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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32> 김억

Posted by 신이 On 7월 - 29 - 2019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7호) 

 

 

한국 첫 번역-창작 시집 발간

‘최초’ 진기록 여러개 가진 才士  –  김억

  

 

 

<김억 (岸曙 金億, 1896∼1950)>


한국 첫 번역-창작 시집 발간… ‘최초’ 진기록 여러개 가진 才士



평북 정주 태생으로 오산학교 졸업후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영문과를 중퇴한 안서 김억의 동아일보 재직기간은 1924년 5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로 짧은 편이다. 학예부 기자로 입사한 김억은 학예면 편집을 맡는 한편, 기사를 직접 쓰기도 했다.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 김억의 동아 시절 활약상과 관련해 눈에 띄는 점은 뜻밖에도 에스페란토 보급운동이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한 가지 말로 서로 자유롭게 통할 수 있는, 거기에는 정복자 일본도 없고 조선 같은 피압박 민족도 없는 평화로운 지구마을을 만들기 위해”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는 것이 김억의 이상이었다. 일본 유학시절 에스페란토를 배운 김억은 1920년 YMCA에서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여는가 하면, 잡지 ‘개벽’에 지상강의록을 싣기도 했다. 조선에스페란토협회를 만든 것도 그였다.

 



이런 김억이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에스페란토 관련 기사를 쓰고 보급에 열을 올린 것은 당연했다. 입사 전부터 ‘청년 제군에게 에스페란토를 전함’(1920년 6월24일), ‘에스페란토에 대하여’(1923년 9월23일) 등 글을 동아일보 지면에 기고했던 그가 동아에 입사한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 에스페란토 고정란이 만들어져 매주 1회씩 모두 47회에 걸쳐 관련 글이 소개될 정도였다. 때로는 동아일보에 에스페란토로 쓴 글이 번역문 없이 게재된 데서도 당시 지식층 사이에 에스페란토에 대한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약한 김억은 한국시단의 향도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작품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러개 붙은 데서도 그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1918년 한국 최초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번역 소개, 1921년 한국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 ‘오뇌(懊惱)의 무도(舞蹈)’ 발표, 1923년 한국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 발표 등 문학사적으로 의미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광복 전까지 20여 권의 시집을 발간한 김억은 ‘기탄잘리’ ‘신월’ 등의 역시집을 통해 한국시단에 ‘타고르’를 소개했고, 제자 김소월을 문단에 길러내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동아 퇴사후 매일신보와 경성중앙방송국에서도 일했으나 6·25동란 때 서울에 남았다가 납북돼 불행한 말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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