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5호)
20대 최연소 사회부장 기염…초창기
한국언론 초석 평가 – 김형원
<김형원(石松 金炯元), 1900~1950?>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된지 4개월 만인 그해 8월, 초대 사회부장 이상협에 이어 약관 20세의 석송 김형원이 2대 사회부장으로 등용되자 언론계는 이 파격적인 인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신문계 최연소 부장이었기 때문이다.
한해 전인 1919년 보성고보를 중퇴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패기만만하고 재기발랄한’ 인재로, 민태원 유광렬과 함께 이상협 편집국장이 가장 아끼던 사람 중 하나였다. 김형원은 25년여의 언론계 생활 중 평기자로 활약한 기간은 1년밖에 안 되는 특출난기자였다. 부장으로 승진한 그는 뛰어난 문장력과 의욕적인 취재활동으로 단연 돋보였다. 사회부장에 이어 23년 5월에는 동경특파원으로 부임, 1년간의 해외근무를 했다.
1924년 5월 조선일보로 옮긴 석송은 사회부장, 지방부장을 지내고 인쇄인으로 재직하다 1년4개월 만에 ‘신일용 사설’을 인쇄했다는 이유로 3개월간 금고형을 살고 회사를 떠났다. 이후 중외일보 사회부장·편집부장, 다시 조선일보 편집국차장·편집국장, 매일신보 편집국장, 서울신문 전무, 대동신문 부사장 등을 역임해 초창기 한국 언론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형원은 신문사를 섭렵한 언론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시인이기도 했다. 기자로 입문하기 전인 19세 때 삼광(三光)지에 ‘곰보의 노래’를 발표한 이래, 그해 매일신보에 ‘사나히냐?’ ‘약자의 지위’ 등의 시를, 이듬해에는 ‘개벽’에 ‘이향(離鄕)’을 연이어 발표하는 등 의욕적인 시작을 선보였다. 1922년에는 ‘개벽’지 창간 2주년 기념특집에 미국의 민중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 6편을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1929년 ‘별건곤’에 발표한 민요풍의 시 ‘그리운 강남’은 월북 작곡가 안기영이 곡을 붙여 일제강점기에 널리 불렸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
1934년 폴리돌레코드에서 발매한 이 노래는 1960년대까지도 소녀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며 즐겨 불렀고, 북한에서도 교과서에 수록돼 널리 알려졌다. 2000년 8월 서울을 방문한 북한의 조선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하기도 했다.
김형원은 해방 후 정계에 투신, 이범석이 이끄는 민족청년단 부단장을 지냈고, 제헌의원 선거에 낙선한 후에는 초대 공보처 차장에 임명됐다. 6·25때 납북돼 출판사 교정원을 거쳐 함경북도 안주탄광 노동자로 추방당한 후 소식이 끊겼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