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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 박헌영

Posted by 신이 On 3월 - 25 - 2019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5호) 

 

 

판매부 서기, 6개월간 지방부 기자 지내 …  

 해방후 월북 –  박헌영

  

 

 

<박헌영(朴憲永), 1900~1956>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활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해방 후 월북해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낸 박헌영이 동아일보 기자였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을 우편으로 독자에게 발송하는 판매부 서기와 6개월간의 지방부 기자 근무가 전부였고, 기명기사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부장 유광렬이 “박헌영이라는 사람이 동아일보에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유광렬은 “박헌영의 동아일보 입사는 1924년 4월부터 약 한달 간 동아일보 사장서리를 맡았던 허헌이 천거한 것으로 들었다”고 뒷날 회고담에서 밝혔다.

 

 

 박헌영은 1924년 4월 동아일보에 입사, 13개월을 근무한 뒤 조선일보로 옮겨 5개월간 사회부 기자로 활약했다. 그보다 앞서 역시 조선일보로 옮겨 사회부장이 된 유광렬은 ‘기자 박헌영’에 대해 “취재도 깊이 있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사도 잘 쓰지 못해 처음에는 사회부에 있다가 얼마후에는 지방부로 갔다. 그가 쓴 기사는 미흡해서 휴지통에 버린 기억이 많다”고 회고했다.

 

 

기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 박헌영은 그러나 공산주의자로서의 활동은 독보적이라 할 정도로 두드러졌다. 20세 때 상해로 망명, 21세 때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비서, 고려공산당 입당 및 기관지 ‘올타’ 편집장, 22세 때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서울로 이전하기 위해 입국하다가 일제에 검거돼 1년6개월간 복역 등 청년시절부터 활발하게 움직였다. 박헌영은 동아일보에 몸담았던 시기에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 등 직책을 갖고 있으면서 활동을 지속했다.

 

 

 박헌영의 기자시절인 1925년 4월15∽17일 처음으로 전조선기자대회가 기자단체인 무명회 발의로 열렸는데, 이때 박헌영은 조선일보 기자이자, 사상적 동지인 김단야 임원근 등과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기자대회 기간중인 4월17일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물론 박헌영도 참여해 지도부의 일원이 됐다. 전조선기자대회에 일제당국의 시선을 돌리게 하고 비밀리에 공산당을 만든 것으로, 당시 박헌영등이 신문사에 몸담고 있었던 의도를 짐작케 한다.

 

 

 이후 박헌영은 공산혁명 투쟁에 매진하게 된다. 조선일보에서 퇴사한 다음달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었고, 공판 과정에서 정신착란을 가장해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1928년에는 부인 주세죽과 소련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다음해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고, 이후 상해와 국내에서 파란만장한 공산혁명투쟁을 벌였다. 해방후김일성에 이은 북한의 2인자로 부수상이 되기도 했으나 1955년 간첩혐의로 숙청됐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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