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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 김준연

Posted by 신이 On 3월 - 25 - 2019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5호) 

 

 

독일 유학 법학연구 …일장기 말소사건때

 주필서 물러나 –  김준연

  

 

 

 

<김준연(朗山 金俊淵), 1895∼1971>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역임하고, 일장기말소사건으로 퇴사한 낭산 김준연은 동경제대 독법과(獨法科) 재학 중 일본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대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연구한, 당대 최고수준의 화려한 학력을 보유한 엘리트였다.

 

 

1925년 1월 3년간의 독일유학을 마친 김준연이 귀국길에 올라 런던 상해를 거쳐 일본 고베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일본유학시절의 절친 백관수 조선일보 이사였다. 김준연은 후일 동아일보 사장이 된 백관수의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일보에 입사, 우리나라 최초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김준연이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1927년 10월. 이광수 후임으로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낭산은 이듬해인 1928년 2월 이른바 ML당(마르크스레닌당)사건으로 체포돼 6년여를 복역하게 된다. 소련취재의 경험이 있는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 포섭됐다는 관측과 함께,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소련의 힘을 빌리기 위해 ML당에 참여했다는 설이 있다. ML당 총책임비서(당수)로 체포된 그는 일제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회개서를 쓰지 않고 버텨냈다.

 

 

1934년 7월 만기출소한 낭산을 인촌은 동아일보 주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2년 남짓 후인 1936년 8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인해 송진우 사장과 함께 물러나야 했다. 일장기가 지워진 신문대장이 현진건 사회부장, 설의식 편집국장을 거쳐 김준연 주필에까지 올라왔지만 완벽히 보안이 유지된 것이었다.   

 

 

언론계를 떠난 낭산은 그 후에도 숱한 수난을 겪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신흥우 유억겸 최두선 윤치영 등과 함께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해방을 맞기까지 낭산을 보살펴준 사람은 인촌 김성수. 경기도 전곡의 한 농장에서 관리인이라는 보신용 직함을 만들어준 덕에 은거생활을 할 수 있었다.

 

 

김준연은 해방 후 정계에 투신, 과거의 ML당 전력을 청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며, 민족진영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사상적 편력과 관련해 낭산은 “나는 한때 공산주의 운동에 관여했으나 그때의 체험으로 공산주의와는 같이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다”며 스스로 반공주의자임을 밝히곤 했다.  

 

 

제헌의원을 비롯해 3∼6대 의원을 역임하고 법무장관을 지냈으며, 박정희에 맞서 민중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그는 야당에 몸담고 이승만독재에 맞서 투쟁했으나 때로는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행보를 보이는가 하면, 신익희 조소앙의 ‘뉴델리 밀회설’을 퍼뜨려 소속당을 거북하게 만드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걸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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