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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20> 정인보

Posted by 신이 On 1월 - 31 - 2019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4호) 

 

 

 

독립 열망 쏟아낸 ‘文士기자들’  

 –  정인보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 대한민국 4대 국경일 노래를 모두 작사 한 위당 정인보는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는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에 버금가는 지식인이자 문장가로 꼽힌다. 위당 정인보는 1893년 서울 명문가의 아들로 출생, 이미 10대 때부터 문명이 널리 알려졌으나 어지러운 시대상황 하에서 일찌감치 출세의 뜻을 접고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1910년 정인보는 중국 상해로 망명,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교포들을 상대로 정치적 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면서 광복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러던 중 정인보는 부인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에 귀국,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차례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연희전문협성학교 불교중앙학림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했다. 그가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게 된 때가 이무렵이다. 1924년 5월 입사, 논설반에 근무하면서 사설 등을 집필하게 된다. 그후 8월에는 해임과 동시에 촉탁기자로 발령받게 되는데, 아마도 연희전문 강단에도 섰기 때문에 겸임발령을 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인보는 기자라기보다는 당대의 대학자요, 강골선비였다. 동아일보가 1940년 8월 강제폐간될 때까지 그의 학문적 경륜과 지식을 쏟아 낼 터전을 마련해준 셈이었다.

 

 

 1926년 4월25일 순종이 서거한 사실이 전해지자 동아일보는 27일자 호외를 발행하고 그날자 본지1면에 정인보가 집필한 사설 대행애사(大行哀辭)를 실었다. 1931년에는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다수의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연재했다. 또 다산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는 데 노력했는데, ‘실학’이라는 용어는 이때 동아지면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1933년 66회에 걸쳐 연재한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도 독자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1935년 1월1일자부터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정간된 1936년 8월까지 무려 440회에 걸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는데, 위당은 ‘얼’ ‘가람’ ‘누리’ 등 옛말을 되살려내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고 동아일보도 폐간되자 정인보는 가솔을 이끌고 전북 익산의 산중에 은거했다. 광복이 되자 정인보는 민족말살정책으로 위축된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민중들에게 민족사를 제대로 알리고자 ‘조선사연구’를 간행하는 등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는 독립투쟁의 방도로 민족사연구를 지향했던 신채호의 민족사학과는 달리, 엄밀한 사료분석에 의한 사실인식과 그 민족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1947년 국학대학학장에 취임한 정인보는 이승만의 간곡한 부탁으로 초대정부의 감찰위원장이 되었으나 1년만에 사임하고 국학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6·25동란에 서울에 남아 있던 정인보는 공산군에 의해 납북돼 그해 10월 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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