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4호)
독립 열망 쏟아낸 ‘文士기자들’
– 민태원
민태원(牛步 閔泰瑗, 1894∼1934)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로 시작하는 저 유명한 ‘청춘예찬’(1929년 ‘별건곤’ 6월호)을 쓴 이가 바로 우보 민태원이다. 한국문장사에 길이 남을 이 글을 쓰기 전에 이미 민태원은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은 물론, 문사(文士)기자로 필명을 날렸다. 1920년 김억 변영로 염상섭 등과 함께 문예지 ‘폐허’의 동인이 되어 단편 ‘음악회’ ‘劫火’(겁화) 등을 발표, 화려한 산문체로 일가를 이뤘다. 민태원은 동아일보 창간호부터 ‘閔牛步’라는 필명으로 엑토르 말로의 ‘집없는 아이’의 일본어 번역서를 번안한 ‘부평초’를 113회에 걸쳐 연재했다. 동아일보 연재소설 제1호였다. 또 ‘무쇠탈’을 동아일보에 165회나 연재했다. 프랑스 소설 ‘아이언 마스크’를 일본작가가 ‘철가면’으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번안소설이었다.
민태원이 동아일보 창간호부터 지면에 등장한 것은 친분이 깊었던 초대 편집국장 이상협의 강력한 권유에서 비롯됐다. 이상협은 동아일보가 창간된지 얼마 안돼 정식기자가 아니었던 민태원을 동경통신원으로 보냈다. 대학교육을 받게 해 장차 큰 재목으로 쓸 심산이었다. ‘부평초’와 ‘철가면’의 원고료 등으로 와세다대 경제과를 졸업한 우보는 일본의 여러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새 시대의 신문제작 스타일을 배우기도 했다. 1921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민태원에게 이상협 편집국장은 동아일보와 함남도청이 주최한 백두산 탐험대에 동행취재하게 한다. 백두산에 이르는 곳곳의 풍정을 유려한 문장으로 동아일보에 소개한 이 르포기사는 간결한 필치의 명문으로 회자됐다. 우보는 이 기행문에서 우리나라 건국에 얽힌 단군설화를 소개하여 백두산에 대한 겨레의 역사의식을 깨우치기도 했다.
동경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민태원은 1923년 5월 28세의 젊은 명 사회부장으로 화려하게 동아일보에 입성한다. 민태원 사회부장은 사회면 기사의 문장부터 뜯어고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그러하였더라’를 ‘그랬다한다’로, ‘백골난망으로 여기더라’를 ‘송구스러워했다’ 등등 고문체와 어휘를 새로운 말과 문장체로 혁신한 것. 사회부장에 이어 정치부장을 맡고 있던 우보는 이상협이 ‘박춘금 사건’으로 동아일보를 떠나자 함께 퇴사했다.
이상협을 따라 조선일보로 옮긴 그는 편집국장이 됐으나 1926년 11월 이상협이 중외일보를 창간하자 다시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이 신문으로 옮겨 편집국장이 됐다. 중외일보가 재정난으로 1930년 10월 자진휴간하자 퇴사한 민태원은 이후 만주동포를 대상으로 한 만몽일보 창간에 관여하다가 병을 얻어 1934년 6월 타계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