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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동아일보 사람들- 홍증식

Posted by 신이 On 1월 - 1 - 2019

 

홍증식(洪璔植, 1895~월북)은 경기 고양 출신으로 학력은 보성중학 1년 중퇴. 1921년 9월부터 1924년 5월까지 동아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했다. 1924년 9월엔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맡았고 1934년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중앙일보의 영업국장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3대 민간신문 영업국장을 모두 역임한 셈이다.

 

홍증식(洪璔植) ( ) ▲ 1921. 9 영업국장, 1924. 5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정간해제와 속간

1920년 9월 25일자로 정간처분을 받았던 본보는 그 뒤 3개월 반이 지난 1921년 1월 10일에야 겨우 정간이 해제되었다. 그러나 정간해제는 되었으나 속간되기까지는 다시 1개월 이상이나 지연되어 속간호를 낸 것은 2월 21일자였다.

속간사에서 ‘독자에 대한 미안(未安)과 사회에 대한 공황(恐惶)의 염(念)을 이에 어찌 필지(筆紙)로써 다 기(記)하리오. 오직 방타(滂沱·비가 세차게 쏟아짐)히 흐르는 열루(熱淚·마음속 깊이 사무쳐 흐르는 뜨거운 눈물)를 스스로 금(禁)치 못하였노라’고 지나간 쓰라림을 되새기고, ‘행(幸)히 독자 제군(諸君)은 양(諒)하여 조선인 생활향상운동에 의연히 본보가 독자의 동반자 됨을 허(許)하라’고 독자에게 호소하면서 재기하였다.

정간 해제 후 한 달 넘게 지나서야 속간호를 내게 된 이유는 속간사에서 ‘이미 3개월을 휴간하였는지라 제반 준비와 시설 갱신에 어찌 다대(多大)한 시일(時日)을 요(要)치 아니하리오’라고 밝히고 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심각한 자금난 때문이었다.

자금난으로 속간이 늦어지고 있을 때, 구 황실의 척족 민영달(閔永達)이 그의 친지인 홍증식(洪璔植)의 소개로 일금 5000원을 출자해 우선 화급한 속간자금을 충당했다. 민영달(1859~?)은 갑오경장 당시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이었다가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관계를 떠나 은거 중 합방 당시 일본이 주는 남작의 작위를 거절한 인물이었다.

민영달의 출자는 속간의 긴급자금으로는 크게 도움이 되었으나, 신문사 운영에는 부족했다. 그러므로 6, 7개월이나 기자들의 월급을 지불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당시를 회고하여 이서구(李瑞求)는 ‘우리는 점심을 굶어가면서 신문을 만들었지요. 배달부가 월급을 안 준다고 호외를 들고 나가지 않을 때, 유광렬 노자영(盧子泳) 김동철(金東轍) 그리고 나 등 젊은 기자들은 호외를 들고 종로 네거리로 뛰어 나가기도 했어요’라고 했다.

(…)

기구개편과 새 진용

중역회의는 사(社)의 기구를 개편, 종래의 주간을 폐지하고 새로이 주필을 두기로 하고, 편집·서무경리·영업의 3국과 공장을 두었다. 편집국의 통신부를 폐지하고 지방부를 신설하였다.

새 기구에 따라 주필은 장덕수 부사장이 편집국장을 이상협 상무취체역이 각각 겸임하고, 서무경리국장에는 양원모, 영업국장에는 홍증식, 영업국장대리에는 한중전(韓重銓), 공장장에는 최익진이 각각 임명되었다.

중역회의는 법정 발행인·편집인·인쇄인도 새로 결정, 종래의 발행인 겸 편집인 이상협을 한기악으로, 인쇄인 이용문을 최익진으로 변경해 (1921년) 10일 23일자로 총독부에 신청하고 11월 10일자로 허가되었다.

(…)

간부진 대 개편

1924년은 연초부터 박춘금의 난동, 식도원폭행사건, 이로 인한 사회적 물의와 언론집회압박탄핵운동의 전개, 조직화한 사회주의계열의 비난 등 동아일보로서는 어려운 시련이 거듭되었다. 또한 일제의 언론탄압도 날로 심해져 압수만도 1920년에서 1923년 사이 연평균 15회이던 것이 1924년 한 해만 56회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렇듯 어려운 시기에 이상협 편집국장이 많은 동조 사원들을 이끌고 퇴진하는 일이 생겼다. (…)

이상협의 퇴진이 빚은 소용돌이는 두 차례에 걸쳐 많은 사원들이 그와 행동을 함께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1차로 5월에 신구범 전무를 비롯하여 홍증식 영업국장, 김동성 조사부장, 김형원 지방부장, 민태원 정치부장, 김양수 논설반장이, 2차로는 9월에 최익진 공장장을 비롯하여 최영목 정리부장, 유광렬 사회부장, 이서구 박팔양 서승효 노수현 야마호 요소기요(山塙芳潔) 등이 이탈했다. 다수가 창간 동인으로 고락을 같이 하며 동아일보의 기초를 다지는 데 심혈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京城名人物 身體大檢査, 男女身邊秘密暴露(第一回發表)

洪璔植
얼골검사를 하면 수염도 그리업지만은 가슴검사를 하면 대삼림(大森林)가티 장모(長毛)가 상당히 만타. 이것이 그의 특증의 한가지라 할가.

(별건곤 제52호, 1932년 6월 1일)

 

行方探索 / 白雲居士

洪璔植
그는 어듸로 자최를 감추고 마랏는가? 아니다. 자기 집이 서울인 것만치 그대로 서울 한복판 仁寺洞에 커다란 주택을 진이고 아들 딸 낫고 충실한 아버지로서 夫君으로 잘 지내어 가는 중이다. 엇지 커다러케 본다면 시대를 못 만난 영웅갓기도 할가? 남들이 말하기를 너무 計畧이만고 너 理智的이라 하니 열에나 백에나 모든 것이 타산적으로 만나가는지? 오다가다 길가에서 만나면 그저 먹고 살아나갈 걱정이 대부분 話題가 된다고. 그러나 그것이야 오즉 그 한사람뿐만이 아니겟지? 그래도 땃듯한 가정이 잇스니 집에 들면 따듯한 음식 구수한 숭늉 그러고 밧게 나가면 在來式 朝鮮 솜버선에 옹구바지 고무갓신 세투 두루매기에 대활보를 옴겨드듼다고. 그러나 저러나 그는 밤낫 돈걱정은 하면서도 무엇을 그리 잘 먹는지 얼골과 아레배는 점점 윤택하여가니 운동자 층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불숙한 어룬.

(삼천리 제4권 제7호,  1932년 7월 1일)

 

洪璔植

現在=京城에서 社會運動
曾經=西間島에서, 多年運動, 東亞日報營業局長, 朝鮮日報營業局長, 火曜會幹部其他(略)
會遊足跡=南北滿洲

◇現住 京城仁寺洞 原籍 一八九七年生卽三十七歲

(삼천리 제5권 제2호 별책부록-조선사상가총관,   1933년 1월 1일)

 

出頭巨頭의 其後 , 第一·二次 共産黨事件의 首腦者, 民衆運動者大會事件의 首腦者

洪璔植의 營業局長
그도 7년을 태양업는 거리에서 呻吟하고 나온 이다. 그는 檢擧 전에도 朝鮮日報 營業局長으로 잇섯거니와 나온 뒤에도<113> 亦 中央日報의 營業局長으로 艱難만흔 言論機關의 살님사리를 마터 縱橫으로 手腕을 휘둘느고 잇다. 얼마전에 趙東祐와 함께 新義州로 拘禁되어 간 적이 잇섯스나 곳 嫌疑가 벗기어 도라 왓다. 그는 共靑의 간부엇다.

(삼천리 제6권 제5호, 1934년 5월 1일)

 

三大新聞 參謀長論
漢陽過客

中央日報의 洪璔植氏
中央日報은 民間3大新聞中 가장 新進하는 機關이다. 그는 30萬圓의 株式會社을 完成하여 노은지가 不過한달 박게 아니되고 6面을 8面으로 朝刊1回을 朝夕刊2回로 늘인 것도 1,20일 밧게 안되고 새로 設置하는 高速度輪轉機는 東京機機製作所에서 아직 틀에 걸고 만드는 중에잇다. 이러케 새로 세간을 작만하고 뿌리를독그며잇는 新聞機關에 기수로 나선이가 洪璔植氏니 그는 現在 營業局長의 자리에 안젓슬 분더러 社의 命脈을 左右하는 取締役中 重要한 一人이다.

그런데 어느意味로보면 民間 三大紙中 中央日報의將來가 가장크게 興味를 끄으니 따라서 이 살님사리를 마터보는 營業局長의 人物如何은 더한층 硏究거리를 던진다. 이말은 무슨말인고하면 東亞의 梁源模氏는 이미 싸어 노흔 地盤이 굿음으로 그것을 失手업게만 직혀나가도 名營業局長의 稱頌을 밧게 八字가 생겻고 朝鮮의 金箕範氏는 이제도 얼마나 올는지 其數不知인 큰 金鑛王을 背後에 업고서 富者집 고간 마튼 맛며느리式으로 세간우에 세간이 또 늘고 또 늘고하고 큰 배를탄 運數조흔 분이 되엿슴으로 未久에 그 治績을 자랑할 날이 必然的으로 오게되엿지만 惟獨 中央의 洪璔植氏만은 깟닥 잘못하다가는 新聞社를 드러먹엇다는 險口를 듯기 쉽게 되엿고 아모리 애써도 12年間은 도모지 그 實績이 天下사람을 황홀케하기가 어렵게 不過한 가난한집 살님을 맛터 잇는 까닭이다.

보라 東亞日報은 資本金 70萬圓을 가지고 잇지 안은가. 또 創立以來 15年의 歷史가 잇지안은가. 朝鮮日報도 50萬圓 資本에 方應模氏에 政權올문지도 年餘가 되지안는가 그런데 中央은 그동안 죽지못해 실낫가튼 괴로운 延命으로 數年을 내려오다가 昨年에 이르러야 비로소 번적하게 빗을 發하기 始作하엿고 資本도 第一적은 30萬圓이 아닌가. 이 30萬圓도 朝鮮日報모양으로 빨닥빨닥하는 純現金으로 한꺼번에 쥐어진 돈이라면 그 3倍쯤 되는 100萬圓 갑싸게<36> 世上이 휘황찬란하게 쓸수 잇을 것이로되 그 新出資는 過去에 이루어노은 녯其地갑에 算入하고 舊出資主의株에도 換算하고 또活字 납덩어리 심지어 社員이 原稿쓰는 冊床한개 鐵筆 한자루에까지 그 備品代를 換算削除하고 手形으로도 드러오고 이럭저럭하야 現金으로는 단돈 10萬圓이 드러온 것갓지 안타는 것이 專門家의觀測이다. 이 조곰한 돈을 가지고 두新聞을 對抗하여 百年之計을 세워야 할 洪叅謀는 그야말로 저쭉 長劍 쥐인敵을 對抗키爲하야 비록 쩌른칼을 쥐엇스나 그代身 한걸음 내어드디고 背水의一戰을 하여야할 處地에섯다. 그러기에 3大新聞戰의 觀客들은 利害업는 일이나 저절로 洪叅謀의 일에더욱 同情 하게된 것이다.

그러면 洪璔植氏는 엇든 秘策을 胸中에 감주어가젓는고?

筆者은 氏의 新聞經營을 들은일이잇는데 그 方針은梁源模氏나 金箕範氏의 主張과는 天壞의 差異가 잇게 特異함에 놀내엇다. 氏는 이러케 보노라고하엿다. 卽

「朝鮮의新聞은 그 收入을 東京大阪 廣告主 턱 밋헤서 依例히 떠러지러니하는 그方策을버러야한다.」하엿다. 東亞나 朝鮮은 東京大阪의 廣告主를 神主모시드시하여 돈푼이나 더어더 뜨들方針을 晝夜로 生覺하고잇는판인데 이 얼마나 獨特한 見解을 가지고잇는고 (中略)그런다고 東京大阪 廣告를 無視하자함은 決코 아니다. 그 증거로 洪叅謀는 엇더케든지 呂社長을 움지기여 東京大阪에 드러가게하여 큰 廣告主와 高等交際을 식혀 새廣告의 길을 開拓할 案을 세우고 社長에 여러번 獻策하엿스나 節操와 見識잇는 呂氏는 돈푼 엇자고 새商工 뽈조아지 앞에 叩頭하지 못하겟다고 물니친 까닭에 이問題은 方今 保留狀態에 잇는터이다. 卽 洪璔植氏는 海外廣告 中心主義을 xx고 鮮內 第一主義에 考慮하는 듯 하엿고 그보다도 新聞紙 販賣中心主義를 取 하려는 傾向이잇다.

남의 비위에 마처가며 어더쓰는 不安定한 廣告收入보다도 차라리 讀者을만이어더 購讀料收入으로 財源을 삼자함이니 그러기 爲하여는 新聞紙簾價主義을 取하야 他社의1圓에 80錢으로서 써-비스하고잇다. 드른즉 中央의 紙數는 氏의案出과 如히 販賣網이 周到한 設直에따라 近年 異數로 增加하고 잇다든가.

洪璔植氏는 녜전 東亞日報營業局長으로도 잇섯고 朝鮮日報營業局長으로도잇슨 百戰老將이요 일즉中國과 東京에 遊하야 智識을 널니 海外에 求하엿슬 뿐더러 社會運動이 한창 華麗하든떄에는 重要한 役割까지 치르고난 人物이다. 過去에 빈주먹으로도 新聞社의 큰 살님사리를 마터 하엿거든 30萬圓이라도 손에 쥐여진 오늘이 中央日報를 엇지써 그手腕力量으로 살니지못하랴 洪璔植氏의 飛躍時代는 今日붙어 비로소 始作되엿다 할 것이니 中央日報의財政코-쓰를 이 參謀長에게맛겨 10萬讀者는 安心하여 조흩듯이 觀側됨이 엇지나 한 사람의 잘못 觀察이라할가. <37>

(삼천리 제6권 제8호, 1934년 8월 1일)

 

동아인명부⑨

홍증식(洪璔植) 입사 당시 영업국장

1921년 9월 20일 본사 입사. 월봉 100원. 1924년 5월 16일 본사 사임

(동우 1964년 2월 21일 10면)

 

소식(消息)

▲홍증식(洪璔植)씨 본사 영업국장,  경부연선(京釜沿線) 및 경상남북도(慶尙南北道) 관내  본사지분국 사무시찰차 왕복  3주간 예정으로 19일 출발 

(동아일보 1921년 11월 16일 2면)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새로 발긔 되엿다

홍수와 가치 팽배하게 몰녀오는 신사상을 연구하야 조리잇는 갈피를 차저보랴는 목뎍으로 신사상연구회가 생겨낫다 위치는 경성(京城) 낙원동(樂園洞) 173 에 두고 실행방법으로는 강습과 토론을하는 외에 도서와밋잡지를 간행할터이라 하며 발긔인의 씨명은 여좌하더라
홍증식(洪璔植) 홍명희(洪命憙) 윤덕병(尹德炳) 김병희(金炳僖)  이재성(李載誠) 이승복(李昇馥)  조규수(趙奎洙) 이준태(李準泰)  강상희(姜相熙) 구연흠(具然欽)  홍덕유(洪悳裕)  원우관(元友觀)박돈서(朴敦緖)  김찬(金燦)  박일병(朴一秉) 김홍작(金鴻爵)

(동아일보 1923년 7월 11일 3면)

 

신의주 공산당사건  홍증식씨도 압송

가택까지 수색하고 검거해 작일 아침에 신의주로압송
시내종로 경찰서에서는 지난 10일 오후에 돌연히 활동을 개시하야 화요회(火曜會)원 홍증식(洪璔植)씨를 검거한후 관훈동(寬勳洞)에 잇는 동씨의 가택을 수색하얏스며 다시 동회원 수명을 검거 취됴한 후 홍증식씨는 작조에 직시 신의주로 보내엇다는데 사건의 내용은 역시 신의주에서 발각된 고려공산당 비밀결사에 관한 것인 모양이라더라.

(동아일보 1925년 12월 13일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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