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래동(丁來東, 1903~1985)은 전남 곡성 출신으로 중국 베이징 민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서무부장(인사총무부장), 영업국장대리를 맡았다. 중국문학에 식견이 높고 중국어에 능통해 1940년 동아일보 폐간 후 보성전문학교 중국어 강사로 근무했다. 해방 후엔 서울대학교, 원광대학교, 중앙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중국문학 관련 교수직을 역임했다. 저서로 <북경시대><정래동전집> 등이 있다.
정래동(丁來東) (곡성, 1903~ ) ▲ 1935. 5 사원, 서무부장, 영업국장대리, 1940. 5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舊友回顧記] 社內가 떠들썩했던 讀者慰安大會
1941·2년 전후 몇 해 동안은 각 신문사에서 춘추로 혹은 연 1차 ‘독자위안회(讀者慰安會)’라고 해서 여러 가지 흥행물(興行物)로 서비스하는 행사가 있었다. 가요, 만담 영화 등 여러 방식으로 위안회라는 명칭을 붙여서 독자를 무료로 관람케 하였던 것이다.
그때 동아의 서무부의 일은 광범위하여서 지금의 인사부 일, 사업부의 일을 도맡아서 하였으므로 큰 사내외의 행사를 서무부에서 주관하였었다. 예를 들면 남녀학생작품전시회, 여자정구대회, 음악대회, 연극대회, 한글학회연례총회 등등의 주선을 서무부에서 했었다.
독자위안회도 사무의 부문은 전부 서무부에서 하고 선전은 부로 학예부(지금의 문화부)에서 맡아 했다.
필자가 서무부장이 되어가지고, 첫 번째든가 두 번째든가의 독자위안대회 때로 기억이 되는데 그때 사의 방침은 될 수 있는대로 비용은 적게 들이고 효과는 크게 날 것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사옥을 신축하기 위하여 자금을 축적하던 때라 무엇이나 절약절약 하던 때다. 그때의 신축계획은 현재신축예정지를 사들이고, 그 당시 사옥과 꼭같이 또 한 채를 연이어서 짓는다는 것이었다. 모형사진도 찍어서 대대적으로 전국에 선전하던 때였으므로 많은 경비를 들여서 독자위안대회를 할 수는 없어서 사내 여러분과도 상의를 하고 각 연예단체 주무자와도 극비리에 경비 등도 알아보았다. 여기 극비리에 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신문사는 서너개 뿐이었지만 경쟁이 매우 심해서 계획을 짜놨다가 다른 사에서 먼저 해버리면 큰 낭패를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인기가 있던 연예단체로는 ‘오케악극단’이었다. 그래서 단장이엇던 이철(李哲)씨와 수차 상의를 한 결과 최종결론을 얻어서 영업국장 국태일(鞠泰一) 씨에게 그 안을 제출하였다. 국태일 씨는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의아한 태도였지만 그럴듯했든지 좀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철 씨와 상의했다는 안이란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주는 초대권과 동시에 일반에게도 매표를 하고, 1일출장수를 1회 늘여서 하고, 공연일수도 1일을 더 늘여서 3일이든가 4일로 하면 매일 1회씩 더 공연한 개런티는 무료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세한 조건을 상의하기 위하여 이철씨를 만나고 사내로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이상하였다. 2,3인씩 모여서 수군수군하고, 보고를 하여야 할 영업국장이었던 국태일 씨는 자리에 없었다.
곧 알아보니 상무이사 임정엽(林正燁) 씨와 영업국장 국태일 씨가 사장실에서 독자위안대회 건을 논의하다가 의견이 맞서서 장시간 논쟁을 하다가 둘이 계단을 내려오면서 계단중간 쉬는 곳에서 육박전(肉薄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경리부장 김동섭(金東燮) 씨의 얼굴을 바라보니 말은 않아도 “서무부장은 종전대로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일을 고안해가지고 문제를 일으켰다”는 태도였었다.
영업국 모든 사원들이 우습다는듯이 서로 바라보는 눈치였다. 나에게 동조 동정하는 분은 한 사람도 없고,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쓸데없는 일을 시작해가지고 사내(社內)만 시끄럽게 한다”는 태도였다.
자리에 앉아서 곰곰 생각하니 난처하기도 하고 간부 두 분이 계단에서 치고 박고 했다는 광경을 생각하니 나 역시 우습기도 했다.
그러나 이일은 만고(萬苦)에 나의 안(案)대로 했다가 실패를 한다면 나의 책임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후 2,3일이 지나서 영업국장은 나더러 그 안(案)대로 하자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들으니 순간 자신이 더욱 없어졌다. 그래서 영업국장에게 임 상무가 정 반대를 한다면 달리 계획을 세우자고 했다.
영업국장은 다른 염려 말고 기안(起案)대로 빨리 진행하라는 것이다. 아마 사장의 승낙이 내린 모양이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임 상무는 1일에 3회 한다는 것이 무리요, 독자우대무대 외(外)에 일반초대권(一般招待券)을 천매(千枚)나 발행한다는 데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그 시기로 말하면 서울에 영화관도 몇 곳 안되고 오락시설이 별로 없던 때다. 그러므로 악극단의 공연이 있다든지 만담대회 같은 것이 있으면 늘 대만원이었다.
독자우대 외에 초대권을 많이 발행하면 초대권을 가진 한사람만 입장하는 예(例)가 적고 적어도 2,3인식 동반하기 때문에 그 동반자는 표를 사서 들어가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노려서 그 안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임 상무는 초대권은 50매나 100매로 한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무료로 1천명이나 입장시키면 수입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요 나는 그 동반자 2,3천명이 더 들어오면 그만큼 수입이 는다는 것이었다.
임 상무나 국 영업국장은 다같이 사(社)를 위해서 가위 일생을 바친 분들이다. 그들의 애사심은 누구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들이다.
그리고 두 분은 고집이 여간 센 분이 아니다. 한번 고집을 내면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 더구나 금전에 관해서는 구두쇠란 말을 듣던 분들이다. 사(社)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될 수 있는 일에 서로 고집을 부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업국장이 업무의 국부(局部)를 잡고 늘어졌다는 이야기는 후일의 웃음거리였지만 사내에서 푼돈을 절약해서 신축비 오만원을 축적한 두 분이다. 오만원이라면 그 때 돈으로는 큰 돈이었다. 얼마 안돼서 이 오만원으로 인해 많은 간부가 옥고(獄苦)를 겪고 고문(拷問)을 당하고 일제말(日帝末)의 폐간(廢刊)의 전초(前哨)도 되기는 하였지만…….
장소는 현재 국회의사당 그때 부민관으로 정하고 공연은 ‘오케악극단’이 하기로 하고 매장(每場) 반수입장자(半數入場者)에게는 매표(賣票)를 하기로 하였다. 그때 부민관내의 좌석은 입석까지 합하면 천3백명까지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부민관은 강연, 영화, 연극 등이 거의 매일 행해졌었다. 국회가 그곳에 있게 된 후로도 연극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때면 그 건물과 그 대지(垈地)는 연극같은 것이 벌어지는 숙명(宿命)을 가졌는가 하고 혼자 고소(苦笑)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제1회 전국연극경연대회도 그곳에서 했던 것이다.
독자위안대회 일자를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인원배치를 정하고 입장권을 인쇄하는 등 준비가 착착 진행하게 되니 나는 두가지 염려가 생겼다.
첫째는 공연기간 중 비가 와서는 큰일이었다.
둘째는 선전문제였다. 보통 ‘독자위안회’라면 신문지면에 뗄 수 있게 우대권이라 인쇄하고, 학예면에 조그마하게 공연단체 출연멤버의 사진을 넣는 것이 통례(通例)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여야만 그 효과가 클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편집시간이 바쁘지 않은 틈을 타서 사회부장이었던 임병철 씨를 만나 어떻게든 선전을 하였으면 하고 상의를 하였다.
사회부장을 찾은 것은 사회면에 좀 선전을 하면 효과가 클 것 같아서였다.
이번에 실패를 하면 서무부장 나는 목이 달아난다고 압력을 넣었다. 목까지는 몰라도 좌천될 것은 그는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영업국장과 상무의 육박전건(肉薄戰件)을 아는지라 단순한 임별철은 눈을 크게 뜨고 알았다고 하면서 가수들 사진과 간단한 이력을 적어서 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사거리는 영리한 오케단장이 미리 갖다 놓은 것이 있어서 곧바로 사회부장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2일만에 조간을 보니 사회면을 종(縱)으로 반(半)을 쭉 쪼개서 그 반(半)에다 가수 십수인(十數人)의 사진을 개개별로 넣고 제목을 사이사이에 크게 붙여서 호화판으로 냈었다. 나는 “이만하면 반성공(半成功)은 했다”하고 사(社)로 나갔었다.
편집국으로 올라가서 임병철을 찾으니 엊저녁 편집을 끝내고 늦게 돌아가서 아직 오지 않고 그때 고문(顧問)(?)으로 계셨던 고하장(古下丈)이 상을 찌푸리고 인사도 잘 받지 않고 편집국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날 오후였다. 나는 영업국에 있었기 때문에 몰랐었는데 한 기자가 내려와서 웃으면서 쳐다 본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 기자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고하장(古下丈)이 아침에 일찍 나오셔서 대뜸
“임병철이란 놈 어디 있느냐?”
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저녁에 임병철에게 들으니 고하장이 사장실에서 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대뜸,
“이놈아, 신문사를 망(亡)쳐놓을 작정이냐! 신문 꼴이 무엇이냐!”
하고 조간신문을 펼쳐서 임병철 앞에 내던졌다는 것이다. 임 사회부장은 내가 부탁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도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한참 당하고 섰다가,
“잘못 됐습니다”
하니까 고하장은 “잘못 됐다면 신문지면이 씻어지냐?”, 노발대발 잠시간 혼이 났다는 것이다.
나의 임병철 씨에 대한 미안했던 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얼마 뒤에 인촌장(仁村丈)을 만나 되었더니 인촌선생도 “요새 신문 꼬락서니가 거 뭔가?”하고 암암리에 ‘오케악극단’의 신문기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신문기사의 척도가 그와같이 엄격한 것인가를 새삼 느꼈던 것이다. 그때 ‘독자위안대회’는 매일 3회씩 했지만 매장(每場) 문자그대로 대만원을 이루고 다행히 기간동안 비도 오지 않아서 대성황을 이루었었다. 수지계산은 물론 흑자가 났다. 독자는 아무 경비도 따로 들이지 않고 위안이 되고 소요비용을 전부 제(除)하고도 오히려 남았었다.
영업국장의 기뻐하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임병철 씨도 “허허!”하고 웃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책임도 가벼워지고 간부도 되었고 아무런 말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인물들이 다 고인(故人)이 되고 그때 가수들도 몇사람 안남아 있고 다 타계(他界)로 떠나서 이 사건은 오랜 옛이야기같이 되고 말았다.
(정래동, ‘舊友回顧記-社內가 떠들썩했던 讀者慰安大會’, 동우(東友), 1970년 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