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학(張龍鶴, 1921~1999)은 함북 부령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 상과를 중퇴한 뒤 전쟁 직전인 1950년 단편 ‘지동설’로 ‘문예’지 추천을 받으며 등단했다.1962년 경향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입문,1967년부터 1972년까지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장용학(張龍鶴) (서울, 1921~ ) △ 1967.1 논설위원, 1972.11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원로 소설가 장용학씨 별세
50년대 ‘요한시집’ 등 관념적 소설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문단을 대표했던 원로 소설가 장용학(張龍鶴)씨가 31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장씨는 50년 5월 단편 ‘지동설’로 등단한 뒤 6·25 전쟁 이후 폐허 속에 선 인간의 존재론적 고통과 소외계층의 고단한 삶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그는 작품에서 한자어를 애용했으며 실존주의적 관념을 소설에 짙게 투사해 ‘한국 관념소설의 대부’로 불렸다. 그가 60년대 초 발표한 장편 ‘원형의 전설’은 5·16이후 대학인들의 좌절과 허탈감을 묘사하며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는 62년 경향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입문, 67년부터 73년까지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유족은 미망인 이화자(李華子) 씨와 한철(漢鉄·한국은행 조사역) 한성(漢聲·대우전자 과장) 한기(漢基·고등기술연구원 차장) 씨 등 3남. 발인 2일 오전8시 서울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동아일보 1999년 9월 1일자 17면)
소외계층 척박한 삶 소재… 인간 실존문제 깊게 투사… ‘지식인소설의 대부(代父)’ 꼽혀
지난달 타계 장용학 씨 작품세계
지난달 31일 향년78세로 별세한 원로작가 장용학 씨는 폐허속의 50년대 문단에서관념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한국 지식인소설의 대부’로 꼽힌다.
장씨는 21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 상과를 중퇴한 뒤 전쟁직전인 50년 단편 ‘지동설’로 ‘문예’지 추천을 받으며 등단했다.
55년 ‘요한시집’, 62년 ‘원형의 건설’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은 전쟁 후 소외계층의 척박한 삶을 소재로 삼는 한편 인간의 실존문제를 깊이 투사해 주로 지식인층의 인기를 끌었다.
그가 주로 다루던 소재중 하나는 당시 문학적 소재로 금기시되던 근친상간. 그는 “사회의 터부와 맞부닥치고 벽을 뛰어넘으려 몸부림칠 때 창작의욕이 일어난다”고 말했었다.그의 소설은 관념적 소재 속에서도 정확하고 엄밀한 용어구사가 강렬한 흡인력을 자아낸다는 평. 오자(誤字)에 대한 공포심이 심해 “오자가 발견되면 독자에게 죄를 짓는 심경이다. 이 때문에 글 쓸 자신을 잃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장씨는 62년 ‘원형의 전설’ 이후 드문드문 작품을 내놓으며 반 절필상태에 들어갔고, 87년 ‘하여가행’ 발표 이후 서울 은평구 갈현동 자택에서 일체의사회적 활동을 끊은 채 칩거해왔다.
그는 97년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인간 복제에 대한 저항감을 글로 쓰고 싶지만, 과학 문명에 문외한이라 꿈을 이루기 힘들 것”이라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유윤종 기자〉
(동아일보 1999년 9월 4일자 37면)
[산(山)바람 바닷바람] ❿ 경북(慶北) 빙산풍혈(氷山風穴)
지령(地靈)의 노기(怒氣)같은 바람… 내일(來日)의 가능성(可能性) 안고 명동(鳴動)하는팔승(八勝)
어느 산(山)에서나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바위와 바위사이의 그다지 넓지도 않은 공간(空間)이 경북팔승(慶北八勝)의 하나인 빙상풍혈(氷山風穴)이라고 한다. 행정구역(行政區域)으로는 의성군 춘산면 빙계동(義城郡春山面氷溪洞).
이런 것을 찾아 먼 길을 그렇게 땀을 흘렸던가, 실망(失望)이 앞서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계류(溪流)가 흘러들어서는 잠시 머물렀다가 흘러 나가는 「부연(釜淵)」의 막막(漠漠)한 푸르름이나, 하지(夏至)날 정오(正午)면 「인(仁)」자(字)로 보인다는「인암(仁岩)」, 천3백여(白餘) 성상(星霜)을 그렇게 서있었다는 빙산사(氷山寺) 오중탑(五重塔)의 고적(孤寂)이 오히려 더 귀(貴)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바깥에서의 실망(失望)이고 한 두 발자국 풍혈(風穴)에 들어서니 홉사 에어컨디숀이 장치(裝置)된 방 안 같다. 이마를 흐르던 땀이 금시에 식어버린다. 바위틈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바람이라기보다 한파(寒波), 흰 김까지 서리어 나오는 것이 지령(地靈)의 노기(怒氣)를 접하는 것도 같아서 슬그머니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1분도 못되어서 뼈까지 시려들고, 바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뻘건 얼굴들이 먼 이역(異域)같다. 2, 3분 더 머물고 싶지 않다.
거기서 2백m 더 올라간 곳에 「빙혈(氷穴)」이 있지만 지금은 이름뿐, 전에는 주렁주렁 고드름이 열렸다지만, 몇 년 전 그 밑을 기어들어가게 되어 있는 바위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방을 지어 붙인 이후로는 그저 풍혈(風穴)정도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름이 지어진 풍혈(風穴)·빙혈(氷穴)만이 아니다. 아무데나 그릴만하게 보이는 바위틈에 손을 가져가면 쏴 소리가 느껴질 것 같은 찬바람이다. 온 산(山)이 바람을 품고 있는 셈이다. 샘이 괴어있고, 겨울에는 더운 기운이 나온다고 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렇게 얼고 녹고 해서인지, 산 전체가 지진(地震)으로 흔들렸던 것처럼, 여기저기에 금이 간 것이 이제라도 와르르하고 무너질 것 같고, 내일(來日)의 가능성(可能性)을 안고 명동(鳴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글·장용학(張龍鶴)
(동아일보 1967년 8월 12일 1면)
[산(山)바람 바닷바람] 해운대 해수욕장(海雲臺 海水浴場)
원색(原色)과 나신(裸身)의 물결… 동백(冬柏)섬서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
산(山)에 들어가서 산(山)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있지만 해운대(海雲臺)는 바다에 와서 바다를 보지 못하는 곳이다. 물보다 사람이 더 많다.
바다는 물이 쉽게 깊어져서 헤엄치며 즐길 수 있는 것은 물가에서 7, 8m이내. 그 물속이나 모래사장은 사람으로 빈 자리가 없다. 그래서 모두가 한꺼번에 들어가면 바다가 터질까 해서 사람들은 교대교대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보이는 것은 그저 나신(裸身)의 물결. 해운대(海雲臺)를 찾는다는 것은 바다에 들어간다기보다 사람의 물결에 끼기 위해서고, 그렇게 구리빛 물결에 묻혀 있노라면 하루를 묵고 돌아가든 1주일을 묵고 돌아가든 수평선(水平線)이 어느 어름인지 한번 바라보지 못하고 만다.
언제부터 여기가 해수욕장(海水浴場)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해운대(海雲臺)의 발상(發祥)은 서남방(西南方)에 있는 동백(冬柏)섬 한 암반(岩盤)에 나말(羅末)의 석유(碩儒)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눈길에 자기 호(號)의「운(雲)」자(字)를 따서 「해운대(海雲臺)」 3자(三字)를 새겼다는데서라고 한다.
그 동백(冬柏)섬에서 오늘의 해운대(海雲臺)를 바라보면 그런대로 한 장의 그림이다. 줄지어 서있는 고층건물(高層建物)을 배경(背景)으로 1㎞반쯤에 걸쳐 몇 줄로 서있는 파라솔의 숲과 구리빛의 물결, 그 속에 들어가면 무덥기만 한 숲이고 물결이지만 멀리서 바라보이는 그 원색(原色)의 바닷가에는 건강(健康)과 낭만(浪漫)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해운대(海雲臺)는 피부(皮膚)보다 시각(視覺)의 피서지(避暑地)가 된다.
글·장용학(張龍鶴)
(동아일보 1967년 8월 15일 1면)
언어(言語)의 혼란(混亂)
장용학(張龍鶴) <작가·동아일보 논설위원)>
창세기(創世紀)에 나오는「바벨」의 탑(塔)의 「바벨」은 「헤브라이」어(語)로 혼란(混亂)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벽돌을 만들어낼 줄 알게 된 인류(人類)의 조상들은 무진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그 벽돌을 가지고 하늘에 닿는 탑(塔)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쌓으려고 들었다. 인간들의 이러한 오만(傲慢)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言語)를 혼란시켰다. 이제까지 다같은 언어(言語)를 쓰던 것을 민족(民族)마다 다른 언어(言語)를 지껄이게 했으니, 서로 대화(對話)가 통하지 않게 된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따라서 탑 공사(塔工事)도 중단되었다.
이와 반대(反對)로 탑(塔)을 쌓으려고 언어(言語)를 혼란시키는 경우도 있다. 공산당(共產黨)에는「선전선동부(宣傳煽動部)」라는 것이 있다. 선전(宣傳)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선동(煽動)이라는 것은 전적(全的)으로 거짓말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부도덕(不道德)에 속한다. 그렇게 부도덕(不道德)한 것으로 보여서는 선동다운 선동을 하게 되지 않는다. 떳떳하게 거짓말을 해도 좋은 분위기(雰圍氣)가 필요하다. 그래서 부서(部署) 이름부터 떳떳하게 선전선동부(宣傳煽動部)라고 내건 것이다. 거짓말도 양성화(陽性化) 시켜서 당당하게 하면 떳떳한 것이 된다는 논리(論理)다.
이것은 강(江) 건너의 이야기지만 우리 주변(週邊)에서도 가끔 이러한 언어(言語)의 혼란(混亂)을 목도(目睹)하게 된다. 『백서(白書)의 테로는 테로가 아니다』는 자유당(自由黨)시절의 유물(遺物)이지만, 애국충정(愛國衷情)」은 아직도 살아 있는 측에 든다. 부정(不正)의 표본(標本)같은 증권파동(證券波動)도 애국충정의 소치(所致)가 되었으니, 그 때문에 도산(倒產)했거나 자살(自殺)소동을 벌인 많은 국민(國民)들은 애국충정(愛國衷情)에 기여(寄與)했다는 것이 된다. 최근의 것으로, 동장(洞長)에게 떳떳하게 요망(要望)했다는「음성적(陰性的)인 선거부정(選擧不正)」은 「선동(煽動)」과 비슷한 케이스지만 불법(不法)의 양성화(陽性化)는 무법천지(無法天地)를 말한다.
「소비(消費)는 미덕(美德)」이라는 것이 또 있다. 부익부(富益富)가 아직 미덕(美德)일 수 없다면 「소비(消費)는 미덕(美德)」도 미덕(美德)일 수 없다. 사회보장제도(社會保障制度)를 청사진(靑寫眞)으로나마 좀 보여 놓고 그런 소리를 한다 해도 뭣하겠는데 8시간제 노동(勞動)을 하고도 인간(人間)으로서의 최저생활(最低生活)을 겨우 할 수 있는 봉급자(俸給者)나 그런 봉급(俸給)도 차려지지 않는 국민(國民)이 대다수(大多數)인 세상에 「소비(消費)는 미덕(美德)」이라고 노래하거나 춤추게 한다는 것은 무자비(無慈悲비)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대량생산(大量生產) 해낼 수 있어도 아스팔트를 가지고 자연(自然)의 푸르름을 덮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 어떠한 언어(言語)의 혼란(混亂)도 인간(人間)의 윤리의지(倫理意識)을 마비시켜 버릴 수는 없다.
(동아일보 1967년 8월 24일 5면)
홍익인간(弘益人間)
해방(解放)과 함께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말 가운데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것이 있다. 단군(檀君)이 이 나라를 세울 때의 건국이념(建國理念)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처음에 이 말을 「홍익(弘益)하는 인간(人間)」으로 보았다. 얼마동안 그렇게 지나다가,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쓰여 졌던 그 옛날에 인간(人間)이라는 낱말이 있었던가 싶어서 출처(出處)를 찾아보니 「가이홍익인간(可以弘益人間)」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인간(人間)이란 사람이란 뜻이 아니고 사람사이라는 뜻으로「세상」 또는 「사회(社會)」라는 것에 해당된다.
그러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사회(社會)에 홍익(弘益)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원전(原典)에 따르려면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뜻으로서의 인간(人間)은 사어(死語)에 가깝다. 지금도 사전에는 인간(人間)의 두 번째 뜻으로 세상이라는 것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 인간(人間)을 세상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라면 사어(死語)라고 규정해도 무방할 것 같다. 가령 사어(死語)라고 규정해서 좋다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경우에만 살아 있는 말이 되는 셈이 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해서 그런 특권(特權)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까다롭게 생각할 것 없이 지금 보통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홍익(弘益)하는 인간(人間으로 보면 되지 않느냐하는 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人間)」을「세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법(語法)을 돌보지 않는 것이 된다면 그것을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역사성(歷史性)을 돌보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은 「동국(東國)」의 경우와 같다. 동국(東國)이란 중국(中國)의 동(東)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동이(東夷)의 하나인 우리를 나라 대접해서 한 말이다.
그것을 이제 와서 「해돋는 동(東)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라고 해서 안된다는 법(法)은 없지만 어색하다. 남국(南國) 북국(北國)이란 말은 흔히 쓰여도 그런 의미(意味)로서의 서국(西國)이나 동국(東國)은 쓰이지 않고 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동서(東西)는 기후(氣候)의 차(差)가 별로 없는데다가 우리는 국토(國土)가 남북(南北)으로 뻗어있고 동서(東西)는 바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국(東國)」이 그저 동(東)쪽에 있는 나라가 되기 어색하다면, 「인간(人間)」이 사람이 되기도 어색하다. 그렇게 인간(人間)이 사람으로도 걸리는데가 있고 「세상」으로도 걸리는데가 있다면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어떻게 서야 할까. 그래도 어느 쪽이 덜 무리(無理)일까 하면 통년(通念)에 따라 『홍익(弘益)하는 인간(人間)』으로 보는 것이 저항(抵抗)이 적을 것 같다. 그래서 출처(出處)는 찾아보지 않는 것만 같지 못했다면 애초에 아무리 그 이념(理念)이 훌륭해도 반만년전(半萬年前)에 한 것으로 되어있는 말을 오늘에 그대로 등장(登場) 시킨 것이 무리(無理)가 아니었던가 싶다. 장용학(張龍鶴) <작가·동아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1967년 9월 21면 5면)
창간(創刊)의 주변(周邊)과 그 주역(主役)들
「반제(反帝)」 구심체(求心體)로 출발(出發)… 인촌(仁村) 재정(財政)지원 각도 대표(各道代表) 망라
張龍鶴(장용학) (東亞日報論説委員)
1. 문화정책(文化政策)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창간(創刊)을 가져온 조선(朝鮮)에 대한 일본(日本)의 문화정책(文化政策)은 3·1(三·一)운동의 소산(所産)이지만 일본측(日本側)으로 볼 땐, 3·1(三·一)운동에서 받은 충격(衝擊)이 크면 클수록 일제(日帝)의 본성(本性)으로 보아 3·1(三·一)운동을 진압(鎭壓)할 때 보여준 솜씨처럼 더 혹독한 무단정책(武斷政策)으로 나올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이른바 문화정책(文化政策)을 취하게 된 것은 그 당시(當時)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 자체(自體)가 내외(内外)의 정세(情勢)에 밀려 일시 후퇴(後退)를 강요(强要)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으로는, 1912년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説)」 1916년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민본주의(民本主義)」 등으로 활발해진 소위 「대정(大正)데모크라시」는 1918년 8월의 「쌀 소동(騷動)」으로 그 절정(絶頂)에 이른 감(感)이 있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군벌내각(軍閥内閣)이 무너지고, 민(民)재상 하라 다카시(原敬)의 정당내각(政黨内閣)이 성립(成立)되었다. 이 하라내각(原内閣)의 성립(成立)은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를 수행(遂行)해 온 원로정치(元老政治)의 차질을 의미하기도 했다. 밖으로는 1차대전(一次大戰)의 종결(終結)과 함께 일본(日本)은 이제까지 그 침략(侵略)의 후원자(後援者)였던 영미(英美)와 대립(對立)하게 되어 국제적(國際的)으로 고립(孤立)하게 되었고, 또 1차대전(一次大戰) 후(後) 반제국주의운동(反帝國主義運動)의 물결이 크게 일어나 「에집트」 인도(印度) 등에 민족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이 일어났고, 1919년에 발생(發生)한 조선(朝鮮)의 3·1(三·一)운동과 중국(中國)의 5·4운동(五·四運動)은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에 대항해서 일으킨 최초(最初)의 민중운동(民衆運動)이었다. 이러한 내외(内外)의 정세(情勢)는 천황(天皇) 원로군벌(元老軍閥)의 삼자합작(三者合作)으로 이루어진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로 하여금 한때 자신(自信)을 잃고 주춤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군벌내각(軍閥内閣)을 물러나게 한 일본(日本)의 민주세력(民主勢力)이 문자(文字)그대로의 민주세력(民主勢力)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피압박민족(被壓迫民族)의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동정적(同情的)이었지만 그 민족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이 일본(日本)을 향(向)하는 것일 때는 쉽게 군벌(軍閥)에 동조(同調)하여 열렬한 그 앞잡이가 되어버리는 류(類)의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日本)이 취한 문화정책(文化政策)은 예상(豫想상)하지 못했던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세찬 반항(反抗)을 무마하려고 마지못해 취한 호도책이면서 무단정책(武斷政策)보다 더 악성(惡性)의 식민지정책(植民地政策)인 동화정책(同化政策)의 시발(始發)이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조선민족(朝鮮民族)의 말살(抹殺)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그 동화정책(同化政策)은 탄압(彈壓)과 착취(搾取)를 그대로 수반(隨伴)한 것이었다. 따라서 민족지(民族紙)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일제(日帝)의 탄압(彈壓)이나 착취(搾取)와 함께 동화정책(同化政策)과도 싸워야했다.
2. 창간전후(創刊前後)
1919년 9월 10일 신임 총독(新任總督) 사이토(齋藤)이 문화정책(文化政策)을 표방하고 언론(言論) 집회(集會) 출판(出版)에 대한 제한(制限)을 완화(緩和)할 것을 시사(示唆)하자 이 땅의 언론계(言論界)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저마다 신문발행(新聞發行)을 꾀하여, 그해 10월 경무국 도서과(警務局圖書課)에 제출(提出)된 신문발행 허가원(新聞發行許可願)은 수십건(數十件)에 달하였다. 이중에서 20년 1월 6일자로 발행허가(發行許可)가 나온 것은 친일지(親日紙)로서 시사신문(時事新聞), 중립지(中立紙)로 조선일보(朝鮮日報보), 그리고 민족지(民族紙)인 동아일보(東亞日報)의 3지(三紙)였다.
이보다 앞서 민족진영(民族陣營)의 언론인(言論人)들은 제각기 민간지 발행(民間紙發行)을 계획(計劃)하다가 민족지(民族紙) 중립지(中立紙) 친일지(親日紙)를 각각 하나씩 허가(許可)하려는 총독부(總督府)의 방침(方針)이 알려지자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매일신보 편집장(每日申報編輯長)을 지낸바 있는 이상협(李相協), 대판조일신문사 기자(大阪朝日新聞社記者) 진학문(秦學文), 평양일일신문(平壤日日新聞)의 국문판 주간(國文版主幹)을 지낸 장덕준(張德俊) 등은 한말(韓末)의 언론계(言論界) 원로(元老)인유근(柳瑾) 양기탁(梁起鐸)을 받들고 처음에는 자금(資金)을 각자가 염출해오기로 했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재산가(財産家)를 구하기로 했다. 그때 첫째로 떠오른 것이, 중앙학교(中央學校)의 교주(校主)이고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사)를 설립(設立)한 청년사업가(青年事業家) 김성수(金性洙)였다.
김성수(金性洙)는 당시 다음에 착수(着手)할 사업(事業)으로 전문학교 설립(專門學校設立)을 계획(計劃)하고 있었으니, 중앙학교장(中央學校長) 최두선(崔斗善)을 통(通)해 이상협(李相協) 등의 민족지 발행계획(民族紙發行計劃)과 출자 요청(出資要請)을 듣고 이에 찬동(賛同)하였다. 교육사업(教育事業)을 자기(自己)의 천직(天職)으로 삼는 김성수(金性洙)가 전문학교 설립계획(專門學校設立計劃)을 당분간 포기하면서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언론사업(言論事業)에 투신(投身)하게 된 것은 전문학교 설립(專門學校設立)보다 민족지(民族紙)의 발행(發行)이 더 시급(時急)하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3·1운동(三·一運動)에 의해 스스로를 자각(自覺)한 이 땅의 민족정신(民族精神)을 집약(集約)하여 고취하려면 민족(民族)을 대변(代辯)할 신문(新聞)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전문학교(專門學校)로는 보성전문(普成專門)과 연희전문(延禧專門)이 있었다.
신문(新聞)의 발행허가(發行許可)를 받은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는 1월 14일 전국 각도 인사(全國各道人士) 78명을 발기인(發起人)으로 하는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발기인 총회(株式會社東亞日報社發起人總會)를 열고 자본금(資本金) 백만원(百萬圓)의 주식회사(株式會社)를 설립(設立)할 것과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창간(創刊) 날짜를 3·1운동(三·一運動)의 1주년(一周年)이 되는 3월1일(三月一日)로 할 것 등을 결정(決定)하고 회사 간부진(會社幹部陣)을 다음과 같이 선출(選出)하였다.
설립자(設立者) 김성수(金性洙), 사장(社長) 박영효(朴泳孝), 편집감독(編集監督) 유근柳瑾) 양기탁(梁起鐸), 주간(主幹) 장덕수(張德秀), 발행인(發行人) 및 편집인(編集人) 이상협(李相協), 인쇄인(印刷人) 이용문(李容文).
총회(總會)에서 선출(選出)된 간부(幹部)들은 회합(會合)을 갖고 사원(社員)의 부서(部署)를 인선(人選)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사시(社是) 3조(三條)를 확정(確定)했다.
一, 조선민중(朝鮮民衆)의 표현기관(表現機關)을 자임(自任)한다.
二,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지지(支持)한다.
三, 문화주의(文化主義)를 제창(提唱)한다.
그리고 2월 6일 주식회사(株式會社) 동아일보설립허가원(東亞日報設立許可願)을 제출하고 동월 6일 그 허가(許可)가 나옴으로써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는 정식(正式)으로 그 설립(設立)을 보게 되었다.
회사 설립(會社設立)을 본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는 임시(臨時)로 화동(花洞) 138번지 한식 가옥(韓式家屋)에 「주식회사(株式會社) 동아일보사창립사무소(東亞日報社創立事務所)」라는 간판(看板)을 걸고 창간(創刊)을 서둘렀지만 3월 1일의 창간호 발행(創刊號發行)은 시설 준비(施設準備)와 인원 확보(人員確保)가 지연되어 실현(實現)을 보지 못하고, 4월 1일자로 동아일보 제1호(東亞日報第一號)를 내놓았다. 타블로이드배대판(倍大版) 4면(四面) 석간(夕刊)으로, 구독료(購讀料)는 1부(一部) 3전, 월(月) 60전이었고, 신문인쇄(新聞印刷)는 대동인쇄소 신문관(大東印刷所新文館) 박문관(博文館) 등의 시설(施設)을 빌어서 했다. 자체(自體)의 인쇄시설(印刷施設)을 갖춘 것은 7월 하순이었고, 그 인쇄기(印刷機)는 마리노니식(式) 윤전기(輪轉機)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最初)가 되는 신식 유전기(新式輪轉機)로 한 시간(時間)에 2만 장을 찍어 낼 수 있었다.
신문(新聞)의 제호(題號) 『동아(東亞)』일보(日報)는 유근(柳瑾)의 제안(提案)으로 『우리 민족(民族)이 발전(發展)하려면 동아 전국(東亞全國)을 무대(舞臺)로 하여 활동(活動)해야 한다』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었고, 초창기(草創期)의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의 부서(部署)는 다음과 같았다.
사장(社長) 박영효(朴泳孝), 편집감독(編集監督) 유근(柳瑾) 양기탁(梁起鐸) 주간(主幹) 장덕수(張德秀), 논설반(論説班) 김명식(金明植) 이상협(李相協) 박일병(朴一秉) 장덕준(張德俊) 진학문(秦學文), 편집국장(編集局長) 이상협(李相協) 정치부장 겸 학예부장(政經部長兼學藝部長) 진학문(秦學文),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通信部長兼調査部長) 장덕준(張德俊), 사회부장 겸 정리부장(社會部長兼整理部長) 이상협(李相協), 기자(記者) 고희동(高義東) 김정진(金井鎭) 김형원(金炯元) 김태동(金泰登) 김동철(金東轍) 김동성(金東成) 염상섭(廉尙燮) 유광렬(柳光烈) 이승규(李昇圭) 이서구(李瑞求) 변봉현(邊鳳現) 서승효(徐承孝) 신상우(申翔雨) 신길구(申佶求) 최영목(崔榮穆) 한기악(韓基岳), 사진반(寫眞班) 야마하나(山塙芳潔) 공무국장(工務局長) 이용문(李容文) 영업국장(營業局長) 이운(李雲), 서무부장(庶務部長) 임면순(任冕淳), 경리부장(經理部長) 이운(李雲), 판매부장(販賣部長) 유태로(劉泰魯), 광고부장(廣告部長) 남상일(南相一)
3. 경영(經營)의 고심(苦心)
공칭자본금(公稱資本金)이 백만원(百萬圓)이라하고 제1회 불입금(第一回拂入金)이 25만원(二十五萬圓)이었지만 그것이 잘 걷히지 않아 십수만(十數萬)을 가지고 창간(創刊)에 착수했고, 그것도 7월 1일 박영효(朴泳孝)의 뒤를 이어 김성수(金性洙)가 2대 사장(社長)으로 취임(就任)했을 때는 거의 바닥이 났다.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간(創刊)을 서둘던 20년 3월 일본(日本)에서 일어난 전후(戰後)공황이 조선(朝鮮)에까지 미쳐 불황(不況)을 가져온데다가 구독료(購讀料)가 잘 들어오지 않고 광고(廣告)가 개척(開拓)되지 않았기 때문에 창간(創刊)된지 3개월(三個月)에 경영난(經營難)에 봉착했고, 그 짐은 김성수(金性洙)에게 지워졌다. 김성수(金性洙)는 전해 10월에 창설(創設)한 경성방직(京城紡織)이 전후(戰後)공황 등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어서 이제까지 없는 곤경(困境)에 처해 있었지만,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육성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해 9월 동아일보(東亞日報)는 3개월 반을 끈 무기정간(無期停刊)을 당하여 경영난(經營難)은 더 한층 심해졌다.
주식회사 성립(株式會社成立)을 서둔 김성수(金性洙)는 주식 모집(株式募集)을 위해 전국 각지(全國各地)의 유지(有志)를 순방(巡訪)하였다. 애초에 주식(株式)을 전국 유지(全國有志)들에게 분산(分散)시키기로 한 것은 김성수(金性洙)였다. 그것은 경제적 이유(經濟的理由)에서 보다 민족지(民族紙) 동아일보(東亞日報)는 몇몇 개인(個人)이 하는 것이 아니고 전민족(全民族)의 신문(新聞)이라는 인식(認識)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김성수(金性洙)의 설명(説明)을 들은 지방유지(地方有志)들은 감격(感激)하며 취지(趣旨)에 찬동하였으나 지방(地方)은 서울보다 더 살기 어려워서 성과(成果)는 기대(期待)에 미치지 못했다.
1921년 9월 14일 주식회사(株式會社)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의 설립(設立)을 보게 되었다. 자본금(資本金)은 애초에 책정(策定)했던 백만원(百萬圓)을 줄여 칠십만원(七十萬圓)으로 하고, 주식 총수(株式總數) 일만사천주(一萬四千株)중 발기인인수주(發起人引受株)를 구천사백오십사주(九千四百五十四株) 공모주(公募株)를 사천오백사십육주(四千五百四十六株)로 해서 주주(株主)의 총수(總數)는 사백(四百)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민족지(民族紙)로서의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쓰임이 컸기 때문에 주식회사(株式會社)가 성립(成立)된 후(後)에도 경영난(經營難)은 여전(如前)하다가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적자(赤字)를 면하고 재정적(財政的)으로 궤도(軌道)에 올라 김성수(金性洙)의 재정적 부담(財政的負擔)이 떨어진 것은 1924년경부터였다. 그러니 초창기(草創期)의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신문(新聞)의 편집면(編輯面)에 있어서는「동인동아일보(同人東亞日報)」였으나 신문사(新聞社)를 경영(經營)해가는 재정면(財政面)에 있어서는 김성수(金性洙)가 혼자 분투(奮鬪)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