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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동아일보 사람들- 장두현

Posted by 신이 On 12월 - 26 - 2018

 

장두현(張斗鉉, 1875~1938)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대한제국 때 농공상부(農工商部)에서 관직생활을 하였다. 1920년엔 민족자본 형성을 위해 천일은행(한국상업은행의 전신)의 설립에 참여했고 같은 해 발족된 조선체육회의 초대회장에 추대되어 체육을 통한 민족자립정신 고취에 폭넓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21년 주식회사 동아일보 창립총회에서 취체역(이사)으로 선임돼 1924년까지 활동했다.

 

장두현(張斗鉉) ( ) ▲ 1921. 9 취체역, 1924. 4 사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실업계(實業界)의 중진(重鎭) 장두현 씨(張斗鉉氏) 금효 서거(今曉逝去)

반도 실업계 중진 (半島實業界重鎭) 장두현 씨(張斗鉉氏)는 저반숙아(這般宿疴)로 경성부 장교정 63(京城府長橋町六三)의 자택(自宅)에서 요양중(療養中)이더니 금효 2시(今曉二時) 서거(逝去)하엿는바 향년(享年)은 64(六十四).

씨(氏)는 구한국시대장례원전사(舊韓國時代掌禮院典祀), 농상공부 비서과장 등(農商工部秘書課長等)을 역임(歷任)하고 폐관후(廢官後) 실업계(實業界)에 전(轉)하야 각종회사(各種會社)의 중역(重役)을 지내고 최근(最近)은 조선상업은행급조선취인소(朝鮮商業銀行及朝鮮取引所)의 重役(중역)에 재임(在任)하고 잇으며 또 씨(氏)는 일즉이 본사(本社) 취체역급(取締役及)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고문(顧問)으로 언론계(言論界)에도 공헌(貢獻)한바 잇다.

(동아일보 1938년 11월 22일자 4면)

 

 

장두현씨 영면(張斗鉉氏永眠)… 장의(葬儀)는 27일(二十七日)

일즉이 구한국정부의 장례원전사(掌禮院典祀) 농상공부 비서과장(農商工部秘書課長) 등을 역임타가 그후 조선의 언론계(言論界)와 은행회사 등의 중임을 가지고 잇는 장두현(張斗鉉)씨는 숙환으로 지난 21(廿一)일 부내 장교정(長橋町) 63(六十三)번지 자택에서 64(六十四)세를일(一)기로 서거하엿다. 장의는 27(二十七)일 오전 8(八)시반에 훈련원 부민회장에서 거행키로한다고 한다.

그런데 씨는 일즉이 본사 창간발기인으로서 취체역과 감사역을 역임하엿으며 또 우보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의 고문 등으로 조선의 언론계를 위하야 만흔 진력을 하엿으며 최근까지도 조선상업은행(朝鮮商業銀行)과 조선취인소(朝鮮取引所)의 중역으로 잇엇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8년 11월 24일자 2면)

 

 

본사창립총회(本社創立總會)

창립 준비중(創立準備中)이든 주식회사 동아일보사(株式會社東亞日報社)는 거14일 오후2시(去十四日午後二時)에 시내 명월관(市內明月舘)에서 창립총회(創立總會)를 개(開)하고 경과보고(經過報告)가 유(有)한 후중역선거(後重役選擧)를 행(行)하얏는대 피선(被選)된 취체역급 감사역(取締役及監査役)의 씨명(氏名)은 좌(左)와 여(如)하더라

취체역(取締役) 이운(李雲)▲장덕수(張德秀)▲김찬영(金瓚永)▲송진우(宋鎭禹)▲이상협(李相協)▲성원경(成元慶)▲장두현(張斗鉉)▲정재완(鄭在涴)▲신구범(愼九範)▲김성수(金性洙) 감사역(監査役) 현준호(玄俊鎬)▲장희봉(張熙鳳)▲박용희(朴容喜)▲이충건(李忠健)▲허헌(許憲) 기후 사장(其後社長) 부사장(副社長) 전무취체역급 상무취체역(專務取締役及常務取締役)은 중역회(重役會)에서 호선(互選)한 결과(結果) 사장(社長)에는 송진우(宋鎭禹), 부사장(副社長)에는 장덕수(張德秀), 전무취체역(專務取締役)에는 신구범(愼九範), 상무취체역(常務取締役)에는 이상협 씨 등(李相協氏等)이 당선(당선)되야 19일(十九日) 취임(就任)하얏더라

(동아일보 1921년 9월 20일자 2면)

 

 

 

근고(謹吿)
취체역사장 송진우(取締役社長宋鎭禹)
전무취체역 신구범(專務取締役愼九範)
상무취체역 이상협(常務取締役李相協)
취체역 장두현(取締役張斗鉉)
취체역 김성수(取締役金性洙)
씨 등(氏等)이 금번 사정(今番事情)에 의(依)하야 사임(辭任) 하엿스며 기외(其外) 취체역(取締役)은 경성(京城)에 부재(不在)이기 감사역(監查役) 허헌 씨(許憲氏)가 임시주주총회(臨時株主總會)에서 후임 결정(後任决定) 되기까지 취체역(取締役)의 직무(職務)를 집행(執行)하게 되엿기 자(玆)에 근고(謹吿) 함
4월 27일(四月二十七日) 주식회사 동아일보사(株式會社東亞日報社)

(동아일보 1924년 4월 27일 1면)

 

 

 

東洋物産會社長 張斗鉉氏라 하면 京城의 實業界에서 大槪로 그가 如何한 人임을 斟酌할 바이거니와 이제 簡單한 말로써 그의 性格을 推察할 거리가 잇다. 지나간 10月 3日 朴熙道氏의 父親 晬宴日이다. 그는 어떠한 會의 宴會費問題로 하야 돈 紙匣을 열엇는데 그 所要金을 除하고 殘餘金이 正히 十五錢이라 그는 문득 가로되 「이것도 동무 두 사람과 가티 술 한잔式을 난흘 수가 잇다」고 하엿다. 문득 내치는 말에 동무 두 사람을 생각하야 말함과 가틈은 氏가 如何히 親友를 조하하며 또는 社交性에 富함을 알 수 잇다.<69>

(‘隨聞見隨’,  개벽 제29호 1922년 11월호)

 

 

五괘사 五多事

興一社의 張斗鉉씨는 아모가 보와도 好好爺이지만은 그의 「괘사」야말로 어지간치 안타. 엇던 주석이던지, 그가 석기기만 하면 집안이 떠들석하고 쌈이 나도 그의 괘사 한마듸가 나오면 배 알는 사람의 理中湯 먹은 것 처럼 속이 다 평화하게 되야 싸홈이 저절로 가러 안는다.

(‘京城名物男女 新春誌上大會’, 별건곤 1927년 2월호)

 

 

興一社 張斗鉉

나는 自誇하는 말슴 갓슴니다만은 서울 사람중에 제일 먼저 이러나고 제일 먼저 자며 제일 규칙적으로 시간생활을 하는 사람은 내인 것 갓슴니다. 언제이던지 오전 5시면 꼭 이러나서 내손으로 창문 분합문 대문등을 모도 여러놋코 집안사람을 다 깨워 이르키고 다시 침실에 드러가서는 냉수마찰을 하고 실내를 掃除함니다. 그리고 조반은 꼭 7시 반에 먹고 8시쯤하야 집을 떠나오면 아즉 회사의 출근시가 되지 아는 가닭에 鐘路나 기타 시가지를 한번 도라서 9시에 회사에 출근하고 12시가 되면 다시 집에 가서 私信處理나 기타 가사를 보고는 오후1시 반에 점심을 먹고 그 다음에 낫잠을 약 30분간 자고 나서는 친구의 방문을 하거나 그럿치 안으면 친구와 가티 술을 먹던지 또는 집에서 독서를 하며 밤에는 8시에 꼭 잠을 잠닏. 이우에 말슴한 정한 시간은 엇던한 날이던지 꼭 실행함니다. 일요일도 물론이고 여간한 병이 낫술 때에도 실행함니다. 나는 청결한 것을 매우 조와하는 까닭에 실내를 매일 三次식 꼭 정규로 掃除를 하고. 취미는 술, 바둑, 독서인데 서적은 한학서류를 청년시대부터 잘 읽엇섯는데 요사이는 書傳周易繫辭 등를 만히 읽슴니다.

(‘하로 時間을 엇더케 쓰나, 各方面名士의 一日生活, 職業따라 다른 生活’, 별건곤, 1928년 12월호)

 

 

男子와 술과-張斗鉉氏 夫人 宋東賢

물론 우리집 령감이 술을 조와하시닛간 나도 물론 좃타고 그래야지요!

남들은 술을 먹으면 주정을 한다 하지만은 우리 령감은 집에서 그런 일이 결코 업슴니다. 남자로는 술도 먹고 담배도 먹어야 함니다.

술 못 먹는 이가 친구교제는 엇지 함닛가. 남자라면 친구하고 교제성이 만어야지 녀자처럼 집안에서 잔소리나 하는 남자를 무엇에 씀닛가 빽빽해서요.

(‘男便으로 家庭人으로 술 먹는 男子가 조흔가 안 먹는 男子가 조흔가, 各 社會名士夫人의 意見公開’, 별건곤, 1928년 12월호)

 

 

 

會社 學力보다도 素行을 삷혀

興一社 社長 張斗鉉

이곳에서야 사원을 만히 쓸 수도 업고 필요도 업고 별 이동이 빈번하게 업슴으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할만치 사원채용에 대하야 自家特有의 별 방식이랄 만한 것이 업스나 하여간 사람을 채용해 쓰랴면 어느 사회에서고 물론 그 방면에 대한 전문지식이 잇서야겟고, 첫재 德行과 心性이 발러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업스나 나는 이럿케 생각을 하오. 學智의 優劣이 잇다면 얼마나 잇겟소. 優等卒業이나<95> 맨끄트로 졸업을 한 사람이나 배호기는 맛찬가지로 배호지 안이 하엿겟소. 혹 어느 사회나 은행에서 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돈도 잇고 일홈도 잇서 일반사회에서 신용을 할만한 사람의 보증이 잇서야 한다니 제가 나흔 자식도 보증을 할 수가 업는데 항차 남의 자식을 엇더케 보증을 하며 무쇠 그릇이나 양철그릇 가트면 혹 보증을 할른지도 모르지만 실상 말이지 사람을 엇더케 보증을 하겟소. 잘못해서 부정한 행위가 잇스면 섯뿔니 보증을 섯다가 그것을 물어놋케 되니 누가 나서서 보증을 스며 그 當者로 말을 하드라도 그런 보증인을 하나도 어렵겟는데 둘ㅅ식 세울 수가 잇겟소. 그것은 다 회사나 은행을 경영하는 소위 資本側의 제혼자의 욕심이라고 할 것임늰다. 그러나 나 가트면 그까지 보증인이고 무어고 다 일업시 학력의 우열도 보지 안코 다만 그사람의 如何를 보아서 능히 남의 일을 내 일 가티 해주겟느냐 안이 하겟느냐 하는 것을 잘 삷혀보아서 쓰겟소이다. 그러나 한번이고 두번을 보아서 능히 그 사람의 소행을 알 수는 업는 일이나 첫인상을 미루어서 그의 가정의 裏面을 드려다보고 될 수 잇스면 여러 방면으로 자세하게 알어본 연후에 합당한 사람이면 써보는 것이지 학생을 모집하는 것 가티 시험을 보히거나 체격을 검사하거나 할 수야 잇겟소! 다른 사회에서도 별달은 방식이 업슬 것갓고 나 亦 이러타는 특별한 自家獨流의 방식은 업소이다.

(‘就職 新作路’, 별건곤, 192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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