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로(李泰魯, 1898~미상)는 전북 순창 출신으로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광고부장, 일본 오사카지국장을 거쳐 1928~1929년 동아일보 도쿄지국장을 역임했다. 1929년 3월 ‘인도의 시성’이자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가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 귀로에 일본 도쿄에 들렀다. 이 소식을 들은 동아일보 본사에서는 타고르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로 계획하고 도쿄지국장 이태로에게 그 뜻을 전하도록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간디가 이끈 인도의 독립투쟁을 보도함으로써 조선 민중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이태로 도쿄지국장은 지인들을 통해 어렵사리 시인 타고르를 만났지만 타고르는 일정상 동아일보의 초청에 응할 수 없음을 밝히고 그의 미국인 비서를 통해 한 편의 시(詩)를 전했다. 이것이 바로 1929년 동아일보 4월 2일자에 주요한 기자의 번역으로 게재된 유명한 시 ‘동방의 등불’이다. ‘일즉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 빗나든 등촉의 하나인 조선 /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비치 되리라’
이태로(李泰魯)(相雨) (순창, 1898~ ) ▲ 1923. 6 서기, 광고부장대리, 광고부장, 오사카지국장, 도쿄지국장, 1929. 5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빗나든 아세아등촉(亞細亞燈燭) 켜지는 날엔 동방(東方)의 빗』
◇동아일보지상(東亞日報紙上)을 통(通)하야◇
타옹(翁)이 조선(朝鮮)에 부탁(付託)
이번 가나다(加奈陀) 려행 중 잠간 동경에 들런 인도시성(印度詩聖)『타고아』옹은 지난달 이십칠일에 마츰 십년전부터 일본에 망명중인 인도혁명가 『보-스』씨의 숙소로 왕방한 긔자와 서로 맛나게 되엇는데 옹은 합장의례로 흔연히 긔자를 마저주며 한번 조선에 오지 안켓느냐하는 긔자의 물음에 대하야
녜 고마운말슴입니다 그러나 래일이면 횡빈(橫濱)을 떠날터인데요-돌아오는 길이라도 와달라고요?미국으로부터 오는길도 아마 일본에 못들를 터이니 딸하서 조선에도 갈수가 업겟습니다 래일 떠나기 전에 다시 맛납시다
하며 이튼날인 이십팔일 오후세시에 횡빈을 떠나는『엠푸레스, 오푸, 에시야』호에 옹을 작별하러간 긔자에게 알에와 가튼 간단한 의미의 멧세지를 써주며 동아일보를 통하야 조선민족에 전달하야 달라 하얏다
조선(朝鮮)에 부탁(付託)
일즉이 아세아(亞細亞)의 황금시대(黃金時期)에 빗나든 등촉(燈燭)의 하나인 조선(朝鮮) 그 등(燈)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東方)의 밝은 비치되리라 1929(一九二九), 3(三), 28(二八) 라빈드라낫, 타고아
(동아일보 1929년 4월 2일자 2면)
[`독자와 함께` 동아일보 支局 85년] 東亞 지국은 `항일 투쟁의 네트워크`였다
●민중계몽 앞장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민족주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로부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시를 받아낸 것도 동아일보 도쿄지국이었다.
1929년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가 동아일보의 조선방문 요청에 응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도쿄지국장 이태로에게 써 준 시가 그해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처음 소개된 ‘동방의 등불’. 당시 영문으로 된 이 시를 번역한 시인 주요한도 동아일보의 본사 파견 평양지국장을 지냈다.
(동아일보 2005년 4월 1일자 A27면)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 <2> 항일 투쟁을 이끌다
▼ ‘동병상련’ 인도의 격려 ▼
간 디 “무저항적 수단으로 조선 독립 이루길”
타고르 “아시아의 등불… 동방의 밝은빛 되리”
1926년 11월 26일 인도 사바르마티의 아슈람(ashram·수행자 공동주거지)에서 ‘코리아의 서울’로 날아온 영문 편지다. 발신인은 모한다스 K 간디, 수신인은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 동아일보는 1927년 1월 5일자 2면 톱기사에 ‘간듸 씨의 멧세지’를 얼굴과 편지봉투 사진, 경력 요약문, 영어 원문과 함께 실었다. 이 편지는 1926년 10월 12일 인촌이 간디에게 쓴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사바르마티에 보관돼 있는 영문 편지에서 인촌은 “당신은 조선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다. 우리에게 당신은 이방인이 아니다.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는 조선을 위해 선지자(先知者)인 당신의 고언을 청한다”고 썼다.
동아일보는 창간 이후 지속적으로 영국 식민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벌여온 인도와 그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 간디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방식으로 일제 식민 지배를 겪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독립 정신을 일깨웠다. 동아일보에서 인도의 독립을 위한 간디의 외침은 곧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목소리이기도 했던 것이다.
1929년 4월 1일자에는 “인도인 군중에게 영국제 면포(綿布)를 불살러버리라고 부르지진 마하도마 간듸 씨가 벌금 65전을 물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간디가 이끈 인도 독립투쟁과 영국의 탄압을 전한 동아일보의 기사들은 1920년 9월 25일 제1차 무기정간 사유 중 하나가 됐다.
1939년 11월 11일자 1면에는 ‘인도 독립을 위하여 최후까지 투쟁, 간디 옹 언명’이라는 기사를 간디의 사진과 함께 실었다. 석간 1판에 실렸던 이 기사는 검열로 인해 다음 판부터 사라졌다.
1929년 4월 2일자 2면에는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일본에서 만난 동아일보 도쿄지국장 이태로에게 건넨 시가 게재됐다. 동아일보는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 일본에 잠시 들른 그를 서울로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자 했지만 타고르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다가 동행한 미국인을 통해 이 글을 전했다.
“일즉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빗나든 등촉(燈燭)의 하나인 조선/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비치(빛이) 되리라.”
1913년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성(詩聖)이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격려하기 위해 시를 써내려간 것이다. 영어 원문 번역은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지낸 시인 주요한이 맡았다.
(동아일보 2010년 7월 12일자 A10면)
동아일보십년사(東亞日報十年史)【一九二○年~一九三○年】【四(사)】
편집체재진보(編輯體裁進步)
추간(秋間)에는 조선공산단(朝鮮共產黨) 공판(公判)이 26회(廿六回)에 긍(亘)하야 파란첩출(波瀾疊出)로 지면(紙面)을 채우고 중국혁명군(中國革命軍)의 승리(勝利)와 합(合)하야 지면편집체재(紙面編輯體裁)의 발달(發達)에 자극(刺戟)이 되엇다. 또 조선농촌(朝鮮農村)에 일대혁명(一大革命)을 일으키는 중(中)에 잇는 전조선수리조합(全朝鮮水利組合)을 거의 누락(漏落)업시 답사(踏査)하야 그 엄정(嚴正)한 비판(批判)을 지면(紙面)에 발표(發表)하다. 9월(九月)에 동경대판(東京大阪)에 지국(支局)을 신설(新設)하고 양원모(梁源模) 이태로(李泰魯)를 각기 지국장(各其支局長)으로 임(任)한 결과(結果) 광고량(廣告量)의 증가(增加)에 호성적(好成績)을 어덧다. 10일(十日) 사장 김성수(社長金性洙) 만기퇴임(滿期退任)하매 송진우(宋鎭禹) 이를 계(繼)하며 이광수(李光洙)의 신병(身病)으로 김준연 편집국장(金俊淵編輯局長)을 임(任)하다. 12월(十二月)에는 다시 평양지국(平壤支局)을 본사 직영(本社直營)으로 하고 또 재만동포구축(在滿同胞驅逐)의 문제(問題)가 일어나매 김우평(金佑怦)을 현지(現地)에 특파(特派)하야 조사(調査)케 하다.
(1930년 4월 4일자 5면)
민족(民族)의 표현기관(表現機関)… 반세기(半世紀) 쌓인 일화(逸話)
박춘금(朴春琴) 권총(拳銃) 대고 돈 내라고 협박(脅迫)
1923년 9월 동경대진재(東京大震災)가 터지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는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을 동경(東京)에 보내 그곳 동포들의 안부를 조사케한 후 위문금으로 국내에서 3만여 원을 모금했다.
1924년 4월 친일단체이던 노동상애회(勞動相愛會)의 부회장 박춘금(朴春琴)이 일본으로부터 건너와서 깡패떼를 거느리고 동아일보사를 7,8차 방문하면서 그 돈을 상애회(相愛會)의 사업비로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김성수(金性洙)는 그때마다
『5전 10전씩 국민의 총의로 모은 돈이라 함부로 쓸 수 없다』고 버티다가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박(朴)을 식도원(食道園) 명월관(明月館)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 박(朴)은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마루야마」(丸山鶴吉)가 주었다는 피스톨을 들이밀고 요리상을 부숴가며 두 사람을 협박했다.
영업국장 양원모(梁源模)는 참다못해 정치부장 최원순(崔元淳) 염업국 사원, 이태로(李泰魯) 박영록(朴永録) 등 3인을 시켜 방망이 하나씩을 차게 한 후 명월관의 빈방에 숨도록 했으나 김성수(金性洙)가
『개인자격으로 3천원을 주겠다』
고 약속함으로써 무사했다. 김성수(金性洙)는 송진우(宋鎭禹)와 상의 끝에 돈을 마련해 가지고 박춘금(朴春琴)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던 총독부 경무국장「마루야마」를 찾아가
『박(朴)에게 이 돈을 수교(手交)할 때 당신이 입회하든지 직접 전해 주시오』
라고 말했다。 당황한「마루야마」는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인데 아뭏든 일주일 안으로 박(朴) 을 퇴거 시키겠소』
라고 답변했고 돈은 전해주지 않았다. – 이태로(李泰魯)
타고르 초청(招請) 응낙대신 시(詩) 보내
1929년 3월 인도의 시성(詩聖)「타고르」가「캐나다」를 순방하고 귀향길에 일본에 들렀다. 이때 일본에서도「조일신문(朝日新聞)」만이「타고르」옹의 예방을 받았으며 다른 신문사에서는 접촉할 수 없었다.
「동아일보(東亞日報)」는「타고르」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기로 하고 동경지국장(東京支局長) 이태로(李泰魯)에게 전보로「타고르」를 만나도록 지시했다. 주로 광고업무만 맡아왔던 이태로(李泰魯)는 취재(取材) 경험이 없어 서툰 솜씨로 동분서주했다. 가까스로 인도인 독립운동자로 일본에 망명중이던「찬드라보스」를 만나 그 뜻을 전할 수 있었고「보스」의 일인(日人) 장인「소마」(相馬)의 집 응접실에서「타고르」옹을 만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태로(李泰魯)는 성(聖)스런 노인이 합장으로 인사(人事)를 해주는 모습을 사진 찍을 수 없음이 안타까왔다. 일인(日人) 사진관에서 데려온 사진사는「타고르」옹이 약속시간인 오전 10시에서 몇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화를 내며 1원50전을 받고 그냥 가버렸던 것이다.
이태로(李泰魯)는 미국인 선교사「내슈」가 영문(英文)타이프로 써 준「동아일보(東亞日報)」의 뜻을 전달했는데「타고르」는 초청 응낙 대신「요꼬하마」항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미국인 비서를 통해 전해주었다. 그것이 바로 주요한(朱耀翰) 번역으로 4월3일자「동아일보(東亞日報)」에 게재된 유명한「동방(東方)의 등(燈)불」이라는 시(詩)다.
『일찌기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燈燭)의 하나인 조선(朝鮮) 그 등불 다시한번 켜지는 날엔 너는 동방(東方)의 밝은 빛이 되리라-』-이태로(李泰魯)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