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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동아일보 사람들- 이중현

Posted by 신이 On 12월 - 26 - 2018

 

이중현(李重鉉, 1949~1983)은 경기 개풍 출신으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했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사진기자를 거쳐 1973년 동아일보 사진부에 입사했다. 1983년 10월9일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 첫 방문국인 버마(미얀마) 수도 랑군의 아웅산국립묘소에서 발생한 북한의 폭탄테러로 서석준 부총리 등 공식 수행원 16명과 함께 순직했다. 국내신문 사진 풀기자로 특파된 이기자는 카메라맨들 중에서도 가장 앞줄에 서서 취재에 열중하다 참변을 당했다. 34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동아일보는 동아일보의 다섯 번째 순직사원이면서 세 번째 순직기자인 고 이중현 기자에게 10월9일자로 부장대우를 추서, 10년간 부장급여를 유족에게 지급했다. 정부도 이 기자에게 국민훈장동백장을 추서했다.

 

이중현(李重鉉) (서울, 1949~1983) △1973.5 사원(편집사진부), 1983.10 순직.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4권, 동아일보사, 1990)

 

 

 

이중현(李重鉉) 기자의 순직

1980년 권동현 사원의 순직에 이어 본사는 2년여 만에 편집국 사진부 이중현기자가 순직한 불행과 슬픔을 또다시 겪게 되었다.

이중현기자는 1983년 10월9일 낮 12시58분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 및 대양주 6개국 공식 순방 첫 방문국인 버마(미얀마) 수도 랑군의 아웅산국립묘소에서 발생한 암살폭발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 등 공식 수행원 16명과 함께 순직했다. 유일한 국내신문 사진 풀기자로 특파된 이기자는 평소에 보여온 치열한 취재의욕대로 카메라맨들 중에서도 가장 앞 줄에 서서 취재에 열중하다 참변을 당했다. 34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이중현기자의 유해는 사건 발생 3일후인 10월11일 오후 5시15분 희생자 유해 15위와 함께 김포공항에 도착, 김상협(金相浹)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영현봉영식을 가졌으며 오후 7시15분경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합동영현안환소에 안치되었다. 정부는 10월13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이기자를 비롯한 희생자 17위에 대한 ‘순국외교사절합동국민장’을 거행, 영결식을 가졌다. 이날 국민장에는 장의위원장인 김상협 국무총리를 비롯한 3부 요인과 와인버거 미국방장관을 위시한 국내외 외교사절, 그리고 서울 시민 1백만명이 참석했다. 이어 이기자의 유해는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의 애도 속에 동작동 국립묘지로 옮겨져 안장식을 가진 후 국가유공자 제1묘역 23호 묘소에 운구되어 오후 2시에 하관 안장되었다.

본사는 다섯 번째 순직사원이면서 세 번째 순직기자인 고 이중현기자에게 10월9일자로 부장대우를 추서, 향후 10년간 부장급여를 유족에게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정부에서도 이기자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1920년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순직기자인 본사 장덕준 부장에게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단장을, 1966년에 월남에서 순직한 백광남 특파원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한 바 있으며, 본사는 고 백기자에게 부장대우를 추서한 바 있다.

한편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자택에 마련된 고 이중현기자의 빈소에는 전두환 대통령 내외와 김상만 명예회장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인사 1천여명이 조문해 미망인 강민선(姜敏善)여서와 두 딸 수연(秀燕) 지원(芝園) 양을 위로했다.

이중현 부장은 경기도 개풍군 태생으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했으며, 경향신문과 조선일보를 거쳐 1973년 5월에 본사 사진부 기자로 입사했다. 고교 1년 때부터 카메라에 심취하기 시작했다는 그는 14년 동안의 사진기자 활동을 통해 취재혼에 불타는 탁월한 사진기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68년 제16회 국전 사진부 입선을 비롯해 한국국제사진살롱과 여러차례의 보도사진전에 입상하는 등 사진작가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동아일보의 지면을 빛낸 대표적인 사진으로는 흑백의 경우 77년 이리역폭파사건의 참상을 극명하게 알린 ‘11월11일의 일기’, 컬러의 경우 78년 동아일보가 처음 컬러판을 발행하면서 컬러사진 1호로 실린 태평양횡단에 나선 ‘동아갈매기호’를 헬리콥터에서 찍은 ‘하늘을 보다’ 등이 손꼽힌다.

한편 이기자와 함께 랑군에 특파된 정치부 최규철 기자는 사고 현장에서 오른쪽 팔목과 머리에 파편이 박히고 손에 화상을 입어 국립의료원에서 파편제거 수술과 입원치료를 받았다.

한편 본사는 11월1일 순직사원 5명의 영정봉안식을 가졌다. 편집국과 5층 회의실에서 차례로 열린 봉안식은 오재경 사장과 김성열 부사장에 의한 영정제막, 순직사원 약력보고, 순직사원에 대한 추모묵념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봉안된 영정은 장덕준, 백광남, 김위일, 권동현, 이중현 동우로 영정 크기는 가로 19센치 세로 30센치의 사진틀 속에 가로 11센치 세로 17센치 크기의 사진을 넣은 것이다.

(동아일보사사 5권, 동아일보사, 1996)

 

 

이중현(李重鉉) 본사기자(本社記者) 순직

전 대통령(全大統領) 수행(隨行)취재 중 참변(慘變)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서남아(西南亞) 및 대양주(大洋洲) 순방을 수행취재하기 위해 특파됐던 본사 사진부 이중현(李重鉉)기자(34)가 9일「버마」「아웅산」국립묘소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로 순직했다.
이(李) 기자는 한국사진기자단의 신문사진 풀기자로 이번 대통령순방을 취재하기위해 지난 8일 대통령특별기에 동승,「버마」에 특파돼 이날 전(全) 대통령의「아웅산」국립묘소 참배행사를 취재하기위해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미리 묘지에 나가 취재하다 참변을 당했다.
이(李) 기자의 유해는 다른 희생자의 유해와 함께 한국으로 옮겨져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李) 기자의 유족으로는 부인 강민선(姜敏善) 여사와 2녀가 있다.
이(李) 기자는 서라벌예대 사진과를 졸업한 뒤 69년부터 경향 조선 중앙일보 사진부 기자틀 거쳐 본사에 입사, 일해왔다.

(동아일보 1983년 10월 10일자 1면)

 

 

큰 사건(事件)때마다 현장(現場)에… 불타던「취재혼(取材魂)」
버마서 순직(殉職)한 본사(本社) 사진부 이중현(李重鉉) 기자

이리역(裡里驛) 폭발·장성(長省) 탄광 붕괴 보도(報道) 발군
「동아(東亞)갈매기」태평양(太平洋)도 전 컬러 생생히
대학 재학(大學在學)때부터 재능… 69년부터 사진기자(寫眞記者) 출발
풀 기자(記者) 사명감으로 순방전(巡訪前) 렌즈 모두 교환하기도

“대형사건에 임해서도 항상 침착하고 특히 현장에서 후배 사진기자들을 리드할 줄 아는 타고난 사진기자였다”

9일「버마」에서 발생한 폭발참사로 현장에서 사진취재중 순직한 동아일보(東亞日報) 사진부 고(故) 이중현(李重鉉) 기자에 대해 직장의 상사와 동료는 물론 그를 아는 다른 신문사 동료들의 일치된 평가이다.
70년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한 이(李) 기자는 재학시절부터 보도(報道)사진부문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졸업 전인 69년부터 사진기자로 활약했다。 73년 군복무를 마치고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입사한 후로는 10년 동안 갖가지 사진으로 독자에게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안겨줬다. 가장 인상적인 사진은 흑백의 경우 이리역(裡里驛) 폭파현장을 담은「11月 11日의 日記(일기)」. 컬러사진의 경우는 태평양(太平洋)횡단에 나선「동아(東亞)갈매기호(號)」를 헬리콥터로부터 찍은「하늘에서 본다」였다.
77년 11월 11일 발생한 이리역(裡里驛) 폭파현장을 취재한 이(李) 기자는 현장에서 얼마 안 떨어진 장소에서 어른들은 그릇을 들고 배급을 타고 있는데 어린이 두 명이 길가에서 이불을 편 채 얼굴만 내밀고 있는 모습을 찍어 보도함으로써 당시 화약열차 폭파사고의 참상을 극명(克明)하게 알렸었다. 이 사진은 이듬해 2월 한국사진기자단이 주최한 보도사진전에서 은상(銀賞)을 받을 만큼 보도사진의 모든 요소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늘에서 본다」는 동아일보(東亞日報)가 78년 6월 3일 처음 컬러판을 발행할 때 컬러사진 1호로 실릴만큼 멋있는 장면으로 길이 기억되고 있다. 부산항(釜山港)을 떠나 태평양(太平洋) 횡단의 장도에 오르는 동아(東亞)갈매기호(號)의 하얀 모습을 헬리콥터에서 찍은 것으로 푸른바다를 배경으로 황홀할 정도로 색채감이 뛰어난 사진이었다. 이(李) 기자는 이 사진을 표구해 거실벽에 걸어놓을 정도로 아꼈었다.
이밖에도 이(李) 기자는 농아라는 이유로 대학입시에서 낙방한 한 수험생과 어머니의 비통해하는 모습을 찍어 모순된 입시제도를 고발했는가 하면 강원도(江原道) 장성(長省)탄광 갱 속에서 광부 수십명이 사상하는 현장까지 진입, 죽은 동료를 운구하는 광부들의 애절한 모습을 보도해 탄광사고의 비참함을 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또 도괴 직전의 창천시민아파트 날림공사의 현장고발을 하기도 했다.
한편 이(李) 기자는 이번 대통령순방을 수행취재하기 전 카메라 렌즈 등을 모두 신제품으로 교체, 모든 신문에 사진을 공급하는 풀기자로서의 책임을 완수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출국하루 전 다른 동료에게 국가원수의 수행취재가 자주 주어지는 기회가 아닌만큼 10여년 사진기자생활 중 가장 깊이있는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李) 기자의 기록사진 중에는「그 높은 취재혼(取材魂)…」이라는 사진이 있는데 6·25동란을 취재 중 숨진 순직종군기자들의 추념비기공식 장면을 찍은 것. 이 사진의 내용처럼 이(李)기자도 순직 선배기자들을 뒤따라 같은 반열(班列)에 올랐고 그의 취재혼(取材魂)은 민주언론(民主言論)의 창달에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족으로는 부모와 미망인 강민선(姜敏善)씨(35), 그리고 두 자매가 있다. (임연철 기자)

(동아일보 1983년 10월 10일자 5면)

 

취재현장(取材現場)서 진 동아(東亞)의 기자(記者)들
 
이중현(李重鉉) 버마서 공식행사(公式行事) 취재하다 참변(慘變)

이번 폭발사고로 순직한 동아일보 사진부의 고 이중현(李重鉉) 기자는 동아일보사상 취재중 현장에서 순직한 세 번째 기자다.

(…)

한편 이중현(李重鉉) 기자는 이번 전(全) 대통령의 서남아 및 대양주 순방에 한국사진기자단의 풀기자로 수행, 8일 대통령특별기에 함께 탑승해 현지에 특파됐다.
이(李) 기자는 대통령의 공식순방에 따른 각종 공식 비공식 행사 장면을 국내 각 언론기관을 대표해 취재해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 때문에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미리「아웅산」국립묘지에 도착, 주변 모습을 취재한 후 대통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참변을 당한 것이다.
그는 이번 대통령의 순방에 앞서 피격 KAL기 잔해 수색 상황을 취재하기위해 지난달 4일 일본「왓카나이」로 특파돼 현지에서 취재활동을 하고 돌아와 한달도 채 못돼 다시 해외에 특파됐다.

(동아일보 1983년 10월 10일자 5면)

 

 

 

버마 取材現場서 殉職한 故 李重鉉 記者

아웅산 묘소에서 취재중 폭발참사로 순직한 東亞日報 사진부 李重鉉기자(34)는 『평소 대형사건을 취재할때도 핵심이 되는 <현장의 순간〉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고 동료기자들은 타고난 사진기자로서의 그의 재능을 추모하고 있다。보도사진 부문에서의 그의 뛰어난 재능은 최근 그가 취재 보도한 KBS의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 사진과 KAL기 피격사건 사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난 7월 1일 KBS 스튜디오에서 33년 만에 만난 두 남매의 눈물겨운 재회 장면 사진은 국내 신문뿐 아니라 외국신문에까지 보도 되었고 KAL기 잔해수색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지난달 4일 일본 왓까나이에 특파 되었을 때에는 딸을 잃고 비통해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취재 보도해 수만 독자의 가슴을 울렸을 뿐 아니라 소련의 만행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했었다.

그는 최근 南北이 예리하게 대치하고 있는 현장인 板門店을 출입하면서 北愧의 갖가지 對南도발과 만행을 고발, 사진기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도 했다。지난 봄 臨津江을 통한 무장공비침투사건 당시 살해된 무장공비와 그들이 휴대했던 각종 무기와 장비를 낱낱이 공개, 北愧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는데 앞장섰던 그가 異城에서 공산 집단의 만행으로 희생된 젖은 더없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찍부터 報道사진 부문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그는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에 재학중이던 69년에 이미 사진기자로 활약하기 시작, 73년 東亞日報에 입사한 후로는 10년동안 갖가지 사진을 취재 보도하면서 독자와 함께 웃고 울었다。그가 남긴 가장 인상적인 사진으로는 이리역 폭발 현장을 담은 흑백사진「11月 11日의 日記를 꼽을 수 있다。「11月 11曰의 曰記」는 77년 11월 11일 발생한 이리역 폭발 현장 부근에서 어른들은 그릇을 들고 식품 배급을 타고 있는데 어린이 두 명이 길가에 이불을 편 채 얼굴만 내밀고 있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당시. 폭발사고의 참상을 극명하게 표현、보도사진의 모든 요소를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듬해 2월 한국사진기자단이 주최한 보도사진전에서 銀賞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 大統領의 西南亞 및 大洋洲순방길의 풀 記者로 수행하게 된 그는 사진기자 생활 10여년 만에 주어진 드문 기회라며 수백 수천행의 기사보다 더 훌륭한 한 장의 사진을 꼭 찍어 보겠다고 마음 부풀어 있었다. 그했던 그가 이제는 우리 곁에서 떠나갔다.

정부는 그에게 國民動章冬柏章을 추서했고 會社는 그를 部長로 승진시켜 주었지만 끈질긴 기자정신을 지녔던、그리고 앞으로도 언론계에 더 큰 빛을 남길 수 있었던 李重兹 기자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미망인 姜爾善 여사와 어린 두 자매를 남겨둔 채 그는 떠났고 그가 서있던 자리엔 행한 공허함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홍성혁 동아일보 사진·조사담당 부국장, ‘버마 取材現場서 殉職한 故 李重鉉 記者’, 신문과방송, 198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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