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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동아일보 사람들- 이승복

Posted by 신이 On 12월 - 24 - 2018

 

 

이승복(李昇馥, 1895~1978)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 청년학원(靑年學院)에서 수학하였다. 10대 후반에 러시아령 및 북만주로 이주해 1913∼1919년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이상설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1920년에는 러시아령에서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했으며, 신문활자를 운반한 일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당했다. 1921년에는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의 국내 조직을 결성하는 데 일조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홍명희의 추천으로 언론사에 발을 디뎠다. 1924~1925년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지냈다. 이후 신간회 발기인,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역임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민주일보 부사장으로 활동하다 낙향해 한학 연구와 농업에 종사했다. 1980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승복(李昇馥) (서울, ) ▲ 1924. 5 조사부장, 편집국서무계주임, 1925. 3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성명 이승복

한자 李昇馥

성별 남

생년월일 1895-05-18

사망년월일 1978-10-31

본적 충청남도 예산 大述 上項 334

주소 서울 冠岳 堂 142-26

공적정보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공적개요

1913年以後 獨立運動志士 李東寧, 李相卨, 趙琬九, 朴殷植 等과 交友하며 抗日活動을 하여오다 數次에 걸쳐 拘禁되고 新幹會創立發起人으로 活動하며 言論暢達等에 繼續的으로 抗日活動을 한 사실이 확인됨.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국가보훈처)

 

 

성 명 이승복
생몰년도 1895. 5.18 ~ 1978.10.31
출신지 충남 예산
운동계열 신간회
훈격(연도) 애국장 (90)

공적내용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한말 애국지사 이남규(李南珪)의 손자로 형 이민복(李敏馥)과 함께 노령(露領)으로 이주하였다. 그후 1913∼1919년간 노령과 북만주(北滿洲)에서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永)·이시영(李始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1920년에는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하고 신문활자를 노령으로 운반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6개월간 구금당하였다. 동년 7월 블라디보스톡에서 박용만(朴容萬)·이민복·조성환(曺成煥)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지원하기 위해 김병희(金炳僖)와 함께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21년에는 이시영·조완구(趙琬九)·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 연통제(聯通制)의 조직결성을 위해 힘썼다.

1923년 김상옥(金相玉)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의거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동년 7월 홍명희(洪命熹)·홍증식(洪增植)·김 찬(金燦) 등과 함께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1926년 9월에 개최된 사상단체 정우회(正友會)의 집행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선임되었는데 동회는 정우회선언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제휴를 주장하여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인 신간회(新幹會) 결성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1927년 1월 신간회 결성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동년 2월 동회의 지회 결성에도 힘써 1927년 11월 이관용(李灌鎔)·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신간회 예산지회를 주도·조직하였다. 또한 1928년 6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의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27∼1931년 동아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창달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의 진상을 보도하였다는 이유로 안재홍(安在鴻)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남경(南京)·상해(上海)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를 원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독립투사의 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 공훈전자사료관,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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