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욱(李東旭, 1917~2008)은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1941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47년 대학선배인 설산 장덕수 선생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동아일보 편집국 조사부장, 논설위원, 이사, 주필 등을 지냈고, 부사장과 사장을 거쳐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동아일보 회장으로 재직했다. 이후 1994년부터 2001년까지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 남아 동아일보 전시 호외를 발행했던 몇몇 기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피난 갈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결국 피랍돼 압록강까지 끌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해 복간호 제작에 참여했다. 1977년 사장에 취임한 뒤 주간 스포츠동아를 창간하고, 동아방송 지방국과 TV국 설치 허가를 요청하는 등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 애썼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보안사 지하실에 끌려가 동아방송 포기각서에 서명을 강요당하며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이동욱은 냉정한 현실 진단과 앞을 내다보는 경제논설로도 유명했다. 특히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경고한 칼럼은 화제를 모았다. 1983년 동아일보 회장에서 물러난 뒤 정계 산업계 등에서 여러 차례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물리치고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며 여생을 보냈다. 1988년 대만 정부가 주는 국제교류상(International Communication Award)을, 2004년에는 서울언론인클럽이 주는 언론상 한길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미국자본주의론(1948년)이 있다.
이동욱(李東旭) (봉산, 1917~ ) ▲1947. 4 논설위원, 이사, 상임정책위원, 이사주필, 1971.12 퇴사. ▲ 1975. 2 재입사, 주필, 부사장 겸 주필, 사장, 발행인.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이동욱회장 별세 10주년 추모기고… 동아 광고사태의 숨은 이야기
동아일보사 주필·사장·회장을 역임하신 이동욱 회장이 별세하신지 어느덧 10년이 됐다. 오는 4월 2일이 10주기다. 2008년 이 날, 오찬 약속을 앞두고 댁에서 목욕을 하시다가 향년 91세로 편안하게 운명하셨으니 고종명의 복을 누리셨다 할 것이다.
회장은 평생을 서울 세종로 동아일보 한 신문사에서 반세기 가까이 기사와 논설을 써 온 한 길 언론인이셨다.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보면 직선적으로 거리낌 없이 비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열혈 기질이셨다. 소신이 뚜렷하셨다.
팔순을 넘긴 연세에도 칼럼을 쓰실 때는 현장을 찾아가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셨다. 만년에도 NYT 등 외지 몇 개를 개인적으로 정기 구독하셨다고 한다. 본받아야 할 언론인의 사표라 하겠다.
이 회장이 1983년 회장직을 끝으로 회사를 떠나셨을 때까지 그분과 나는 오랜 시간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정계에 몸담았다가 의원직을 그만둔 다음에는 자주 뵙고 장시간 대화를 나누곤 했다. 타계하시기 얼마 전에도 만나뵈었다. 회장께서는 동아일보 재직 중 겪으셨던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셨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10·24 자유언론실천운동 이후 광고탄압이 몰고 온 온갖 어려움을 회고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7년 연장인 일민 김상만(一民 金相万) 회장과 서로 깊이 신뢰하면서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시련을 이겨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비화도 많이 털어놓으셨다. 특히 장감산(張堪山)과 장철수(張徹壽) 형제 이야기는 나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감산은 아호이고 본명은 성수(成壽). 장감산과 장철수는 이복형제. 동생 장철수는 동경제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졸업과 동시에 일제고등문관 외교관시험에 합격한 수재였다. 그것도 수석으로. 한국인으로 동경제대 정치학과 출신이 몇몇 있으나 외교관시험에 합격, 외교관이 된 것은 장철수가 유일했다.
2차 대전 말 일본 외무성 정보국 1급 비밀 취급자였던 장철수는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휴가를 얻어 귀국한 다음 귀임하지 않고 해방을 맞았다. 장철수는 평소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다고한다. 장철수로부터 정보를 들은 고하는 일본이 곧 항복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철수가 수재라면 이복형 감산 성수는 천재로 불렸다. 대구 출생의 감산은 한학과 주역에 통달했고 풍수지리와 역학에도 정통한 대가였다. 박정희가 사부로 모시는 관계였다. 박정희 소장에게 “5월 16일 거사하면 천하는 임자 것이 될 것”이라고 거사 날짜를 잡아주고 거사 성공을 계시해 줄 정도였다고 한다.
장감산은 사회를 멀리하고 경북 어느 산사에서 은둔해 살고 있는 거사였다.가끔 대구나 서울 나들이를 할 뿐이다. 평소 동아일보를 장기구독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아는, 동아일보를 아끼는 애독자의 한 사람이었다.
1975년 초 동아일보사 주주총회를 앞두고 이 회장은 일민으로부터 주필 겸 부사장으로 재입사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 회장은 고사했다. 광고탄압에 따른 경영난을 타개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던 차에 이 회장은 절친한 친구의 소개로 장감산을 상면하게 된다. 장감산은 오헌 이 회장에게 “동아일보는 길이 발전해야 할 민족지”라고 하면서 “광고탄압은 내가 중수를 만나 풀 터이니 오헌은 회사에 재입사하라”고 권고했다는 것이다. 중수(中樹)는 박 대통령의 아호. 장감산은 재입사를 여러 차례 설득하면서 이런말도 했다고 한다. “민족지 동아일보를 죽이면 중수는 민족에 큰 죄를 짓는 것이 된다.” “광고탄압으로 동아일보도 죽을 지경이지만 광고파동으로 국제여론이 아주 나빠져 중수의 고민도 동아일보 못지않다.”
정부는 그해 8월 6일 페루 리마에서 열리는 비동맹국회의에 가입하기 위해 외교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고 북한은 대한민국의 신규 가입을 저지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남 북한외교전이 치열했다. 이런 상황에서 광고탄압이 몰고 온 국제여론 악화는 큰 문제였다.
장감산은 이 같은 사정을 이 회장에게 설명하면서 8월 비동맹국회의가 열리기 이전 7월경에는 광고탄압을 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장감산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광고탄압은 장감산의 말대로 7월 16일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광고탄압을 해제하는 데 누가 박 대통령을 움직였을까? 대체로 세 사람인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75년 5월 21일 청와대 박정희-김영삼 회담에서 신민당 김 총재가 박 대통령에게 문제를 제기했고 김용식(金溶植) 전 외무장관이 개인적으로 문제해결을 건의했다는 설도 있다. 또 정부를 위해 대미로비활동을 했던 김한조(金漢祚) 씨가 ‘동아일보를 풀어주라’는 서한을 박 대통령에게 보내도록 미 의회 친한파 의원들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장감산의 역할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나는 이 회장으로부터 자세한 경위를 듣고서야 비로소 장감산이 은밀하게 기여했음을 알게 되었다.
75년 3월 3일 주필로 재입사한 이 회장은 일부 사원들로부터 ‘관선이사 주필’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안보세미나’ 간사를 맡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세미나는 관변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3월 8일 기구축소와 사원 18명 해임’조치와 관련해서는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고 거센 공격을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경영난에 따른 회사 독자적인 조치였다”면서 권력 개입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결코 이 회장은 권력의 눈치를 살피거나 권력 편에 줄을 서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다. 진정 동아일보를 아꼈고 동아일보의 앞날을 걱정했던 분이셨다고 나는 믿는다. 삼가 이 회장의 명복을 빈다.
(장성원 전 국회의원 · 전 논설위원, 동우회보, 2018년 3월 23일)
梧軒 李東旭(1917~2008)
○1917년 8월 3일 황해도 봉산 출생, 2008년 4월 2일 별세
◇학력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정치경제학부 졸업(41)
◇주요경력 민중신문 주간 겸 편집국장(46) 동아일보 입사(47), 조사부장 겸 논설위원(50), 동아일보 이사 상임 정책위원(65)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술조사센터 자문위원(71), 주필 겸 편집인(69), 사장(77), 회장(81), 금융통화운영위원(비상임)(64) 동아일보 재입사 주필 겸 부사장(75),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99)
◇수상 대만 정부의 국제교류상(88), 삼성언론재단 특별상(97), 올해의 한길상(2004서울언론인클럽)
관직마다하고 언론 외길 살다간 원칙주의자
오헌(梧軒) 이동욱(李東旭) 선생은 동아일보 취재 기자에서부터 시작해 논설위원 주필 사장 회장을 지낸 외길 전문 언론인이었다. 그는 신문사 최고 경영인이면서도 사설을 쓰고 구순을 넘어 작고하기까지 개인 칼럼을 기고하는 언론 활동을 멈추지 않은 평생 언론인이었다.
언론 분야에서도 경제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문제 전문가였다. 그런가 하면 사주철학과 풍수지리에도 일가견을 가진 보기 드문 언론인이었다.
1917년 황해도 봉산(鳳山) 출생으로 1941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고향에서 농업학교 교원을 하면서 책을 읽으며 소일하다 1946년 2월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강행되는 와중에 월남했다. 월남 직후 서울에서 민중신문 주간 겸 편집국장을 잠시 지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4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고향과 대학 선배이자 동아일보 부사장을 지 낸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선생의 주선이 있었다. 사회부, 정경부 기자를 거쳐 1950년 조사부장 겸 논설위원이 됐다.
유신독재 비판 사설로 정부 미움 사 한 때 동아일보 퇴사
1971년 정부의 언론탄압에 의해 중도 퇴사하기까지 논설위원, 주필 겸 편집인을 지내면서 춘추필봉을 휘둘렀다. 1971년 퇴사했다가 1975년 재입사, 주필 겸 부사장을 거쳐 1977년에 사장, 1981년에 회장이 됐다. 사장과 회장을 하면서도 이따금 사설을 썼다. 논설위원 때는 통상 주 5회 꼴로 사설과 횡설수설을 썼다. 유신(維新)정권 시절 독재와 분연히 맞서 싸운 언론인이라는 평을 듣는다.
1971년 12월 6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주필 겸 편집인이었던 그는 동아일보 사설을 통해“카이젤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나치즘 체제를 겨냥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며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것이 유신정권을 자극해 동아일보를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71년 퇴사 경위에 대해 훗날 이병천(李丙天) 전 동아일보 경제부 차장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71년 12월 1일 박정희 대통령 정부의 비상사태선언을 반대하는 사설을 쓴 것이 빌미가 되어 당시 발행인 일민(一民) 김상만(金相万)이 수사당국 지하실에 불려가 철야담판, 나를 퇴사시키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압력을 받았고 결국 내가 책임을 지고 71년 12월 12일 퇴사하게 되었다.”
1974년 말 유신정권이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을 일으켜 어려운 상황을 맞자 동아일보 사주(社主)는 선생에게 복직을 요청했다. 고민 끝에 1975년 주필로 복귀하게 된다. 당시의 재입사 과정과 동아일보의 어려웠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75년 광고탄압 사태가 발생, 동아일보사는 빈사상태였다. 일민이 서울 클럽 등에서 5차례 만나 재입사를 간청했다. 나로서는 청와대를 상대로 담판해서 광고 사태를 풀 자신이 없어서 거듭 고사했다. 끝내는 그 분을 만나는 것조차 기피했다. 그 분이 부평(富平) 구석의 내 집까지 찾아왔다. 당시 심경으로는 동아일보의 장례 치르는 일이나 할 것 같아서 재입사를 하기 싫었다.
그러나 그 때 내 사주를 보니 뜻대로 이루어지는 운세로 나타났다. 내 운세 때문에 동아사태가 풀릴지도 모른다는 일루의 꿈을 가지고 마음을 바꿔 재입사했다.”계속해서 동아사태에 얽힌 비화 가운데 일부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975년 8월 6일 리마 비동맹회의가 시작되기 전인 7월 15일 동아일보의 광고 금지 해제 결정이 났다. 발표 전인 7월 11일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중앙정보부 차장과 일민 간에 철야 마라톤 회담을 했다.‘ 동아일보로 하여금 광고사태 사과성명을 내라’‘주식의 40%를 바쳐라’‘이동욱(편집인 겸 주필 부사장)을 해임하라’고 요구했지만 일민이 거부했고 긴급조치 9호를 준수한다는 각서만 썼다.”기구축소와 사원 해직의 경위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퇴사 기간 동안에 바뀐 사내의 인적 사항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들어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나의 전형을 거쳐 들어온 사람들의 다수 해직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사태를 예상했더라면 절대로 재입사는 하지 않았을 것이며 지금까지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당시 일민으로서는 광고탄압에 대항, 최후의 순간까지 동아일보를 끌고 가자는 장기 지구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장기 지구전을 펴 나가려면 지면축소(8면, 6면), 기구축소, 감원 등을 단행하고 감면된 지면 제작에 직접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기구 과학부, 기획부, 출판부, 심의실 등을 우선 정리해서라도 경비절약으로 어떻게든지 살아남자는 기업적인 생각이 단호했다.
동아일보 사주의 삼고초려 권유로 재입사
내가 보기엔 미국 측이 춘궁기에 대비, 도입한 농산물의 하역작업 지연을 내비치면서 언론자유와 민주화 촉진의 압력수단으로 삼았는데 이는 특히 동아일보 구출이 주목적이라고 짐작했다. 또 그해 8월 리마에서 열리는 비동맹회의에의 한국 가입을 앞두고 한국을 지원하는 우방들의 대한 악감정 무마가 불가피하게 됐고 국제여론 조정을 생각할 때 언론탄압을 더 계속하기 어렵게 되리라고 보았다.
따라서 동아일보 광고사태는 곧 전기가 온다고 보았다. 나는 기구축소 감원 등을 하지 않더라도 광고 탄압을 오래 계속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감원을 반대했다. 내 주장에 대해 일민은 비현실적인 것이라 하여 받아 들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내가 직책상 하수인이 되는 악역을 맡은 꼴이 되고 말았다.”
평생 언론인으로서 독재와 맞서 싸운 분인지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꽤 가혹한 편이었다.“ 그래도 긴급조치를 남발하기 전까지는 경제발전이다, 뭐다, 평가를 받을 만한 일들이 꽤 많았어. 그런데 말이야. 긴급조치 9호 내용을 봐. 권력이 아무리 힘이 있다 해도 그게 할짓인가. 긴급조치 9호 이후의 박정희는 노망 든 권력자로서 추한 모습만 보이다 갔어. 권력자의 못된 짓은 다 빼놓고 좋은 얘기만 써놓으면, 그건 일종의 역사 왜곡이야. 물론 박정희의 훌륭한 점이 많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못 할 짓을 많이 했어. 우리가 이런 것까지 총체적으로 봐야
지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나오는 법이야.”1980년 11월 김상만 회장과 함께 서빙고의 국군보안사령부 지하실로 끌려가 강권에 의해 동아방송 포기각서에 서명했다. 전두환 정권은 동아방송에 대해“야당 성향을 보이고 있다”며 KBS에 강제 통폐합 시킨 것이라고‘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10년 1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신군부는 동아일보 경영진을 소환해“방송국을 내놓지 않으면 동아일보의 존립 자체가 위험하다”며 동아방송 포기각서를 강요했다고 진실 화해위 결정문은 밝혔다. 보안사의 집요한 강요에 김 회장은“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며 거부했다. 보안사 요원들은“동양방송 등 다른 방송사들도 각서를 이미 썼다”“각서를 쓰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는 등 강압과 회유를 거듭했다. 당시 보안사 직원들은 권총을 차고 착검을 하고 있었고 신군부의 방침을 거부할 경우 수사 등 법적 처리를 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이동욱 사장은“성명 불상의 보안사 직원이 포기각서를 작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은근히 이를 거절하면 회사나 나의 신상이 해로울 것이라는 태도를 취했다. 직접적인 폭행을 당한 것이 없다는 것이지 당시의 분위기는 협박적이었다”고 진술했다.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때 보안사에 끌려가 곤욕 치러
당시 동아일보 담당 수사관 홍성경 씨는“나는 김상만 회장과 이동욱 사장을 담당하게 되었다.‘ 두 분은 우리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며 각서 작성을 거부하였다. 이에‘쓰지 않으면 안 된다. 빨리 쓰고 나가시라’고 설득을 했고 각서 작성이 되지 않자 다른 요원이 들어와‘왜 늦느냐’고 다그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다.
홍씨는‘각서 징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아 조그만 방송국 하나를 내놓지 않으면 모체인 동아일보 본지의 존립 자체가 위험하고 두 분의 명예도 치명적으로 손상되는 불이익이 닥칠 것이라는 취지로 얘기했다’며 “강압으로 느끼고 각서를 쓴 것이라 고 생각 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동욱 선생은 타고난 언론인이었다. 월남 후 설산 장덕수에게 취직자리를 부탁했을 때 당초 중앙청 과장 자리가 마련됐지만 벼슬이 싫어서 사양하고 신문사에 들어갔다.
1961년 경제기획원 중앙경제계획위원(비상임), 1965년 한국은행 금융통화운영위원(비상임)을 지내고 1971년 12월 동아일보 퇴사후 1975년 2월 재입사 할 때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술조사센터 자문위원과 안보세미나(상설)간사를 잠깐 지낸 것을 제외하면 외길 언론인이었다.
전국구 2번을 줄 테니 정치를 하라는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의 권유가 있었다. 정계에 진출하라거나 기업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계속 있었지만 다 뿌리쳤다. 한 때는 산업은행 총재직과 경제부총리 영입 제의를 받기도 했다. 선생 생전에 그같은 제의를 왜 받아들이지 않았느냐고 필자가 물었을 때“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내 사주팔자에는 정치나 기업을 할 운을 타고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나. 나에게는 언론이 천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독재정권 시기에는 온 몸으로 권력과 맞서 언론의 자존심을 지켰고, 언론계를 떠난 후 기고 활동을 통해 자신의 뜻을 사회에 알렸다. 그는 작고하기 얼마 전까지도 일간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세미나에 나가 토론에 참가했다. 동아일보와 문화일보, 한국경제 등에 칼럼을 많이 썼다. 경제와 안보, 국제 관계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공부를 많이 했다.
전문가들도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국내 인사뿐만 아니라 국내의 외국인 전문가, 미국 등 외국 전문가들의 방한 때 가능하면 그들과 접촉해 국제 기류를 폭넓게 파악하고 자신의 관점을 정립하는 일에 정진했다. 국내 외 각종 신문과 잡지 등의 구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시력 저하로 신문 글자를 보기
어렵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노안에도 불구, 신문을 보고 공부하는 일을 주요 일과로 삼았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신봉자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공산 치하가 싫어 자유를 찾아 월남한 사실도 그렇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납북됐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경위는 그의 반공주의가 철두철미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동아일보는 27일 오후 수동 인쇄기로 호외 300부를 찍어 배포했다. 9월 28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까지 더 이상 신문을 내지 못했다. 서울이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동안 이동욱 선생은 납북돼 갔다.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북으로 끌려간 것이다.
625 때 북한군에 납북됐다가 구사일생 살아나와
1950년 10월 4일자 속간 동아일보 2면에는 가슴 아픈 사고(社告)가 실렸다.“ 다음 본사 사원의 행방이 불명인바 가족 되시는 분은 즉시 본사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인갑(편집국장), 정균철(영업국장), 이동욱(조사부장), 백운선(사진부장), 김성열, 서정국, 조용근, 변영권, 김준섭 편집국기자….”
이동욱 선생은 서울종로구 누하동 자택에서 납북되어 평안북도 개천까지 끌려갔다. 그러나 국군이 북진할 때 탈출해서 돌아왔다.“ 개천에서 피부병에 걸려 방공호에서 격리돼 지냈다. 9월 하순 어느 날 미군의 폭격기 굉음이 쏟아지자 인민군이 북쪽으로 달아났다. 꿈인가 생시인가 했는데 그 끔직한 피부병이 나도 모르게 나았다”고 회상했다. 2005년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625는 통일전쟁’논문으로 촉발된 격렬한 좌우 이념논쟁 때는 애국시민 모임의 시국선언에 참여해“좌경화가 나라를 망친다”며 당시 우리 사회의 좌경 풍토에 우려와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다음은 동아일보 경제부장과 논설위원, 광고국장, 이사를 지낸 김태선(金泰善) 씨의 이동욱 회장에 대한 추념문.
“평생을 원칙과 신념을 지켜 끝까지 굽히지 않은 언론인이었다. 또한 소탈하기 이를 데 없는 파격의 어른이셨다. 언행이 기이한 분으로 평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그 분이 살아온 삶 자체가 상식을 넘는, 특이하고 남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례를 치르던 날, 장지인 충남 홍성시 선영서 하관할 때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선생의 관을 모셔 놓고서 시신 앉힐 자리를 파던 인부들이 웃어가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었다.(중략) ‘건강 얘기랑 시국문제 국제 정세를 화제 삼다 보면 열 띤 토론이 세 시간을 넘길 때도 있었다. 주로 듣는 편이셨고 동아해직 사태나 광고탄압 비화를 꺼내실 땐 몹시 비분강개해서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 치시면서 개탄하곤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2007년 5월까지 이른바‘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로부터 몇 차례나 출두 요구를 받고 고민하시던 끝에 출석하여 사건 내용을 당당하게 밝히겠노라고 하셨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가 뻔 한 이상 진실이 밝혀지기 보다는 자칫 동아일보가 왜곡, 이용당하지 않을까 걱정 하셨다.
기자 해직 사태란 당시 인쇄 공장 점거와 신문발행 좌절에 따른 불가
피한 인사 진통이었으며, 진정한 언론 자유와는 무관한 일이었고 광고사태가 풀린 것도 국제 여론의 악화와 정부의 난처한 입장 때문에 그들 스스로 철회한 것일 뿐 정부와 협상은 없었다고 했다. 어려운 시기에 두 차례나 주필을 역임하셨고 사장 회장을 맡아 동아의 언론 자유를 위해 헌신한 분이라는 건 다 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동아일보를 비롯해서 신문들이 탄핵 안 찬반양론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에 격분해서 장문의 신문 비판기사를 월간 한국논단에 기고한 것만 봐도 선생의 강직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평생 외로운 길을 걸으시면서, 머뭇거리지 않으셨다. 그 분이라고 왜 내적 갈등이나 좌절이 없었겠는가. 인간적 고뇌와 회의가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일생을 같은 걸음으로, 언론 자유의 멍에를 지고 외길을 일관되게 걸으셨다. 이 시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언론의 사표다.”
다음은 김용삼 편집장의 2008년 5월호‘월간조선’에 게재된 ‘이동욱 전 동아일보 회장과의 마지막 만찬’이란 제목의 기사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선생은 광복 후 좌익이 판을 칠 때부터 일관되게‘시장경제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햐, 이런 무식한 것들… 공부를 해, 공부를’하며 자극을 주었다. 최근 읽은 외신 기사 중 귀감이 될 만한 내용들을 직접 복사해서 주었다. 선생은 작고하기 하루 전 식사 후 음식점 종업원에게‘4월 9일 총선날 말이야. 그날 점심에 다섯 자리 비워 두라고. 동아일보 경제부 후배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어’하고 예약을 했다. 선생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돌아 가셨다.”
구순을 넘은 나이에 별세했으니 수를 누리고 가신 셈이다. 그러나 망백은 거뜬하리라 생각하던 차에 어느 날 갑자기 가셨다. 작고하기 전날까지만 해도 서울시내에 나가 지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다 귀가했다. 자택이 있는 서울 압구정동의 지하철 역과 저녁 식사 장소인 인사동 근처 종각역을 지하철로 오갈만큼 건강하셨다. 그리고 불과 하룻밤 지난 아침에 아파트 욕실에서 반신욕 하는 자세로 가셨으니 망백에 이르지는 못했어도‘구구 팔팔’하신 셈이다.
작고 전날까지 지하철로 외출, 지인과 식사하고 담소
평소 나들이 교통은 늘 지하철을 이용하셨다. 그뿐 아니라 걷기 운동삼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대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돌아가시기 수년 전까지만 해도 청계산을 자주 오르내리셨다. 장수 비결은 타고난 체질에다가 건강 섭생에 철저했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술과 담배는 안 하셨다.
“걷기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잘 먹는 것이야. 음식은 가리지 말고 먹어야 해. 그런데 내 체질이 소양이거든. 한의사들이 쇠고기 닭고기 개고기를 먹지 말래”돼지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해서 돼지고기와 생선을 즐겨 먹고 야채와 과일을 많이 드셨다. 연세가 일흔을 넘기면서 음식 양을 서서히 줄이기 시작, 한창 때에 비해 반이 채 안 되는 양을 드셨다.
“날콩이 아주 좋아. 식초를 탄 물에 콩을 7시간 정도 담갔다가 하루에 백 알 정도 먹지. 김과 함께 먹어. 일본인들이 낫토를 먹을 때 김과 함께 먹거든. 장 안에서 발효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야.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야.”
또하나의건강비결은노래부르기와잠잘자기.“ 요즘유행하는노래는 가사가 어려워 못 불러. 어린 시절 배워 익힌 동요를 주로 부르지. 윤석중의‘낮에 나온 반달’‘고추 먹고 맴맴’등을 부르고 어쩌다 신명이 나면‘황성 옛터’도 불러. 피로하면 바로 자. 하루에 적어도 6시간은 숙면하거든.”
참고문헌 : 대한언론인회 발행‘대한언론 1995년 7월 1일자 제112호 4쪽’ 동우회 발행‘동우회보’2006년 5월 6일자 창간호 4쪽‘2008년 6월 25일자 제9호 10쪽’‘월간조선’(2008년 5월호)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1월 발표‘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진상 조사결과 결정문’ ‘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월간‘신동아’(2009년 11월호)
(최희조 전 동아일보 경제부장, ‘梧軒 李東旭’,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2010)
梧軒 李東旭 선생을 기리며 … 원칙,신념 끝까지 지킨 언론 師表
강직·소탈… 파격적 言行으로 평판
의례적인 추모의 글이 아니라 서양신문들이 항용 싣는 Obituary(사망기사)란을 통해 접하고 싶었던 분이다. 그 분이 살아온 생애와 이룩해 놓은 업적이랄까 성취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활자화된 신문지면에서 꼭 읽고 싶었던 그런 분이셨다.
오헌 이동욱 회장께서는 평생을 원칙과 신념을 지켜 끝까지 굽히지 않은 언론인이셨고 또한 소탈하기 이를 데 없는 파격의 어른이셨다. 언행이 기이한 분으로 평하는 이도 없지 않지만 그 분이 살아온 삶 자체가 상식을 넘는, 특이하고 남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례를 치르던 날, 장지인 충남 홍성시 선영서 하관할 때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선생의 관을 모셔놓고서 시신 앉힐 자리를 파던 인부들이 웃어가며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전엔 가끔 오셔서 용돈도 주고 하셨는데 이젠 글렀다면서 아쉬워했다. 부인과 따님을 차례로 여의고 이곳에 묘소를 마련한 연유도 있지만 실은 고인이 이 곳을 자주 찾아와 자기 누울 자리까지 일러놓고 인부들과도 친숙하게 지낸 사이 같았다. 상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관예배를 집례하는 목사나 교인들도 이 같은 인부들의 예의를 벗어난 언행을 전혀 개의치 않는, 뭐랄까 따뜻하고 묘한 분위기에 휩싸인 듯 했다.
경제부출신 몇이서 회장님 모시고 한 달에 한 번꼴로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나누었다. 건강얘기랑 시국문제 국제정세를 화제 삼다 보면 열 띤 토론이 세시간을 넘길 때도 있었다. 주로 듣는 편이셨고 동아해직사태나 광고탄압 비화를 꺼내실 땐 몹시 비분강개해서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치시면서 개탄하곤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 5월까지 이른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몇차례나 출두요구를 받고 고민하시던 끝에 출석하여 사건내용을 당당하게 밝히겠노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가 뻔한 이상 진실이 밝혀지기 보다는 자칫 동아일보가 왜곡, 이용당하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기자해직사태란 당시 인쇄공장점거와 신문발행좌절에 따른 불가피한 인사진통이었으며, 진정한 언론자유와는 무관한 일이었고 광고사태가 풀린 것도 국제여론의 악화와 정부의 난처한 입장 때문에 그들 스스로 철회한 것일뿐 정부와 협상은 없었다고 했다.
어려운 시기에 두 차례나 주필을 역임하셨고 사장 회장을 맡아 동아의 언론자유를 위해 헌신한 분이라는 건 다 안다. 2004년 노무현대통령 탄핵때 동아일보를 비롯해서 신문들이 탄핵안 찬반양론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에 격분해서 장문의 신문비판기사를 월간 한국논단에 기고한 것만 봐도 선생의 강직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평생 외로운 길을 걸으시면서, 머뭇거리지 않으셨다. 그분이라고 왜 내적갈등이나 좌절이 없었겠는가. 인간적 고뇌와 회의가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일생을 같은 걸음으로, 언론자유의 멍에를 지고 외길을 일관되게 걸으셨다. 이 시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언론의 사표다.
그분을 알고 있다는 것, 그 분을 자랑한다는 것 자체가 흐뭇할 뿐이다.
(김태선 전 동아일보 이사, ‘梧軒 李東旭 선생을 기리며’, 동우회보, 2008년 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