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수(李東洙, 1923~2007)는 강원도 통천 출신으로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1946년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 동아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동아방송 국장, 이사, 상무이사를 거쳐 1991년부터 2007년 6월까지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입사 3년차 기자 때인 1948년 4월 19일 평양 남북협상회의에 김구(金九)선생을 동행, 취재 보도했다. 2002년 동아일보 퇴직사원 모임인 ‘동우회’ 결성에 앞장섰고 초대 회장을 맡아 모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양궁협회 부회장, 대한 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하는 등 체육계에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체육훈장 백마장(1984), 기린장(1992), 국민훈장 모란장(1999) 수상.
이동수(李東洙) (서울, 1923~ ) ▲ 1953. 9 기자, 취재2부차장, 취재3부장, 조사부장, 사회부장, 문화부장, 지방부장, 체육부장, 부국장대우(방송뉴스․사회․지방부 담당), 부국장(방송뉴스부․방송시사해설 담당), 수석해설위원, 방송국장, 이사(회장실 근무)(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夢桃 李東洙(1923~2007)
○1923년 4월 11일 강원도 통천 출생, 2007년 7월 24일 별세
◇학력 연희전문 문과, 연세대 정치외교과 2년 편입, 명예졸업(48)
◇주요경력 조선일보 기자(46) 동아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 부국장, 수석해설위원(53~71) 동아방송 국장, 상임위원(74~79) 동아일보 이사, 상
무(81) 동아문화센터 대표(81) 대한체육회 이사(83~97) 금강장학회 이사(80)
동우들이 추모비를 세우다
2009년 5월 24일 오전 11시 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소재 마석 모란공원 묘원에서 1천여 東友(동아일보 사우회 회원)들의 성금으로 제작된 夢桃李東洙선생 묘비 제막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고인과 평소 가깝게 지냈던 친구를 포함해 박경석 회장 등 동우회 관계자 그리고 고인의 가족 등 1백여 명이 참석하여 고인을 추모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은 고인이 훌륭한 일생을 산 성공한 삶이었다는데 모두가 동의 했다. 몽도 선생의 일생은 추모비에서 간략하나 빠짐없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언론인, 체육인 그리고 사회봉사인으로서 값진 삶을 산 몽도(夢桃) 이동수(李東洙, 1923년 4월 11일~2007년 7월 24일) 東友께서 여기 영면하고 계시다. 몽도 선생은 강원도 통천에서 아버지 이종우(교육부장관, 고려대총장 역임), 어머니 전연부의 장남으로 출생, 연희 전문을 수학하고 1946년 조선일보를 거쳐 53년 이후 전 생애를 동아일보와 함께 하셨다.
몽도 선생은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 金九를 동행, 취재 보도한 것을 비롯하여 일생을 통해 언론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셨다.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동아방송 국장, 상무이사를 그리고 1991년부터 18년간 동아일보의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셨다. 특히 사우회인 東友會를 동아일보 창간 81주년인 2001년 창립,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시어 동우들의 친목과 권익 증진을 위한 제도적 초석을 마련 하셨다.몽도 선생은 연희전문시절 축구선수로 延高戰은 물론 45년 11월 자유해방경축 전국대회에 골키퍼로 출전한 영원한 스포츠맨으로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양궁협회 부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하시며 한국 스포츠 수준을 높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특히 양궁협회 부회장 재임중 제32회 세계양궁대회에 한국선수단을 인솔하여 우승한 것을 비롯, 세 차례나 세계대회에 한국선수단장을 맡아 국위 선양에 이바지 하셨다. 이러한 공로로 체육훈장 백마장(1984), 기린장(1992), 국민훈장 모란장(1999)을 수상 하셨다.
몽도 선생은 후학 육성과 사회봉사에도 커다란 자취를 남기셨다. 아산장학회, 금강장학회 이사 그리고 동아꿈나무재단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후학 육성에 정성을 다하셨고 국제 라이온스 354A지구 부총재를 역임하시는 등 라이온스를 통해 수많은 곳에 사랑을 베푸셨다. 몽도 선생은 당신의 아호처럼 이상향 武陵桃源을 이 세상에 펼치고자 하는 꿈을 갖고 계셨다. 때문에 일생을 통해 사랑과 배려 그리고 봉사에 나섰지만 자랑하거나 알리지 않으셨다.
한편 가정에서의 몽도 선생은 자상한 남편, 훌륭한 아버지이셨다. 여기 합장한 사모님과는 한결같은 부부애로 해로 하셨고 슬하의 4남 1녀 모두 훌륭하게 나라의 일꾼으로 키우셨다. 한마디로 성공한 생애이셨다.
이에 동우들의 뜻을 모아 이동수 동우의 아름다운 생애를 이 추모비에 담는다. 몽도 선생이 일생동안 베푸신 사랑은 특히 동우들의 가슴에 영원히 함께 하리라. 2009년 5월 24일 이병대가 글을 짓고 동우회가 비를 세우다”
추모비 제막식을 가진 며칠 후 이동수 선생의 큰아들 상완 씨가 5천만 원을 동우회에 발전기금으로 기탁했다. 큰 아들 상완 씨는“선친이 동우회를 위해 애쓰신 뜻을 받들어 발전기금을 드린다”고 밝혔다. 동우회는 이사회를 열어 이 발전기금을 기금으로 한 이동수 선생의 아호 夢桃를 딴‘몽도상’을 제정, 해마다 동우회 연말 총회 때 동우회 발전에 기여한 사우들에게 시상하기로 결정, 2009년부터 몽도상 시상을 하고 있다.
남북협상회의 취재
이동수 선생은 해방되던 1945년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 한다. 재학 중이던 1946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평생을 함께 한 언론계에 몸을 담았다. 해방 당시 인재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재학 중에 산업현장으로 나갔었다. 입사 2년차 해인 1948년 4월 19일 몽도 선생은 金九일행을 따라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를 취재 보도 한다.
1948년 4월 29일 조선일보 1면 톱기사로 처리된 남북협상회의 보도는 [평양에서 李東洙특파원 발] 로 역사적 정치현장을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남긴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거한 남북통일 정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 조선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회의가 지난 19일 오전 10시부터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개회되어 23일에 폐회되었는데 그간의 회의 경과를 회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즉 회의 초일 19일에는 46개 정당 사회단체와 545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金月松씨의 개회선언, 애국가 주악이 있은 후 김일성, 김두봉, 허헌, 박헌영, 최용건, 김달현 제씨를 비롯하여 28명의 주석단을 선거하고 이어 김일성 씨의 사회로 회의는 진행되었다…’남북협상회의는 소련공산당의 각본에 따라 김일성이 김구 등 남쪽인사를 농락한 사기극 무대였다. 그 과정을 보면 좌우대립으로 어지러웠던 해방 정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남한 단독총선거를 결의하자‘하지’장군은 1948년 5월 10일을 선거일로 결정 한다. 이른바 510 총선이 결정되자 각 정파간 대립 갈등은 고조 된다.
김구와 김규식은 단독 정부 저지 및 총선 반대를 위한 남북협상회의를 추진하게 된다.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명의로 1948년 2월 6일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협상회의 개최를 요청하는 서한을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보낸다. 그러나 북한은 두 金씨가 보낸 서한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은 채 4월 14일 평양에서 남한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 단체와의 연석회의를 갖자고 평양방송과 서신으로 알려왔으나 날짜는 다시 19일로 연기 된다. 김구와 김규식은 각기 다른 날 평양으로 떠났는데 몽도 선생은 김구와 동행 한다.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은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4.19~26)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4.27~30) ▲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4金회담(5.3)순으로 진행 됐다.
김구 일행은 발언다운 발언을 한 번 하지 못한 가운데 연석회의에서 미소양군의 즉각 철수와 단독 정부 반대 격문이 채택되고 만다.
4金회담에서도 김구 등은 북측이 남한에 전력공급을 계속하고 연백수리조합 개방 그리고 조만식의 월남 허용 등을 요구하여 앞의 두가지는 합의하고 조만식 월남 문제만 해결하지 못했으나 김일성은 그 후 합의한 약속들을 전혀 지키지 않고 폐기해 버린다.
남한에 대해 계속하여 단일 정부 구성을 위한 남북협상을 갖자고 한 북한은 남북협상 회의 때 이미 북한 단독으로 단일 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 초안 제정을 서두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속임수 협상에 나섰던 것이다. 소련 붕괴 후 해체된 소련 비밀문서에 따르면 남북협상회의도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소련 정치국은 남북협상 때 다음 세 가지 사항을 다루도록 결의 한다.
즉 ▲조선 인민 참여 없이 채택된 유엔 총회 결의를 규탄하고 한국문제 임시위원회의 즉각 철수 ▲한반도에서 외국군대 철수 ▲남북한 동시 선거.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는 김구 등이 김일성 등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회의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올챙이 기자 때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 현장인 남북협상회의에 몽도 선생이 취재에 나선 것은 언론사에 남는 행운의 기회였다.
2차 대전 격전지를 찾다
몽도 선생은 1953년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옮겨 나머지 전 생애를 동아일보와 함께 한다. 동아일보 입사 후 기자,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 부국장, 수석해설위원, 동아방송 국장, 동아일보 이사, 상무, 꿈나무재단 이사장, 동우회장 등 신병으로 몇 달간 쉰 것을 빼고는 동아일보와 함께 하였다.
몽도 선생은 1961년 말부터 거의 6개월에 걸친 남태평양 취재에 나서 보도한 대하 르포르따쥬는 동아일보史에 커다란 족적으로 남아있다.
몽도 선생은 1961년 11월 27일 서울을 출발해 호놀룰루, 타이티, 시드니, 라바울, 웨이크, 비악, 마닐라, 괌, 사이판, 오키나와 등 2차 대전 당시 치열했던 옛 전쟁터를 취재, 그해 12월 9일부터 1962년 3월 17일까지 31회에 걸쳐 1면 옆 4단 박스 기사로 보도 한다.
당시는 해외 취재가 거의 불가능하던 시절 이다. 여권 발급부터가 쉽지 않았고 외화 조달과 운송수단 등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몽도 선생은 선박과 비행기를 바꿔 타면서 거의 6개월 가까이 태평양 전쟁터에서 전쟁 후의 이야기를 전했다.
12월 9일자 첫 회‘진주만을 잊지 말자’제하의 기사 일부를 옮겨보면 ‘포트 아일랜드’국기게양대는 20년 전 그날의 비극을 상기하듯 성조기만이 펄럭인다. 20년 후 오늘에 와서 그날의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고 하지만 공격 받았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지금도 그대로 있는‘아리조나호’와‘유타’호 등 녹슨 잔해는 그날의 비극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태평양은 살아있다’는 31회에 걸쳐 보도 된다. 몽도의 기사 내용들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현지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시드니 주말이라는 제하의 글에서‘놀기 위해 사는 듯, 이틀치 찬거리도 미리 사놔야, 일요일 안쉬면 벌금도’라는 소제목들을 뽑아 놓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비슷한 생활환경이 60년대 이미 호주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몽도 선생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지상천국‘시드니’항 편에서는‘65세만 넘으면 연금, 강도사건이란 꿈같은 얘기, 화제 없어 신문들 골치’라는 글로 살기 좋은‘시드니’를 표현하고 있다. 1962년 3월 17일 토요일 마지막 31회째‘비아크’섬 편에서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비아크’섬에는 최근 또 다시 암운이 떠도는 무거운 분위기다. 그것은 ‘인도네시아’와의 긴장 상태에서 비롯된다. 종족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또 다시 전쟁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자는 ‘비아크’를 뒤로 귀국길에 올랐다.”
몽도 선생이 태평양의 2차 대전 전적지를 방문한지 약 20년 뒤쯤에서야 우리나라 언론계는 봇물 터지듯 해외 취재에 불이 붙기 시작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해외 취재는 정말 어려웠다. 몽도 선생의 태평양 전적지 방문은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기 기획물인 동시에 본격적인 해외 취재의 효시적 성격을 띤 르포르따쥬였다.
마음 아파했던 동아사태
몽도 선생은 동아일보 재직 시 마음 아픈 잊을 수 없는 사태를 겪는다. 1974년 동아일보 일부 기자들이 노조 창립을 신청하고 정부에서 이를 계속해 반려하자 신문, 방송, 잡지의 외부 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거부, 언론인 불법 연행 거부 등을 골자로 한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한국 언론사에 빛나는 자유언론의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시기였다.
정부는 이에 맞서 광고 탄압에 나서는데 1974년 12월말부터 광고란이 백지로 신문이 발간되는 이른바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가 벌어진다.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을 위한 농성에 들어간다.
뜻있는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격려 광고를 게재한다. 1974년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동아일보에 실린 격려 광고가 하루 평균 350건 꼴로 모두 합하면 5만 건에 달한다. 격려 광고를 낸 주체는 주부, 학생, 회사원, 품팔이 노동자, 농민, 교사, 교수, 신부, 목사, 문인, 언론인 등 다양하다. 학생회, 동창회, 교회 모임, 동문 모임, 교사 모임, 유학생 모임 등 단체 또는 모임 이름도 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줄을 이었다.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 등지에 거주하는 일부 한인들도 외신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하고 자유언론을 위한 격려에 동참 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한국 정부의 언론 탄압에 항의하고 탄압에 항거하는 동아일보를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언론인과 학자 등 일본 지식인이 결성한‘동아일보를 지원하는 모임’은 광고 탄압을 알리는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모금활동을 펼쳤다.
일부 기자, PD 등은 편집국에서 농성을 계속 했다. 동아일보사는 이 과정에서 기자와 PD 등 102명을 해임 했다. 당시 몽도 선생은 동아방송 국장직에 있었다. 때문에 방송국의 기자, PD의 해임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아 투위 인사들은 몽도 선생의 해임을 끈질기게 요구 했다. 당시 몽도 선생의 직위는 분명 동아방송 국장에 있었으나 해임이라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는가 하는 반문은 가능하다. 몽도 선생은 국장 재임 중 그 같은 일이 발생한데 대하여 언제나 마음아파했다.
몽도 선생은‘해임 사태’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때면“어떻게 내가 그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어”하고 안타까워했다. 동아일보의 인사 관행을 다소나마 이해한다면 몽도 선생의 안타까움은 납득이 간다.
몽도 선생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결정으로 피해를 볼 당사자를 배려하고 심지어 보상을 해야 마음이 편한 성격이었고 나는 그런 현장을 여러 번 목격 했었다. 몽도 선생이 해임 문제와 관련해 늘 괴로워했다. 그리고 해직자들을 이해하면서도 억울해 했다. 어느 의미에서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빚어진 오해이고 아픔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아픔이었다.
동우회를 만들다
동아일보 출신 사우들은 창간 이후 부서별 또는 국별로 각종 모임들은 있었으나 전체 사우들을 집결하는 규모의 모임은 없었다. 林學洙사우가 주관하는 전체모임 형식의 연말파티는 십 수 년 간 있었지만 제도화 내지 조직화까지 되지 못한 비공식 회합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1920년에 창간된 동아일보에 사우회가 없었고 따라서 퇴직 사우들에게는 아무런 구심점이 없었다. 특히 김대중 정권시절 보수언론들이 크게 시련을 겪고 사주들이 구속되는 언론사상 미증유의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동아일보가 그 중심에 있었다.
동아일보 사주가 구속 되었으나 탄원을 할 인적 네트워크가 없었다. 다른 보수 언론사의 경우 사우회에서 연명으로 재판부에 석방 탄원을 했으나 동아일보는 그렇게 할 사우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1980년 12월 어느 날 이동수, 임학수, 김광희, 조광식, 이병대 등이 점심을 함께 하면서 사우회를 창립 하자는데 자연스럽게 의견을 같이 했다.
실무적인 준비는 이병대가 맡아 1년 간의 준비 끝에 2001년 12월 4백여 명의 동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열어 몽도 선생을 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 하였다.
몽도 선생은 동우회의 인적기반을 넓히고 재정적 토대를 공고히 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형편이 괜찮은 동우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찬조를 부탁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식사에 초대하여 기금의 필요성을 간곡히 설명한 결과 창립 첫해에 3천여만 원의 운영자금과 5천만 원의 정기예금을 하게 된다. 특히 1천여 회우들의 주소 확인에 나서 7백여 사우들의 명부를 작성하여 회우간의 안부를 나눌 수 있게 되고 현재 5백여 사우들이 회비를 납부하는 등 동우회를 반석에 올려놓는다.
또한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 2층에 동우회 사무실 50여 평을 마련 한다. 사우회 창설에 따라 동우회는 그전까지 불가능했던 사우들의 경조사를 직접 챙길 수 있게 되고 구심점이 되어 사우들의 관심사들을 일관성 있게 다루게 됐다.
항상 남을 배려하는 인품
이동수 선생은 항상 남을 배려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仁), 아끼고 사랑하며 함께 하는(德), 아름다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동우회 일을 보면서“일을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면“반대하는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돼”라든가 “이 일은 특정 아무개가 싫어할 수있으니 분명히 물어보고 불평 없도록 해야 해”라고 관계자들에게 일렀다. 동우회 일과 관련하여 식사 등 회합에서 필요한 경비는 언제나 몽도 선생이 부담하는 솔선수범을 보였다.
이사들과의 숱한 모임과 찬조를 권유하기 위해 호텔 등지에서의 식사는 항상 몽도 선생이 앞장서 즐겁게 지불하곤 했다. 몽도 선생은 남에 대한 배려가 깊었으나 대단히 성질이 급했다. 후배들을 만나면‘이봐’하고 퉁명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나 그 말속에서는 따뜻한 기운이 항상 촉촉이 배어 있었다.
특히 선배들을 잘 모셨다. 말년에 이동욱 전 동아일보 회장과 모임이 있을 때면 모시러 언제나 압구정 집으로 갔고 좋은 음식을 먹을 기회가 생기면 단골로 초청하곤 했다. 대화도 최대 경어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렸고 무슨 말을 하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는 걸 동우회 관계로 자주 옆에 있었던 나는 목격 했었다.
몽도 선생은 대학시절(연희전문) 축구선수로서 활약하는 등 스포츠를 대단히 좋아 했다. 기자시절부터 각종 스포츠 단체에 참여, 한국 스포츠 발전에 초석을 놓았고 특히 축구 구경을 좋아 했다. 그 한 예로 한일월드컵 축구때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전 경기 표를 사전 구입해 두었다가 구경 했는데 일본에서 열리는 경기 참관을 위해 10개 월 전에 비행기 표와 숙박 호텔 예약을 하기도 했었다.
또한 여행을 좋아하여 기회가 닿으면 떠났다. 몽도 선생의 직접 死因인 폐기능 저하도 2003년 가을 일본 알프스 단풍구경에 나섰다가 2천m 중턱에서 쓰러져 끝내 이로 인해 숨졌다.
몽도 선생은 패션에 신경을 썼고 음식 맛을 찾아다니는 멋을 아는 신사였다. 몽도 선생과 만나 식사 때가 되면 “어디 갈까”하고 묻지 않고 “어느 음식점에 가자”고 앞장을 섰다. 상대를 배려하여 이른바‘좋고 비싼’음식점을 찾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호텔 화식 집 또는 양식당, 중국음식점을 주로 찾았는데 큰 호텔의 VIP카드가 대여섯 장씩이나 됐다. 그리고 식단은 거의 영양이 많은 코스로 택하곤 했다.
몽도 선생은 젊었을 때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하지만 만년에는 한 두잔 정도 입에 대었으나 좌석의 다른 사람들이 술을 마시게 하기 위해 마시는 시늉만 했다. 몽도 선생의 멋은 알아줬다. 항상 단정하게 계절에 맞게 옷 컬러와 넥타이를 골랐다. 매너는 그야말로 흔히 말하는‘영국 신사’였다.
몽도 선생의 젊었던 때 여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직도 회자되는 메뉴의 하나다. 사모님이 초등학교 담임을 하고 있을 때인 어느 날 점심을 하고 동아일보사 부근을 지날 때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인사를 드리자 몽도 선생은 술집 여자로 착각 했다. 인사를 받고 엉덩이를 손으로 두드리면서‘그래 큰놈 하나 물었어’라는 말을 웃으며 건네고 회사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사모님이 크게 역정을 냈다. 사모님 반 학생 어머님을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전에 한 번 그 어머님이 집에 놀러와 본 일이 있는데 그날 술집여자로 착각해서 빚어진 실수였던 것이다.
몽도 선생은 선릉역 부근에 4층 건물을 갖고 있었다. 맨 위층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친구들이 늘상 찾아와 사랑방 구실을 했다. 집필도 하고 친구들과 담소도 하면서 재미있게 하루를 보냈다. 사무실에는 주로 동아일보의 최호 이혜복 권오철 박정하씨 등이 찾는 등 많은 언론계 인사들이 왕래 했다.
몽도 선생은 자제들을 훌륭하게 키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일본 알프스에서 쓰러진 후 병원과 집을 오가는 환자 생활을 오랫동안 했는데 경제적 여유가 없어 의료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면 훨씬 일찍 他界했을 것으로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몽도 선생은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신경을 쓰면서 성실하게 인생을 살았다.
(이 병 대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夢桃 李東洙’,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2010)
李東洙초대 동우회장 別世
언론인이며 체육인인 몽도(夢桃) 이동수 전 동우회 초대회장이 지난 7월 2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은 강원도 통천 출신으로 연희전문을 나와 1946년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 동아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동아방송 국장, 이사, 상무이사를 거쳐 1991년부터 2007년 6월까지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특히 고인은 2002년 동이일보 퇴직사원 모임인 동우회 결성에 앞장섰고 초대 회장을 맡아 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고인은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양궁협회 부회장, 대한 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하는 등 체육계에도 많은 공적을 남겼고 아산 장학회, 금강장학회 이사, 국제라이온스협회 354A지구 부총재를 맡아 남 다른 사회봉사 활동도 펼쳤다.
故李東洙회장을 추모함
고 별 사
지난봄 포항제철빌딩에서 이회장과 오찬을 함께한 후 전화통화한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타계하셨다는 급보를 접하고 보니 가슴이 콱 막힙니다. 이제는 이회장과 말을 나눌 수도 또 손을 맞잡을 수도 없게 됐군요.
제가 이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벌써 68년전 까마득한 옛일이 됐습니다. 정부 수립후 첫 개천절행사가 있던 1949년 10월 3일,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까지 취재하러 갔던 때지요.
그때 이회장은 조선일보, 저는 자유신문에 일선기자로 뛰고 있을 때가 아닙니까. 초면이었지만 저는 그때부터 남달리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회장의 취재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강원도 통천, 38이북에 고향을 두고 온 이회장이기에 누구보다도 분단의 벽이 허물어지기를 갈망하던 이회장의 심정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선생일행이 남북 협상차 평양에 갔을 때 이회장이 동행 취재 했고 그해 5월 5일 김구 선생이 서울로 돌아 올 때 까지 이회장은 밀착취재를 했지요. 그때 협상의 성공을 얼마나 염원하셨겠어요. 그러나 협상은 실패했고 김구선생이 귀로에 올라 38선에 이르자 이회장은 뜀박질쳐 서울로 오지 않았습니까.
남북협상의 그간의 경과를 보다 빨리 보도 하려던 것이지요. 철저한 취재, 신속한 보도를 생명으로 삼는 언론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회장은 항상 남보다 한발 앞서 달렸습니다.
한 가지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동아 사회부장직을 맡고 있을 때 이회장은 미일전쟁 전적지 순회보도를 위해 단신, 자진해서 남태평양상의 외딴섬들(뉴기니아,타라와 등) 한달이상 순방하셨지요.
지금과 달라 그때는 항공편도, 숙박시설도 제대로 안돼있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어김없이 장문의 기사를 본사로 보내왔고 제가 직접정리 할 틈이 없을때 데스크를 보조하던 고 오상원(소설가)씨가 손봐 사회면에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62년가을? 아니면 63년 봄쯤 이던가요. 근 반세기전 일이니 누가 기억하겠습니까. 그 당시의 동아지면을 다시 뒤져보면 살아 숨쉬는 이회장의 현지르포에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회장은 50년대에 동아에 입사하셨고 저는 62년에 사회부장직을 맡아 입사 했을 때 스포츠기사는 사회부 몫이었지요. 체육부로 독립하면서 이회장이 체육부장을 맡으신 뜻을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체육부 데스크를 맡으시면서 이회장은 ‘한국체육’의 발전을 위한 집념어린 노력을 펼치시기 시작했다고 믿습니다.
그후 이회장은 동아에서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치시면서 동아 발전의 기둥역할을 하시는 동안 한국스포츠의 위상을 높이는데 또한 헌신적 노력을 계속하셨지요.
체육회 이사로, KOC 상임위원으로, 양궁협회 부회장으로 그 분야에서 다각적 활동을 펴시는 동안, 특히 ‘한국의 양궁’이 세계정상을 차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마땅히 이러한 이 회장의 활동은 한국체육사에 길이 기록될 것입니다.
한편 이 회장은 동아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동아꿈나무 이사장으로 후진양성에 앞장서셨고, 전직 동아사원들의 모임인 동우회를 결성, 초대 회장으로 전직 사원들을 위한 튼튼한 보금자리도 마련해주셨습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동아시절 같은 부장급으로 지면제작에 함께 땀 흘렸던 옛동료들을 위해 선릉역 부근 동아빌딩 4층 이회장 집무실을 활짝 열어 맘 편히 담소할 수 있는 모임터를 마련해 주신 일입니다. 공사간 바쁜 틈을 내서 한달에 꼭 한번은 어김없이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도록 일일이 전화를 거시던 정다운 추억이 새롭습니다.
최치근 임순묵 권오철 최호 이회장 그리고 저까지 6명이 그 멤버였으나 이제 저 홀로 남았으니 가슴이 막힐 뿐입니다.
이회장! 더는 붙들 수가 없군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저희들 곁을 떠나셔야 됩니다. 부디 고이 고이 잠드시오소서.
(이혜복 전 편집국부국장, ‘故 李東洙 회장을 추모함’, 동우회보 제6호, 2007년 9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