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영(吳基永, 1908~ 월북)은 황해 연백출신으로 1928~1937년 동아일보 평양지국, 신의주지국,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1932년엔 무너져가는 단군릉 보수운동을 위해 평안남도 강동에 파견돼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1938년부터는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다. 1949년에 월북해 조국통일민주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월북 전 저서로는 <민족의 비원><자유조국을 위하여><사슬이 풀린 뒤> 등이 있다.
오기영(吳基永) (연백, 1908~ ) ▲ 1928. 3 기자(평양지국근무, 신의주지국근무, 평양지국근무, 사회부), 1937.11 퇴사. ▲ 1938. 5 재입사, 사원(사회부), 1938. 5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④] 6·25전쟁 시기 남북한의 신문(하)
중앙일보가 발행한 ‘민족의 증언’(권 2, 83쪽)에는 전쟁 전에 월북했던 오기영(吳基永)이 이끄는 7~8명의 기간요원이 서울에 와서 인민보와 해방일보를 발행하였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오기영이 두 신문에 간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기영은 1928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10여 년간 기자로 활동하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퇴사했고, 이듬해 8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광복 후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 근무하면서 조선일보에 ‘팔면봉’을 집필하는 한편으로 서울신문이 발행한 ‘신천지’를 비롯하여 여러 신문에 글을 썼다. 그런 글들을 모아 ‘민족의 비원’(1947)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이상 세 책·1948)의 저서를 출간했다. 1949년 초 월북하여 6월25일부터 평양 모란봉극장 회의실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남조선언론협회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여 중앙위원 99명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전쟁 3일 전인 6월22일자 ‘민주조선’에 ‘매국노들의 죄악상, 인민의 피에 젖인 인간 백정 신성모’를 실었다.
김가인은 압록강 연안 만포(滿浦)에서 오기영이 애인 이은희(李恩姬·서울방송국 근무, 잡지사 기자)와 함께 피난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김가인의 수기에는 오기영이 해방일보나 조선인민보에 관계했다는 말은 없었다. 오기영은 그 후 조국통일민주전선 중앙위원(1949, 1956년), ‘조국전선’ 주필(1958년), 과학원 연구사(1962년)를 역임했다. 월북하기 전에 출간했던 오기영의 책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3권으로 묶어 2002년에 다시 출간했다.
(…)
(정진석, ‘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④- 6·25전쟁 시기 남북한의 신문(하)’, 신동아, 2009년 11월호)
“역사적 근거에 기초한 단군유적보존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된 것은 1932년 5월 평안남도 강동 대박산의 단군릉의 수축사업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단군 묘로 알려진 이 능이 일제하에 들어 황폐해지자 이를 증수하고 수호각을 세우기 위해 지방 유지들이 ‘단군릉수축기성회’를 발기하였다. 당시 단군릉수축은 평안도 강동의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이 운동을 단순한 지방의 운동이 아닌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운동으로 전환시킨 것은 ‘동아일보’ 였다.…(중략)…단군릉 수축 움직임이 알려지자 동아일보는 오기영을 현지에 파견하여 기행문을 싣고 이 능이 단군릉임과 이를 방치한 조선 민족 전체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오기영은 강동읍 북쪽에 위치한 대박산이 단군이 하강했다는 ‘태백산’이며 ‘강동읍지’ ‘대동총람’ ‘문헌비고’ ‘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의해 조선왕조 정조년간부터 나라에서 춘추로 봉심했던 사실 등을 들어 이 능이 단군릉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조선 민족이 단일민족으로서 단군의 자손임을 인식하는 민족적 각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함께 5월 28일부터 단군릉수축을 위한 성금모집을 촉구하고 같은 해 7월 9일부터 23일까지는 동아일보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을 ‘단군성적순례’의 특파원으로 파견하였다. 행적지는 묘향산, 평양의 단군굴, 강동 대박산 단군릉, 황해도 구월산, 강화 마니산 등이었는데 이 순례기는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연재되었다.…(중략)…당초 단군릉 수축은 강동의 단군릉기성회를 중심으로 1932년 끝낼 예정이었으나, 1933년 말까지도 기금이 822원에 그칠 정도로 자금 마련이 부진하여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1934년 1월 초 동아일보는 영업국장 양원모(梁源模)를 현지에 파견하여 단군릉에 참배하고 성금 500원을 냈으며 사원들도 따로 228원을 모아 성금으로 냈다. 이를 시작으로 동아일보는 단군릉수축성금란을 고정으로 설치하여 11월에는 3000원의 기금을 마련하였고, 이때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35년 10월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단군릉 수축사업은 당시 단군조선과 대일본주의를 연결시키려는 일선동조론적인 단군의식이 부상하는 시점에서 종족적이고 종교적이지만 부여 ‐ 고구려 ‐ 백제로 이어지는 고대 민족 형성상의 원류를 강조함으로써 반일의 정조(情調)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 시기 부르주아 민족주의 진영의 국수적 민족의식을 현양하는 것이었다(각주: 동아일보 1932년 7월 9일 ‘단군성적순례’ 기획연재를 시작하는 글에서 단군 이래 오천년 조선 역사의 맥을 ‘부여 ‐ 고구려 계승’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제기한 단군조선의 ‘부여 계승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이지원 대림대 교수, ‘한국근대문화사상사연구’, 혜안, 2007, 325~327쪽)
平壤暴動事件回顧, 在滿同胞問題 특집 -吳基永
7월 5일 밤. 그 밤은 진실로 무서운 밤이엇섯다. 역사로써 자랑삼는 평양에 기록이 잇슨 이래로 이런 참극은 처음이라 할 것이다. 美의 都, 평양은 완전히 피에 물들엇섯다.
하기는 우리가 인류사를 뒤저서 文野의 別이 없이 피다른 민족의 학살극을 얼마든지 집어낼 수가 잇다. 그러나 유아와 부녀의 박살 시체가 시중에 산재한 일이 잇엇든가!
나는 그날 밤 발 밑에 질적어리는 피와 橫在한 시체를 뛰어 넘으며 민족의식의 오용을 哭하든 그 기억을 되푸리하여(내, 비록 늙어 망녕이 들려도 이 기억은 분명하리라!) 검열관의 가위를 될 수 잇는 데까지 피하면서 거두절미의 회고록을 독자 앞에 공개한다.
사건 전야에 府內에서는 萬寶山 사건을 빙자하여 중국인을 힐난, 협박, 구타 등 경미한 충돌이 6건이나 발생하엿섯다. 그러나 이것이 익야 중국인 대학살이라는 인류 血史의 한 페이지를 더하게 하는 장본일 줄이야 누가 알앗으랴. 중국인은 새려 폭동군중 조차도 몰랏으리라.
5일 밤의 폭동은 오후 8시 10분경, 平壤府 新倉里 중국인 料亭 東昇樓에 어린애 10여명이 투석을 시작한 것에서부터다. 이것이 1만여 군중을 미련하고 비열한 폭동에의 동원령이 되엇다기에는 일백번을 고처 생각해도 내 理智가 부인한다. 누구나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어쨋든 일은 여기서부터 확대되엇다. 어린애들 10여 명의 투석이 60여 명 장정들의 투석으로 변하고 東昇樓의 정문과 유리창이 부서지면서 큰 돌을 안고 옥내에 침입하는 자가 생기엇다. 어느듯 군중은 수천 명을 헤이게 되고, 고함은 점점 부근 사람을 모아 놓앗다.
『이 집의 소유주는 조선인이다. 집은 부시지 말자』는 함성이 구석구석에서 터저 나왓다. 가구 집기를 모조리 부신(전화 한 개가 남앗다-<10>2층 한 구석에 붙엇기 때문에) 군중은 그 다음 집으로 옴기어 군중은 刻刻으로 집중되면서 순차로 대동강岸의 중국인 料亭을 전부 파괴하고 大同門通 대로로 몰려 나왓다.
大同門通에서 남으로 西門通-여기가 중국인의 포목, 잡화의 무역상들이 집중된 상가다.
군중은 2, 3백명씩 떼를 지어 중국인의 굳게 닫은 상점을 향하야 투석하기를 시작하엿다. 심한 데는 어데선가 굵은 材木을 멫 명이 둘러 메고 와서 「엉치기」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닫은 문을 부시는 데까지 잇섯다고 한다.
기관총의 난사와 같은 투석은 삽시간에 굳은 문을 깨치엇다. 店內로 침입한 십 수의 장정들은 마치 화재 장소에서 물건을 집어 내듯 손에 닥치는대로 상품, 집기 등을 길 밖으로 내 던진다-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내던지는 상품을 밟고 찢고 뜯고…어느듯 南門町에서부터 鍾路通까지에 노도와 같이 움즈기는 군중은 1만여 명을 돌파하고 노상에는 綢緞 포목, 和洋 잡화 등등…찢고 깨튼 상품류가 산적하엿다. 전차 자동차 등의 교통두절은 무를 것도 없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군중의 물결에 싸히지 않고는 마음대로의 통행도 할 수 없엇다.
오후 11시, 이 때는 벌서 평양은 북에서부터 남으로 중국인의 상점과 가옥은 한 개를 남기지 않고 전부 부서진 때엇섯다. 누구의 입에선가 무서운 유언이 퍼젓다.
「永厚湯(중국인 목욕장)에서 목욕하든 조선인 4명이 刺殺되엇다」
「大馳嶺里(府外)에서 조선인 30명이 중국인에게 몰살되엇다」
「西城里에서 중국인이 작당하야 무기를 가지고 조선인을 살해하며 성 안(府內)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長春에서는 동포 60명이 학살되엇단다」
비상시기의 군중을 선동하는 流言과 蜚語는 실로 위대한 힘을 가젓다. 냉정에 도라가면 상식으로써 판단될 허무맹랑한 소리가 마츰내 전율할 살인극을 연출하고야 마랏다.
집을 부스고 물건을 찢고 깨트린 것으로써 고만인 줄 알고 일시 피햇다가 제각기 잔해만 남은 가구등을 수습하랴든 중국인은 이 때부터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야 다리가 뛰는 대로 다라날 수 밖에 없엇다.
죽은 어린애를 죽은 줄도 모르고 힘껏 붓안은 채 경찰서로 도망해 와서 비로소 乃子의 시체되엇슴을 발견하는 모성…젖 빠는 어린애를 껴안은 채 부축되어 署로 와서 땅 바닥에 뉘이자 숨이 넘는 모성. 시내는 완전히 XXX상태다.
곳곳에서 살인은 공공연히 XX의 XXX에(!) 감행되엇다.
군중은 완전히 잔인한 통쾌에 취해버렷다. 3, 4명 내지 6, 7명식 피흐르는 곤봉을 든 장정을 앞세우고 2, 3백명식 무리를 지어 피에 주린 이리떼처럼 마자 죽을 사람을 찾아서 헤맨다.
「여기 잇다!」한 마듸의 웨침이 떠러지면 발견된 중국인은 10분이 못 지나서 살려달라고 두 손을 합장한 채 시체가 되어버린다.
-늙은이의 시체의 안면에 구더버린 공포의 빛! 고사리같은 두 주먹을 엡브장스럽게 쥐인채 두 눈을 말둥말뭉 뜨고 땅바닥에 엎어저 잇든 영아의 시체!
날이 밝앗다. 간밤의 무참은 숨김 없이 드러낫다. 길 우에는 부서진 상품과 가구가 산적하야 보행좇아 곤란하고 전선에는 찌저진 포목류가 걸려서 새벽 바람에 건들거리고 잇다. 폐허다! 문허진 로마성인들 여기서 더하엿으랴. 곳곳에서 중국인 시체는 발견되엇다. 西城里 曹成岩(중국인)의 집에서는 일시에 10개의 시체를 발견하엿다. 피살된 자, 적어도 백을 넘으리라는 나의 예상은 드러맞고야 말앗다.
아침부터 경관은 무장을 하엿다. 중대가 출동하고 인근에서 응원경관대가 오고-그런 중에서도 백주에 다시 재습 삼습-XX의 XX로 피난 장소에 가든 중국인이 중도에서도 타살되고 목숨이 귀하야 8, 9명이 한 곳에 숨엇다가 몰사를 하는 등. 재습, 삼습에서 공책 한 권이라도 그대로 내버려진 놈이 잇으면 마자 찢어버렷다. 잉크병 한 개라도 거저 내버리기 아까웟는지 쓰레기통에다 맛장구를 처서 죄 없는 쓰레기통이 붉고, 푸른 땀을 흘리고 섯다.<11>
이날 오후에는 천여 명 군중이 기빨을 선두로 「용감한 정예병」(!) 30여 명을 태운 화물 자동차를 앞세우고 箕林里로 재습의 壯途(!)를 떠낫다. 여기서는 필경 1명의 총살자와 2명의 중상자를 내엇다.
그러나 이것은 경관의 발포에 의함이엇고 중국인은 결코 반항치 않앗다. 군중은 반항 없는 약자에게 용감하엿든 것이다. 이날 밤에는 다시 府外의 중국인 가옥을 닥치는 대로 衝火하엿다. 밤새도록 평양성 밖에는 불꼿이 뻐처 잇섯다.
死者 119(경무국 발표)
중상 163
생사불명 63(平壤 華商總會 조사)
방화 49
가옥 파괴 289
중국인측 피해 약 250만원(평양 華商總會 조사) 손해는 이뿐 아니다. 조선인측도 20여 만원을 不下할 것이다. 大阪의 日人 상업자는 속골는 사람이 잇을 것이다.
사건 익야부터 검거풍이 이러낫다. 평양 大同 兩 署 총검거 1,200여에 달하엿다.
京城서 응원경관대까지 와서 행차 뒤의 장엄한 나팔을 한 달을 두고 부럿다.-(下6행 略-원문)
(오기영, ‘平壤暴動事件回顧, 在滿同胞問題 특집’, 동광, 1931년 9월호)
강동대박산(江東大朴山)에 잇는 단군릉봉심기(檀君陵奉審記)(上)
5월 2일 정오 평양선교리역에서 경편차에 올랐습니다. 강동에 있는 단군릉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강동을 가자면 바로 평양에서 강동으로 가는 자동차도 있습니다마는 나는 길을 안내해 줄 강동지국장 김중보(金重寶)씨를 찾아서 승호리로 돌아서 가기로 노정을 정한 것입니다.…(중략)…우리는 4천년 동안을 이렇게 봄이면 밭을 갈아 2천만 명의 한 식구가 살아왔습니다. 나는 이제 우리 조상에게 밭 갈기와 씨 뿌림이며 옷 입는 법과 모든 살림 범절을 가리켜 주시고 우리를 가장 먼저 다스리신 한배님의 능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오후 2시 승호리에서 김중보씨와 함께 다시 자동차로 강동에 도착되었습니다. 이번 단군릉 수축과 수호각 건축을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는 김상준 씨를 찾았습니다. 김씨는 나를 반가히 맞아주었습니다. 여기서 점심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곧 대박산으로 갔습니다.대박산은 강동읍 북쪽에 동리와 거의 맞붙어 있는 산입니다. 단군릉은 이 대박산 밑 기슭에 있습니다. 우리는 상원(上元) 갑자(甲子) 10월 3일 태백산 및 단목 아래 하늘로서 단군이 하강하셨다고 알고 있거니와 이 대박산이야말로 속칭 태백산입니다. 읍지에도 대박산이라고만 쓰지 않고 이와 병서로 태백산이라고도 썼다합니다.…(중략)…오후 4시 10분 나는 태백산 밑 성지에 다다랐습니다. 세상이 강박해 가면서 이 능의 위엄을 몰라보고 야박한 밭 주인의 염치없는 ‘보습’이 바로 능밑까지 범하여 밭을 갈아 놓았습니다. 나이 먹은 소나무가 능을 지킬 뿐 비록 얕은 담속에 둘려 있어도 범연한 고총으로 지나쳐볼 자는 없습니다. 나는 지극히 경건함과 왼 정성을 묶어 능에 나가 두 번 절하였습니다. 내 눈에서는 줄줄이 흐르는 눈물을 구태여 막을 체도 않고 엎드려 있습니다. 설혹 이 무덤 속에 그의 뼈와 살이 묻히지 않았던 들 어떻습니까.…(중략)…기자묘와 동명왕묘를 봉심하면서 이 단군릉은 오늘날까지 이렇듯 초라하게 겨우 대대로 전하는 조상의 말씀이 범연치 않은 고총으로만 여겼으니 내 비록 보잘 것 없는 일개 서생이로되 그의 피와 살을 전해 받은 후손이어든 이 초라한 선조의 무덤 앞에서 한줄기의 눈물을 바침이 어찌 정성 없는 일이라 하오리까(계속)
(동아일보 1932년 5월 6일자 7면)
강동대박산(江東大朴山)에 잇는 단군릉봉심기(檀君陵奉審記)(中)
능의 주위는 4백여 척에 상당합니다.…(중략)… 능에서 동쪽으로 20정 가량 들어가서 태백산 중턱에는 청계굴이 있습니다. 일명 단군굴입니다.…(중략)…묘향산에 단군굴이 있고 황해도 구월산에서 단군이 화신어천(化神御天)하셨다하거니와 구월산의 속칭이 ‘아사달산’이요 이 태백산과 마주 대하고 섰는 조그만 산이 ‘아달뫼’라는 것도 사학가들의 연구거리가 될까합니다. 평양에 단군전 묘향산의 단군굴 구월산의 아사달산이란 것들을 모두 주어 모아야 이 강동의 태백산뫼를 당할 것입니다.…(후략)
(동아일보 1932년 5월 11일자 7면)
강동대박산(江東大朴山)에 잇는 단군릉봉심기(檀君陵奉審記)(下)
정종 병오 이래로 봉심하던 것도 일한합병 이후로 폐지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저 황폐한 산기슭 밑에 외로이 큼직한 무덤 한 개가 풀을 깎을 주인도 없이 바람과 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계해 11월에 강동명륜회에서 2백여원의 경비로써 능 주위에 담장을 둘러쌌으나 이것으로써 어찌 단군릉의 위풍을 다하였다하오리까.…(중략)…이번에 다시 강동 유림을 해심으로 하여 수호각을 세우자는 의론이 기운 있게 일어났습니다. 이들의 원하는 바는 이 일이 비단 강동군의 일이 되지 말고 전 조선 민족의 일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입니다. 그에게 농사짓기를 배워 4천년을 살아오며 그를 시조로 동방에 빛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제 어찌 단군을 몰라볼 것이며 그에게 다한 정성이 없다할 것이겠습니까.…(중략)…나는 이제 다시 한번 이 능을 찾는 날 갖추신 위엄 앞에서 오늘 초라한 고총의 신세를 풀 때가 있을 줄 믿으매 구태여 약한 감정이라 그대로 눈물만을 뿌릴 것도 아닌 상 싶어 앞날을 바라보고 돌아섰습니다. 봄날이라 그의 가르치신 유업 그대로 능 바로 앞에서는 두 마리의 소가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다.
(동아일보 1932년 5월 12일자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