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균(申浩均, 1903~?)은 1929년 일본 도쿄대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1929~1937년 동아일보 도쿄지국장을 맡았고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동아일보 광고부장을 역임했다. 1943년 중앙약품공업을 설립했고 해방 후에는 한국 의약품업계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신호균(申浩均) (서울, 1903~ ) ▲ 1929. 4 서기(광고부), 도쿄지국장, 광고부장, 1939. 4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함관재지(凾館災地)의 현장(現場)에… 본사(本社) 특파원(特派員) 급파(急派)
본사(本社) 동경지국장(東京支局長) 신호균군(申浩均君)
금일 오후2시 동경출발(今日午後二時東京出發)
【동경지국전보】22일 북해도 함관(凾舘)의 대화재는 전 시가를 휩쓰러 2(二)만3(三)천6(六)백호 사상자 1(一)천여、행방불명 2(이)천이라는 놀낼만한 미증유의 대참화를 내엇다.
이같은 불의의 대잠재를 본사에서는 직접 현장에 가서 조사하는 동시에 5(五)천여의 조선사람이 잇는 곳으로 그들의 안위는 어떠한지 그 안부를 조사하기 위하야 본사 동경지국장(東京支局長) 신호균(申浩均)군을 재지 함관으로 특파하기로 되엇다.
그리하야 신 특파원은 23(二十三)일 오후 2(二)시35(三十五)분에 동경(東京)을 출발하는 열차로 함관을 향하야 떠낫는데 24(二十四)일 오전 11(十一)시 40(四十)분에는 현장에 도착하야 실지참상을 조사할터이며 더욱 조선사람의 안위를 조사하야 시시로 보도할 터이다.
(동아일보 1934년 3월 24일자 2면)
본사동경대판지국활동(本社東京大阪支局活動)
구호반10대조직(救護班十隊組織)
각교회(各敎會)각조합(各組合)이 협력응원(協力應援)
재지제일선(災地第一線)에서 활약(活躍)
【대판(大阪)에서 동경지국장(東京支局長) 신호균(申浩均) 전화(電話)】미증유의 대풍재로 대판등지의 참해는 참혹을 극하엿다함은 누보하엿거니와·재류조선인의 소식과 그들의 참담한 재후형편과 구호여하가 대단히 알고싶엇는데 본사 대판지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호반 10대(十)대를 조직하야 재류주민유지와 각 단체의 협력으로 재민구호에 전력을 경주하고 잇다.
한대에는 책임자가 잇고 그 책임자 아래로 5(五)명 내지 10(十)명이 협력하야 재지로 순방조사하며 구호에 전력하고 잇다.
풍수재구호조사대(風水災救護調査隊) (…)
(동아일보 1934년 9월 27일자 2면)
東京에서 活躍하는 人物들
言論界
申浩均氏 이분은 東亞日報 東京支局長을 하는 분인데, 일즉이 福島高等商業學校를 卒業하엿고, 이여 東京商科大學에 入學하여 뛰여난 學力으로 優秀하게 마친 분인데, *분 역시 東京社會의 빛나는 존재이다.
(‘東京에서 活躍하는 人物들’, 삼천리, 1935년 12월호)
한국제약산업 100년의 주역 <8> 신호균 환인제약 사장
중소제약사 육성 기틀, 약품공업협회 약품조합 창립 주역
신호균 사장은 1903년 9월 서울생으로 동경상대를 졸업한 후 1939년 금강제약에 총무부장으로 입사하면서 약업계에 투신했다.
신 사장은 1943년 제약 중간원료를 공급하는 중앙약품공업을 설립했으며 해방 직후에 환인제약소를 창업, 치료제 및 약국방약 위주의 신뢰할 수 있는 약업인으로 굵은 족적을 남겼다.
환인제약소는 해방 직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마루진제약(丸仁製藥)을 신 사장이 1945년 11월 적산(敵産)으로 인수받아 대방동에 공장을 두고 출범시킨 연고제, 시럽제, 팅크제 및 환제 전문 제약기업이었다. 해방 당시 제약업체들이 난립한 가운데서도 환인제약소는 공장을 갖추고 적지잖은 자본금으로 제약사다운 면모를 갖춘 몇 안되는 기업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신호균 사장은 1945년 전용순, 전항섭, 유명한, 이덕휘, 이경봉, 김종건, 김일영 등 당시 약업계의 거물급 인사 20여명과 함께 조선약품공업협회를 창립하는 데 핵심적인 관여한 장본인의 한사람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환인제약소는 머큐로크롬, 동상약, 건위정 등을 다량 생산하면서 주요 군납업소의 하나로 맹활약했다. 전후에는 신경안정제를 비롯한 향정신약과 혈압강하제 등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 사장은 다년간 대한약품공업협회 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불굴의 의지와 기개로 제약공업 육성‧발전에 헌신했으며, 특히 정부시책에 따라 약품공업협동조합 창설에 앞장서 중소기업 육성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대한상공회의소 위원을 연임했으며, 상표협회 회장, 세제심의위원 등 경제인이자 실업인으로서 폭넓은 활동을 통해 대외적으로 약업계의 위상을 선양했다. 약업계의 혼미한 거래질서 문제에도 항상 정론을 펼침으로써 지도자적인 역할을 다했다.
약업인으로서 그의 투철한 정신은 대한의약품판매협회의 구매조합이 세금문제로 곤경에 처했을 때 사법 및 세무당국을 설득해 난제를 원만히 해결해 준 공적만으로도 충분히 대변되고 있다.
일찍이 동아일보 동경지국장을 역임한 이채로운 경력을 바탕으로 신호균 사장은 해방 직후인 1946년 4월 ‘조선의약신보’(朝鮮醫藥新報)를 창간 했다. 타블로이드 4면의 주간신문이었던 ‘조선의약신보’는 의사, 치과의사까지 독자층으로 하는 보건종합지의 성격을 띄었다. 또 경제잡지 창간에도 손을 대 ‘에코노미스트’를 발간하기도 했다.
한편 환인제약은 훗날 1978년 이광식 사장에 인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제약산업 100년의 주역<8> 신호균 환인제약 사장’, 약업신문, 2016년 5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