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호(申昌浩, 1917~납북)는 전남 장성 출신으로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46년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해 1949년 11월까지 재직했으며 정치부 차장을 지냈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됐다.
申昌浩
▲ 1917년 6월 7일 전남 장성군 북이면 묘현리 306에서 출생
▲ 50년 6월 납북
▲ 광주고보를 거쳐 일본 京都 同志社대학 영문과 졸업
▲ 46년 동아일보 정경부 기자
▲ 49년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
▲ 49년 고려축전지(회장 신익희) 사장
▲ 1950년 5.30선거 때 전남 장성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 했으나 차석으로 낙선
□ 예절 바른 세련된 신사
1946년, 아직 미군정하에 있을때였다. 필자는 어느날 아침 군정청 제1회의실 회견장에서 늘 나의 옆자리에 앉는 동아일보사의 노일환 기자로부터 “오늘부터 함께 군정청 출입을 맞게 된 기자”라고 신창호를 소개받았다.
훤칠하게 큰 키에 몸은 약간 깡마른 편이나 첫눈에 ‘매우 세련된 신사’라는 인상을 받았다.
노 기자는 그때 이미 40대의 연배로 동아일보 정치부의 노련한 중견기자였다.
동아일고가 노일환 기자와 함께 신창호 기자를 군정청에 내보낸 것은 더욱 취재를 치밀하게 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나 또 한편 돌이켜 생각해보면 노일환 기자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뜻이 그때부터 있어(노일환은 48년 6월 10일 5.10선거 때 제헌의원으로 당선, 그후 46.5.20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 검거된바 있음) 미리 군정청 취재를 대신케 할 의도였다고도 볼 수 있다.
신창호 기자는 광주고보를 나온 준재로 이어 일본 교토의 동지사(同志社)대학 영문과를 나왔는데 첫인상부터가 매우 부드럽고 매일 취재터에서 만나지만 인사를 깍듯이 하는 예절 바른 사람이었다. 원래 인품이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아침에 그처럼 예절바른 언동을 하기 힘들 것으로 인사성이 두드러져 나같은 연하의 기자에게도 깍듯이 경어를 썼기 때문에 여러번 말을 낮춰 주도록 주문한 적도 있다.
군정청 출입이 처음인 신창호 기자는 선임의 노일환 기자나 타사의 경력 많은 기자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늘 나와 함께 각 부처를 취재하면서 다녔다. 그것이 마음 편한 모양이었다. 나 이외에 신창호 기자는 자유신문의 최영준(6.25때 납북) 기자 그리고 합동통신의 정광현(6.25때 납북) 기자와도 함께 행동했다.
□ 미군정청과 출입기자들
여기서 잠깐 그 당시 취재대상이던 군정청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45년 11월 처음 중앙청(군정청) 출입을 시작했을 무렵 하루는 헨리 스팀슨(나중에 국무장관 역임) 미국 육군장관이 미군정청을 방문했을때 마침 미육군의 최고 인사에 대한 환영의식이 펼쳐지고 있었고 군악대가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스팀슨 장관과 악수를 교환하는 제24군 군사령관 하지 중장, 군정장관 겸 제7사단장인 아놀드 소장 등 막료들을 근접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때 스팀슨 장관은 “자유에의 목적이 달성 될 때까지 남한에서 물러나지 않겠다” “미 육군의 군정부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성명하는 것이었다.
(…)
48년 8월 미군정은 윌리엄 딘 군정장관의 고별회견으로 우여곡절 끝에 3년간의 미군정 시대는 막을 내라고 대하님ㄴ국정부의 발족을 보았을때 군정청 출입기자단은 새 독립정부가 선 후에도 중앙청 출입을 이어받았다.
□ 李대통령 “저 기자 뉘집안 자식인지…”
신창호의 기자활동에 있어 그의 기자로서의 능력이 발휘된 것은 정부수립 후 부터였다.
그때 신창호는 동아일보사를 대표하는 중앙청 출입기자인 동시에 경무대 출입까지 겸했다.
그의 화술은 정중하면서도 지적이었고 유머감각이 있으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주목을 끌었다.
당시의 신문사 인원은 지금처럼 방대할 수 없어 ‘소수 정예주의’여서 정치·경제부를 합쳐 5,6명 정도였다.
그래서 중앙청에서 나가면서도 정당, 사회단체, 기업, 은행, 다른 관공부처까지 커버해야되는 다종목 운동선수 모습이랄까? 이리뛰고 저리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승만 박사 환국부터 돈암장, 마포장, 이화장, 경교장(김구선생, 임정요인 거소) 등 모두 커버하면서 때로는 남로당, 전평, 인민당, 한민당, 독촉, 삼청장(김규식박사 거소)까지 찾아다녔는데 신창호 기자도 거의 함께 뛰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아주 특이한 취재원이었다. 신창호 기자는 스티코프(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 대장에 대해서 아픈곳을 곧잘 찔러 질문을 했기 때문에 당시 주 서울 소련 총영사 사라신(일어와 한국말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다)은 신기자가 무슨 말을 할까 늘 뛰따라 다니기까지 했다. 기발한 신기자의 질문은 기자단의 심심찮은 화제가 되었는데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재치있고 귀염성이 담긴 신 기자의 질문을 자주 대할때마다 “저사람 뉘집 아들인가?” 하고 배석한 비서실장에게 묻기도 했다.
그의 해학은 성숙된 교양없이 이뤄질수 없는 것으로 나에게 큰 감명을 주곤했다.
돌이켜 보면 광복이후 신문기자와 함게 뛰던 사람중 시인 여상현(서울신문), 합동통신의 유재명 기자, 조선통신의 최명소(월북) 기자 등 쟁쟁한 기자들이 많았으나 당시 좌우 이념의 갈등 속에서 딱 한쪽만을 택하지 못하는 지성적 방황속에서 6.25의 비극을 만나 우리 언론계에서 영영 사라진 기자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뚜렷이 자기 자세를 밝힌 기자는 내가 보기에는 양명복 기자와 신창호 기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물론 난세를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행동의 표출이나 표현을 피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존의 지혜를 지닌 기자들이었을지 모른다.
□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사라진 申기자
어떻든 신창호 기자는 정부수립 이후 얼마간 우리와 함께 중앙청 취재를 함께 했으나 일찍이 실업계로 진출할 뜻을 비치기도 하던 중 49년에 영등포소재 고려축전지 회사를 관리하게 되어 기자생활을 청산할 때 옛 동료기자들과 저녁을 함께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 어딘가 쓸쓸한 모습을 보이면서 “새로 시작하는 사업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고 자기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신창호가 정계진출을 꿈꾼 것은 이 무렵, 그는 50년 5.30선거때 고향인 장성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근소한 차이로 차점에 그쳤다.
그런데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신창호 기자와의 관계가 여의치 않게 끊겼다. 남쪽으로 피난한 나는 여러모로 신창호를 찾았으나 대전에서도 대구에서도 그를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중앙청에 함께 나가던 기자들의 모습 또한 묘연했다.
미처 한강을 넘지못한 신창호, 그리고 많은 기자동료들은 ‘서울의 운명’에 그 자신들을 맡긴 것이었다.
신창호의 동생(신태호, 광주생명 사장·광주 상공회의소 회장)이 전해준 바로는 6.25 발발 직후 형제가 모두 인민군 정치보위부(구 국립도서관 자리)에 끌려갔고 동생은 상인으로 분류돼 요행히 풀려났으나 신창호는 기자경력 때문에 ‘반역자’의 낙인이 찍혀 구금된 끝에 결국 납북되었다는 것.
신창호가 정치보위부에 끌려간 것은 여상현(서울신문)과 함께 가회동에 나와 동아일보 동료기자 노일환(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됐었음)의 석방을 위로하러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렸던 것이다.
9.28 이후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평양에 가 있는 군의 유력인사를 통해 수소문해 봤으나 곧 1.4후퇴로 더 이상 수소문할 수 없었다.
지금 생존해 있으면 76세, 그의 조부는 장성에서 알려진 선비였고 그의 백부(신정식)는 3.1만세운동을 장성에서 주도,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책 등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많은 재산을 ‘오복이수’라는 학원에 주어 개화교육에 힘쓴 지사이다.
신창호는 납북될때까지 부인과의 사이에 소생이 없었다. 신창호는 과연 북에서 살아있을까? 쉽게 내 머릿속에서 떨쳐버릴수 없는 멋진 기자, 예의바른 신사, 유머감각이 뛰어난 재사였으나 6.25의 비극이 결국 그를 앗아가고 말았다.
(장기봉 전 신아일보 사장, ‘申昌浩’, 韓國言論人物史話-8.15後篇(下),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