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3호)
자유시 개척 ‘關西 3천재’ 중 하나
– 주요한
1920년 창간 당시 사람들은 동아일보를 가리켜 ‘청년신문’이라고 일컬었다. 설립자 김성수가 30세의 젊은이였고, 편집국장 이상협은 28세의 나이에 사회부장과 정리부장을 겸했다. 논설반과 편집국 기자들도 대부분 30세 안팎의 청년들이었다.
초창기 기자들은 간부들의 추천으로 입사했지만, 일부 신출 기자들은 입사시험을 거쳐 채용되기도 했다. 신문사 경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전혀 없는 사람도 있었다. 외국에서 유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학으로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인물본위로 선발하였기 때문에 한결같이 준재(俊才)들로 벌써부터 세상에 이름 석 자를 떨치고 있는 쟁쟁한 젊은이들이었다. 창간기자인 김동성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동아일보에 모인 사람들은 만세 직후여서 누구나 애국심에 불타올라 있었다. 직업의식을 가지고 들어온 것 보다는 ‘남이 감옥에서 고생하는데 나는 편안히 앉아서 문필보국을 한다. 이게 뭐가 괴로우냐’ 이런 심리였다. 그런 분들이 모인 곳이 동아일보였다. 말하자면 13도에서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유지들이 자연 모이게 됐다”(동아일보 사사 1권)
<주요한>
송아(頌兒) 주요한(1900~1979)은 우리 신문학 사상 자유시의 개척자일뿐 아니라 춘원 이광수, 계광순(3선 국회의원)과 함께 관서(關西) 3천재의 한 사람으로 언론과 경제 및 정치활동까지 병행하는 큰 발자취를 남겼다.
주요한은 평양 숭덕소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일본 도쿄 한국학생교회의 담임목사로 초빙돼 온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명치학원 중등부에 편입했다가 일본 최고 명문인 제1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 한국 학생으로는 첫번째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편집국장을 맡는다. 사장 겸 주필은 이광수였다. 그리고 학업을 마치기 위해 상해 호강대학(滬江大學)에 들어가 화학을 전공했다.
학업을 마친 1925년 그는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언론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다음해 9월 퇴사했다가 27년 3월에 재입사한다.
사장인 인촌은 사회부에서 일 하라고 했지만, 당시 학예부장 허영숙(춘원 이광수 부인)이 송아의 재능을 간부들에게 알리고 끝내 학예부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사회부 외근기자의 기회를 놓친 송아는 그 뒤 한 번도 외근기자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요한은 동아일보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옮겼다. 잠시 학예부장이 되었다가 1927년 12월에는 평양지국장으로 나갔고, 다시 본사로 돌아와 편집국장이 됐다. 그리고 다시 논설위원을 거쳐 1932년 조만식을 사장으로 진용을 크게 개편할 때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옮겨갔다.
그 후 조선일보에서 잠시 전무를 맡았다가 해방될 때까지 화신(和信)산업 전무를 지냈다. 해방 후 친일 문필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는 1958년과 1960년 두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됐고, 민주당정부에서 부흥부장관과 상공부장관을 지냈다. 1966년 대한일보 회장으로 논설위원을 겸하면서 다시 언론계로 돌아왔다. 그 후 무역협회 부회장, 한국능률협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9년 11월 별세.
– 글 김일동 (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