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3호)
일본정계거물 취재 …창간 16면 중
절반이상 쓴 필력 – 염상섭
1920년 창간 당시 사람들은 동아일보를 가리켜 ‘청년신문’이라고 일컬었다. 설립자 김성수가 30세의 젊은이였고, 편집국장 이상협은 28세의 나이에 사회부장과 정리부장을 겸했다. 논설반과 편집국 기자들도 대부분 30세 안팎의 청년들이었다.
초창기 기자들은 간부들의 추천으로 입사했지만, 일부 신출 기자들은 입사시험을 거쳐 채용되기도 했다. 신문사 경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전혀 없는 사람도 있었다. 외국에서 유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학으로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인물본위로 선발하였기 때문에 한결같이 준재(俊才)들로 벌써부터 세상에 이름 석 자를 떨치고 있는 쟁쟁한 젊은이들이었다. 창간기자인 김동성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동아일보에 모인 사람들은 만세 직후여서 누구나 애국심에 불타올라 있었다. 직업의식을 가지고 들어온 것 보다는 ‘남이 감옥에서 고생하는데 나는 편안히 앉아서 문필보국을 한다. 이게 뭐가 괴로우냐’ 이런 심리였다. 그런 분들이 모인 곳이 동아일보였다. 말하자면 13도에서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유지들이 자연 모이게 됐다”(동아일보 사사 1권)
<염상섭>
횡보(橫步) 염상섭은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보에 입학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부립제2중학을 졸업했다. 1919년 일본 게이오대학 문과 예과에 들어갔으나 첫 학기를 마치고 병으로 자퇴했다. 그는 줄곧 고학으로 학교에 다녔으며 대학 자퇴 후에는 일본 중부 쓰루가(敦賀)의 작은 신문사에서 약 3개월간 기자로 일했다.
1919년 3월 19일 오사카에서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자신이 쓴 조선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벌이려다가 거사 전날 일경에게 체포되어 3개월간 복역했다. 출옥 후 그해 11월 한글판 성경과 ‘학지광’, ‘창조’ 등을 인쇄하던 요코하마의 복음인쇄소에 취직했다.
노동운동을 통한 민족해방을 목표로 직공으로 일하며 어렵게 지내던 중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기자가 됐다. 창간호에 조선 통치에 대한 일본 정계 거물급 인사들의 소감을 취재했는데 신문 12면의 절반 이상이 염상섭이 쓴 기사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6월 말 동인지 ‘폐허’를 출간하기 위해동아일보를 떠났다.
공초 오상순과 함께 ‘폐허’ 동인이 된 횡보는 다음해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작가 데뷔를 한다. 이 작품은 우리 소설사에서 이채로운 작품으로, 염상섭은 3·1 운동 직후 지식인의 심리를 냉철한 시각으로 생물을 해부하듯이 파헤쳐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주의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횡보는 사회부 기자로 출발했다. 그러다 1922년 최남선이 창간한 주간지 ‘동명’에 참여하는데, 1924년 동명이 시대일보로 바꾸자 초대 사회부장이 됐다. 당시 시대일보 편집국장은 동아일보 창간 멤버인 진학문이 맡았고, 안재홍 현진건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최남선과 진학문이 손을 떼자 횡보도 물러나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1932년에는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횡보는 동아일보를 떠난 뒤에도 소설은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1924년 출간된 그의 첫 창작 단행본인 ‘해바라기’는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인 나혜석을 모티브로 신여성의 연애관과 결혼관을 담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출간 1년 전인 1923년 동아일보에 40회로 연재됐다. 아직 언론인과 문인이 전문적으로 나눠지기 전이어서 언론인이 소설을 쓰는 게 어색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염상섭은 1931년 6월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작품활동만 하다가 1935년 매일신보에 입사해 정치부장으로 일했다. 1936년에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에서 발행되던 한국어 신문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초빙되어 만주로 건너갔다. 그러나 일본인 주간과의 마찰로 1939년 만선일보를 그만 두고 국경 도시 안둥(현 단둥)의 한 건설회사에서 홍보담당관으로 일했다.
횡보는 해방 후인 1946년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초대 편집국장에 취임하는데, 이것이 그의 언론계 마지막 경력이었다.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초대 학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예술원이 개원하며 종신회원에 추대됐다.
1957년 예술원 공로상을, 1962년 3·1 문화상 예술부문 본상까지 잇달아 수상했지만, 부상으로 받은 시계와 반지를 팔아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1963년 사상계에 ‘횡보 문단 회상기’를 연재하던 중 고혈압과 직장암으로 쓰러져 서울 성북구 성북동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3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문단장으로 치러졌고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됐다.
– 글 김일동 (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