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朴憲永, 1900~1953)은 1919년 경성고보를 졸업하고 1920년 가을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922년 4월 국내 공산당 조직을 위해 입국하다 일제에 검거돼 징역형을 치르고 1924년 1월 출옥했다. 1924년 4월 15일 동아일보 판매부 서기로 입사했다가 12월 12일 지방부 기자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앞서 11월 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박헌영과 주세죽의 결혼소식 기사에서는 박헌영을 본사 기자로 소개하고 있다. 1925년 5월 24일 퇴사했다.
박헌영(朴憲永) (예산, 1900~1953) ▲ 1924. 4 서기(판매부), 기자(지방부), 1925. 5 퇴사.〔조선공산당수, 북괴요직〕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최초의 전 조선기자대회 전 조선기자대회(全朝鮮記者大會)는 기자단체인 ‘무명회(無名會)’의 발의로 한국의 신문?잡지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1925년 4월 15일부터 3일간에 걸쳐 서울에서 열렸다.
이 대회가 처음 발의된 것은 1924년 10월 26일 서울 교외 청련사에서 열린 ‘무명회 추기(秋期)간담회’에서였다. 이어 1925년 1월 31일 서울 명월관에서 열린 ‘무명회 임시총회’에서 최원순의 제의로 구체화돼 ‘무명회 10인 위원회’에서 모든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3월 6일 청련사에서 10인 위원회가 준비위원을 선출하고 3월 8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다시 회합, ‘전 조선기자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정식 발족하였다. 준비위원은 이상협 이종린 최원순 조봉암 박일병 등 33명이었다.
준비위원들은 네 차례의 준비위원회를 열어 대회장소, 개최일정, 대회임원, 대회취지, 대회참가자격 및 수속절차 등을 결정하고 제5차 준비위원회에서 대회절차를 숙의(熟議), 4월 15일 오전 10시 천도교기념관에서 창립대회가 열렸다.
이종린의 사회로 개회되자 의장선거로 들어가 의장에 이상재, 부의장에 안재홍을 선출한 뒤 의안 작성위원으로 안재홍 송진우 김정진 김기전 조봉암 장명현 인동철 김병식 김성업 등을 뽑았다. 이 대회의 ‘참가인원은 조선일보의 지방기자가 압도적으로 제1위를 차지’했고, ‘동대회가 소집되기까지에는 서울시내 각 사의 사회부 기자 중심으로 조직된 철필구락부(鐵筆俱樂部)와 조선일보의 홍증식 이하 화요회(火曜會) 계통의 세칭 적파(赤派) 기자들이 주동이 되었던 만큼 소위 사회주의 색채를 띤 지방기자가 절반 이상이었다’고 최준은 ‘한국신문사’에서 쓰고 있다. 이 책은 ‘동아일보에 대립하여 새로 민족 신문으로 혁신한 조선일보에 계속 사회주의자들이 자리를 잡게 되어 어느덧 조선일보는 사회주의 신문이란 세인의 평까지 받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의 주동으로 연 3일 세인의 관심이 집중된 대회가 열리는 가운데 17일 아서원(雅?園)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공산당’을 창당했다. 주요 간부로는 김재봉(책임비서), 홍증식, 박헌영, 조봉암, 홍남표, 권오설, 박순병, 이준태, 조동호, 김찬, 최원택, 김약수, 안종건, 유진희, 윤덕희 등 거의 조선일보 기자들이 선출되었다. 이런 점으로 미뤄 전 조선기자대회는 ‘공산당’ 결성을 위한 연막작전이었다는 설도 있다.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1924년(25세) 4월 15일, 동아일보 입사
○ 1928년 11월 20일에 작성한 박헌영의 자필 영문이력서
1924년 4월 이래 나는 조선인들에 의해 발행되던 일간신문 동아일보에 취직해 있었는데, 나는 1925년 6월에 일어난 파업의 조직자란 혐의로 해고되었다.
○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당시 신의주 검사국이 작성한 수사 기록
경성에 올라와 이내 1924년 4월에 동아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하여 그해 7월까지 있었다.(신의주 지방법원 검사국,「피의자(박헌영) 신문조서」1925. 12. 17.)
○『동아일보사사(東亞日報社史)』에 따르면, 박헌영의 동아일보사 재임 기간은 1924년 4월에서 1925년 5월까지다. 재임기간중 그의 직책은 ‘판매부 서기, 지방부 기자’였다.(「歷代社員名錄」,『東亞日報社史』1, 1975, 423쪽) 동아일보사에서 발급한「경력증명서」에 따르면, 박헌영의 입사일은 1924년 4월 15일이다. 입사 당시 직책은 ‘판매부 서기’였다.(동아일보사,「경력증명서」(박헌영), 2001. 2. 22.)
1924년(25세) 4월 21∼23일,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3일째인 4월 23일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되다
이 대회에서 박헌영은 한신교(韓愼敎), 주종건(朱鐘建), 최순탁(崔順鐸), 강제모(姜齊模)등과 함꼐 5명으로 구성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으로 뽑혔다.(「靑年臨時大會」,『동아일보』1924. 4. 25.)
1925년(26세) 5월, 동아일보 퇴사
○『동아일보사사(東亞日報社史)』에 따르면 박헌영의 동아일보사 재임기간은 1924년 4월에서 1925년 5월까지다.(「歷代社員名錄」,『東亞日報社史』1, 1975, 423쪽) 그가 해임된 날짜는 1925년 5월24일이었다.(동아일보사,「경력증명서」(박헌영), 2001. 2. 22.)
○ 퇴사 경위
동아일보를 퇴사한 이유는 당시 그 회사에 동맹파업이 있어 그때 7, 8명의 동료 기자가 퇴사하게 되었는데 위 기자들을 동정하여 나도 퇴사한 것이다.(신의주 지방법원 검사국,「피의자(박헌영) 신문조서」1925. 12. 17.)
○ 1928년 11월 20일에 작성한 박헌영의 자필 영문이력서
나는 1925년 6월에 일어난 파업의 조직자란 혐의로 (동아일보사에서) 해고되었다.
1925년(26세) 8월, 조선일보 입사
○ 조선일보사에 근무할 당시 직장 상사인 사회부장 유광렬(柳光烈)의 회고
그(박헌영-인용자)는 조선일보사에서 나와 같이 근무할 때 나에게 냉혹하게 대했다. 당시 사회부장은 좌익청년에게 매맞는 자리였다. 좌익 단체인 화요회·북풍회·서울청년회·적박단(赤雹團) 등은 신문기사가 자기들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나오면 신문사에 몰려와 야료를 부리고 사회부장과 취재기자를 때리곤 했다. 이럴 때면 같은 좌익 기자지만 김단야는 “왜 그러느냐. 신문사는 신문사대로 입장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렸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말리는 김단야를 못마땅하게 생각, “야, 너는 유광렬 개인을 위해 무엇 때문에 나서느냐”고 빈정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그를 괘씸하게 생각하곤 했다.(유광렬,「나의 이력서」,『한국일보』1974. 4. 13.)
1925년(26세) 10월 15일, 조선일보사에서 해직
○ 해직 경위에 대해 박헌영이 일본 경찰에게 행한 진술이 남아 있다.
조선일보사를 물러난 것은 당시 동사가 발행정치 처분을 받은 바 있는데, 이 처분 해제에 있어 사내의 사회주의 기자를 해직시키지 않으면 이 처분을 해제시키지 않겠다는 당국의 희망에 따라, 나는 그 희생이 된 것이다.(신의주 지방법원 검사국,「피의자(박헌영) 신문조서」1925. 12. 17.)
조선일보 제3차 정간사건이란 논설위원 신일용(辛日鎔)이 집필한 사설「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의 필화사건을 가리킨다. 조선총독부는 이 사설을 문제 삼아 윤전기를 압수하고 필자를 구속하며 신문에 대해 무기한 정간 처분을 내렸다. 조선총독부는 정간 처분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사회주의 기자들의 해직을 요구했다. 실제 정간기간은 1925년 9월 8일부터 10월 15일까지였다.
(임경석. ‘이정(而丁)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87~102쪽 中 발췌)
三氏 滿期出獄
상해에서 공산주의를 선뎐하였다는 일로 재작년 삼월에 안동현에서 체포되어 제령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일년반의 언도를 받고 그동안 평양형무소에서 복역중이든 林元根 朴憲永 金泰淵 삼씨는 지난 19일에 만기출옥하여 20일에 경성으로 왔다더라.
(동아일보 1924년 1월 22일 2면)
新興靑年 巡廻講演 서, 남조선으로
신흥청년동맹 순회강연단은 남조선과 북조선 두 대에 나뉘어 아래와 같은 날짜로 각지를 순회하리라는데, 변사는 남조선에는 김찬, 신철, 박헌영 3씨요, 서조선에는 박일병, 조봉암 등 제씨이라더라.
남조선순회일정 …(후략)
(동아일보 1924년 3월 10일 2면)
朝鮮靑年總同盟의 靑年臨時大會
집행위원회에서는 상무위원 오명선거
집행위원선거-이십오명선거
(전략)…집행위원 선정이 마치고 이어서 검사위원 5명을 전형위원 10명이 선정하였는데 씨명은 한신교 박헌영 최순탁 강제모 주종건.
紀念萬歲, 공원에서 사진도 박엇다
靑年同盟位置, 이전련합회집에
臨時終了後에 간친회가 잇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5일 2면)
신흥청년사, 창간호는 9월 중순경에 발행
시내 관수동에 있는 월간잡지 신흥청년사에서는 재작일(11일) 오후 8시경부터 동회관밖에서 동인들이 다수히 모이어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출판과 경영에 대한 여러 가지 의사를 교환한 후에 사업진행상 편의를 따라 재무부 편집부 서무부의 3부를 설치하고 상무위원으로 김단야, 박헌영, 김찬, 홍증식, 민태흥, 임규호, 임원근 7 사람을 천거하여 일체의 사업 진행할 것을 그 사람들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하고 창간호는 아무리 늦어도 9월 중순경에는 발행되리라는데 아즉것 동인중에서 주금을 보내지 아니한 사람은 속히 보내주기를 바란다더라.
(동아일보 1924년 8월 13일 2면)
신흥청년강연
신흥청년동맹에서는 금번에 농촌문제 대강연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당국에 교섭한 결과 문제가 부당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었으므로, 그 동맹에서는 새로이 ‘청년문제’로 연제를 고쳐 가지고, 오는 13일 오후 7시부터 종로 중앙청년회관 내에 청년문제로 대강연회를 개최하리라는데, 입장료는 20전씩이며 그 연사의 씨명과 연제는 아래와 같다더라.
歐洲靑年運動의 新局面(閔泰興)
新興靑年의 正義(金燦)
靑年運動의 三大標語(曹奉岩)
殖民地靑年運動(朴憲永)
靑年과 敎養(朴純秉)
(동아일보 1924년 10월 8일 3면)
신랑신부
▲본사기자 朴憲永군과 朱世竹양의 결혼식을 오는 7일에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그 본댁에서 거행할 터이며
▲본사기자(평양지국) 고영한 군과 백영애 양의 결혼식을 금 3일 하오 2시에 평양 남산현 예배당에서 거행한다고.
(동아일보 1924년 11월 3일 2면)
‘칼’ ‘로자’ 순직 6주 기념
오는 15일은 세계 무산청년운동의 인도자 ‘칼리브크네트’와 ‘로사 룩쎈부르크’ 두 사람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손에 암살을 당한 날이므로 이날을 당하여 시내 신흥청년동맹에서는 오후 7시부터 시내 경운동 천도교당내에서 殉難 제 6주년 대연설회를 개최한다는데 입장은 무료이고 그 연제와 씨명은 다음과 같다더라.
反軍國主義運動과 靑年(朴憲永)
國際靑年運動과 ‘칼-리브크네트’(金燦)
‘로사’를 追憶함(金隱谷)
‘스빠타카스탄’과 獨逸革命(朴純秉)
‘칼’ ‘로사’의 殉難實報(李柄立)
一月十五日(閔泰興)
(동아일보 1925년 1월 19일 2면)
五氏는 無關係
퇴사동긔가 다르다고
금번에 조선일보사에서 도태당한 사원중 10여명이 지난 22일 오후 7시에 시내 돈의동 열빈루안에서 모여 대항책을 강구하였다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그 중에서 孫永極 徐範錫 金丹冶 林元根 朴憲永 等 5씨는 그 일에 대하여 같이 의논한 일도 없고 참가한 일도 없다하며 태도를 취한다하더라도 전연 별개 행동을 취하리라는데 이에 대하여 박헌영씨는 말하되
“우리는 이상협 씨 등과는 퇴사한 동기도 다를 뿐 아니라 어떠한 일을 불론하고 우리는 그들과 한 자리에서 일을 의논할 수 없는 것을 일반에게 표명하고자합니다”하더라.
(동아일보 1925년 10월 25일 2면)
國際靑年데이의 意義
新興靑年同盟 朴憲永
無産階級運動의 중요한 부분을 분담한 無産靑年運動은 國際勞農運動, 國際붉은組合運動, 國際婦人運動으로 더부러 계급전선에서 연대책임을 가진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국제적 단결의 필요가 생기어, 1907년에 이르러 슬쓰트갈드에서 제1회 國際大會가 열리엇다. 이것이 곳 각국의 사회주의청년단체가 비로소 『靑年인터내슌낼』로 통일된 것이다.
國際無産靑年運動의 실제의 역사는 이 슬쓰트갈드회의로 비롯하엿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제1회 國際無産靑年運動의 국제회의는 청년의 경제적 이익 **와 무산청년의 교육문제와 반군국주의를 위하야 최초로 통일적으로 조직된 근본윈칙과 실제적 전술을 결정한 중요한 국제회의이엿다.
우리 國際無産靑年運動의 역사상 영구히 기억하여야 할 은인이 잇다. 그는 곳 『카―트, 리브크넥크트』이다. 國際無産靑年運動 제일선에선 맹렬한 투사이엇스며 『靑年인터내슌낼』의 창립자이엿다. 그는 당시 격렬한 반군국주의운동의 先驅者로서 제1회 국제회의에서 주장한 반군국주의의 이론과 전술은 기리 장래 반군국주의운동의 바탕이 되엿다.
당시에 無産靑年運動의 기세, 더욱히 안티밀리타리슴(반군국주의)운동의 의기는 과연 무서운 것이엿다. 이는 곳 제1회 국제회의에서 채용된 반군국주의운동의 이론과 방침을 세계 무산청년단체에 잘 전달한 까닭이다. 따라서 각국 무산청년단체는 반군국주의운동을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임무로 알게 되엿다.
그러나 此會議와 전후하야 歐羅巴의 당시 자본주의는 加勢的 有機的 발달이 전개되여 잇섯다. 그래서 이 平和的 有機的(24) 자본주의의 발달과 병행하야 각국 노동조합에 관료주의가 생기고 社會黨에 기회주의가 나타나 적지 안흔 방해를 낏첫다. 당초로부터 급진적 사회주의 諸단체 중 가장 투쟁적인 청년단체까지도 역시 이러한 *落의 영향을 바다 점차로 최초의 용감한 意氣가 희박하여젓다.
각국 社會黨에서는 완전히 改良主義를 주장하야 노동계급을 不關하고 부르쥬아식 데모크래씨―로 기우러저 점진적, 평화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에 나가기를 희망하며 주장하엿다. 이러한 주장의 이론적 귀결로 彼等은 급진적 노동계급과 노동청년을 혁명적 투쟁에서 분리케 하려 함은 당연한 일이엇다. 노동조합도 그와 가티 『앙글로 삭손流』의 노동조합주의로 되어 勞資협조를 부르지지며 獨, 墺流의 노동조합의 관료적 개량파 사회주의와 제휴하고 무산계급을 반역하야써 혁명적 요소를 一掃하려고 하엿다.
1910년에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社會主義靑年國際會議는 국제社會黨대회와 가티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서 진행되엿슴으로 이 회의는 무산청년의 교육사업의 刷新과 청년인터내슌낼과 社會黨인터내슌낼과의 관계를 결정한 외 다른 큰 의미를 갓지 못하엿다. 반군국주의운동에 대한 문제도 잇기는 하엿스나 슬쓰트갈드회의만치 큰 감격은 주지 못햇다. 彼等은 滔滔한 시세의 영향에 압도되어 열렬한 운동을 할 수 업섯다. 1914년에 世界大戰이 발발되니 각국 사회민주당의 醜態가 드러낫다. 「戰爭에 對한 戰爭」을 임무로 알고 「萬國 勞働者는 團結하라-」는 『인터내슌낼리슴』 밋헤서 단연히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하여야 될 각국 사회당과 노동조합은 개전을 당함에 모다 ―자국 무산계급을 배반하엿다. 그들은 자국 부르쥬아를 위하야 동무에게 銃을 놋케 되엿다. 이러케 제2인터내슌낼은 완전히 붕괴되고 마럿다. 제2인터내슌날의 붕괴를 따라 청년인터내슌낼도 해체되엿다. 처음에는 반군국주의운동에 감격되어 투쟁하던 각국무산청년은 일제히 자국부르쥬아계급의 유지를 위하야 피를 흘니게 되엿나니 이는 곳 각국 사회당, 노동조합의 기회주의자의 수령들이 청년인터내슌낼을 간섭한 까닭이다.
그러나 무산청년의 혁명적 의기는 成年 무산계급의 사회당, 노동조합과 가티 부르쥬아의 走狗되기에는 너무나 순진하엿다. 그들의 진리와 정의에 대한 타오르는 열정은 파렴치의 기회주의자, 직업적 사회주의자를 반항하야 니러낫다. 獨逸, 伊太利, 瑞西, 스칸지나비아의 무산청년은 끗까지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하고 애국사회주의적(25) 自國의 사회당을 무시하고 그에 대신하야 정치적 투쟁을 하엿다. 이러케 혁명적 무산 청년의 인터내슌낼의 부활이 歐洲전쟁 중에서 되엿나니 이것이 곳 1915년 4월에 열닌 베른회의이다. 이 회의는 국제 사회당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痛罵하고 해체된 청년인터내슌낼을 즉 무산청년의 힘으로 부활식히어 반군국주의 운동을 그의 목적으로 삼고 이 회의에서 『國際靑年데이』를 결정하엿나니 和蘭대표의 제의를 채용하야 매년 1회 각국 무산청년단체의 示行列을 행하야 대중적 시위운동을 세계적으로 실행할 것을 결의함에 비롯하엿다. 그리하야 1915년 10월 3일에 제1회 국제청년데이를 기념하야 무산청년이 자본주의 전쟁에 대한 최초의 대중적 항의를 단행하엿다. 국제청년데이는 이러한 역사를 배경하고 출생된 것이다. 이 날은 인터내슌낼국제局에서 각국무산청년에게 선언을 보내여 데몬스트레이슌을 鼓吹 激勵하엿나니 瑞典, 丁抹, 諾威, 瑞西, 獨逸의 諸도시와 和蘭, 羅馬尼, 亞米利加 밋 葡萄牙의 무산청년은 이에 응하야 니러나 그 시위운동에 참가한 대중은 12만이 넘엇다. 이 시위운동은 무산청년운동을 위하야 세계청년무산계급의 연대책임의 관념을 촉진식히기에 힘 잇는 선전이 되엿다. 대전 중 각국 애국사회당의 반동적 노력이 맹렬함도 불구하고 우리 청년인터내슌낼운동이 이럿틋 용감 스러웟슴은 오즉 각국 무산청년단체가 국제적 단결의 필요를 깨닷고 한 기빨 밋헤 집중한 까닭이다.
제2회국제청년데이는 1916년 9월 3일에 거행되엿나니 국제局은 전년과 동일한 선언을 내리어 국제적 데몬스트레이슌을 鼓吹하니 獨逸, 和蘭, 瑞典, 諾威, 丁抹, 亞米利加, 加奈太, 伊太利, 瑞西에서 시위 운동이 니러낫다. 시위운동진행중 瑞西에서는 군사당국의 금지가 잇섯고 羅馬尼에서는 同國의 전쟁발발로써 계획적 행동은 이루지 못하엿고 伊太利에서는 다수 혁명청년이 인터내슌낼 檄文을 인쇄 撤布한 이유로 투옥된 일도 잇섯다.
제3회는 1917년 9월 2일에 제4회는 1918년에 제1, 2회와 가튼 시위운동이 잇섯다. 제5회 기념일은 1919년 9월 7일에 거행된 바 예년에 업는 偉觀을 呈하엿나니 특별한 청년노동자의 관병식인 觀이 잇섯다. 1917년 로시아혁명 이후 공산당인터내슌낼과 청년인터내슌낼의 부활이 잇서 각국무산계급 陳戰의 총참모부의 진실하고 敏活한 지휘 인도가 잇게 되니 계급전은 일층 혁명의 기분이 넘치엇스며 무산계급의 단결은 인터내슌낼리슴(26) 밋헤서 더욱 구더젓다.
제6회국제청년데이는 1920년 9월 5일에 거행되엿나니 공산청년인터내슌낼의 계획적 준비가 잇서 기념일 전주부터 각국에 통고가 잇섯스며 집행위원에서는 『靑年인터내슌낼特別號』를 간행하엿다. 이 해는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각국에서는 공장, 학교, 도시, 농촌, 직업장에 집회가 잇섯고 시위 행렬이 성행하엿다. 더욱히 쏘비에트, 로시아에서는 백만의 노동 청년이 행렬에 참가하엿다 한다.
제7회, 8회, 9회를 예년과 가티 거듭하고 금년에 제10회국제청년데이를 맛게 되엿다.
이 전세계 무산청년의 국제적 기념일을 압헤 두고 우리 고려청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국제청년데이의 의의를 밝히 아는 동시에… 此 間 29行 削除…
미래의 세상은 청년의 것이다. 그만치 우리는 중한 책임을 가진 줄 아러야겟다.
―(1924·8·18일)―(27)
(박헌영, ‘國際靑年데이의 意義’, 개벽, 1924년 9월호)
‘양반의 서자, 어머니는 주모’
소련의 지령에 따른 ‘찬탁’에의 표변으로 대중적 기반을 크게 상실한 박헌영.…(중략)…
그의 어렸을 적에 관해 그의 10촌인 박대희 씨(49, 농업,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와는 나이 차가 너무 많아 직접 접해 본 적은 없고 다만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몇 가지의 일만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200여호의 마을로 변했지만 그가 보통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아주 작았던 신양면 소재지인 신양리 장터에서 그의 어머니가 술장사를 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합니다. 그 집에서는 해방직후까지 그의 어머니와 이복형님인 박지영 씨가 살다가 집을 팔고 서울로 올라가서 박헌영을 만난 후 한때 조선호텔에 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일이 있지요. 그 집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진학하기 힘들었던 고등보통학교까지 아들을 공부시켰던 걸 보면 약간은 넉넉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박헌영은 당시 신양면내에 보통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20여리나 떨어져 있는 대흥보통학교를 다녔는데 성질이 약간 특이했다고 해요. 같은 반에 있는 부잣집 아이가 좋은 옷을 입고 나오면 두들겨 패서라도 빼앗아서 이것을 가난한 애에게 주었고 자신도 좋은 옷을 입고 다니다가도 떨어진 옷을 입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벗어주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3.1 운동이 일어난 후는 고향을 거의 찾아온 일이 없고 오더라도 일경의 감시 때문에 몰래 다녀가곤 했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그 제삿날 밤엔 꼭 들르거나 그렇지 못할 때에는 자기집 전답에 왔다는 것을 알리는 무슨 표지를 꼭 해놓고 갔다고 합니다. 박헌영에 대해서 잘 아는 분들은 이미 다 타계해서 알 길이 없습니다-.
그가 졸업했던 경기고보(경기고) 15회 졸업생 학적부에는 …(중략)…
그와 함께 중학시절을 보냈던 동기동창들은 그의 ‘이면’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별명 기와장, 영어공부 열중’
▲한준섭 씨(72, 전 명지대학 재단이사)=내가 2학년 땐가 박헌영 군과 같은 반이 되어 알게 됐지요. 그는 나보다 한 살이 위였습니다. 얼굴이 까무잡잡해서 우리들은 그를 갯장(기와장)이라고 별명을 붙여 놀려대기도 했지요. 박 군은 남에게 친하게 굴거나 뛰어다니지도 않았었고 휴식시간 같은 때면 양지바른 곳에서 조용히 책을 펴들고 있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퍽 얌전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 그의 과격성을 보고 크게 놀라기도 했지요. 그는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중간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학과목 중에서 영어를 열심히 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경기고보에서는 1학년 때는 영어과목이 없었고 2학년부터 들어있었는데 그나마 두 개로 갈라진 반 중 농과에서는 없고 상과에서만 있었습니다. 나와 박헌영 군은 같은 상과였지만 1주일에 영어는 한 시간 정도밖에 수업이 없어 함께 YMCA영어강습회에 다니면서 배웠지요. 얼마 후 당시 낙원동에 있던 모 영어 선생집에 까지 다니면서 배우다가 나는 떨어져 나오고 박 군만이 다녔는데 그 후에 영문소설까지도 읽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1919년 3월 25일 졸업할 예정이었으나 그해 3월 1일에 일어난 3·1 만세 사건에 경기고보 학생들이 어떤 학교 못지않게 격렬하게 가담, 더러는 붙잡히고 더러는 달아나 흩어지는 바람에 졸업식은 고사하고 졸업사진 한 장 없습니다. 박 군과는 3·1운동 이후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요-.
‘북악산 올라가 낚시질’
▲최기용 씨(74, 전 조폐공사 부총재 현 서울 종로구 중학동 109)=박헌영 군과는 3·1운동 때 만세를 부른 후 일단 뿔뿔이 흩어졌다가 그해 5월인가 종묘 앞 황영진 씨(작고) 댁에서 함께 하숙을 했습니다. 학교 때에도 알았지만 이 하숙생활을 계기로 가깝게 됐지요. 그때까지도 공산주의자 같은 인상은 풍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해 가을에 그는 상해로 건너갔는데 그의 처지를 우리끼리 아는 암호나 은어로 써서 몇 차례 엽서로 알려오기도 했습니다. 그 후 언젠가 공산주의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됐는데 그 때 박헌영은 자신을 정신병자로 가장키 위해 자기 똥을 먹는 등의 거짓 발작상황을 보여 그로 인해 정신병자라는 진단을 받아 가석방돼 나온 일이 있습니다. 일경은 박헌영을 정신병자로 보고 일단 놓아주기는 했으나 그래도 미심쩍었던지 형사를 붙여 미행시켰어요. 이것을 눈치챈 박은 낚싯대를 들고 북악산으로 올라가 바위 위에서 낚시질을 했어요. 이걸 보고 형사가 완전히 미쳤다고 판단하고 감시를 풀어 무사히 국내를 빠져나간 일도 있었습니다. 박헌영 군은 주세죽이라는 아주 현처가 있었는데, 그 부인이 남편의 공산주의 활동을 막기 위해 처음에는 노력하다가 나중에는 함께 공산주의운동을 벌여 부부가 함께 투옥되기도 했지요. 그 부인은 옥고로 건강을 상해 몇 해 후에는 슬하에 소생도 없이 ‘모스크바’에선가 병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부인이 죽기 전인 1929년경 부인과 함께 박 군이 연건동 우리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어요. 그때 내가 “자네, 다시 한번 더 그 놈들(일경)한테 걸리면 햇빛구경 못할 터이니 정신 차리게”라고 충고했더니 아무 대답도 않고 앉아 있다가 “그럼 다시 들르겠다”고 떠나간 후 소식이 없다가 39년 출옥한 후 우리집에서 4, 5일 동안 머물다 간 일이 있지요. 해방 후 조선공산당 우두머리로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박헌영을 서너 차례 만났다는 채동선 군(음악가)을 보고 “자네, 박헌영이 만나면 한번 데리고 오라”고 일렀더니 “그 녀석 만나기 싫어. 중간에 사람이 들고 명함을 들여보내도 뭐가 그리 바쁜지 잘 만나주지를 않아”라고 푸념을 하더군요-.
학적부에 나타난 박헌영은…(후략)
(‘남북의 대화(61)-박헌영의 과격성(상)’, 동아일보 1972년 3월 9일 4면)
‘동아·조선일보서 기자활동’
(전략)…해방 후 좋든 나쁘든 한국정치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그는 이북에서는 스파이로 몰려 숙청되고 이남에서는 반민족자로 규탄받는가 하면 6·25를 겪는 동안 8촌 이내의 집안사람이 모두 없어진 그의 일문에서는 족보에서마저 그를 빼버렸다. 그의 ‘과거’에 대해 ‘리차드 E 라우터배크’는 그의 ‘한국미군정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박 씨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중략)…
<주=동아일보에 의하면 1926년 6월 제2차 공산당 사건으로 일경에 피검, 정신병자로 가장함으로써 27년 11월 24일 병보석돼 출감한 후 1년 후인 28년 11월 16일 부인과 함께 국외로 탈출했다고 돼 있다.> …(중략)…
박헌영은 1925년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벌이기전엔 동아·조선의 기자생활도 갖지만, 유능한 기자라는 평을 받지 못한 채 퇴사, 제 2차 공산당 조직사건으로 일경에 피검됐다가 풀려나온다. 그와 함께 일한 바 있는 유광렬 씨(75·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 현 한국일보 논설위원)는 그 무렵의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상히 말하고 있다.
-1920년4월 창간사원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해서 24년 10월(당시 사회부장)에 퇴사할 때까지 박헌영이라는 사람이 동아일보에 있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1925년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 임원근이라는 기자로부터 비로소 박헌영이가 동아일보 판매부 직원으로 있다가 조선일보 기자로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임씨는 또 3·1운동 후 김단야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 6개월 코스의 동방공산대학을 졸업하고 국내로 들어오다가 셋이 모두 신의주에서 붙잡혀 1년여 감옥생활을 하고 나왔다고 실토하기도 했습니다. 이 임원근 기자는 내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 사회부 기자로 들어왔는데 어떻게 해서 그가 입사했느냐고 누구한테 들으니까 24년 4월부터 약 한 달간 동아일보 사장 서리를 맡았던 허헌 씨가 천거해서 들어온 거라고 합디다. 그해 임씨는 허헌의 딸인 허정숙<주=일제 때 중국 연안으로 들어갔다 해방 후 월북, 48년 북괴 문화선전상 57년 최고재판소장 61년 연안파 관계로 제거됨>과 정식 결혼을 했지요.
‘김단야 조봉암과 함께 쫓겨나’
내가 조선일보에 있을 때 사회부기자로 임원근과 함께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이 있었지만 김단야를 제외하고는 기자로서는 유능하지 못했습니다. 박헌영은 취재도 깊이 있게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사도 잘 쓰지 못해 처음에는 사회부에 있다가 얼마 후에는 지방부에 가서 일했지요. 그가 쓴 기사는 미흡해서 채택할 수 없어 휴지통에 버린 기억이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마찰이 없었어요. 김단야는 머리도 좋고 글도 잘 써서 내가 몹시 아끼고 좋아했습니다.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등 좌익기자들은 조선일보 영업국장이던 홍증식을 통해서 대거 들어왔는데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25년 4월에 아서원에서 전 조선기자대회를 열고 소위 제 2차 공산당을 조직했지요. 그런데 일제는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막연히 조선일보 내에 좌익기자가 많다고만 생각하고 무언가 손을 써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중 이 해 9월 8일자 조선일보에 “조선과 노국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이 실렸어요. 그러자 총독부는 이것이 불온하다고 트집을 잡아 무기정간처분을 내렸습니다. 그 후 총독부는 당시 사주인 신석우 씨 등을 종용하여 “좌익기자를 모두 내보내면 무기정간을 풀어주겠다”고 해서 좌익기자들은 회사 측에 “총독부와 잘 통할 수 있는 이상협(당시 이사)이가 손을 쓰지 않아 정간을 당했으니 태업의 책임을 물어 이상협이가 동아일보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도 함께 내보내야된다”고 주장해서 나도 그 바람에 밀려났지요. 박헌영 등은 그 후 몇 달 뒤에 검거됐다가 감옥에서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병보석으로 나왔습니다. 당시 조선일보에 들어가 일하고 있을 때인 28년 어느 날 데스크를 보면서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데 모자를 쓴 박헌영이 부인과 함께 신문사에 나타났어요. 그래서 원고지에 “너가 나를 알겠느냐”고 써서 밀어보였더니 픽 웃으며 “그럼 내가 유광렬이를 몰라”라고 대답했다가 아차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별안간 미친 듯이 공장으로 뛰어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를 눈치챈 그 부인이 “저 분이 또 발작해서 저러네”라고 중얼거리며 뒤따라가서 붙잡아 데리고 나가더군요. 그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후 어느 해인가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한기악 씨 집으로 한씨를 방문했더니 “엊저녁에 박헌영이가 우리집에 와서 조선일보에 들어가겠다고 말해서 내가 그건 어려울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말한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동아일보 퇴사 직원록’에 적힌 박헌영의 약력은 …(중략)…
박헌영이가 제출한 이력서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 퇴사 직원록에 기재된 것 중 22년 상해상과대학을 수업했다는 부분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아마 공산주의자로서의 활동을 반증하는 감옥생활기간을 총독부에 은폐하기 위해 끌어댄 이력일 수도 있다. 어떻든 39년 출옥한 후 해방이 될 때까지 광주의 벽돌공장에서 인부로 가장, 피신해 있던 박헌영은 서울에 나타나 맹렬한 활동을 벌인다.
‘신경질적 성질, 번쩍이는 눈’
이 무렵 그를 만났던 ‘라우터배크’는 박헌영에 관해 “씨는 소구 신경질적인 성격이며 번쩍이는 눈에는 뿔테안경을 쓰고 있다”고 그의 저서에 묘사하고 있다.
…(중략)…
다시 유광렬 씨의 회고담.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마지막으로 본 지 17년만인 해방되던 45년 가을 청진동 입구 길거리에서 딱 한번 그를 마주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공산당의 한 사무실이 광화문 碑閣 옆 구KNA자리에 있었는데 나는 그날 그 앞을 지나 화신 쪽으로 가던 중이었고 박은 화신을 지나 광화문 쪽으로 오던 길이었습니다. 나와 부딪친 그는 “유선생 참 오래간만입니다. 일이 많은 이 시국에 나와서 일하시지 않고 왜 들어앉아 계십니까”라고 인사를 해요. 그래서 나는 “나 같은 사람이 뭐 일할 재목이 됩니까”고 겸손하게 대꾸했더니 다시 그는 “일간 내 사무실로 한번 찾아와 주십시오”라고 부탁합디다. 이 말에 내가 “아니 박 선생은 지금 서쪽을 향해 가시고 나는 동쪽을 향해 가는데 어떻게 선생 사무소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고 서로 노선이 다르다는 뜻이 포함된 함축성 있는 대답을 했더니, 그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달 후인 46년 초 내가 글을 싣고 있던 조선일보와 자유신문에다 공산당이 찬탁을 들고 나온 것은 매국적 행동이라는 등의 신랄한 논설을 게재했습니다. 이걸 본 공산당원들이 크게 분개해서 박헌영에게 “그 따위 논설을 쓴 유광렬이를 제거해버리자”고 제의하니까 박의 말이 “내가 알기로는 유광렬이란 사람은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닌 휴매니스트지 반동분자는 결코 아니다. 그런 사람까지 제거하면 우리의 손실이다”고 주장해서 무마가 됐다는 걸 그 후 들었습니다. 박헌영의 그 말속에는 지금 생각해보면 한가닥 인정도 섞여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강성재 기자>
(‘남북의 대화(62)-박헌영의 과격성(하)’, 동아일보 1972년 3월 11일 4면)
나와 같이 조선일보사를 쫓겨난 좌익기자들의 우두머리격인 박헌영은 아주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동아일보에서 翠松(우편으로 독자에게 신문을 발송하는 것)을 담당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동아일보를 떠나 조선일보에 들어가보니 지방부에서 기사 정리를 하는 기자였다. 내가 사회부장이 됐을 때 사회부 기자로 왔는데 기자로는 별 능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글을 지독히 못썼다. 그는 내가 1924년 4월 동아일보에서 송진우 사장을 배척하는 ‘스트라이크’를 한 후 그만두었다가 복직했을 때 편집국장으로 와 있던 홍명희와는 그런 점에서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는 한때 허정숙과 살았던 임원근 김단야와 친했는데 셋은 똑같이 ‘모스크바’ 동방대학을 나왔다. 박은 글을 못썼어도 셋 중 머리가 제일 좋은 것 같았다. 비밀운동을 하는 사람답게 말이 없는 대신 아주 엉큼했다. 나는 그와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에 별로 친하지 않아 그가 예산사람이라는 것만 알지 그 이상은 모른다. 내가 동아일보의 서승효씨에게 물으니 술집작부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는 조선일보를 쫓겨난 지 한달만인 11월 25일 신의주에서 발각된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잡혀들어갔다.
언론계에서 좌익기자들을 전부 쓸어내고 제1차 조선공산당을 완전히 붕괴시킨 신의주사건은 아주 우연히 터진 것이었다. 1925년 11월 22일 신의주에 있던 한 신만청년회원이 변호사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변호사를 때린 청년회원이 붉은 도수(赤吐手)를 끼고 있는 것을 의심, 청년의 가택을 수색했다. 그의 집에서 박헌영이 김단야에게 보낸 비밀서류와 공산당에 관한 일체의 서류가 나왔다. 이를 근거로 경찰은 좌익계를 때려잡기 시작했다. 신문기자로는 박헌영 홍증식 임원근 김재봉 등이 검거되고 김단야만 교묘히 국외로 탈출했다. 이때부터 민간 신문계에서는 좌익기자들이 활개 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박은 잡혀 들어가서도 엉큼스럽게 미친척했다. 그의 연극이 어찌나 진짜처럼 보였던지 그는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1927년(편집자주-1928년인 듯 함) 봄 내가 복직,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 그는 부인 주세죽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보석 중이라 그때도 미친 척했다. 그의 부인은 나에게 가까이와 “집안에만 있으니 갑갑해 하는 것 같아 데리고 나왔다. 정신병이라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부인과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맞은편 책상에 앉아 감개무량한 듯 나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정신병의 진위를 알아보려고 원고지에 “나를 아느냐”고 써서 주었다. 그는 원고지를 받아 읽어보더니 엉겁결에 그가 미친적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유광렬이를 몰라”하고 대답했다. 그는 대답하고 나서야 실수했다고 생각했던지 부인을 이끌고 공장으로 달아났다.
그는 조선일보사에서 나와 같이 근무할 때 나에게 냉혹하게 대했다. 당시 사회부장은 좌익청년에게 매맞는 자리였다. 좌익 단체인 화요회·북풍회·서울청년회·적박단(赤雹團) 등은 신문기사가 자기들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나오면 신문사에 몰려와 야료를 부리고 사회부장과 취재기자를 때리곤 했다. 이럴 때면 같은 좌익 기자지만 김단야는 “왜 그러느냐. 신문사는 신문사대로 입장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렸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말리는 김단야를 못마땅하게 생각, “야, 너는 유광렬 개인을 위해 무엇 때문에 나서느냐”고 빈정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그를 괘씸하게 생각하곤 했다.
그는 조선일보에 부인과 함께 나를 찾아온 뒤 자취를 감춰버렸다. 1927년 가을 내가 편집국장 한기악을 찾아갔더니 박헌영이 왔었다고 알려주었다. 박은 한기악 씨에게 “ ‘러셔’에 가 보았으나 독립운동도 공산당운동도 잘 안돼 귀국했다”며 “다시 조선일보 기자가 되어 새 출발하고 싶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좌익기자 때문에 조선일보를 쫓겨난 경력이 있기 때문에 “다시 박을 채용하면 경무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한기악 씨도 내 의견을 따랐다.
내가 그를 마지막 만난 것은 해방직후였다. 1945년 8월말께 청진동 거리를 지나다 그를 만났다. 거의 20년만에 만난 것이다. 그는 나에게 달려와 “유선생, 오래간만이요.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왔는데 왜 가만히 있소”하며 일을 같이하자는 뜻을 비쳤다. 나는 두 사람은 갈 길이 다르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렇게도 나에게 냉정했던 박도 나에게 선심을 한번 쓴 적이 있었다. 해방 후 나는 자유신문과 조선일보에 공산당을 공격하는 사설을 많이 썼다. 박의 부하들은 이런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 나를 죽이려 모의했는데 박이 이를 알고 “아예 유광렬이는 다치지 말라. 그는 ‘부르좌’가 될 사람도 아니라”고 부하들을 말렸다는 말을 들었다.
(유광렬(柳光烈), ‘나의 이력서-박헌영’, 한국일보 1974년 4월 13일 4면)
그래서 회의명칭도 처음엔 무산이란 두 자를 머리에 사용하려 했으나 무산이란 말을 쓰면 일본이 사사건건 간섭하고 전단 한 장 뿌릴 수 없을 것 같아 신흥이란 용어를 대신 쓴 것이다. 회의 목적은 무산계급청년의 교양과 단결을 기하는데 두었고 회원의 자격은 18세 이상 30세까지의 무산청년으로 제한했다.
워낙 활동에 제한을 받는 때인지라 청년회의 사업계획이란 것도 겉으로는 ‘출판 강연 강습 연극 등을 때때로 개최하며 청년수양에 관한 일반조사를 실시한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신흥청년동맹은 내부적으로는 지금까지 우후죽순격으로 무수히 탄생한 여느 청년단체와는 그 질이 달랐다. 국내에서도 홍명희 홍증식 윤덕병 구연흠 원우관 이재성 조봉암 등 신사상연구회(뒤에 화요회가 됨) 그룹과 그밖에 북성회 그룹을 모두 망라했고 국제적으로도 사실상 코민테른의 직접지도를 받은 단체였다. 그와 같은 실례로 신흥청년회에는 ‘코민테른’측에서 밀파한 김재봉 신철 등이 이미 조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들 중 김재봉은 23년 4월에 코민테른, 꼬르뷰로(고려국)의 당조직책으로, 신철은 공산청년동맹조직책 사명을 띠고 배후에서 조직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사실상 상당한 정치자금도 가지고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신흥청년동맹은 처음부터 조직목적이 국내 공산주의조직의 전위단계로 표면에 내세워진 청년단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박헌영 등이 출옥하자마자 입회활동을 한 것도 속셈을 미리 두고 끼어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겉으로는 차분한 듯하면서도 곰처럼 끈질긴 박의 강인성은 차차 활동상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흥청년동맹이 결성되고 안 뒤 12일 뒤인 23일 박헌영은 홍명희 김찬 등과 함께 종로중앙회관에서 첫 대강연회를 가지려했으나 악명 높기로 이름났던 종로서가 돌연 불온하다는 이유로 강연회를 금지했다.
이 때문에 첫 대강연회 계획은 깨져 다시 3월 11일부터 한 달 동안에 걸쳐 전국순회강연을 열었다. 순회강연 팀은 남조선반과 서조선반의 두 팀으로 나뉘어져 박헌영은 김찬 신철과 함께 청주 공주 대구 광주 등 28개 도시를 순회하며 ‘청년의 사회적 지위’ ‘이제로부터의 청년’ ‘청년의 사고고찰’ 등 꽤 다양한 제목의 강연회를 가졌다.
박헌영의 웅변은 굵직하고 선동적인 편은 못되었으나 설명적이면서 진지한 편이었다. 목소리를 카랑카랑했으며 키가 작은 그가 열변을 토할 때는 야무진 모습을 보였다.
한편으로 신흥청년동맹은 일종의 기관지로 ‘신흥청년’을 만들기 위해 신흥청년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신흥청년사는 8월 11일쯤 회원 20여명이 지금의 관수동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출판에 관한 협의를 했다. 자금은 주식을 500주 가량 만들어 15,000원을 모금키로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신흥청년사는 재무 편집 사무부를 두었는데 상무위원으로는 박헌영을 비롯 김단야 임원근 김찬 홍증식 민태흥 임규호 등이 맡았다. ‘신흥청년’은 그해 9월 창간호를 냈으나 자금사정으로 그 이상 속간하지 못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국내에 들어선지 몇 달 안에 박헌영은 이미 그의 조직의 촉수를 청년단체 출판사에 뿌리 뻗 친 것이다.
조선청년총동맹 창설과 기자생활
신흥청년동맹소속의 대표적인 인사로 순회강연에 참가하는 등 사회주의운동에 한창 열을 올리던 박헌영은 1924년 4월 15일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그가 취직을 해보기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신문사라면 국내 최고의 지성인들만이 일하던 곳으로 직접이라기보다 하나의 우국지사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던 곳이었다.
박헌영 입사당시의 동아는 송진우가 사장자리에서 물러나고 허헌이 사장자리를 맡고 있을 때이었다. 그 때 동아일보는 친일깡패인 세칭 박춘금 테러사건으로 일대 파란을 겪은 때였다.
24년에 들어서면서 전국 각지에는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비롯한 청년단체운동이 활발히 벌어지자 친일파 송병준계는 소작인상조회를 비롯한 유지단체를 만들어 민족운동을 막으려 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가 사설로 비판하자 친일앞잡이의 노동단체인 노동상애회의 회장 박춘금이란 자는 4월 2일 송진우 사장을 식도원으로 유인한 뒤 3시간에 걸쳐 권총과 단도로 협박하며 사죄문을 쓰도록 강요했다. 송 사장은 끝내 사죄문을 쓰진 않았지만 사과 비슷한 글을 써주어 결국 이 때문에 회사를 인책 사퇴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박이 어떤 경위로 입사하게 됐는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허헌이 직접 박을 채용했다고도 한다.
박헌영은 동아일보에 취직한 뒤 마치 날개라도 단 듯 신문사 사원의 신분을 이용해서 활동에 열을 띠었다. 겉으로라도 룸펜으로 청년운동을 하기보다는 신문사 사원으로 일하기가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국내의 사회주의 청년운동계에서는 여러 파로 갈려 파벌싸움 한 것에 차차 반성의 기운이 떠돌아 청년단체의 전국적인 통일조직을 모색하였다. 서울청년회측은 선수를 들어 “우리는 계급적 대단결을 목표로 청년운동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선청년총동맹을 발기하노라. 이에 공명하여 전진하려는 각 청년단체여, 어서 가맹하여라! 단결하라!”고 주창했다.
박헌영이 가입해 있던 신흥청년동맹도 그 이상 독주활동을 한다는 것은 명분도 서지 않을뿐더러 국내의 청년단체가 통일조직을 만드는 데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총동맹조직에 찬성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1924년 4월 12일 서울에서는 역사적인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가 개막되었다. 회의는 임시의장 한신교(서울청년회계)의 식사, 34통의 축전낭독으로 시작하여 의사일정에 들어갔다. 창립대회에 이르기까지 참가권고 통고를 보낸 곳이 모두 520군데이며 본 대회에 참가한 단체는 223개 단체, 회원은 37,150여 명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청년의 조직적 단체에 민중적 정신을 고무하고 계급적 의식을 주입함으로써 그 필연의 도정을 밟게 하는 것을 근본 방침으로 한다”고 정하고 교양선전 노농 부인 교육문제 계몽을 솔선하기로 운동방침을 정했다.
특히 이 회에서는 동척문제에 대해 착취사업으로 규정, 이를 배척키로하고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타협적 민족운동은 절대 배척한다고 성명했다.
회의는 3일째 계속되었으나 마지막 날 창립대회의 경비문제 토의 중 경찰로부터 해산명령을 당했다.
이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박헌영은 임시의장이었던 한신교 주종건 최순탁 강제모 등과 함께 5명으로 구성된 중앙검사위원으로 뽑혔다. 중앙집행위원은 600명이었다.
조선청년총동맹의 창립은 600여개를 헤아리던 당시의 각종 청년단체 중에서 250여 단체가 하나의 이념과 기치 밑에 결성됐다는 것으로 보아 한국 청년운동사상이나 사회운동사에서 괄목할만한 거사로 기록되었다.
동아일보기자로 있던 박헌영은 1924년 9월께 조선일보로 일자리를 옮겼다. 그 무렵 송병준이 경영하던 조선일보는 경영난에 빠져 동아 영업국장으로 있던 홍증식이 신석우의 부친 신태휴를 설득해 85,000원으로 회사를 인수했다. 그리고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막대한 경영자금을 끌어들인 홍증식이란 사람은 충남 당진 출신으로 수완이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홍은 조선일보에 자금을 끌어낸 대신 영업국장 자리에 앉아 상당한 실력을 갖게 됐다. 동아에서 박춘금 사건을 계기로 옮겨온 김동성 이상협과 함께 신문사를 인수하다시피 했다.
박헌영이 조선일보기자로 자리를 옮긴 것은 바로 홍증식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홍을 통해 당시 조선일보에는 사회주의 물이 든 기자들이 대거 입사했다.
그때 편집국 사회부에는 박헌영과 함께 김단야 임원근 조봉암 지방부에는 홍남표(남로당 출신, 월북 후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 역임)가 들어갔고, 논설반에는 김준연 신일용이 들어갔다.
박헌영은 신문기자만은 어느 직업보다도 안성마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 세 사람은 서로 성격이 대조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셋은 늘 수근대며 똘똘 뭉쳐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조선일보에는 화요회계 홍증식을 중심으로 모두 공산당조직세력들이 서올 뭉쳐 열을 올렸던 것 같다. 그래서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주목을 받아오던 중 1925년 9월 8일 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서울 청년회계의 논설위원인 신일용이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라는 제목 하에 “조선과 러시아의 영사관이 개설된데 주목하여 소련의 힘을 빌어 조선 독립을 쟁취하자”는 내용의 사설을 써 총독부의 격분을 터뜨리게 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문사는 윤전기가 압수되고 무기한 정간을 당하고 또한 신일용은 구속되었다. 이것이 조선일보 3차 정간사건이며 우리나라 언론사상 필화사건으로 집필자가 구속되기는 처음인 사건이다.
총독부 당국은 사주인 신석우에게 반일좌익자들을 몰아내면 정간을 풀어주겠다고 종용했다. 사내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이상협 등 우익기자들과 북풍회 기자들은 총독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맞서 투쟁하자고 고집했다. 그러나 홍증식 등 화요회계는 총독부의 요구를 들어주고 신문을 속간하자고 주장, 간부회의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결국 총독부는 정간 37일만인 10월 15일 정간을 해제해주었고 해제와 더불어 신문사는 개별적으로 총독부가 지명한 기자를 불러 해임통지를 했는데 결국 이상협계의 유광렬 김형원, 북성회계의 서범석 손영극, 화요계의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등 모두 17명이 해직되었다.
이에대해 유광렬 씨는 당시 화요회계가 퇴진을 요구받고 궁지에 몰리자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등이 총독부와 잘 통하는 이상협이 정간을 막을 수 있으면서도 손을 쓰지 않아 당했으니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 이씨 계열도 결국 사퇴했다고 말하고 있다.
화요회계가 총독부의 요구를 받아들인데는 신문사 지국망을 통해 자기네 지방조직을 해놓고 있던 터이라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전국 조직을 살리자는 속셈에서였다. 그래서 집단해임된 기자 가운데 유광렬 씨 등 10여명이 23일 하오 7시 돈의동의 중국음식점에 모여 사후대책을 숙의할 때 박헌영은 “우리는 이상협 등과 퇴사한 동기도 다를 뿐 아니라 어떠한 일을 막론하고 그들과 의논할 수 없다”고 공언했다는 것이었다.
(박갑동, ‘박헌영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인간사, 1983, 40~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