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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동아일보 사람들- 김철중

Posted by 신이 On 11월 - 1 - 2018

 

김철중(金鐵中, 1882~1962)은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때 영업국 서기로 입사해 1937년 9월 은퇴할 때까지 서무부장, 발행인, 편집인, 경판부장, 발송부장을 역임했다. 경성판매부장으로 있을 때인 1926년 동아일보 광화문사옥 신축의 감독을 맡았고, 비슷한 시기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 제2차 무기정간과 관련해 송진우 주필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풍속학자 송사 김화진은 1965년 4월 동아방송 대담프로그램 ‘얘기의 샘’에서 “당시에 영업부장으로 동아일보를 잘 지키던 이”라고 김철중을 소개했다. 해방 후 1947년 2월부터 1947년 7월까지 감사역으로 있었다.

 

김철중(金鐵中) (옥구, 1882~ ) ▲ 1920. 4 서기, 서무부장 사무취급, 서무부장, 발행인 ․ 편집인, 경판부장, 발송부장 겸, 서무부장, 15년근속표창, 1937. 9 퇴사. ▲ 1947. 2 감사역, 이하 권2 참조.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김철중(金鐵中) (옥구, 1882~ 몰) ▲ 폐간전 서무부장. ▲ 47. 2 감사역, 49. 7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창간 진용

창간 당시 진용은 다음과 같다.

(…)

영업국장 이운
서무부장 임면순
경리부장 이운(겸직)
판매부장 유태로
광고부장 남상일
서기 김동혁(경리) 최익진(서무=공장담당) 양재홍(광고) 하희원(광고)
황치영(광고) 이종익(서무) 신효범(광고) 김철중(서무)
이응호(서무) 유국한(판매) 김두백(판매) 임국번(판매)
광고부 촉탁 오기노 이쿠마(萩野生馬)(비상임)
(이상 17명)

공장장(영업국소속) 공석
문선과장 김경희
연판과장 이용구
문선 13명
식자 1명
정판 2명
해판 2명
기계 2명

(…)

김성수 사장 재취임

1924년 4월 간부진의 대개편이 있었을 때, 취체역을 사임했던 김성수는 9월 10일 본사 고문에 추대되었다가 10월 정기주총에서 대표취체역에 선출됨으로써 제5대 사장으로 두 번째 사장직에 취임했다. 사장에 취임한 김성수는 송진우, 이승훈 전 사장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특히 이승훈 고문은 그가 사망한 1930년 4월까지 계속 그 직에 있었다.

또 하나 특기할 일은 제3회 정기주총에서 ‘주주는 조선인에 한함’의 1항을 정관에 삽입하여 동아일보사의 성격을 한층 뚜렷이 한 일이었다.

김성수는 어떤 일에든 옆에서 조력자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직접 앞에 나서는 일을 즐겨하지 않는 성품의 사람이었지만,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는 사태 수습과 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면도 있었다. 제2대 사장에 취임했을 때는 ‘주식회사’ 설립이라는 어려운 일을 성취시켜 기초를 튼튼히 구축하였고 제5대 사장에 취임하여서도 사옥신축이란 힘겨운 사업을 완성시켰다.

김성수가 사장에 재취임한 후 1924년 10월 24일자 사설 ‘취임에 제(際)하여’에서 본보는 ‘외국의 유수한 신문에 비하여 내용과 설비가 아직도 불충분한 것이 많다 할지라도 현재 조선 사계(斯界)에 있어서 권위와 신용을 가진 것은 세인(世人)이 공인하는바’라며 이것은 모두 사원일동의 불휴불면(不休不眠)의 고심 분투한 결과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국민적인 성원에 크게 힘입고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실상은 이것이 기천만의 피와 눈물의 결정(結晶)이며 수심과 한탄의 소산인 것’이라고 한 뒤 ‘본보의 정신은 항상 일관하고 본보의 주장은 영구히 불변할 것’을 다시 약속하였다.

두 번에 걸친 사원들의 이탈로 본사가 입은 타격은 컸다. 김성수 사장은 취임 2개월 후 이들 못지않은 인재들을 영입, 다음과 같이 각 부서를 결정하였다.

▲ 발행인·편집인 김철중
▲ 인쇄인 조의순
▲ 대표취체역·사장 김성수
(전무·상무취체역 겸임)
고문 송진우 이승훈
부사장 장덕수(재미)
취체역 홍명희 허헌 윤홍렬 양원모
감사역 장희봉 이충건
▲ 영업국장 양원모
서무부장 김철중
경리부장대리 김기범
판매부장대리 김석중
광고부장대리 이태로
사업부장 홍성희
▲ 공장장 조의순

(…)

제2차 무기정간

1926년 3월 1일, 3.1운동 7주년을 기념하여 소련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축전이 본보로 날아들었다. 본사에서는 3월 5일자 2면에 그 전보문 사진과 함께 축전을 번역 게재했다. 전보문은 다음과 같다.

(…)

이런 시기였기 때문에 편집실무자들이 국제농민회 본부의 축전 게재를 꺼렸던 것이나 송진우 주필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전보문을 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신문지법 제21조에 저촉된다 하여 3월 6일 제2차 무기정간처분이 내려졌다.

3월 6일 발행정지령이 내리고,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5, 6명이 편집국을 수색해 국제농민회 본부가 보내온 전보원문을 압수하고 주필 송진우, 발행인 겸 편집인 김철중, 고영한 기자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소환 심문한 끝에 송진우 주필은 보안법 위반으로, 김철중 발행인 겸 편집인은 신문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4월 1일 1심 재판에서 송진우 주필은 징역 8개월, 김철중 발행인 겸 편집인은 발행인 책임으로 2개월, 편집인 책임으로 2개월 모두 4개월의 금고형을 받았다. 9월 8일 2심 재판부는 송진우 주필에게 징역 6개월, 김철중 발행인 겸 편집인에게 금고 4개월을 선고했고, 11월 8일 상고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실형이 확정되자, 기자단체인 ‘무명회’는 11월 12일 명월관에서 필화사건으로 복역하다 출옥한 조선일보의 김형원을 환영하고 본보의 송진우, 김철중 양인의 입감(入監)을 위로하기 위하여 송영회(送迎會)를 열었다. 당시 신문이나 독자대중은 압수 등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환영 지지하기까지 하여 압수처분이 나오면 사내에서 쾌재를 불렀다. 신문기자도 ‘신문제작하는 것을 하나의 애국운동’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신문기자가 기사 때문에 수감되는 일은 명예일지언정 수치라고 생각지 않았고, 일반도 그렇게 여겼던 것이다. 이런 시대풍조로 ‘무명회’에서는 송영회를 열어 ‘수감 잔치’로 그들을 위로했던 것이다.

송진우 주필은 3개월 만인 1927년 2월 7일, 그보다 조금 늦게 수감되었던 김철중 발행인 겸 편집인과 함께 감형 출옥하였다.

제2차 무기정간이 해제된 것은 1926년 4월 19일, 신문이 속간된 것은 21일이었다. 정간에서 속간까지 꼭 1개월 반이 걸렸다.

(…)

송진우 주필, 김철중 발행인 겸 편집인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8월 22일 ‘횡설수설’이 다시 필화를 일으켰다.

주의자(主義者)는 검거, 언론기관은 정지가 아니면 금지, 집회와 단체는 위압, 그래도 간판은 문화정치.

어떤 친구 총독정치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정말 기급(奇扱)하다.

현하의 총독정치는 조선인을 이(利)케 하고 익(益)케 하는 인사(人士)는 박해하고 배척하면서도, 조선인을 해(害)케 하고 불리케 하는 놈들은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방침이라고

시고(是故)로 왈 총독정치는 악당보호정치라고.

이것이 문제가 돼 집필자인 논설기자 최원순이 징역 8개월, 김철중 발행인 겸 편집인이 다시 금고 4개월의 선고를 받았다.

(…)

이 충무공 유적보존운동

위토경매설에 대한 민족적 의분에서 발단한 이 운동은 본보의 간곡한 호소가 전 민족의 가슴에 메아리쳐 현충사의 중건, 묘소 비각 종가 수리, 유물의 항구적 보존을 위한 강철금고 제조 등의 큰 사업으로 전개돼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특히 본보에서는 현충사에 모실 영정을 본보 전속화가 이상범에게 위촉해 이 화백이 직접 통영 한산도에 출장가 제승당에 안치된 영정을 대본으로 하여 3개월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새로이 영정을 완성했다. 1932년 6월 5일 영정봉안식이 3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된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본사에서는 송진우 사장, 영정을 그린 이상범 화백, 그 뒷바라지에 힘쓴 숨은 공로자 김철중 서무부장이 참석하였다.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증자와 최두선 사장 취임

1947년 2월 20일에 열린 임시주주총회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의결했다. 총회에서 의장 김성수는 ‘현재의 자본금 70만원으로는 도저히 신문사를 운영할 수 없으므로 자본금을 500만원으로 증자할 것’을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최두선 사장의 선임과 동시에 전무에는 국태일, 취체역에는 김성수 고재욱 김승문 김동섭 임병철 고광표 장덕수 김준연 그리고 감사역에는 김재수 김철중이 선임됐다. 법정 등록인도 바뀌어 발행인은 국태일, 편집인은 고재욱이 되었고, 복간 이래 본보를 주도하여 온 설의식은 물러났다.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십년근속(十年勤續) 본사원(本社員) 소개(紹介)
창간10주년기념(創刊十週年記念)

필화(筆禍)로 옥고(獄苦)… 본보를 대표해

[서무부(庶務部) 김철중 군(金鐵中君)]
군은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全北沃溝郡臨坡面邑內里)에 본적을 두고 개국 사백십일년팔월십일에 출생하얏다. 지난 대정구년 삼월삼십일 본사 서긔로 피선되어 판매부에 근무하고 동년 십월 서무부장 사무취급으로 임명되어 동 십이년 유월에 부장으로 승임되고 동 십사년 오월일일에는 경성판매부장으로 전임되어 소화이년 삼월일일에는 발송부장을 겸임하얏다가 동년 팔월일일 전직을 해임하는 동시에 다시 서무부장으로 임명되어 오늘까지 근속해온 것인데 경성판매부장으로 잇슬때에는 본사 신사옥 건축(新舍屋建築)을 하는 동안 감역(監役)을 겸무하고 지난 소화삼년 함남 수재때에는 여러달 동안 구호반으로서 재지 출장한 일도 잇섯스며 더욱히 지난 소화원년 본보가 정간이 되는 동시에 사법처분을 바더 철창에서 신음까지 햇다.

(‘十年勤續 本社員 紹介’, 동아일보 1930년 4월 10일자 11면) 
 

 

 

東亞日報 發行停止表

즉 제1차는 同報가 大正9년 1월 6일에 창간된 뒤 약 9개월후인 9월 25일 사설에 3종의 神器에 대하야 불경한 언사를 농한 廉으로 무기정간,

제2차는 大正15년 3월 5일에 在莫斯科國際農民組合본부 대표자로부터 온 전보를 번역 게재한 때문에 무기정간까지 당하고 또 편집국장과 편집 겸 발행인 金鐵中씨는 사법처분을 受하야, 西大門형무소에서 受刑하다.

제3차는 昭和5년 4월 2일에 창간 10주년 기념호 지상에 「내외명사가 朝鮮에 寄하는 書」

를 널니 모아실기로 되야 愛蘭의 빠나드, 쇼을 위시하야, 胡適, 랏셀, 東京의 安部璣雄, 室伏高信등의 기고를 실든 중 米國인 삐라도 기고의 『朝鮮민족의 가장 긴급을 요할 不眼不休의 노력』이란 의미의 격언운운으로 무기정간되다, 이때 당시의 淺利警務局長 발표에 의하면 其年 1월부터 3월까지 90일간에 발매금지처분건수 15일, 삭제처분을 명한 건수 24회의 다수에 달하였다고.

(‘東亞日報 發行停止表’, 삼천리, 1936년 11월호)

 

 

그 만행 그 진상, 내가 겪은「일제침략」을 증언한다<10> 뼈에 사무친 창씨개명 

호적 떼보니 金씨가 金子로… 위협으로 안되자「도둑창씨」

1944년 12월 4일、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 사는 김철중(金鐵中)씨(당시 61세)는 면사무소에서 자신의 호적초본을 떼어보고 쇠망치로 뒷머리를 얻어맞은듯한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질뻔 했다。

호적에는 광산 김(金)씨인 자신의 성이 난데없이 금자(金子)로 바뀌어져 있었다。 또 호적초본에는 다음과같이 쓰여있었다。

「氏의 계출을 하지않으므로 인하여 소화 15년8월11일 금자씨로 함」

김씨는 곧바로 당시 일본인 면장 궁야영광(宮野英光)에게 달려가 경위를 따졌으나 면장은『이미 지나간일』이라며 김씨를 무마하려 들었다。

저간의 사정은 명백했다。 면장 궁야영광은 김씨가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자 설득과 위협으로는 불가능할것으로 판단、본인몰래 멋대로 창씨개명을 해놓았던것。

『자신도 모르게 성(姓)을 바꾸어놓다니 이럴수가』 김씨는 발을 동동 굴렀으나 이미 어쩔수가 없었다。

이상은 작고한 나의 선친의 경우였다。

지난 10일자 일간지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일본문부성의 해명내용이 보도됐다。

「창씨개명은 법령상 강제는 아니었고 임의의 신청에 따른 방침이었으며 약 6개월동안의 신청자가 조선인의 80%에 달했다」

난 저들이 얼마나 간악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가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서도 이에 관해 증언하지 않을수 없다。

일제는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령을 내려 전관헌을 동원、한국인의 창씨개명 작업을 추진했다。

당시의 남차랑(南次郎)총독이나 궁본(宮本)법무국장이「일시동인(一視同仁)의 대이상을 구현하는 대화대애(大和大愛)의 발로」라고 떠벌리던 창씨개명、명목은 한국인에게도 자원하는 이에게 일본식으로 성을 고칠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추진과정은 강압적이고 악랄하며 잔인한 것이었다。

소학생들에게 창씨개명을 하지않으면 등교를 허락하지 않았고 창씨거부자는 면사무소나 부청(府廳)에서 공무는 접수조차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창씨를 안하고있는 집은 배급을 중단했으며 비국민이라는 딱지를 붙여 요시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탄압속에서도 우리들의 자신의 성(姓)에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창씨개명에 대한 탄압이 점점 더해가자 견디다못해 죽음으로 이에 항거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나의 선친도 그들의 모든 협박에 끄떡하지않았다。 『내가 살아있는한 우리집안은 어떤일이 있어도 성을 바꿔서는 안된다』는것이었다。

선친은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될때 인촌 고하선생등과 함께 창간작업에 참여한 분이었다。 그후 동아일보의 서무부장 발행인 등을 지내다가 1937년에 은퇴했다。 일제치하에서 동아일보를 이끌어가면서 일본 관헌의 박해에 이골이 나 있었고 또 민족주의자로서의 자긍이 대단했던만큼 창씨개명강요에 넘어갈리 없었다。

창씨개명에 대한 반발이 이처럼 강하고 실적도 부진하자 상부의 닦달에 못이긴 일선 행정기관에서 본인도 모르게 멋대로 창씨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친의 경우가 바로 그 증거다。

저들이 동아일보의 전 발행인에게까지 본인도 모르게 창씨를 하는 판국에 일반인의 경우는 오죽했겠는지 미루어 짐작할수 있지않은가。

선친이 자신의 강제 창씨사실을 알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그 당시 나의 형(金善琪)은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었고 나는 기술장교로 중국에서 복무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일보를 퇴직한후 속세를 등지고 전북 정읍 내장산에 들어가 자연을 벗하며 살다가 만년에 가산을 털어 수원근교에 묘원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으며 칩거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선친은 조상에 대해 깊은 죄의식을 느꼈던 것같다。

선친은 해방후 호적이 다시 원상복구된뒤까지도 그당시 뗀 자신의 호적초본을 간직하고 있다가 내게 넘겨주고 돌아가셨다。 선친이 도둑맞은 성의 기록을 없애지않고 간직하고있던 의도를 난 이제야 분명히 알수있을것같다。

「조상이 당한 만행을 두고두고 잊지말고 후손에게 가르쳐라。 그리하여 다시는 저들에게 속아 근본을 도둑맞는 일이 없도록하라」는 의미로 새겨진다。

(김선집, ‘그 만행 그 진상, 「내가 겪은일제침략」을 증언한다<10> 뼈에 사무친 창씨개명’,동아일보 1982년 8월 17일자 10면)

 

 

이밖에 고하의 55년동안에 걸친 전반적인 행적에 대해 김선기박사(명지대명예교수·언어학)는 한마디로 지조를 지킨 철두철미 민족주의자였다고평가했다。 창씨개명을 강요했을때 환부역조가 될말이냐며 그같은 총독부의 강요를 거부、「민족주의자의 심벌」이 되었다고 말했다。 김박사는 또자신이 고하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된 동기로 33년 당시 조선어학회에 근무할때 동아일보가  신철자법을 채택하면서부터라고 밝혔다。 당시 편집국의 맞춤법고문으로 일했기때문에 자주 뵙고「의리(義理)」를 강조하는 말씀을 경청할 수 있었다고。

특히 김 박사는 자신의 선고(先考-김철중 전 발행인 겸 편집인)가 일장기말소사건(36년)으로 함께 투옥됐었기 때문에 더욱 가까와져 4차로 무기정간 됐을때 인촌댁에서 고하 설산 장덕수 안호상씨(당시 보성전문교수)와 더불어 자주 어울려 그의 고담준론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고하의 암살사건을 인도에서 영국인도 죽이지않았던「간디」를 인도청년들이 암살한 것과 마찬가지 비중의 사건으로 풀이한 김박사는 고하의죽음이 해방후 최대의 민족적 손실이었다고 애석해했다。

(‘민족주의자 고하 송진우 선생’, 동아일보 1980년 5월 7일자 4면)

 

 

일정시대 퇴사직원록- 김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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