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하(金準河, 1927~2017)는 1953년 12월 동아일보 편집국 수습기자로 입사해 1960년 6월 퇴사했다. 김준하는 1950년대 동아일보 전성기를 빛낸 스타기자였다. 정치적 혼란기 박동감 넘치는 기사와 연이은 특종보도로 동아의 성가를 올렸다. 남시욱 전 편집국장은 “김준하 선생은 동아에서 일선기자로 젊음을 불태웠던 때를 가장 보람있는 시절로 회고했다”고 전했다.
김준하(金準河) (이천, 1927~ ) ▲ 53.12 수습(편집국), 기자(정경부), 60. 6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동아일보 전성기의 스타기자-고 김준하 동우를 추모하며
東亞日報 전성기의 스타記者 원로 동우인 김준하(金準河) 선생
이 지난 1월 16일 자택 침실에서 넘어지면서 심한 뇌진탕을 일으켜 불과 10여 시간만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인 그는 1950~60년대 전성기 시절의 동아일보를 빛낸 스타기자 중 하나였다. 당시 동아는 발행부수가 압도적인 1위여서 한국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압도적인 1위라는 의미는 발행부수 2위와 3위를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발행부수였다는 뜻이다. 이 무렵 동아에는 고재욱 편집국장 아래 백광하·김성한 두 부국장을 비롯해 변영권 정경부장과 최호 사회부장 등 기라성 같은 간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김 선생은 고려대 정치학과 졸업 1년을 앞둔 1953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다음 정경부 기자로 국회에 출입하면서 특종을 쏟아냈다. 당시 동아는 요새 말로 하면 한국 신문계에서 사실상 패권적 지위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패권적 신문의 기자인 김 선생은 막강한 동아의 권위를 즐기기만 하는 기자가 아니라 그 권위를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우리 한국 현대사의 생생한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론을 통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한국 현대사를 만든 한 분이기도 하다.
8·15 해방 직후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 땅에 속했던 철원에서 부유한 가정의 3남으로 태어난 김준하 선생은 15세 때 단신으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왔다. 그가 홀로 남하한것은 그의 어머니 덕이었다. 어머니의 용단으로 그를 단신 월남시켜 공산치하를 벗어나게 했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서 중학과 고교과정이 통합되어있던 당시의 구제(舊制)중학교인 기독교계 명문 배재중고교에 입학했다. 5년 후인 1950년에는 배재중학 제65회 졸업생으로 고려대학교에 입 학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한지 불과 석 달만에 민족의 일대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이 서울을 완전 점령하기 직전 천신만고 끝에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그 곳에서 만난 친구로부터 일본으로 함께 밀항하자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를 물리치고 군에 자원입대했다. 다행스럽게도 김준하 선생은 배재학생 때 영어성경을 배우면서 익힌 영어실력 덕으로 신병훈련 과정에서 곧바로 미25사단 포병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평북 운산 지방까지 진격했으나 미 군은 곧 중 공군의 인해 전술에 밀려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간 동안 산악지대에서 포위된 미군 포병대는 포신을 아래로 내려 벌떼처럼 달려드려는 중공군 병사들을 향해 포를 쏘는 기막힌 전투를 했다 한다. 중공군에 밀려 경기도 평택까지 후퇴한 미군이 다시 북진할 때에는 북으로 도주하던 북한군이 미군의 포격을 막기 위해 흰옷을 입은 피란민들을 방패로 삼기도 했다 한다.
그는 동아 입사 후 전쟁 기간 미군부대에서 닦은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환도 직후 고려대학교에 주둔중이던 미5공군 사령부의 사령관을 단독 회견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사령관으로부터 곧 대학캠퍼스를 학교 측에 돌려주겠다는 언명을 특종 보도하기도 했다.
그가 정경부 기자로 명성을 날린 것은 1958년 9월 실시된 경북 영일의 민의원 재선거 개표부정사건을 취재했을 때였다. 그와 함께 현장에 파견된 당시 사진부 기자였던 이명동 선생은 개표 도중 갑자기 전기가 나간 틈을 타서 여당 후보측이 투표지를 빼돌리는 모습을 카메라로 잡는데 성공했다. 김준하 선생은 그의 생생한 현장 사진과 함께 박동감 넘치는 기사로 지면을 빛냈다. 김준하 선생은 또한 1960년 봄 4·19학생 봉기를 유발한 3·15부정사건 때는 경찰이 비밀리에 작성한 부정투개표 사전계획서를 야당인 민주당 수뇌부로부터 단독입수, 특종보도를 해서 동아의 성가를 올렸다. 그는 신변위험 때문에 지방으로 피신했다 한다.
김준하 선생의 기자생활 중 가장 보람 있는 취재는 1954년 7월 그가 국회의원 조사단과 함께 독도 현황취재에 나섰던 때였다 한다. 당시 독도를 수비하던 우리 해경대의 허술한 경비를 틈타 일본 해상보안청의 경비정과 어선들이 수시로 독도 주위에 출몰할 때였다. 그는 서울에 돌아온 후 현지르포기사를 쓰면서 독도에 등대가 하나도 없는 사실을 기사 말미에 적시하고 우리 해경대의 항해안전을 위해 등대 설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기사가 나가자 국회에서도 큰 호응이 일어났다. 신익희 국회의장은 독도 등대 설치촉구결의안을 즉각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런 일들 때문에 김준하 사장은 동아에서 기자 생활을 했을 때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나중에 동양통신 기획위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중년기에는 강원일보 사장으로 신문 경영을 맡기도 했지만 동아에서 일
선기자로 젊음을 불태웠던 이때가 가장 보람 있는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준하 사장은 1960년 4·19 이후 실시된 그해 7월의 5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동아를 떠났다. 그러나 선거에 낙선한 그는 윤보선 대통령 아래서 청와대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이 시기에 여러 가지 일화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청와대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졌을 때 일어났다. 당시 박정희 장군은 청와대로 밀고 들어와 윤 대통령에게 계엄령 추인을 요구했으며 마셜그린 미국대리대사와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이 연이어 청와대를 방문해 윤 대통령에게 국군 통수권자로서 군에 쿠데타 진압을 명령하라는 요청을 했다. 이런 내막을 생생하게 기록한 그의 회고록은 지금도 한국정치사 전공 학자들에게는 필독의 자료가 되고 있다.
김준하 사장은 1963년 민정 이양 때에는 당시 제1야당이던 민정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대변인으로 활약 했다. 그는 대선 직후 실시된 6대 국회의원 총선을 맞아 국회로 입성할 기회가 있었으나 또 다시 난관에 부딪혔다. 그는 이 때 전국구 의원 후보 상위권으로 들어가 처갓집의 도움을 받아 2천만원의 특별 당비까지 완납했다. 그러나 윤보선총재가 그의 자리에 다른 사람을 바꾸어 넣기 위해 양보를 요청했던 것이다. 이 바람에 그는 끝내 정치
가로 입신하는데 실패했다.
김준하 선생은 최근 최순실사건이 불거지자 한국 정치의 향방과 국가장래를 크게 걱정했다. 그는 또한 이번 사태와 관련된 언론의 보도 경향에 대해서도 적잖은 우려를 했었다. 그런 그가 우리 곁을 떠났으므로 이제 그와 시국을 토론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그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빌고자 한다.
故 김준하 동우를 추모하며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 ‘동아일보 전성기의 스타기자-고 김준하 동우를 추모하며’, 동우회보, 2017년 1월 23일 9면)
金準河(김준하)
생각해보니 내가 1953년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수습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대디딘 때가 엊그제 같다.
갓 입사해 선배 기자들의 잔신부름이 고작이었던 올챙이 기자인 나를 국회 출입기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준 고재욱 편집국장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첨예한 여야 대집속에서 하고많은날 정쟁을 일삼던 국회, 그속에서 뉴스를 찾아 동분서주하며 야당지 동아일보의 위상을 한껏 제고시켰다는 내 자부와 금지가 있었기에 지금도 부끄럽지 않은 언론계 재직시절을 회고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때 그시절, 정말 남기고 싶은 말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기억을 더듬어 나름대로 다음 몇가지만 밝혀 둠으로써 한국 언론사에 참고가 됐으면 한다.
먼저 25세의 올챙이 기자시절, 나의 특종기사가 계기가 되어 독도에 등대를 세우게 만든 것은 지금 생각해도 대견하게만 느껴진다.
54년 초여름 ‘쓰지마사노부’라는 일본 참의원 의원이 여러 명의 신문기자들과 독도에 잠입하여 바위마다 일장기를 그려놓고 기자들에게 큰소리로 “쓰지 마사노부 죽도(독도)에 왔다. 한국의 함정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구나”며 큰소리를 친 기사가 일본 신문에 대서특필 됐었다.
특히 일본에서 권위자로 알려진 아사히신문은 ‘한국의 함정은 어디에 있느냐’는 제목으로 독도가 자기들 땅일분 아니라 한국의 소홀한 경비 상태를 비웃기까지 했다. 한국은 그때 3대 국회가 구성되어 이기붕 의원을 의장으로 자유당 체제가 다져지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일본 의원의 이같은 망언이 국내에 전해지자 국회는 발칵 뒤집혔다.
긴급 소집된 국회 본회의에서는 독도에 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결의하고 김상돈 염우량 김동욱 등 세 의원으로 조사단을 구성했다. 당시 동아일보 국회 출입기자였던 나는 조사단을 통행, 7월 24일 경비정 ‘화성호’에 타고 부산을 떠나 현지로 향하게 됐다. 말이 경비정이지 배는 낡을대로 낡았고, 선원은 구멍이 난 러닝셔츠를 입은 채 된장국에 날김치뿐인 조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부산에서 독도까지는 무려 22시간이 소요됐다. 독도까지 가는 도중에 나침반이 고장나서 배가 한대 동서를 가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는가 하면 엔진이 꺼져서 수시간동안 배가 표류하기까지 했다. 화가 난 선장이 자기에게 대드는 기관장을 향해서 권총을 뽑는 촌극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김상돈 의원의 만류로 수습은 됐지만 그 당시 경비대의 실정을 엿볼 수 있는 해프닝이기도 했다.
독도에 상육을 해보니 바위마다 그려놓은 일장기가 우선 분노를 사게 했다. 흙색의 화산암석은 다년간의 풍화작용으로 백토처럼 나약하게 흩어져 있었다. 나는 우리 땅에 일장기가 버젓이 그려지고 마치 일본 국토와 같은 형태로 변해버린 독도의 현실보다도 그때까지 말로만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어대던 이 나라 정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독도에서 자라나고 있던 뱀풀과 엷은 녹색의 잔디는 바위 틈새에 끼여 영양실조 상태에 있었으며, 독도 주변을 헤엄쳐 다니는 물개만이 생동하는 눈요기거리가 됐다.
우리 일행은 검은 페인트를 가져오라고 해서 일장기를 태극기로 고쳐서 그렸고 사찰단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독도단기 4287년 7월 25일 대한민국 민의원 시찰, 김상돈 염우량 김동욱’이라고 절벽에다 써놓기도 했다.
독도를 떠나 부산으로 오던 선실에서 나는 당돌한 생각을 해보았다. ‘만일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으면 일본인들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수도 없을 것이며, 세계적으로도 독도가 우리 땅인 것이 입증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귀사하자마자 ‘절해의 섬 독도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1954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2면에 르포 형식으로 기사를 썼다. 2호 활자의 3단 제목은 ‘어장 보호에 등대설치 긴요’였고, 부제목은 ‘남대문 연상되는 무수한 수문’이었다. 독도에 등대를 설치할 것을 주장한 것은 이것이 최초였고, 신문에서 보도한 것도 이것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도에 등대를 세우자는 신문 보도가 나간지 8일만에 ‘독도와 등대문제’는 마침내 국회로 비화되었다. 8월 6일 국회 본회의에서 독도 문제에 대한 난상토의가 진행되고 나서 김상돈 의원이 등단, 내가 쓴 독도 르포기사 전문을 낭독하고 ‘독도에 등대라든지, 이러한 시설을 해놓고 세계만방에 공표한다면 우리 국토가 된단 말입니다…… 정부가 빨리 추진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신문에(등대 설치문제) 발표된 것은 유감이지만 정부로 하여금 빨리 추진할 것을 촉구합니다…’고 다그치는 발언을 했다.
사회를 보던 이기붕 의장은 ‘김상돈 의원의 말씀을 내무위원회가 조속히 처리하도록’ 결론을 내렸다(이상과 같은 사실은 같은 잘짜 국회 속기록 26호에 상세히 기록돼었듬)
정부나 국회가 진작 알아서 해야 할 일을 신문이 독도의 등대 설치문제를 선도했다는 점에 대해서 유감이라기보다는 자책에 가까운 분위기가 역력했다. 국회에서 독도에 등대 설치문제가 논란이 된지 얼마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독도에 등대를 세우라는 유시를 내렸다.
독도의 등대는 이렇게 해서 세워졌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세계에 알리는데 기념비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40여년전의 독도에 관한 나의 기사를 회상하면서 오늘도 독도문제가 한일간의 현안으로 남아 있고, 또 앞으로도 분쟁은 어김없이 계속 될 것이 현실임을 감안해 볼때 ‘독도에 등대를 세우면 어떨까’를 생각하고 이를 서슴없이 기사화 했던 올챙이 기자시절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자유당시절 이승만 독재정권은 왼손에 김창룡 CIC 대장, 바른손에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거느리고 군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문제에까지 깊숙이 개입해서 무소불위의 전횡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여당 국회의원들까지도 CIC대장, 헌병사령관 하면 이유도 없이 벌벌 떨던 시대였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나는 공교롭게도 그들 두사람과 악연을 맺게 되어 모진 고생도 경험했으며, 또 특종을 얻어내 회사에서 1호봉 승급을 하는 행운을 잡기도 했다.
자유당 말기인 4대 국회 때의 일이다. 국회에 중대한 내용의 투서가 접수됐다. 사병들이 사용하는 담요 수만장이 유실됐다는 것이다. 구회는 논란을 거듭한 끝에 ‘진상 조사단’을 구성, 근 한달동안 조사한 결과를 보고했다. 나는 구회 출입기자로서 당연히 보고내용을 기사화 해서 편집국에 송고했다. 그날 동아일보는 톱기사로 ‘담요 2만장은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내가 작성한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신문이 가판을 시작할 무렵 나는 편집국에 앉아서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돌연 무장한 군인 두명이 편집국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김준하 기자가 누굽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납니다…”하고 대답했다. 군인중 한사람이 “나와 같이 가시지요…나는 CIC에서 왔습니다”였다. 꼼짝못하고 효자동 CIC본부로 지프차를 타고 끌려갔다.
내가 끌려간 곳은 CIC ‘정치 문화과’였다. 과장인 김모 소령은 즉각 나에대한 신문을 시작했다. 신문 요지는 “군대에서 2만장의 담요를 유출했다는 사실을 보도했을 경우, 북한의 김일성이 좋아한다고 보느냐, 싫어한다고 보느냐, 그리고 그러한 보도가 결과적으로 김일성을 이롭게 하느냐, 해롭게 한다고 생각하느냐”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영리한(?) 소령이 나를 국가보안법으로 걸려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는 국가보안법 위만 제1호가 아닌가.
나는 딱부러지게 대답했다. “김일성에게 매우 해롭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가 뭔가?” 김소령은 날카롭게 반문했다. 나는 “소령님 생각해 보슈… 만일 인체 일부에 암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 부분을 빨리 도려내야 사람이 살아날 수가 있듯이 군대도 썩은 부분을 세상에 알려 빨리 도려내야 건전한 군대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2만장의 담요 유출사건을 보도한 것은 김일성에게는 해가 되면 됐지, 이롭지는 못할 것이 아닌가?”하고 설명을 했다.
그러나 김소령은 집요할이만큼 끈질기게 ‘김일성에게 유리하게 된다…’는 결론을 유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이틀밤을 꼬박 새우면서 입씨름은 계속됐으나 나는 한발짝도 후퇴하지 않았다. 후퇴하면 천길만길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김소령은 나의 주장을 꺾지 못하고 신문을 포기하고 말았다.
김창룡 CIC대장이 사흘째 되던 날 나를 오라고 앴다. 그는 악수를 청하면서 “군대와 언론이 힘을 합쳐야 우리 나라가 강해지지 않겠느냐?”는 말을 남기고 나를 석방시켜주었다. 나를 집요하게 신문했던 김소령은 제대후 ‘대한공론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유정회 국회의원도 지냈다.
원용덕 헌병사령관 덕분으로 내가 회사에서 1계급 특진을 할 수 있었던 일도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원용덕 헌병사령관은 잘 알려진대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경쟁에서 정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인물이었다. 이 박사에 대한 충성심에서였든, 권력에 도취었든간에 그가 야당 지도자들을 테스트한답시고 김일성 명의의 편지를 돌린 사건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다.
당시 신익희 조병옥 윤보선 김도연 김준연 씨 등 여러 야당 지도자에게 느닷없이 김일성 명의로 된 편지가 날아들었다. 이 편지를 받고 신고를 하면 별 일이 없지만 만일 신고를 안하고 감추어버리면 ‘불고지죄’가 성립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편지를 받은 야당 지도자들에게는 정치생며잉 걸린 주요한 시건이기도 했다.
결국 이 편지를 받은 야당 지도자들은 한사람 빠짐없이 경찰에 신고를 했고, 이 사건은 ‘불온문서 투입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에서 문제가 됐다. 특별조사단까지 구성하는 사태로 발전하면서 뜻밖에도 이 편지가 원용덕 헌병사령관에 의해 투입됐다는 것을 내가 최초로 확인 보도했으니 보통 행운이 아니었다.
국회 특별조사단의 조사가 진행되던 어느 일요일, 나는 아침부터 조사단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전원 출타하고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는 여기 저기 수소문한 끝에 국회 조사단이 극비리에 국방장관실(지금 병무청 자리)에서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불러놓고 최종 신문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신문사에 알리지도 않고(당시는 일요일에도 신문이 발간되었다) 국방부로 달려갔다.
헌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나는 기자들에게 발급되었단 야간통행증을 보이고 무사히 정문을 통과해서 2층에 있는 장관실 근처로 접근했다. 그러나 보초를 서고 있던 또 다른 헌병이 “누구냐?”고 물으며 앞을 가로 막았다. 나는 즉흥적으로 “나… 김영삼 의원 비서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화장실 쪽으로 갔다.
겁도 나고 해서 화장실 안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영삼 의원이 화장실에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원용덕이가 불온문서를 자기가 투입했다고 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가. 나는 김 의원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국방부를 빠져나올 수 있었으며, 택시를 타고 신문사에 도착하니 석간이 막 인쇄에 들어간 오후 2시였다.
윤전기가 멈춰지고 1면 기사를 새로 만들어 돌리니 제목은 ‘내가 시켰다. 헌병사령관 원용덕’이었다. 완전무결한 특종이 아닌가. 이래서 하는 원용덕 장군 덕분에 회사로부터 1호봉 승급의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근원이 되어 4.19 혁명이 발생했다. 이 4.19 혁명 2~3년을 앞두고 집권당인 자유당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져 치열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유당 총재이기도 했던 이승만 대통려으로서는 본인의 건강과 고령을 생각해서 자신의 후계자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당시 신문들은 국회의장이며 당의장인 이기붕씨를 후계자 제 1후보로 사슴없이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는 언제나 경쟁자가 나타나는 법. 부산 피난시절 원외 자유당을 리드했던 철기 이범석 씨를 비롯해서 몇 명의 후계자 후보들이 정계의 ‘참새’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만송 이기붕 씨의 후계자 구도가 반석처럼 생각됐었다. 그 근거로 두가지 사실이 거론됐다. 첫째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시가 동성동본이라믄 점, 둘째는 이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이기붕 의장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 사이가 자매 이상으로 긴밀한 사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의 국내 사정이 어두웠던 관계로 만사를 박마리아 여사와 의논하고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공평하지만은 않았다. 이기붕 씨에게는 건강이라고 하는 큰 장애물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자유로이 말도 못했고 또 자유스럽게 보행을 할 수가 없을 만큼 건강이 최악의 상태였다. 어떻게 하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확실하게 후계자의 벨트를 인수받을 수 있을까? 자나깨나 이기붕씨에게는 후계자 문제가 그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바로 그 무렵 이기붕씨는 이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경무대(청와대 전신)를 방문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단도직입적으로 이기붕씨의 장남 이강석 군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으면 하는 의향을 내비췄다. 이기붕씨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기붕씨에게는 본인이 그렇게도 노심초사하던 후계자문제가 살타래처럼 풀리듯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다.
이기붕시는 확답을 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이 대통령과 이 의장의 이날의 언약은 극비에 붙이기로 했다. 이기붕씨는 대통령과의 언약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당시 무소속 대표이기도 했던 임흥순 의원을 불러 사무적인 문제를 위임했다.
나는 그 무렵 취재를 목적으로 신당동 임흥순 의원 댁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임 의원이 슬며시 이강석군 양자문제를 흘리면서 “만일 그것이 성사된다면 여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가?”하고 나에게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두갈래의 의견을 예상할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는 이가석 군의 양자 문제가 해결되면 이기붕씨의 후계구도가 거의 확정된 것과 마찬가지가 되지만, 반대로 이기붕씨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기의 자식을 대통령게게 헌납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다음날 신문사에 출그하자마자 최호 사회부장에게 이강석군의 양자 문제를 알렸다. 사회부가 아연 긴장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후 사회부에서는 종로구청에 가서 이강석군이 이 대통령 호적에 입적된 사실을 확인하고 호적등본을 촬영까지 했다. 완전한 보도자료(증거)를 입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절로(우승규) 편집국장은 신중했다. 대통령에 관계되는 문제이니 만큼 이기붕씨에게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기붕씨에 대한 취재 지시가 나에게 떨어졌다.
서대문 이기붕씨댁에 알아보니 이기붕씨가 아침에 부인과 함께 온양온천으로 휴양을 갔다는 것이었다. 나느 아내를 데리고 신문사 지프로 즉각 온양을 향해 떠났다. “아들을 대통령게게 양자로 보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너무나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아내를 데리고 간 것이다.
그 당시 온양관광후텔은 2층 건물로 객실도 몇 개 되지 않았다. 나는 아래층에 짐을 푸고 2층에 투숙한 이기붕씨 내외가 저녁을 들기 위해 식다에 내려 오기만 기다렸다. 저녁 7시 경, 이 의장 내외가 외부인사 한사람과 같이 식당에 들어왔다. 나의 인사를 받고 그는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뜻밖에도 “식사후 3층에 잇는 ‘샤플포드’대에서 부부끼리 시합이나 하자”는 것이 아니가.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2층에 올라가 부부가 한조가 되어 ‘샤플포드’ 게임을 즐겼다. 물론 우리 부부가 이겼다. 게임이 끝나고 내가 이기붕씨에게 다가가 질문을 하려는 순간 박마리아 여사가 가로막았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잠시 후에 자기들 방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10여분후에 그의 방을 찾았을때 문을 열어 주면서 이 의장이 피곤하시니 내일 아침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나는 별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하고 아래층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새벽 2시쯤 시끄러운 엔젠소리에 잠이 깼고 수상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피곤해서인지 바로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 여섯시가 되자 방을 노크하는 사람이 있어 열어보니 호텔 지배인이었다. “이기붕 의장께서 새벽 2시경 서울로 떠나면서 서울로 돌아오면 전화를 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박마리아 여자로부터 환전히 따돌림을 당한 꼴이 됐다.
기자로서 낙제생이 된 것이다. 신문사는 이날 석간에 ‘이기붕 의장, 그의 아들을 이 대통령 양자로…’를 보도할 계획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내가 실망한 얼굴로 신문사에 도착했을때 나절로 편집국장은 대뜸 “이기붕 의장을 만났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네” 대답했고 그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당신 견습기자 다시 해야 되겠군…” 그의 뼈 있는 한마디가 나의 결심을 재촉했다. 그날로 나는 사표를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연합신문’이 그날 석간에 이강석군의 양자문제를 특종(?)으로 보도했다. 이제와서 나의 취재 미스는 책임을 면할래야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변영권 정치부장, 최호 사회부장이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부득이 했던 일인데… 뭘 그래… 내일 출근하라’고 나를 위안해 주었다. 그러나 차마 출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나절로 국장이 직접 왔다. “이사람… 나와 같이 출근하자구…” 이렇게 해서 체면 불구하고 나는 회사에 다시 나가게 됐다. 나의 기자 생활을 통해서 유일한 취재 실패담이었다.
‘3.15 부정선거’라고 흔히 불려지고 있는 제3대 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의 이승만 이기붕 정부통령 후보와 야당인 민주당의 조병옥 장면 후보가 러닝메이트로 대결했던 선거였다.
선거도중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서거함으로써 선거의 핵심은 부통령선거로 옮겨지게 됐다. 나는 선거 10여일을 앞두고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본격적으로 부정선거를 강행할 목적으로 전국 시도경찰국장에게 ‘부정선거 지령문’을 발송했다는 정보가 그것이었다.
최 내무는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드문 미국 유학출신으로 항상 ‘전화가입 허가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여보, 전화 한대 줄까…”하며 국회의원이나 출입기자들에게 곧잘 인심을 쓰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어느날 저녁 순화동에 있는 민주당 대변인 조재천 의원 댁을 방문했다. 부정선거 지령문에 대한 취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조 의원을 보자마자 “조 의원… 부정선거 지령문을 장면 부통령(장면 씨는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있었다)이 보관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는데 아시고 계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조 의원은 “전혀 모르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래서 나는 “조 의원, 이번에 협조를 안해 주시면 동아일보도 당신에게 절대로 협조하지 않겠습니다…” 협박조로 말했다.
나의 협박(?)은 즉시 효력을 발휘했다. 조 의원은 같은 순화동의 부통령 공관에 살고 있던 장 부통령을 그날 밤 방문해서 문제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가지고 왔다. 조 의원의 설명에 따르면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김기택 의원이 전남경찰국장으로부터 지령문을 입수했다는 것이다. 김 총무는 과거에 전남경찰국장을 역임한바 있어서 경찰과는 비교적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그때 내가 입수한 ‘부정선거 지령문’의 내용은 2할 사전투표를 포함해서 A4용지 3장분 가량의 분량에 망국적인 부정선거 방법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나는 조의원에게 하룻밤만 이 지령문을 빌려달라고 했다. 부정선거 지령무을 집으로 가녀와서 나는 처와 함게 밤새도록 옯겨 적었다. 다음날 신문사에 가서 취재경위를 알리고 기사를 썼다. 편집국장 겸 주필이었던 고재욱 씨가 나를 불렀다.
“김 기자, 이 기사(부정선거 지령문)은 사운을 거는 중요한 기사야. 책임을 질 수 있지?” 나에게 다짐하듯이 질문했다. 나는 서슴없이 “책임지겠습니다” 자신있게 확답을 했다.
그날 동아 석간에는 ‘부정선거 전모’라는 제목으로 문제의 ‘부정선거 지령문이 그대로 보도됐다. 신문이 나오자 즉각 공보처장관의 담화가 나왔다. 동아일보가 전혀 사실무근인 허위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치안국(지금의 경찰청)에서는 나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나는 신문사의 권유에 따라 피신을 하기로 했다. 생각 끝에 이리에 있던 처가로 몸을 피했다. 3.15 부정선거 내막은 이렇게 해서 서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리에 간 나는 자전거 한대를 사서 낚시꾼으로 변장을 하고 매일같이 김재, 옥구 방향으로 낚시를 하며 소일할 수밖에 없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도 참가못하고 처가에서 세월을 보내야 랬다. 마침내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을 유발하게 됐고, 내가 보도한 내무부장관의 부정선거 지령문은 사실로 입증됐다. 완전한 특종기사였다.
3.15 선거가 끝난 직후 회사측은 나를 2호봉 승급발령을 냈다. 그동안 겪었던 모진 심적 고생에 비하면 2계급 특진이란 별로 대견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적인 4.19 혁명의 시동을 내가 걸었다는 점에서 나는 지금도 적지 않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5.16 쿠데타가 발생했을때 나는 청와대 대변인으로 윤보선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5.16 직후 하야할 것을 결정했으나 만부득이한 사정으로 하야를 번의하고 군정하의 대통령으로서 별로 하는일 없이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포고령 11호’를 이용해서 신문이 혁명을 비판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도하 모든 신문들은 혁명을 지지하고 찬양하는데 경쟁적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발통문식으로 전파되는 민심의 동향이 만만치 않았다. 일각에서는 점차 군정을 반대하는 국민여론도 적지 않게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청와대는 전혀 외신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양통신의 친구 한사람이 UPI통신 원문을 들고 나를 찾아 왔다. UPI통신은 미국 의회가 한국의 군사정권을 ‘독재정권’으로 비판하고 조속히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도록 촉구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었다. 암흑시대 같은 군섲앟에서 UPI통신은 큰 충경을 안겨주었다. 나는 매일같이 동양과 합동통신을 찾아 가서 UPI통신과 AP통신의 원문을 입수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어느새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어느날 중요한 외신이 입수됐다. 9월에 소직되는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가 정식으로 논의될 예정이라는 거시앋. 유엔군을 한국에 파견하고 있는 유엔으로서는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문제가 큰 논란거리가 되리라는 전망이었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최고회의 기자단이 청와대에 기자회견을 요청해 왔다.
아무런 권한도 없이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윤보선 대통령으로서는 기자단의 요청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다. 6월 3일 기자회견이 열리게 됐다. 5.16 쿠데타 이웋 최초의 행사였다. 기자들은 “9월 유엔총회를 앞두고 민정이양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말씀해 달라”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질문했다.
대통령은 “나나 군인이나 조소히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9월에 열리는 유엔총회를 고려해서 민정이양 문제가 결정돼야 한다”고 분명한 답변을 했다. 그 당시 군사정권을 담당하던 군일들은 ‘민정이양’이라는 말만 나오면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했는데. 누구에게 정권을 이양하라는 말이냐…?“ ”다시 그런 소리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정도로 민정이양 문제는 군인들에게 보통 예민한 엘러지가 아니었다.
군인들은 대통려이든 누구든간에 다시는 ‘민정이양’이라는 말을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동아일보를 타깃으로 삼았다. 대통령 회견내용을 도하 신문들이 다같이 보도했는데, 유독 동아일보가 ‘제목’을 크게 단 것이 화근이 됐다. 군인들은 기자회견 그날로 이만섭 이진희 기자를 구속하고 나중에 김영상 편집국장, 조용중 데스크, 그리고 박경석까지 연행해 갔다. 동아일보 정치부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청와대 대변인으로 기자회견을 준비했던 나의 입장은 말할 수 없이 난처해지게 됐다. 더욱이 나 자신이 동아 출신이고보니 옛 동료들과 신문사에 대해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됐다. 나는 대통령에게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을 불러서 선처(?)를 부탁해달라고 했다.
대통령이 장 의장을 불러놓고 “아니 당신들이 혁명공약에 ‘조속한 시일내에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해놓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야단을 쳤다. 그러나 장도영 의장은 명색이 의장이지만 혁명주체도 아니고 그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있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뒤에 이만섭 기자만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이 기자의 부인이 나를 찾아왔을때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무슨 큰 죄나 지은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만섭기자가 구속된지 40일 가까이 되었을때 뜻하지 않은 찬스가 왔다. 최고회의에서 공문 한 장이 날아왔는데. 그 내용은 ‘7월 15일 서울 근료의 순환철도가 준공되어 개통식과 시승식을 하기로 했으니 대통령께서 괜찮으시다면 시스식에 나오시기 바란다’는 거싱다.
대통령은 시승식 행사에 가는 것을 반대하는 눈치였으나 비서실장과 내가 적극저으로 가시기를 권유하자, 마지못해 시승식 행사에 참가하기로 했다. 나느 이번기회를 이용해서 이만섭 기자 문제를 꼭 해결하려고 마음을 굳혔다.
7월 15일 아침 대통령이 서울역을 향해 청와대를 출발한수 나는 차안에서 “오늘 박정희의장을 만나시게 되면 이만섭 기자 이야기를 꼭 말씀 좀 해주시지요”하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나를 바라보면서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하나…”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대통령 생각은 이 기자를 구속한 것은 바로 자기를 구속하고 싶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뿐만 아니라 설혹 이 기자에 대한 구속 사유가 있다손 치더라도 대통령과의 회견내용을 가지고 기자를 구속하려면 적어도 대통령에게 사전보고나 양해 정도는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대통령과 동승하고 서울역으로 가는 도중 몇 번이고 다시 이 기자 문제를 재론하고 싶었으나 대통려의 심중을 이해하는 나로서 더 이상 입이 덜어지지 않았다. 시승한 기차가 서울역을 떠나 한참 지났을때 나는 의도적으로 대통령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대통령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나는 대통령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나의 시선에서 ‘저자가 도 이 기자 이야기를 하라는 구나’하고 느꼈던지 “여보, 박의장!” 대통령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얼마전 나의 기자회견으로 동아 이 기자가 잘못된 일이 생긴 모양인데. 기사가 좀 과장된 점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까지 대통령의 말이 떨어졌을때, 박 의장은 “네!” 하더니 “김 부장 오라고 해. 부장 어디 있나…”
김 부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을 가리킨다. 박 의장은 숨쉴 여유도 없이 김부장을 찾았다. 김종필 부장이 그 자리에 나타나기가 무섭게 “김부장 동아일보 기자 구속한 일 있나?” “네!” 김 부장이 대답했다. “석방해…” 박의장의 말이 뒤따랐다. 이 기자의 석방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저 박 의장 봐라…? 이만섭 기자가 구속된 것을 동아일보가 대서특필 했고, 도하 신문이 모두 보도했을 뿐 아니라 최고회의 공보실장은 특별담화까지 발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마치 처음 듣는 일처럼 태연하게 김 부장에게 물어보는 박 의장의 태도는 당돌하다고나 할까, 능청맞다고나 할까. 정말 독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기차가 서울역으로 되돌아온후 최고회의 공보실장은 구속중이었던 이만섭 기자를 석방시켜 동아일보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주었다. 아무리 군정하라 할지라도 ‘법’은 있을 법 하건만 “석방해…” 한마디가 그 다시는 법 이상의 효력이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정리 정운종 대한언론인회 논설위원, 녹취 한국언론사, 2001, 73~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