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혜(金慈惠, 1910~ )는 춘천에서 3·1독립운동을 전개한 김조길 선생의 장녀로 배화여학교, 이화여전을 졸업한 뒤 동아일보에 입사해 1932년 4월부터 1934년 7월까지 잡지 ‘신가정’에 여성 관련 기사를 전담해 썼다. 퇴사 후 함께 근무한 소설가 주요섭과 결혼했다.
김자혜(金慈惠) (춘천, 1910~ 여 ) ▲ 1932. 4 사원(신동아근무), 1934. 7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作家日記
갈피 일흔 日記
金慈惠
1월 6일 (金)
네 시부터 좌담회가 잇섯다. 성교육과 사교문제에 대하여 만흔 各士들이 참석햇섯다. 몃 해전만해도 「性」이란 글자만 불너도 罪惡視하든 것을 공공연히 터놋코 그 문제의 지도방침을 토의한다는 것이 기적가티 생각 들기도 햇다. 사실 이론으로만 떠들지 말고 실제로 교육자들이 자기네 아들과 딸들을 사랑하듯이 지도할 필요는 절실하다. 그럿치만 교육자들 가운데 얼마나 만흔 위선자들이 가면을 쓰고 철면피의 짓을 하는지! 씨워노은 보재기를 들치면 해괴망칙한 일들이 탈로 될지 몰으것만 것흐로는 다 「貢*이 만흔 교육자」 행세를 한다. 것발님을 말고 적나라하게 텨놋코 사는 세상이 언제나 오려는지…
남녀교제의 첫 조건이 참스런 지도자가 생기는 것이다. 수만흔 나어린 학생들을 위해서 진정한 이해와 해결을 줄 어버이가튼 마음이 얼마나 필요한지… 떼리켓잇트한 문제속으로 끌려드러 가기전에 行路를 정해줄 참스런 가르침을 얼마나 만흔 학생들이 바라고 잇는가?
(김자혜, ‘作家日記-갈피 일흔 日記’, ‘삼천리’ 1933년 4월호)
文壇春秋
여류문단의 적막은 최근에 더욱 심하다, 宋桂月 氏 開闢社를 去하야 天에 往하고, 金源珠 氏 每申을 去하야 上海로 향하고 崔貞熙 氏 三千里社를 去하고, 오직 崔義順氏 東亞에, 金慈惠氏 新家庭에 毛允淑氏 女論社에 據하야 殘月 비치는 孤疊을 직힐 뿐.
(‘文壇春秋’, ‘삼천리’ 1933년 9월호)
1933년 10월 1일에는 신가정 주최로 안양에서 제1회 밤줍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위원은 회장 송진우, 위원장 양원모, 시상 설의식, 유희 및 경기위원 이길용 박봉애 방정순 홍희, 의료위원 길정희, 설비위원 김철중 국태일 조종헌 주요섭 최영수 고형곤 박범서, 접대위원 김자혜로 발표됐습니다.
“10월 1일! 10월 첫 공일인 이날을 맞이하여 안양 노적봉 밑 밤나무 무성한 잔디밭에 열린 신가정 주최 부인습률대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천지가 떠나갈 듯한 웃음과 박수소리에 재미있는 경기 10여 종목을 마치고는 밤줍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노적봉 밤나무 알에 유쾌히 즐기는 부인들’, 동아일보 1933년 10월 4일자 조간 6면)
“습률대회를 앞둔 하루 전날 아침. ‘습률대회고 뭐고 대실패인걸. 청원인이 겨우 스물밖에 안돼.’ Y 국장의 말. 공연히 애만 쓴 것도 분하지만 가정에 얽매인 그들이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하루의 쉬임, 단 하루가 허락되지 않는 그들. 오후에 퇴사하면서 서무계를 들렀을 때 깜짝 놀랐다. 한 나절 사이에 청원인이 백오십명으로 부쩍 늘은 것이다. 밤사이에 2백명은 훨씬 늘리라.
10월 1일 새벽 네시반, 혹 날이 궂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별의 떼.
용산역. 차가 떠나려면 아직 시간반 더 있어야 되는데 희긋희긋 부인에들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삽시간에 역은 2백여명의 부인네들로 꽉 차고 앞섶에 붙인 노랗고 빨갛고 파란 휘장이 기분을 돋궈준다. 내 상상과는 달리 구가정부인들이 90퍼센트는 훨씬 넘는다. 마음대로 놀러 다닐 수 있는 신여성들보다 얼마나 더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가.
(…)
계속해서 보배찾기 종치는 경기 추첨경주 수건쓰기 경주 릴레이. ‘아이구 이게 늘그막에 웬일이오?’하면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도 달음박질을 했다. 얌전만 피우던 부인네들이 아무것도 돌아볼 여유없이 손뼉을 치고 소리지르면서 응원했다. 상탄 것을 펼쳐보며 야단들이었다. 냄비 주걱 비누 수건 주전자 모두 살림살이 기구인 까닭에 유난히 기쁜 모양이다.
(…)
그 얌전만 피우던 부인네들이 아무것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손벽을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응원하는 것을 보면 어쩐지 가슴이 탁 터지는 소리를 지르면서 응원하는 것을 보면 저렇게 자유롭고 저렇게 구속없는 중에서도 열광적이기를 바랬다.”
(K생, ‘본사 주최 제1회 습률대회기’, 신가정 1933년 11월호, 107~112쪽)
人生揭示板
女流文人中『女史』와 『孃』은 如左하지요 混線되기쉬우나 잘아라두서요
△孃= 金慈惠, 盧天命, 金活蘭
△女史=尹聖相, 朴花城, 毛允淑, 崔貞熙, 姜敬愛, 李善熙
△다시 孃으로 還元된이=朴仁德, 羅蕙錫, 崔義順, 金一葉<22>
(‘人生揭示板’, ‘삼천리’, 1934년 8월호)
“광화문 네거리를 내려다보는 조용한 방이었다. 테이블은 여섯 개. 북쪽으로 세 개는 ‘신동아’를 만드는 이들이 앉았고, 남쪽에서 마주보는 세 개는 ‘신가정’을 만드는 사람들이 앉았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만화 그리던 최영수 군이었다. 앉은 차례로는 북쪽의 주형과 남쪽의 김자혜 양이 마주보고 앉았었고, 그 다음 자리, 김 양의 곁에는 내가 앉았었는데, 나와 마주보던 사람은 ‘신동아’의 고형곤 씨. 그 분의 곁 구석자리에는 ‘신동아’의 이무영(李無影, 본명 이용구, 李龍九) 군이었는데, 그와 마주 앉았던, 내 왼편 자리에는 최영수 군이었다. 이같이 몇 해를 한 방에서 뒹굴었건만, 어느 한 사람, 한 번도 다투어본 일 없었던, 평화의 방이어서, 가른 사원들이나, 바깥 손님들도 우리 방에만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며 부러워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가 이무영과 만화가 최영수는 내가 천거해서 입사시킨 제자였고, 고형곤 씨는 그 당시 경성제대를 마치고 들어온 철학도여서 종일 묵묵히 앉았던 신입사원인데다가, 아무 것보다도 서로 마주보고 앉았던 주 형과 김 양이 백도 이상의 정열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나는 그들의 너무도 충실한 호위병이었으니, 그 방이 웃음 가득한 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은상, ‘나의 신가정 편집장 시절’, 여성동아 1967년 11월 복간호, 459쪽)
“원고가 다 검열에 통과된 뒤에 인쇄에 넘어가면 괜찮았을 텐데 한편 검열이 끝난 부분은 먼저 인쇄에 넘기고, 나중 부분은 인쇄한 걸 검열에 돌리고 했기 때문에 그게 나중에 삭제되면 꺼멓게 동판 깎인 자리에 자죽이 남았죠.”
(김자혜, ‘신가정 때의 여기자’, 여성동아 1967년 11월 복간호, 462쪽)
“미국서 돌아오자 집사람(김자혜 여사)이 신동아가 복간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신동아에는 창간호부터 관여했었다. 그때도 미국서 갓 돌아 왔을 때였는데 송 사장의 부탁으로 일하게 되었었다. 설의식 선생 주관 아래 창간호의 교정을 보고 있을 때였다.
다음호부터는 설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내가 맡아보았는데 원고 부족 총독부 검열 등 어려운 일이 많았다. 실명 외에 용악산인(龍岳山人) 양두식(梁斗植) 멍텅구리 등 가명, 필명으로 마구 쓸 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양두식 선생이 어떤 분이냐고 문의가 와서 모두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들이다. 원고를 모아놓고도 고생이었다. 원고 검열이어서 손을 나누어 복사하고 한편으로 조판, 한편으론 검열을 진행시켰다. 신문사에서 하는 거라 보아 준다는 것이 자그만치 한 달이나 걸리곤 했다. 그만두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총독부의 눈을 속이려고 투고의 자구를 요리조리 수정하느라 모두 땀을 빼기도하고.
자유천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여서 더했겠지만 부자유스럽기가 감옥 같았다. 2년 뒤 중국으로 떠났다.”
(초대 잡지부장 주요섭, ‘다시 햇볕 본 新東亞’, 동아일보 1964년 8월 22일자 5면)
“당시 기자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주요섭과 김자혜였다. 주요섭과 김자혜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송진우 사장은 사내에서의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엄격했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은 두 사람 모두가 퇴사를 한 후에야 이루어졌다.”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 당시 신동아 기자, ‘민족의 잡지, 일제하의 신동아’, 신동아 1991년 11월호)
독립운동가 김조길(金祚吉) 선생 딸 재미 김자혜(金慈惠) 할머니
30년대 초, ‘여성동아’ 전신 ‘신가정’ 기자 활약
당시 동아일보 양재강습 등 여성개화 앞장
일제 감시받던 작가 주요섭 씨와 북경피신 결혼
“여기자가 두 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았어요. 취재 나갈 때 다른 기자들은 5전짜리 전차를 타고 다녔는데 저는 송진우 사장이 내준 전용인력거를 타고 다닌다고 남자기자들의 불평이 많았었지요”
독립운동가 김조길 선생의 장녀로 광복50년을 맞아 정부의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초청행사에 참석중인 김자혜 할머니(85·미국 로스앤젤레스 거주)는 30년대 초 동아일보 ‘신가정’(여성동아 전신)지 기자였다. 16일 숙소인 소피텔 앰배서더호텔에서 김 할머니를 만나 당시 얘기를 들어보았다.
“아직 남녀가 유별하던 때라 기자의 성별에 따라 기사가 분담됐어요. 저는 여류명사 가정 탐방을 주로 했고 사회부에 있던 여기자는 여성관련 사건을 주로 맡는 식이었어요”
김 할머니는 30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32년 4월부터 34년 7월까지 신가정에서 근무했다. 당시 여성들의 개화에 앞장섰던 신가정은 집안에만 있던 가정주부들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광화문사옥 4층 강당에서 요리강습 양재강습 등을 자주 개최했었다고 회고한다.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라 총독부에서 매일 신문기사를 검열했죠. 중간중간이 시커멓게 지워진 신문대장을 들고 술에 잔뜩 취한 채 편집국에서 비탄에 젖은 목소리로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리던 정치부 기자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김 할머니의 기자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늑막염에 걸린 데다 신동아 주간으로 있던 소설가 주요섭씨와의 ‘비밀교제’가 알려질 것같아 미리 사표를 냈다고 한다. 지하신문을 발간하다가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주 씨는 일제의 계속되는 감시를 피해 북경으로 갔고 36년 YWCA회관에서 두 사람은 결혼했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아네모네의 마담’ ‘추물’ 등 주 씨의 대표작들이 대부분 김 할머니와의 연애 신혼시절에 쓰여졌다.
김 할머니의 기억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아버지 김조길 선생의 모습은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할 때라고 한다.
“어머니가 한복차림의 아버지를 부축하고 나오시는데 서대문형무소 언덕에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향기가 어찌나 강렬하던지 아직도 그 향기가 코끝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73년만에 다른 유족들과 형무소터에 다시 가보았는데 그많던 아카시아나무는 간데 없고 널찍한 공원이 되었더군요”
(김세원 기자, “감옥 나서던 선친모습 눈에 선해”, 동아일보 1995년 8월 17일자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