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담구(金聃九, 1938~2016)는 대구 출신으로 경북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과학부장, 논설위원, 출판국 부국장, 심의실 부국장 등을 지내고 1999년 6월 문화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북중 친구인 정성진 전법무부 장관은 그의 인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고전의 해석이나 크고작은 지식을 흔쾌하게 나눠주는 등 너그러움과 여유를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김담구(金聃九) (대구, 1938~ ) △ 65.8 수습(편집국), 기자(교정부, 신동아부, 외신부), 문화부차장, 과학부장(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평생 검도(劍道)를 운명처럼 지고 살아 온 국민(초등)학교 때부터의 한 친구가 빈소에서 자신이 쓴 글을 틈틈이 봐주던 당신을 생각하며 ‘이제 평생 선생 한 분을 잃었다’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도 당신을 아는 사람들에겐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광산 김 씨 양반의 후손인 당신이 자당을 극진히 모신 효성이나 혼자서 3남매를 성가시키며 보여 주신 속 깊은 자녀사랑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암과 척추협착증으로 10여 년 전부터 치료를 받고 있으면서도 마치 삼국지의 관운장 같은 모습이라도 따르려는 듯 주위에 고통의 표정을 보이지 않고자 했던 당신의 그 남다른 절제력과 의지에 많은 친구들이 적지 않은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6년쯤 전이던가, 중고교 동기생 30여 명이 버스 한 대를 빌려 경북 안동지역의 몇몇 종가(宗家)를 방문했을 때의 기억도 이 사람에게는 매우 뚜렷합니다. 퇴계 선생과 학봉 김성일의 종가까지도 찾아보았던 그 여행에서 우리는 안동 댐 수몰 당시 옮겨 온 광산 김씨 집성촌인 군자마을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지요. 밤을 자고 난 다음날 아침 한복 두루마기를 차려 입은 그곳 종손 되시는 분이 굳이 담구 형 당신을 찾아 절을 올리고 훈사(訓辭)까지 청하는 것을 보고 일행들이 모두 감복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자다운 치밀함과 결벽증이 남달랐다는 점도 가까운 친구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께서 2001년에 추간했던 ‘우리말 속 고사성어’의 일부내용을 정리하여 당신의 경북중고교 친구들은 운영 중이던 카페에 ‘조동일 글방’과 함께 ‘김담구 칼럼’까지 만들지 않았습니까?
(정성진, ‘봄길을 먼저 간 김담구 학형을 추모하며’, 동우회보 2016년 5월 23일)
첫 해외나들이 海士순양함대 동행
날씨는 쾌청이었다.
1977년 10월 13일.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의 케냐까지 배로 다녀오는 여정(旅程)의 첫날은 기분 좋게 펼쳐졌다.
오전 10시 45분, 진해 부두를 미끄러져 나오면서 해사(海士) 순양함대의 평탄한 진로와 무사귀환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종수 함대사령관이 거느리는 순양함대는 D D 96 전북함과 APD 81함으로 편성되었다. 붕정만리의 장도를 축복해 주듯 가덕도 앞바다에서는 해군의 함포사격 훈련이 있었다. 동행했던 언론 동지는 한국일보의 강영수, 신아일보의 장옥 기자.
저녁 늦게까지 달렸는데도 우리 영해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거울처럼 매끈하고 잔잔한 해면, 승무원 누구나 이렇게 좋은 기상은 드물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순양의 항로는 장장 1만7천4백62마일(8만 여리)에 유류 값만도 60만-70만 달러나 든다고. 근 90일 동안의 이 대장정에 참가하게 된 걸 나는 기뻐했고 행운으로 생각했다.
우선 입사 12년 만의 첫 해외 나들이가 아닌가. 내근 혹은 반 내근부서를 떠 돌아다니느라 비행기를 타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비행기가 아니고 배다. 국방부에 출입한 덕분이었다. 벌써 37년이 지난 취재노트북을 뒤적이다 보니 감회가 새롭다.
바다나 배와 나는 별로 인연이 없었다. 그때까지 대구동촌 유원지에서 보트를 저어본게 한 두번,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 가본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들떠있는 내 기분과는 달리 우려하는 눈길도 있었다. 어느 선배는 유람선타고 한 며칠 노니는 것이 아니고, 승객의 안락보다 전투를 최대한 잘 하기 위해 건조된 군함을 장기간 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일인지를 걱정스러운 듯 일러주었다. 그런가하면 어떤 동료는 ‘유급 장기휴가’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나도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 항행에 덥석 도전하는 것이 사려없이 덤비는 당랑거철의 만용은 아닐는지. 그러나 가보자.
(…)
18일 아침 필리핀 수빅 항에 기항. 진해를 떠난지 만 5일 만에 밟아 보는 땅이다. 흔들거리는 배에 익숙해져 있던 다리가 휘청거린다.
이곳은 미 해군기지여서 필리핀적인 것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우리나라 7, 8월의 후꾼거리는 날씨, 즐비한 야자수가 남국의 정취를 돋운다. 미군 식당의 오찬에 나온 비프스테이크는 크기가 서울 양식당의 2~3배는 되는 것 같아 3분의 1정도 먹었는데도 포식감을 느낄 정도.
다음은 싱가포르행이다. 19일 오전에 출항, 오후에는 미해군과 더불어 해상급유작전에 함포사격훈련 등 한.미 해군 합동작전훈련을 했다. 이 훈련 모습을 보려고 몰려들었는지 상어떼 날치떼가 장관을 이룬다.
적도에 가까워지니 날씨가 점점 후텁지근해진다. 보르네오 섬을 끼고 계속 항행, 베트남 적화(赤化)로 약간 우회할 수밖에 없다고.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일망무제의 바다. 이따끔 씩 보이는 선박이 반갑기만하다.
22일, 거의 적도에 다다른 북위 3도 선상을 가는데도 생각보다는 덥지 않다. 드라이 시즌 때문이라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한때 일본은 이 일대까지 석권하지 않았던가.
새삼 그들의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
텔렉스(UPI)에서 이틀 전에 육군 중령 (20사단 대대장)과 사병 한명이 휴전선을 넘어 월북, 그곳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보도했다. 함내의 분위기가 한동안 침울했지만 곧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23일 진해를 출발한지 만 10일째 되는 날 전체 여정의 9분의 1에 지나지 않고 하는일 없는 생활이지만 배를 오래 탄 것만으로도 고달프다.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기만 해도 되는 감방생활을 상상해 보시라. 그래서 해상생활을 금고형(禁錮刑)에 비유한 이 사령관의 말이 실감난다.
간밤엔 잠을 못 이루어 늦게 까지 갑판을 돌아다니며 달빛 쏟아지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24일 싱가포르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아침에 스콜치고는 대단한 폭우가 쏟아져 걱정을 했는데 얼마 후 거짓말 같이 활짝 개었다.
보트로 상륙했다.
싱가포르는 과연 듣던 대로 고층빌딩이 임립, 국제항으로서의 면모가 약여했다. 세계에서 가장 청결한 나라라는 평가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시아 네 마리 용중 하나로 꼽힐 만큼 고도성장을 이룬 나라답게 그 국부(國富)가 한눈에 들어 왔다. 이곳 저곳 서둘러 둘러보고 밤늦게 귀함했는데 짧은 체재시간이 아쉬웠다.
거지 떼 득실거리던 인도
다음 행선지는 인도의 봄베이(지금은 뭄바이로 개명), 꽤 먼 거리다. 이제 태평양도 굿바이다. 인도양의 입구인 말라카해협으로 접어들었다. 해협이어서 오가는 각종 선박들을 자주 만난다.
인도 서부 연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하던 중 요즘은 보기 힘들다는 범선 2척을 만났다. 봄베이 도착 하루 앞두고서는 상어와 비슷하게 생긴 이노끼(?)떼가 펄쩍 펄쩍 뛰는 등 갖가지 묘기를 보여줘 고달픈 심신을 달래주었다.
2일 아침 봄베이 항에 도착, 배에 오른지 꼭 20일 만이다. 땅을 딛고 몇걸음가지 않아서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에 발걸음을 멈췄다.
(…)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한 이범석(아웅산 폭파 사건때 순직) 주인도대사는 극소수의 부유층과 대다수의 빈곤층의 격차가 격심하다는 등이 나라의 병폐를 지적하다가 “이 나라는 요, 미꼬미(‘장래성’의 일본말)가 없습니다”라고 한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쓰다가 보니 덩치 값도 못하는 인도를 헐뜯는 것 같이 되었는데 추호도 그럴 의도는 없고 안타까운 마음에서다. 지금은 봄베이가 아닌 뭄바이를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엘리판타 케이브를 찾았다. 봄베이 항에서 배로 50분 거리에 있는 이 동굴은 힌두조각술이 절정에 달했던 5~6세기경에 바위를 깨어 만든 사원인데 그 웅장하고도 정교한 조상(彫像)이 놀랍다.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같다.
5일 아침. 이란의 아바단을 향해 출항, 이틀 뒤 한.미해군합동훈련이 있었다. 인도양을 순항하는 미 해군함 2척과 우리 함대가 참가했는데 한.미 해군이 인도양 해상에서 합동 훈련한 것은 처음이라고.
훈련 내용은 하이라인 기동훈련 등, 우리 측을 유심히 관찰했다는 미해군 지휘관은 지금까지 본 해군중 가장 스마트 하다고 칭찬했다. 페르시아 만을 깊숙이 들어가 아바단이 가까워지자 해저 유전시설에서 불이 솟는 것이 더러 보이고 바닷가에 야자수가 죽 늘어서 있는게 인상적이었다.
아바단에 도착한지 이틀째 공설 운동장에서 펼친 우리 해군 의장대 군악대의 공연과 태권도시범에 1만여 관중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는데 이곳 신문과 TV에도 보도되었다. 봄베이에서도 이 같은 행사가 펼쳐져 관중의 갈채를 받은바 있다.
우리나라 중동진출기업들 자리잡아
아바단에 이틀간 머무르고 다음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담맘 행. 거리가 가까워서 24시간 만에 도착. 이즈음 중동 진출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현대건설 동아건설 경남기업 대한통운 등이 기반을 닦아 놓은 듯 했다. 1977년이라면 우리 경제가 도약하고 있던 때가 아니던가.
시내 상점에 우리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고 가게 문에는 한글로 안내문을 붙여 놓았다. ‘프랑스 화장품 다량 입하되어 염가로 판매하고 있사오니 많이 이용해 주십시오’ 맞춤법 하나 틀림이 없는 제대로 된 광고문이다.
그런데 상식 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내셔널리즘인지는 몰라도 외교관 차량에 그나라 깃발을 못 꽂게 하는 것은 물론 우리 진출업체가 입주해 있는 곳에 태극기 거는 것을 금하고 있단다. 이러한 풍토 속을 비집고 들어가 정착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사흘간 머무는 동안 진출기업체들이 ‘환영의 밤’ 등을 열어 수백명이 모여 즐겼다. 입항 할 때도 그랬지만 출항하는 우리를 환송하느라 부두에는 유양수 대사를 비롯, 수백 명이 몰려와 플래카드를 흔들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
29일 오전, 몸바사 항에 닻을 내렸다.
수 세기 전 이집트인 페네키아인 페르시아인 말고도 중국인까지 드나들었다는 몸바사는 아름다운 전원도시 같았다. 햇볕이 따가웠지만 그늘에만 들어서면 견딜만 했다. 상인들 중에는 “안녕하십니까” 등 짧은 우리말을 하는 사람도 있어 놀라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저 멀리 우뚝 솟은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를 바라보면서, 이곳에 왔다면 놓칠 수 없는 국립공원(사파리)으로 향했다. 경상북도 크기만 하다는 사파리는 기린 사자 얼룩말 영양 등이 한가롭게 노니는 야생동물의 천국이었다.
사흘 뒤 출항하기에 앞서 파일롯비 및 입항비 조로 케냐당국이 요구한 8천 달러(관례의 거의 10배라는 것) 때문에 약간의 마찰이 있다가 4천 달러로 낙착되었다고. 바가지요금에다 날치기 네다바이 등 피해를 본 해군장병도 있어 케냐에 대한 인상은 대체로 좋지 않은 듯, 그래서 해군의 몸바사 방문은 시기상조란 말까지 나왔다.
다음은 스리랑카의 콜롬보 항이다. 이제부터는 귀로다. 또 지루한 9일간의 항해를 해야 콜롬보에 닿는다고. 이제 밤과 낮이 뒤바뀌었다. 취침시간이 조금씩 늦어지다가 새벽 3~4시가 되어서야 눈을 붙여 정오쯤에야 일어난다. 나만이 아니었다. 기자실의 동지들도 마찬가지. 새벽까지 눈이 말똥 말똥하여 이제 올빼미를 닮은 야행성
동물이 되었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다소 파도가 있을지 모른다던 인도양도 거의 침묵을 지켜 주었다. 11일 오전 콜롬보 입항. 이 도시의 사람들이나 분위기가 봄베이와 흡사, 노소할 것 없이 담배를 달라며 따라다닌다.
다음날 북쪽에 있는 고도(古都) 캔디에 있는 사찰관광, 이 절에 석가모니의 이빨과 뼈를 안치하고 있다고.
이틀 밤을 자고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로 향했다. 6일 만에 자카르타 도착, 교민 어린이가 많이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반겨주었다. 교민 수는 현재 1천 3백여 명 정도, 주로 진출업체의 직원과 공관직원 가족이라고.
이튿날 저녁엔 이재설대사 관저에서 리셉션 및 뷔페식 만찬, 노래도 부르고 흥겨운 한때를 보냈다.
다음은 필리핀의 마닐라로 간다. 귀국일이 가까워지니 더 지루해진다. 달력을 보며 하루 이틀이 지났군이 아니라 이따끔 시계를 보며 이제 1시간 지났군 2시간 지났군 했으니 그 지루함이란. 식당출입도 더 멀어지고 하루 한두끼 라면으로 때운다.
27일 아침 마닐라항에 입항, 다음날 2차대전 때의 유명한 미.일 격전지인 마닐라만 초입에 있는 조그마한 섬 코레기도를 찾았다. 미군의 초토화작전에 사망한 일본군이 10만 명 가까이 되었다고, 맥아더 장군의 미군사령부가 틀어박혀있던 미로같이 파고 든 터널, 뼈만 앙상하게 남은 건물. 대포 등 그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흘 밤을 자고 마닐라 항 출항, 이틀만에 갈수 있는 다음 목적지이자 마지막 기항지인 대만의 지룽(基隆)까지를 5일만에 가야되기 때문에 6노트정도로 서행한다고 했다.
1978년 1월 1일 새해를 맞는다. 함상에서의 송구영신이란 색다른 체험을 해본다. 적도의 무풍지대를 연상시켜주던 바다가 음산해진 날씨에 따라 요동을 친다. 롤링(배가 좌우로 흔들림)에 피칭(배가 앞뒤로 흔들림), 배타고 처음 맛보는 바다의 형벌이다. 방문을 닫아 놓고 바깥 출입도 못했다 마치 수인(囚人) 같은 생활로 이틀을 보냈다.
4일 아침 지룽 항에 입항, 다음날 타이베이의 유명한 고궁박물관을 찾았다. 3시간 넘게 살펴보았으나 주마간산(走馬看山)이었다. 과연 진귀한 물건의 보고 같았다.
6일 오후 출항, 8일 오전 진해 도착. 힘껏 달리던 육상선수가 기진맥진 골인지점을 밟고는 맥없이 엎어지듯 우리 땅을 밟았다. 힘들고 고달픈 여행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넓힌 견문을 감안하면 밑지지 않는 남은 장사였다고 생각한다.
☆ 필 자: 동아일보기자. 문화부차장, 외신부장대우, 과학부장, 기획위원 겸 심의위원, 편집위원, 논설위원, 출판국 부국장, 문화일보 논설위원
(김담구, ‘장장 8만리 바닷길 90일 대장정’, 실록 언론·언론인의 길(4) 그때 그 현장 못다한 이야기, 2014, 45~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