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섭(姜仁燮, 1936~2016)은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관훈클럽 총무 자격으로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후보 간 ‘1노 3김 관훈토론회’를 주관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정치권에 입문해 통일민주당 부총재, 14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주자유당·신한국당),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김영삼 정부), 16대 국회의원(한나라당)을 지냈다. 또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 정치·법제도 분과 민간위원과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회장, 대한민국헌정회 부회장을 맡았다.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돼 등단했다.
강인섭(姜仁燮) (고창, 1936~ ) △ 62.3 견습(편집국), 기자(정경부, 정치부, 외신부, 월간부, 문화부, 정치부), 정치부차장, 외신부차장, 미국특파원, 비서부장, 논설위원(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로 시작되는 노랫말을 읊조리노라면 누구나 아련히 사라진 옛 추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굳이 나에게 ‘그 집 앞’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서울 광화문 네거리 한 모퉁이에 남아 있는 동아일보 옛 사옥을 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지금 나이 들어 지나온 먼 길 되돌아보니
동아에 몸담았던 그 시절이
가장 보람찬 인생의 황금기였음을,
다시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아쉽고
소중한 나날이었음을 깨닫게 되나니
동아를 떠난 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우리는 東友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여
실향민처럼 옛 집을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광화문네거리
낯익은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젊은 날의 내 모습이 되살아나고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 들리는 듯 하다
4·19와 6·10항쟁의 물결이 넘실대던 그 거리엔
또 다른 행렬과 함성이 지나가고
잉크 냄새 묻은 신문지를 들고 뛰어가던
배달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동아의 몸속에 흐르는 피와 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나니
아, 자유 정의 민주주의의 횃불은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다
대학을 갓 나와 수습기자로 시작해
수십 년을 몸 바쳐 일했던 곳
우리는 그때 역사를 써나가는 마음으로
그날그날의 신문을 만들었었다
(후략)
-자작시〈그 집 앞에서〉중
동아일보 공채 4기로
내가 대학을 졸업한 1960년대 초반 무렵은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가 잇달아 있었던 격동의 시대였다. 대학을 졸업해야 별로 갈 만한 데도, 취직할 직장도 없었다.
대학 3학년 재학 중에 군대에 갔다 온 나는 4·19 후에 복학한 나이든 학생으로 이미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한 기성문인이었다. 4·19 이듬해인 1961년 대학졸업도 하지 않은 채 조선일보 수습기자 시험에 응시했는데, 1차 필답고사에는 합격했으나 2차 면접에서 낙방했다. 그 후 5·16을 거쳐 졸업과 동시에 1962년 동아일보 수습기자 시험의 문을 두드렸다.
5·16 직후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입사원서를 받을 때부터 병역을 필했는지 확인했다. 그런데도 경쟁률은 여전히 높았고, 최종합격자 5명중 한명은 월급이 더 많은 한국전력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4명만 수습4기로 입사했다. 이연교(李縯敎, 전 베트남특파원, 작고), 김태선(金泰善, 전 주영특파원, 이사 지냄), 장동만(張東萬, 재미언론인) 등 4기 네 사람은 사회부나 정치부 또는 편집부 등을 순회근무하면서 기자수업을 했는데, 특별히 개인지도나 길잡이를 해주는것도 아니어서 눈치껏 일을 배워야했다.
(…)
지루했던 1년 수개월간의 수습기자 수련을 마치고 처음 배치된 곳이 정치부였다. 당시 정치부는 경제부와 분리되어 김성열(金聖悅, 전 동아일보 사장) 부장이 10여명의 민완기자를 이끌고 있었다.
정치부에서 기자의 첫발 내딛다
신동준(申東峻, 전 공화당 대변인), 이웅희(李雄熙, 전 문공부 장관),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 권오기(權五琦, 전 동아일보 사장), 유혁인(柳赫仁, 전 공보처 장관), 박경석(朴敬錫, 전 국회의원), 이진희(李振羲, 전 문공부 장관) 등 쟁쟁한 선배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견습기자 꼬리가 갓 떨어진 나는 올챙이 기자로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 사이에서 일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내가 처음 맡은 출입처는 훗날 막강한 집권당이 된 민주공화당이었다. 사실 당시 공화당은 창당 초기의 잘나가던 집권여당이아니라 사무국의 2원 조직 및 사전조직 시비에 휘말리고 친김(親김종필)계와 반김 라인이 치열한 내부갈등을 겪는 바람에 정당구실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반신불수의 상태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애써 취재해서 기사를 보내도 거의 활자화되지 않고, 당사를 드나드는 취재기자의 발길도 뜸한 때였다. 그러나 올챙이기자로서 처음 출입처를 맡게 된 나로서는 부지런히 이방저방 드나들면서 사람도 사귀고 돌아가는 정치풍향도 열심히 취재할 수밖에 없었다.
(…)
“돌이켜보면
일제(日帝)때는 전국에 산재한
동아일보지국(支局)이 독립운동의 근거지였고
독재와 싸울 때는 동아의 깃발이
가장 큰 무기였고 방패였나니
모진 언론탄압으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때는
행간(行間)에 진실을 담아
후세에 전하려 했고
백지(白紙)광고로 권력에 알몸으로 대항했었다.
그때 우리는 얇은 봉투를 받고도
동아가족임이 자랑스러웠고
창간기념일과 김장보너스를 기다리는
작은 행복을 누리기도 했었다.
아, 그때 힘들게 봉양한 부모는 먼저 가시고
알뜰하게 키운 자식들이 장성해
한 가정을 이루었나니
이제 바라는 것은
어머니 품 같은 동아가 영원히 번창하고
그리하여 지난 날 선배들이 일할 때처럼
뼈대 있는 언론으로 자리 잡아감을
지켜보는 일이다.”
-東友會報 창간[2006년 5월 창간 – 인용자 주] 祝詩에서
잦은 人事속 문학기자로 1년 일해
나는 사장이 약속한 대로 꼭1년 만에 신문사 정치부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창 한일회담 타결 준비로 바쁜 외무부를 출입하게 되었다. 그동안 국내문제만 다루었던 좁은 시야의 나로 하여금 외교부를 통해 바깥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것이다.
나는 외무부를 출입하면서 처음으로 해외출장을 갔고, 한일교섭 외에도 베트남 파병과‘브라운’각서, 아스팍(ASPAC, 아시아태평양 각료회의) 그리고 한미행정협정, 중동진출 등 대외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던 한일회담 취재비화는〈관훈저널〉2005년 여름호(통권 제95호)에 실린‘한일회담을 취재했던 외무부 출입기자 시절’이라는 글에서 대충 얘기했으므로 여기서는 줄이려고 한다. 어쨌든 나의 기자경력 가운데 외교담당 기자와 외신부 근무 그리고 해외연수와 해외특파원 근무 등을 합치면 국내문제보다 대외문제에 관심을 쏟은 기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나는 외무부를 출입하는 동안 한일회담 타결의 주역인 정일권(鄭一權) 전 국무총리, 이동원(李東元) 전 외무장관, 김동조(金東祚) 전주일대사를 비롯 김용식(金溶植) 전 주미대사, 박동진(朴東鎭)전 외무장관, 이범석(李範錫)·이상옥(李相玉)·최광수(崔侊洙)·노신영(盧信永) 등 한국 외교를 주름잡던 외교관들과 만남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특히 워싱턴특파원 부임전 서너달동안 미국 보스턴에서 머물던 시절에 대학가 근처에서 자주 만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이동원 장관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당시 미 의회 청문회에 나가 한국정부에 불리한 증언을 서슴지않았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과 나눈 얘기를 들려주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려는데 문안을 다듬어줄 것을 부탁하곤 했다.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할 때는 주미대사이던 김용식 전 외무부 장관과 그 동생인 영문소설가 김용익(金溶益) 교수와 함께 식사하는 등 얘기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지금은 두분 다 세상을 떠났지만 김 대사는 주말이면 나와 함께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徐載弼) 박사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곤 했는데, 만년에 동아일보에 회고록을 연재하기도 했다.
나는 이분들과의 만남을 통해 기자로서의 안목을 넓힐수 있었고, 시대의 격랑을 헤쳐가던 외교관들의고뇌를가까이에서지켜보았던것이다.
돌이켜보면 동아에 몸담았던 25~26년 동안 나는 참으로 많은 부서를 전전했던 것 같다. 정치부에서 근무하다 서너 차례 다른 부서를 옮겨다녀야 했고, 사회부·외신부·문화부·신동아부등을두루거쳤으며비서실과논설위원 근무도 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문화부에 몸담았던 1년은 보람 있는 기간이었다. 정가에 태풍이 감돌던3선 개헌 직전 문화부로 자리를 옮긴 나는 오랜만에내취향과적성에맞는일을찾게되어얼마나보람있었는지모른다.
문화부에 배치되자 작가인 최일남(崔一男) 부장이 문학을 맡겼다. 나는 모처럼 물 만난 고기처럼 열심히 문학분야를 파고들었다. 매달 발간되는 문학지를 거의 섭렵하고, 신간도 열심히 읽었다. 그러다보니 우리 문단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사실 그때까지만해도 그리 넉넉지못한 문화면 지면이 개인적인 친소관계나 정실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나는 과감하면서도 말없는 가운데 창작에 열중하는 작가들을 찾아내 정당한 평가와 재조명을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시인 김광섭(金珖燮)과 소설가 김정한(金廷漢)을 재발견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60대에 접어들어 병고에 시달리던 이산(怡山) 김광섭은〈성북동 비둘기〉라는 만년의 재기작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차지하는 문화면에 그의 재기작을 크게 조명했고, 뒤이어〈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정한의 중편소설〈수라도〉(修羅道)에도 과감하게 지면을 할애했다. 이를 계기로 두 노작가가 계속 역작을 발표함으로써 비평가들의 주목을 끌게 돼 문학기자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
훗날 장정호(張廷鎬) 조선일보 편집국장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일이 있는데, 알고 보니 “나 대신 꼭 강 기자를 대접해달라”는 장 국장의 장인 김정한 선생의 부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문학도로서 더 있고 싶었지만 문화부에는 오래 근무하지 못하고 1년 만에 다시 자리를 옮겨야했다. 그리고 동아사태의 거센 태풍에 휘말리면서 박 정권의 종언과 언론자유운동이교차하는 험난한 파도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암울했던 시대의 기자像
60년대 후반과 70년대는 그 시대를 살았던 언론인에게는 참으로 잔인하고 힘든 시기였다. 박정희정권의 정치적 압제가 날로 강화되다보니 정치고 언론이고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던 암울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고, 나 역시 붓을 꺾고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1969년 이루어진3선 개헌은 단순히 박 정권의 권력연장을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나라 전체의 향방을 억압과 통제로 끌고가는 거대한 계략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3선 개헌에 이어10월유신이 단행되었고, 긴급조치가 잇달아 발동되면서 정치적 암흑기를 맞게된 것이다.
숨통이 막힌 언론 역시 정계 일각과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저항의 움직임을 어떻게든 보도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거대한 권력에 의해 번번이 차단되었다. 그야말로앞뒤가콱막힌절망의벽에갇힌형국이었다.
신문사와 방송국에는 중앙정보부가 파견한 출입기자(?)가 공공연히 상주하다시피 했고, 청와대나 정부 관계부처 그리고 집권여당 간부들이 수시로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와 언론보도를 통제했다. 그뿐 아니라 경영의 주요부분인 광고 분야에까지 간섭의 손길이 뻗쳐 동아 백지광고시대 같은 엄청난 언론탄압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기자는 설 자리가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日課는
제 안방의 거울 앞으로 돌아가
쓰다 남은 日記나 다시 써가는 일이다.
쓰지 못하는 붓대를 들고
진종일 계단을 오르내리며
달을 보고도 달이라 못 부르고
끝내는 달을 해라고 發音해야 하는
범죄의 대열에 가담하여
하루를 욕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마지막일과는
중학시절의 公民교과서 앞으로 돌아가
먼지 낀 눈자위를 새로이
닦아내는 일이다
하루도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뿌연 먼지 속에 살면서
동물적으로 지껄이고
요령있게 파도를 헤엄치면서도
노상 죄없는 처자식을 파는 우리
가난한 이웃은 업수이 여기고
높은 대문 앞에서는
제 목소리마저 잊고 지내면서도
철조망을 胸圍처럼 감고 사는 우리가
몸을 비틀며 소리치고 싶은 것은
제발 내 목소리를 달라는 것뿐이다.”
-자작시〈新聞記者〉전문
이 시는 월간〈다리〉지 창간호[1970년 9월 창간 – 인용자 주]에 실린 작품이다. 후에 필화사건으로 발행인과 집필진 등이 옥고를 치른 ‘다리’ 잡지는 출발부터 저항의 씨앗을 숨기고 있었기에 당국의 눈총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잡지에 내 작품이 실렸으니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한 친지가 “달을 달이라 못 부르고 해라고 불러야 한다고…”라고 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은근히 위협적인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
동아사태 와중에서
나는 동아사태 와중에서 그야말로 그 중심에 있었다. 민주화는 정치적 자유와 함께 언론의 자유를 필수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정치와 언론은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고 한다. 정치적 자유가 억압 받을 때 언론인에게는 재갈이 물리게 마련이고,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동아사태 당시 나는 정치부 차장이었다. 청와대 출입이 거부된 후 데스크에 눌러앉게 되면서 정치부 차장으로 발령받아 동아사태의 거센 풍랑을 맞게 된 것이다.
차장으로있는동안어떤때는부장이공석일때도있었고, 정치부 출신이 아닌 선배가 부국장을 겸해 부장자리에 앉게 된 경우도 있어 사실상 지면제작의 실무는 내 몫이었다. 말하자면 부장아닌 부장으로 매일 편집국 주요간부가 모여 그날의 제작방향을 결정하는 톱회의에 참석하는 등 정치부 데스크일을 도맡아 해야했다. 따라서 나는 동아일보가 유신의폭압정치에굴하지않고언론자유실천선언-백지광고사태-동아투위 등으로 저항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 격동의 중심에 자리하였다.
동아일보에 대해 평소 못마땅한 생각을 갖고 있던 박정희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자 정부와 동아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돼갔다. 여수의 선거연설에서 동아일보‘호외’를‘삐라’라고 부르고 선거소감을 묻는 동아방송 마이크에 대고‘거짓말 방송’이라고 내뱉었던 박 대통령의 생각을 잘 아는 정부당국자들이 한술 더 떠 동아를 궁지로 몰고 갔고, 70년대의 정치적 상황과 겹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 갔다.
동아의 언론자유운동은71년4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긴장이 예고되면서 그 불씨가 싹트기 시작했다. 71년 4월1일자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박권상(朴權相)이 임명되고 보름 후인 4월15일 최초의 언론자유선언이 있었다.
사실 동아사태의 근원은 언론자유를 얻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되었지만 회사 내부에 깔려 있던 인사 불만 등 내부요인이 겹쳤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회사에는 공채1기부터 13기에 이르는 수습기자 출신이 수적으로는 많았지만 타사에서 스카우트돼 온 외부출신이 주요직책을 많이 차지하고 있어 내부갈등의 요인이 자라고 있었다.
특히 한해 4~5명에서 많게는 10명가량 뽑던 수습기자를 동아방송 개국과 신동아, 여성동아, 주간스포츠 등의 사업확장으로 더 많이 공채했지만 이들에게 적당한 일자리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습 출신들의 인사 불만이 날로 커져갔고 ‘악타디우르나’라는 이름의 기별 친목모임까지 만들어져 은밀히 만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다 박권상 편집국장의 취임을 계기로 인사불만이 표출되었고, 외부의 정치적 상황과 겹쳐 그 불씨는 날로 커져 갔다고 할수 있다.
동아사태를 말할 때 흔히 ‘10·24 언론자유실천선언’을 하나의 분수령으로 본다. 그러나 74년10월에 이루어진 이 선언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언론자유선언이 있었고, 정부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71년 4월15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었던 최초의 언론자유선언은 이듬해 10월 단행된 10월 유신으로 무참히 짓밟혔고, 이어 73년11월26일에 재차 터진 언론자유실천선언도 긴급조치 발동으로 그 효력을 크게 확산시키지 못했다.
73년 11월 있었던 편집국 중심의 언론자유선언은 동아일보 수습출신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다. 수습 1기 김재관(金在灌, 전 과학부장), 2기 김원기(金元基, 전국회의장), 3기안성열(安聖悅, 전정치부기자)과 4기 대표인 내가 은밀히 만나 선언문을 마련하고 3층 편집국에서 이를 발표했던 것이다.
권력과 동아일보 기자 사이에 벌어졌던 긴장관계는 마침내 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계기로 전면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날 아침 9시 15분 동아일보 기자 180명은 출근하자마자 3층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박수 속에 채택했다. 서울대생들의 유신반대 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송건호(宋建鎬) 편집국장 등 간부 3명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풀려난 직후였다.
이날 동아일보 기자 일동의 이름으로 된 실천선언은 종전의 선언문보다 훨씬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신문·방송 등의 제작에 외부간섭을 배제하고 기관원의 사내 출입을 거부하며,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거부하되 만일 불법연행이 이루어질 경우 그들이 귀사할때까지 퇴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 이후 ‘출입기자’라고 불리던 중앙정보부 직원의 회사출입은 잠시 중지되었고 언론인의 연행도 좀 뜸해진 듯했다. 그러나 이 선언이 있은 지 두달 만인 74년 12월 26일부터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광고탄압이 가해졌다. 광고주들이 이유 없이 예약된 광고를 취소하면서 백지로 나가던 광고면이 격려의 글과 문구가 적힌 격려광고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동아 광고탄압이 무려 7개월이나 계속되는 바람에 회사가 입은 경영상의 손실은 엄청났고, 기자들은 봉급과 보너스가 깎이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정부와 권력의 보복이 동아의목을 조이는 광고탄압이라는 교묘한 행태로 나타난 셈이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동아사태라는 뼈아픈 내부갈등을 겪어야 했다. 회사는 75년 3월 경영난 타개를 이유로 기구축소를 단행하면서 기자 18명을 해고했고, 기자들은 이에 맞서 월급을 깎더라도 해직은 말아달라고 호소했으나 이 과정에서 오히려 기자 2명이 더 징계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싸움은 외부와의 투쟁이 아니라 내분양상을 띠게 되었다. 1975년 3월12일 기자총회를 열던 기자들은 제작거부를 결의한 후 일부 기자가 2층 공무국으로 몰려가 제작시설을 점거하기에 이른다. 이때 기자들은 제작거부에 참여하느냐, 제작투쟁의 길을 선택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신문을 만들면서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언론의 가장 큰 무기인 신문제작을 스스로 포기하고 무엇으로 강력한 독재권력과 맞서겠느냐는 생각에서 였다. 더구나 일간으로 허가된 신문이 일정기간 휴간하면 스스로 폐간 사유를 제공하는 꼴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신문발행을 거를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작투쟁 대열에 참여, 회사가 공무국의 미비로 자체 인쇄를 못하는 동안 비상제작체제를 가동했다. 첫날 조선일보를 시작으로 한국일보, 신아일보 등의 인쇄시설을 이용해 반쪽신문 발행을 계속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회사는 공무국이 점거된 지 닷새만에 판매국 직원 등을 앞세워 농성에 참여한 일부 사원과 해직기자를 해산시키고 공장시설을 정상화했다. 이후 제작거부에 참여했던 기자와 사원100여명은3월18일 신문회관에서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그해 9월까지 6개월간 매일 아침 회사 정문 앞에 늘어서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엊그제까지 한솥밥 먹으며 고락을 같이했던 동료들 앞을 지나 출근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기자는 정문출입 대신 후문 등 다른 출입구를 이용하기도 했고, 침묵시위가 끝난 후 출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3월 25일 제작에 참여했던 기자들이 돈을 모아 낸 광고를 보면“우리와 함께 자유언론을 외치다 밖으로 나간 동료들에게 호소합니다. 동아일보의 경영자나 바깥에 나가 있는 여러분이나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나 모두가 언론자유를 실천 수호한다는 대명제에는 한 치의 이견도 없다는 것은 확신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무렵 나는 동아사태의 아픈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출근길에서 옛 동료와 마주치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 그래서 나이 40세의 만학도로 프랑스 유학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프랑스 유학과 워싱턴특파원 시절
(…)
이처럼 7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국내 정치기류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고, 따라서 한미관계도 가파른 고비를 넘고 있었다. 미 행정부와 의회는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의 강경통치를 비판했고, 우리가 보내는 워싱턴발 기사는 때론 문맥을 알아볼수 없을정도로 왜곡돼 짤막하게 보도되기도 했다.
그 무렵 워싱턴대사를 지낸 함병춘(咸秉春, 아웅산에서 순직) 대통령특보가 워싱턴을 방문, 조지타운근처한호텔에서조찬을함께하자고연락해왔다. 한국일보 조순환(曺淳煥, 전 국회의원, 작고) 특파원과 나 이렇게 단 세 사람이 마주앉는 자리여서 솔직하고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갔다. 우리는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불만이 폭발직전인 데다 워싱턴의 기류가 심상치 않으니 아무래도한국정부가완화책을쓰지않으면안될것같다는의견을털어놓았다.
우리 의견을 심각하게 경청하고 이것저것 미국 조야의 사정을 물어본 후 함 대사는 결론적으로 “상황이 어렵지만 물러설수 없다. 권력을 지탱하는 마지막 수단은 공포와 존경인데 존경(respect)을 잃은 박 정권이 매달릴 데는 이제 두려움(fear)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대로 유신정권은 김 총재 제명후 터진 부마사태를 무자비한 방법으로 진압했고, 미국의 잇단 경고에도 불구하고 강권통치로 치달았다.
그때 남미여행을 마치고 워싱턴을 찾은 후배 박기정(朴紀正,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언론재단 이사장), 이재원(李在遠, 전 서울신문, 정무차관)과 셋이서 술자리를 한 일이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정정이 얼마나 심각한지 설명하면서 “서울에서 정변같은 예기치않은 큰일이 터졌으니 미국측 반응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오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라며 뭔가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들이 서울로 돌아가자마자 박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내 예언이 적중한 셈이 되고 말았다.
10·26사건이 터진 후 미 국무성에서 만난 세계 각국의 언론인이나 미국 조야인사들은우리못지않게놀라움과충격을받은것같았다. 그들은 마치 지나간 시대의 궁정쿠데타 같은 이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왔지만 낯이 뜨거워 제대로 대답할수 없었다.
10·26이후 광주사태가 발발하고 신군부가 등장하자 미국 언론의 관심은 다시 한국에 쏠렸다. 광주에서 무자비한 진압이 있었다는 보도가 산발적으로 흘러나오면서 미국 정부도 어느 정도 사실확인을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소식이 끊긴 광주의 사정을 서울에서보다 미국을 통해 알아보는 것이 빠르다 싶었는지 우리에게는 기사와 함께 정보보고를 더많이 요구해왔다.
1980년 대통령선거에서 카터를 꺾고 승리한 레이건 대통령은81년1월20일 취임한 후 첫 외국원수로 전두환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맞이했다. 오래쌓인 한미간의 깊은 앙금과 골이 서서히 풀려가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워싱턴특파원시절도 이 무렵 끝이 났다.
동아일보 社歌를 작사하다
“동방의 빛이어라 민족의 길 밝힌 등불
3·1정신 받들어 새벽을 헤쳐오다
밝히리라 온누리에 자유의 횃불
누구도 영원한 그 앞을 막지 못하리
(후렴)
동아일보 겨레의 얼 나날이 새로워라
나라 위한 바른말 역사에 전하리라
나라가 없을때도 깨어있던 종소리
진리와 함께 가는 보람찬 길이로다
외치리라 온누리에 민주의 소리
누구도 의로운 그 붓을 꺾지 못하리
아, 세계로 뻗어가는 겨레의 기상
시대에 앞장서서 문화의 밭을 간다
알리리라 진실이 무엇인가를
천년 뒤 만나도 살아있는 글자리니”
워싱턴특파원을 마치고 돌아온 후 비서실 근무를 발령받았다. 회사에 입사한 후 처음으로 글 안쓰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비서부장으로 2년 남짓 근무하면서 회사의 경영내부를 들여다 볼 기회를 갖게 되었고, 김상만(金相万) 회장의 대외활동을 돕는 일을 두루 맡았다. 일주일에 두 번 미 대사 부인과 만나 영문편지의 문안을 다듬고 PFA(아시아신문재단) 등 외국언론 관계 일을 거드는 게 주임무였다. 그 대신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동아일보 사가(社歌)를 작사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1985년4월1일은 동아일보 창간6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회사는 이에 맞춰 그때까지 불리던 춘원 이광수(李光洙) 작사의 사가를 폐지하고 새 사가를 제정하기로 결정, 김성열사장을위원장으로하는사가제정위원회를구성해놓고 있었다.
맨 처음 사가 원고를 시단의 원로이며 동아일보 문화부장 경력이 있는 미당 서정주(徐廷柱)에게 청탁했다. 그러나 초고를 심사한 결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아 한두번 개사(改詞)를 부탁했는데도 끝내 채택되지 않았다. 이어 원로시인 박두진(朴斗鎭)에게 다시 부탁했으나 그 역시 채택되지 않아 원고료만 드리기로 하고 없던 일로 하게 되었다.
사가제정위원회는 고심 끝에 사내에도 시인들이 있으니 사내공모를 통해 새 사가를 골라 보기로 했다. 그 결과 김광협(金光協, 작고) 시인과 내 작품이 마지막 선고대상에 올랐고, 몇 번의 축조심의 끝에3절로 된 내 사가가 정식채택 되었다.
지금도 4월 1일 창간기념일 같은 때는 내 작사에 김성태(金聖泰, 전 서울음대학장) 작곡으로 된 사가가 울려퍼지고, 아침 출근시간에도 그 노랫말이 사원들의 마음에 전해지고 있는데 4반세기 동안 동아에 근무하면서 남긴 가장 큰 보람이 아닌가 싶어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항상 “나라위한 바른말 역사에 전하리라”는 후렴을 되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언론계를 떠나 정계로
나는 논설위원을 끝으로 동아일보를 떠났다. 만 25년 2개월에 걸친 언론인 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1984~88년 5월까지 4년 동안 정치, 외교, 군사, 남북문제 등에 관한 논설을 쓰면서 일하는 보람과 성취욕을 맛보았다. 비록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이었지만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6·29선언과 6·10항쟁이라는 민주화의 승리를 가져온 역사적 고비이기도 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온나라가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기도 했으며, 언론이 모처럼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시기였다.
나는 이 기간 동안 신문, 잡지에 많은 글을 썼고 저술활동과 방송매체 출연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특히 관훈클럽 제35대 총무를 맡아 민주화의 길목에서 언론의 사명을 다하는데 한몫을 담당했던 것은 커다란 보람으로 여긴다.
(…)
관훈클럽 총무로 1노3김 대통령후보 옆자리에 앉아 각각 3시간 동안 토론회를 진행한 것은 더없는 기회였고 행운이었다. 게다가 토론회 전 과정이 TV화면을 타고 전국에 중계되었으니 그 폭발력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야말로 자고 나니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어떤 사람은 회사로 전화를 걸어와 격려해주기도 했고, 택시를 타려고 길에 서있으면 “총무타세요”라면서 차를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은 대통령선거와 이듬해 있은 국회의원 선거가 모두 끝난 후 야당 부총재가 된 것이다. 나는 1988년 5월25일 전당대회에서 통일 야당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
4반세기의 기자생활을 마감하고 험난한 야당의 길을 선택한 나에게 축복과 격려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는 지인도 많았던 게 사실이다. “신문사 논설위원의 위상을 3·4선의원이 차지하는 야당 부총재급으로 격상시켰다”는 얘기에서부터 “가려면 금배지를 달고 갈 것이지…”라고 걱정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로 했다. 비록 지금부터 걸어가는 길이 가시밭길이라고 할지라도 당당하게 말이다.
(강인섭, 미니회고- 시대의 격랑 헤쳐온 기자 4반세기, 관훈저널 2007년 여름호, 43~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