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0호)
민중의 길잡이 창간 실무주역 3人-유근
1920년 4월 동아일보의 창간주역 들을 훑어보면 20대 청년들이 주동이 된 청년신문이란 것을 알 수 있지만 유근(柳瑾), 양기탁(梁起鐸) 등 노장층 두명이 편집감독이란 이름으로 끼어있다. 일종의 부조화(不調和)랄 까, 심한 세대적 격차가 느껴진다. 창간주역인 김성수가 29세이고 주간 장덕수가 26세, 편집국장 이상협이 27 세, 정경부장 진학문은 26세, 정경부의 핵심멤버인 염상섭은 고작 23세 였다. 이에 반해 편집감독 유근이 59 세의 노령이고 양기탁은 49세의 장년 으로 노장년 원로층이 앞줄의 청년들을 뒷받침하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유근은 원래 개신유학자(改新儒學 者)로서 개화운동에 참여하여 독립 협회, 대한자강회, 신민회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1896년 창간된 황성신문 주역의 한사람으로 대한제국기 언론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1905년 을사 늑약때 장지연(張志淵)의 「是日也放 聲大哭」으로 신문이 격랑에 휩싸였을 때 이를 수습하고 끝까지 신문을 지켰던 장본인이다. 일제강점후 조선 어신문이 전폐(全廢)되자 조선광문회의 주역으로 신자전(新字典)편찬사업을 필두로 한 수많은 고전간행사업에 앞장섰으며 대종교에 참여하여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 등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다. 특히 1915 년 김성수가 중앙학교를 인수 경영할때 교장으로 초빙되어 동아일보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1919년 3⋅1운동 후의 열화와 같은 독립열망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상협 장덕준 등이 신문창간의 자금마련을 위해 김성수를 만났을 때 이들을 도운 것도 유근이었다. 당시 김성수는 중앙학교와 경성방직 개편 준비로 신문에 참여할 겨를이 없었는데 그를 참여의 길로 인도한 사람이 유근이 었다. 김성수에게 유근은 중앙학교를 매개로 한 깊은 인연과 신뢰를 가졌던 대원로 선배였다. 그때 유근은 꼭 10년전 일본에 강탈당했던 황성신문 이나 대한매일신보의 부활이란 간절한 비원(悲願)의 실현을 이들 젊은이 들에게서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김성수의 참여만이 자신의 꿈을 실현케 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김성수 또한 누구의 권유나 설득보다 유근의 간절한 권면에 동의하여 어렵 사리 신문창간에 나섰던 것이다.
1919년 10월 총독부에 신문발행 신청서를 낼 때 신문의 제호를 「東 亞日報」라 결정한 것도 유근의 뜻이 었다. 장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쟁취 하려면 모름지기 동아시아를 무대로 삼아야 하며 우리 겨레의 시야를 넓혀 조선이 일본의 속방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였다. 창간호에 권덕규(權悳奎)의 「東亞解」란 글에서 보면 「동아」란 말이 광의로는 중국 일본 등을 모두 지칭하고, 협의로는 「東」은 만주와 몽고 한반도 등 옛 조선의 강역을 가리키는 말이며 따라서 동아는 조선으로 통하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 지금도 쓰고 있는 「東 亞日報」란 제호는 성당 김돈희 (惺堂 金敦熙)의 글씨인데 이 역시 유근이 추천한 것이다. 종로구 화동 138번지 신문사 사옥 역시 얼마전까지 중앙학교 자리로서 학교가 계동 신축사옥으로 이전하고 비어있던 건평 80평 짜리 한옥이었다. 자신이 3년여를 교장 으로 재직했던 중앙학교 그 건물에서 동아일보가 창간됐다는 것도 유근에 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유근 양기탁 등 두 편집감독은 창간호에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 「지(知)아? 부(否)아?」란 기명기사로 얼굴을 보인 이후 직접 지면에 나타나지도 않고, 제작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주간 편집국장 이하 제작진 전원이 20대의 젊은이들인데 노령의 편집감독들이 끼어들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근은 틈만 나면 신문 사에 나와 젊은 기자들을 격려하며 그들을 붙잡고 바둑을 두기도 하고 한담도 즐겼다. 그 당시 신문사 경영이 핍박해서 기자들이 몇 달씩 월급을 받지 못하여 하숙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도 있었으며 편집국 책상 위에서 쪽잠을 자는 기자들도 있었다. 유근은 새벽같이 회사에 나와 이들을 데리고 근처 해장국집에 가는 배려와 자애를 베풀었다 한다.
이 무렵 유근의 시국관이랄까, 정치적 신념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으니 권덕규의 「假明人頭上 의 一棒」이란 글의 파문이 일었을 때였다. 유교사회의 허위의식과 구시대 적인 누습을 맹박한 이 글로 하여 유림들이 신문에 대한 격렬한 성토와 불매운동이 일어나자 박영효 사장이 사장직을 사퇴하며 신문에 사과문을 실을 것을 요구하였다. 젊은 기자들이 이에 반발하여 사장을 성토하니신문사가 신구세대의 대결로 양분되 었다. 그러나 유근은 기자들의 편에 서서 간부회의 석상에서 단연 박영효 사장을 맹박하였다. 그의 진취적이며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 모습을 엿볼수 있는 풍경이었다.
1921년 5월 유근이 별세하니 동아 일보를 필두로한 당시 우리사회의 그에 대한 예우가 극진하였다. 신문 1면에 장문의 부음과 조사가 나갔고 연일 각계의 조사와 만사가 잇따라 나갔다. 「지방열을 삼가라」는 그의 유훈도 나갔다. 심지어 안동과 곤양 등지의 지방과 일본유학생과 교민들의 추도식 기사도 실렸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도 1면에 장례식 기사와 그의 행장을 실었다. (후략)
– 글 이종석 (장지연기념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