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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 백관수

Posted by 신이 On 4월 - 3 - 2018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59호) 

 

 

     

       근촌 백관수 (芹村 白寬洙)  

2·8 독립선언 주도…강제 폐간 끝까지 저항

 

 

 

 동아일보 제7대사장을 지낸 근촌 백관수(芹村 白寬洙, 1889~1961)는 1889년 1월 전북 고창군 성내면 생근리에서 태어났다. 열세살 때 서당에서 인촌 김성수를 만나 함께 공부했는데, 그 이후 인촌과 근촌은 서로 교분을 쌓고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나누었다.

 1907년 두 젊은이는 서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능가산 청련암을 찾아가 호연지기를 기르고 있었는데 뜻밖에 고하 송진우가 찾아와서 한 두살 차이의 세 청년은 함께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였다.

 세 청년은 군산의 금호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힌 후 1910년 3월 나란히 졸업하였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실력을 쌓는 길이 구국의 길임을 깨닫고 인촌과 고하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근촌은 부모의 만류로 남아서 청년들을 이끌고 민중계몽과 사회봉사활동을 벌이던 끝에 1917년 29살의 만학도로서 일본 메이지 대학에 들어갔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선포함으로써 조선의 유학생들은 조국독립의 열망에 들끓게 되었다.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회관에서 조선인 유학생 웅변대회가 열렸다. 이 모임에서 학생들은 조선의 독립을 일본 내각을 비롯하여 각국의 대사와 공사에게 청원할 것을 결의함과 동시
에 백관수, 김도연 등 10인을 독립운동 대책위원으로 뽑아 독립선언의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근촌 등 유학생들은 2월 8일 학우회 총회를 도쿄의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강당에서 개최하여 근촌은 강단에 서서 비장한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장내가 터질 듯한 박수 속에 제지하는 일본경찰과 학생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우렁찬 “독립만세!”소리로 뒤덮였다.

 난투극 끝에 근촌을 비롯한 9명의 학생대표들은 체포되었고, 수백명의 참가 학생들도 검거되었다. 3·1 독립운동을 앞두고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일어난 2·8 독립선언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으며 이를 주동했던 학생대표의 선두에 근촌 백관수가 있었다.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처분을 당했다. 신문의 속간을 위해 불철주야 동분서주했던 인촌과 고하에게 총독부는 “동아일보의 제호를 바꾸라”, “폐간하겠다”는 협박을 계속했다. 이때 인촌은 근촌을 사장으로 하고 사장인 고하와 취체역인 자신이 회사를 떠나겠다는 마지막 카드를 제시하였다. 결국 총독부가 이 제의를 받아들여 동아일보는 9개월 간의 정간을 마감하였고, 근촌이 제 7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40년 1월 총독부 경무국장은 동아일보의 백관수 사장, 송진우 고문과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을 불렀다. “전시(戰時) 보국체제를 일원화한다”면서 동아, 조선은 폐간하여 매일신문에 통합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동아, 조선 대표들은 즉각 이를 거부하고 양사가 함께 반대할 것을 다짐하였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의 「자진 폐간」을 종용하였으나 회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동아의 간부들이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모의했다”는 엉뚱한 혐의를 뒤집어씌워 백관수 사장, 송진우 고문 등을 연행, 간부들을 구속하였다. 근촌은 고등계 형사들에게 연행당하기 직전 편집국에 나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손으로 폐간계에 서명날인하지 않을 것이니 사원 여러분은 낙망하지 말고 신문 발행에 전심협력해주기 바란다”는 인사를 남기고 끌려갔다.

 근촌이 구속중에도 자진폐간을 끝까지 거부하자 총독부는 강제로 수감중인 동아일보 중역들을 불러내어 ‘중역회의’를 열게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근촌 대신 병중에 있던 임정엽 상무로 변경하도록 강요하여 임정엽의 명의로 폐간계를 내게 하였다.

 폐간계를 낸지 열흘만에 왜경은 백관수 등 임원들을 석방하였으나 8월10일 동아일보는 지령 6819호에 폐간사를 싣고 창간 이래 20년의 역사에 임시 종지부를 찍었다. 동아일보 강제 폐간 후 근촌은 향리로 내려가 은둔의 나날을 지냈다. 해방후엔 잠시 정계에도 나아갔으나 1950년 7월 2일 종로구 원남동 자택에서 북의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되어 납북됐다가, 1961년 3월 평북 선천의 결핵요양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 글 정구종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1919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재일본 유학생들. 가운데 줄 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이다. 몇몇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일본인 복장을 하고 있다(왼쪽 사진). 2·8독립선언 장소인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지금은 당시 건물은 사라지고 현대식 빌딩들이 들어서 있다. 한국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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