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덕(崔慶德·1923~2003)은 해방 후 동아일보가 복간하면서 동아일보 사진부에 첫발을 디뎠다. 사진부에는 일장기말소사건의 주인공 백운선이 있었다. 그는 백운선이 6·25때 납북된 뒤 혼자 사진부를 지키다 1955년 3월 이명동 기자를 영입하고 사진부를 키웠다.
최경덕(崔慶德) (창녕, 1923~ ) ▲ 45.12 기자(사진부), 취재3부차장, 사진부장, 편집국부국장대우, 편집국부국장, 심의위원, 71.11 사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백운선(오른쪽) 동아일보 사진부장과 견습생 사진기자 최인집씨. 1948년 말이나 1949년 초쯤으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동아일보에서 처음으로 ‘후랏쉬’ 장치의 카메라를 구입, 처음 시험한다고 최경덕 기자가 찍은 사진.[사진제공 최인집]
다음은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대한언론인회 발행, 2010)에 “영원한 사진기자, 카메라 인생에 이정표”란 제목으로 실린 최경덕 사진기자론. 최경덕은 1983년 사진기자 일생을 담은 회고록 ‘역사(歷史)의 목격자(目擊者) : 사진기자일대기’(을지사)를 펴냈다.
○1923년 8월 25일 경북 달성 출생, 2003년 4월 1일 별세 ◇학력 일본 나고야 시립 다이이치(第一)중 졸업(41) ◇주요경력 일본 아사이신문 중부본부 사진부 기자, 경성일보 사진부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45), 사진부장(59), 편집부국장(68) 서울신문 편집부국장 겸 사진부장(72) 한국가이드진흥회사 대표이사(75) 월간 여행 대표이사(83) 사진작가 협회 고문 한국신문사진동우회 회장 ◇수상 금성화랑 무공 훈장, 한국언론인상 보도사진상, 서울시문화상 ◇저서 ‘역사의 목격자’
영원한 사진기자, 카메라 인생에 이정표
최 국장님의 삶이 동아일보 사진부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지대하다. 1945년 동아일보 사진부에 입사하여 홀로 동분서주 하다가 인촌 김성수 선생의 서거(1955)후 이명동 기자를 영입하고 그 후 사세 확장에 따라 박용윤을 비롯하여 홍성혁 이의택 최금영 송호창 조천용(65년) 심종완 조두현(67년) 윤석봉 남기재 김창선(68년) 등 대부대를 이끌다가 정년퇴직함으로써 파란 많던 신문기자 생활을 끝냈다.
특종인생! 좋아서 시작한 사진 찍기가 영원한 사진기자 최경덕을 탄생시킨 것 일뿐, 유난히 특종을 바라고 뛰어 보진 않았다. 한낮 기기(器機)에 지나지 않는 카메라. 그것이 최경덕 인생의 방향을 바꿔 놓았던 것이다. 나이 육십(耳順)에 회고록을 쓴 최경덕은 한 인생의 여로를 더듬는 게 아닌 역사의 음영 진 구석까지 살펴 후세에 바른 사관(史觀)을 심어 주자는 게 작은 욕심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하자면 필연적으로 일본이 등장 한다. 그의 선친께서는 나고야에서 동양 도자기공장을 경영하고 계셨다. 비교적 부유한 가세에 힘입어 당시로서는 희귀한 카메라 선물을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받게 되었다. 감칠 듯 살짝 들려오는 셔터 음에 도취되어 열심히 렌즈를 조절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4학년 가을, 일대 전환이 되어버린 일이 생겼다. 교내 운동회가 열리던 날, 한창 응원에 몰두한 학우들의 표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신나게 소리 지르며 땀투성이 얼굴로 함빡 웃을 때 드러나는 흰 치아. 이런 것에 초점을 맞췄다. 별 기대는 하지 않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 학생 컨테스트에 출품했다. 한데 그것이 특선으로 당당히 뽑히고 말았으니 그때의 기쁨이란 하늘을 뛸 듯이 굉장했다. 좋아서 가까이 한 카메라가 일본 학생을 압도했으니 말이다. 그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는 조선인이었으니 일인의 편견이 고의적으로 입상을 기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친한 벗이었던 가노우지(加納充二)의 이름으로 출품했다.
5학년인 그 다음해 학우들의 여러 모습들을 담아 다시 특선을 받게 되었다. 시상식에서 스폿 라이트를 받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엉엉 울고 있었다. 연이은 특선으로 사진에서의 열정은 불꽃같은 집념으로 굳어만 갔다. 아울러 아사히신문에서는 기가 막힌 프러포즈를 해왔다. 컨테스트의 심사위원장이었던 사사끼신조 부장은 사진이 시각적으로 뛰어나다며 입사해 줄 것을 권유해 왔다. 보도사진기자! 약관 20세에 얻게 된 이 직함은 그 후 30여년을 따라 다니게 되었다.
중학을 졸업하자 곧 아사히신문에 대망의 첫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열심히 뛰어 다니던 6개월 무렵, 미제출 구비 서류를 준비해오라고 했다. 다름 아닌 호적 등본이었으니 그러면 신분이 들통 나는 일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최연소 기자라 하여 모두들 귀여워 해 주었는데 달리 방도가 없었다.
“조센징?”예상대로 신문사의 반응은 냉담 했다. 사진 일선을 뛰는 기자가 한국인이라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이긴 했지만 서운 했다. 주섬주섬 책상을 정리하는데 예의 입사를 주선했던 사진부장 사사끼신조가 앞으로 나섰다.“ 그에 대해선 내가 책임지겠다.”명확한 의사 표시였다. 모두의 눈빛이 긍정적으로 보여 지기 시작했다.
사사끼 부장의 이런 결단은 대단한 용기를 요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가명 문제는 일단락 지어졌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2년 8개월을 나고야 본사에서 근무 하게 되었다. 이런 고비를 넘기고 햇병아리 기자생활을 하며 재미있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는 중에 중일 전쟁은 계속 되었고 사사끼 부장의 배려로 아사히신문 서울 지국으로 발령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기쁨과 스승과 다름없는 사사끼 부장을 떠난다는 서운함이 교차되어 목젖이 뜨거웠다. 모두의 정성어린 환송을 받으며 일본을 떠났다. 전세(戰勢)가 기우는 1943년 초 여름의 일이었다.
解放그리고 東亞日報
그 후 아사히신문 서울 지국장(信夫韓一郞)과 함께 경성일보로 옮긴 게 43년 11월이었다.
당시 10년 이상 근무한 기자들의 월급이 80원이었는데 100원으로 꽤 좋은 조건으로 일했다. 그때까지 일본 보다는 물자가 풍부했던지라 카스테라와 과자 등을 몇 상자 아사히신문 동료들에게 보내 주었다. 경성일보에 근무하면서 9명으로 구성된 보도반원으로 종군하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나랑(羅南)사단에 도착하여 군(軍)과 합류했다. 이틀 후인 1945년 8월 11일 청진 이북은 소련군이 점령하였고 일본군은 패주하는 중이었다. 다른 기자들은 모두 남아 있겠다고 하여 경성일보팀 만이 함경남도 명천으로 남하 하였다.
군용 차편으로 명천에 도착하자마자 명천 지국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8월15일 12시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뉴스였다. 해방! 그랬다. 바로 해방을 맞은 것이었다. 보도반에 소속된 한국기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한동안 좋아 하다보니 옆에 서있던 일본 기자들은 한구석에 모여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씻어 내고 있었다.
서울 본사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화물열차를 얻어 타고 함흥에 도착 하여 본사로 연락하니 하루를 쉬고 아침 일찍 출발하라고 했다. 그러나 패전으로 초조해진 일본기자들은 밤차로 떠나 버렸다. 그 다음날 출발준비로 바쁜 기자들에게 비보가 날아왔다. 청진에서 떠나 올 때 남아있던 기자들이 18일 잠수함으로 상륙한 소련군에게 잡혀 갔다는 것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에 도착하니 거리마다 해방의 기쁨으로 축제 분위기였다.
1945년 12월 1일 동아일보는 긴 겨울잠을 깨고 다시 민족 앞에 우렁찬 소리로 인사를 올리게 되었다. 일제가 동아일보를 없애려고 인쇄기 일체를 없애서 해방 3개월 반이 지나서야 겨우 타블로이드 2면의 신문을 만들 수 있었다. 폐간 된지 5년 4개월 만의 일이다.
입사(入社)날 날아간 이층집 두 채
동아일보에 입사 하는 날, 사진부장 백운선 씨가 명동에 가서 라이카를 구해 주었다. 마침 서울 운동장에서 거행되는 한미 친선 복싱 대회를 취재해 오라는 것이었다. 교통수단이 극히 불편했던 때라 을지로 입구에서 매달리다시피 전차에 올라 타 을지로 6가에서 내렸다.
귀한 자식이라도 품듯 오버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카메라를 꺼내려다 없어진걸 알게 되었다.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듯 아찔함을 느꼈다. 망연히 바보처럼 서 있다가 터덜터덜 본사까지 걸어와 만 가지상념으로 사색이 되어 들어서는 내 기색에 모두들 의아해 했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사실을 고백하자 고재욱 편집국장이 용수철 튀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말이야?”이 한마디를 부르짖고는 모두 입이 붙어버린 듯 앉아 있었다.
하는 수없이 노량진에 사시는 누님 댁에 찾아가 통사정 했다. 누님과 매부는 술값 갚으려는 줄 아시고 탓하셨다.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돈을 받아와 고 국장에게 건네주었다. 전액을 변상하고 사퇴의 뜻을 비치자 고 국장은 두 번째로 놀라 눈이 둥그레졌다.
주위 만류와 뽀족하게 갈 곳도 마땅치 않아 그냥 눌러앉기로 했다. 당시 독일제 카메라 한 대 값이 1만2천원이었다. 잘 지은 양옥 한 채에 6천원 했는데 그걸 잃어 버렸으니 결국 양옥 이층 두 채가 순식간에 날아간 격이었다.
해방의 해가 기울어 가던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의 신탁 통치가 결정되자 전국적으로 반탁시위가 일어났다. 어수선한 정국 속에 이승만 박사가 미국을 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이 대통령이 미국을 설득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그 동안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군중들의 사진 500여장을 이틀 밤을 새워가며 인화 하여 측근을 통해 이 박사에게 전달했다.
이 사진을 보고 “정말 고맙다. 미국사람들에게 이 사진을 보여 주어야겠다”라고 말하고 이 사진을 들고 미국에 갔다. 귀국 후 이 박사가 경무대로 초대하여 종종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요리한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
1945~1949년 한국 격변기에는 우리나라 정치 거물들이 수 없이 암살 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1945년 12월 송진우 씨, 1947년 7월 여운형 씨, 그 해 12월에는 장덕수 씨, 1949년 6월에는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 때마다 현장으로 뛰어가 피묻은 시체를 보면서 셔터를 눌렀지만 뛰는 가슴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1949년 9월 27일, 소련 영사관의 니콜라이 서기관이 간첩혐의를 받고 북쪽으로 추방당하는 사진을 취재하게 되었다. 황해도 부근에서 외신기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보도진들이 무장군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취재를 해야 했다. 등에 짐을 지고 북쪽으로 향하는 니콜라이 부부의 뒷모습만 찍을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사진을 위해서 지정된 장소를 벗어나 니콜라이 부부가 걸어가는 정면에서 촬영을 했다.
생사의 곡예 6 25 종군
취재는 현장의 질서를 지켜야 하지만 독자들에게 생생한 사진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용감하게 행동해야 했다. 정면으로 찍은 유일한 사진, 일그러진 스파이 나콜라이의 표정, 너무나 생생했다. 이때 뉴욕 타임스의 동남아 특파원 ‘존스톤’기자가 사진 원고료를 많이 줄 테니 팔라고 제의 해왔다. 고액의 사례금을 거절하고 뉴욕 타임스에 동아일보 제공이라고 밝힐 것을 전제로 하고 주었으나 며칠 후 막상 뉴욕 타임스를 보니 1면 톱으로 실렸는데 엉뚱하게도 존 스톤 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사진으로 당시 2천달러의 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그 사실에 대해 그는 미스 프린트라고 극구 변명 했으나“기자는 신의가 중요하다”고 정면으로 비난 했다.
한민족 그 누구라서 6 25를 모를까마는 그가 겪은 6 25는 생사의 곡예 짓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술꾼이면서 낚시광이었던 그는 아침 일찍부터 낚싯대를 메고 서울역으로 나섰다. 개성행 북행 열차가 운행 정지한다는 방송과 함께 섬뜩한 예감에 발길을 공중전화 쪽으로 끌고 갔다. “ 비상사태야. 개성 쪽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빨리 군복을 입고 귀사 할 것.”후일 3년이 넘도록 군복을 벗지 못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국방부 보도과로 달렸다. 그곳엔 이미 동료 기자였던 이혜복 임학수 김진섭 등이 나와 있었다. GMC 트럭을 타고 육군 제1사단 (사단장 백선엽)에 도착했다. 첫 기자회견, “ 우리의 강한 반격으로 격퇴 중”이라는 지극히 낙관적인 얘기였다.
온 밤을 쭈그려 새우고 국군들의 총 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서울로 돌아와 제1면 톱 타이틀로‘국군정예 북상, 총반격 전개’라고 거창하게 박아 냈다. 술렁이던 시민들은 동아일보의 이름을 믿으며 안심했다. 다음날인 6월 27일 서울 주재 모든 외국기관들이 철수 준비를 끝냈다는 정보가 들어와 최두선 사장은 전 사원을 놓고 해산을 선언했다.
의정부를 거쳐 미아리 고개를 넘보는 북괴들의 총소리가 아련히 들려 오는 오후 4시경, 내 외근 기자들 모두가 편집국에 모였다.
그날의 뉴스를 호외로 만들어 문선과 조판을 기자들이 직접 하여 300장 가량을 수동기로 찍어내서 지프차로 뿌리고 나서 무교동 설렁탕집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어느 신문보다도 가장 늦게 까지 서울에 남아 정확한 소식을 전달한 동아 식구들은 장인갑 이동욱 권오철 최경덕 백광하 등 15인이었다. 남하하는 길밖에 도리가 없었다
6월 29일 아침 쌀자루를 차고 마포강변으로 나갔다. 적당한 도강장소를 물색해낸 찰라 잠복 중이던 인민군 2명이 총부리를 겨누고 누구냐고 했다. 인근 부대로 끌려가면서도 줄곧 묘안을 짜내느라 애썼다.
인민군들은 발길로 차며“이 간나이 새끼! 스파이구나.”소리치며 직업을 물었다. 우물쭈물 하자 다시 발길질이 시작되어 평소엔 그렇게 불편하던 틀니(송학산 사건으로 얻은 반갑잖은 선물이었다)를 뽑아들고“나는 지하운동을 하다 모진 고문으로 생 이빨까지 뽑힌 남로당원이요. 이 망가진 잇몸을 보시오. 그래도 못 믿겠소?”이때 까지 거만을 떨던 장교가 덥석 내 손울 잡으며“고생이 많았수다. 영웅 동무!”졸지에 영웅 대접을 받으며 유유히 살아나올 수가 있었다.
누님 댁에 숨어살던 그는 9 28 수복을 맞아 감격의 만세를 부르며 밖으로 나왔다. 자유당 말기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폭력이 난무하는 부정 선거로 치닫기 시작했다.
1958년 민의원 선거 때 서대문 밖에서 괴 청년단의 투표조작 실태를 확인 취재하다 집단 폭행을 당해 이승만 대통령의 투표사진을 비롯한 이날의 모든 사진을 게재하지 않고 사진 없는 먹판 신문을 발행해 신문사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
3·15 부정선거 등 역사의 증인으로
같은해 5월 2일 민의원 선거 때 수색 상암동으로 취재를 나갔다. 그곳의 정치대결은 최규남(崔圭南)과 김산(金山)이었는데 정치깡패들이 등장 했다. 그들은“어디서 왔냐?”고 거칠게 시비를 걸었다.“ 이곳이 모범선거를 한다고 하기에 동아일보가 취재를 하러 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카메라와 시계를 강탈 당했다. 심한 폭행을 하며 난타를 가했다. 백병원에 입원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정성어린 위문품을 많이 보내주기도 했다.
1960년 3월 15일 속칭 부정선거의 서막은 몽둥이로부터 시작 되었다. 정 부통령 마감일이 임박한 2월 12일 장택상 박기출 후보의 추천서류를 찾아 갖고 나오던 민주 수호연맹위원 10여명이 테러를 당했다. 서류도 강탈했고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정 부통령 선거 후보 방해사건’을 박용윤 기자가 이 희대의 활극을 카메라에 담아 보도 할 수 있었다. 4월 12일 대구에 간 박용윤 기자를 마산으로 특파하여 불태운 경찰서장의 지프차와 야간 데모대를 비롯하여 태극기에 덮인 김주열, 동래 고교생들의 데모 등을 보도 하였다. 4 19시민 혁명 때는‘청와대 진격사진’(이명동 차장 취재) 등 적재적소에 기자를 배치하여‘민주혁명의 기록’을 발간하고 1960년 6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기자대표로 미국대통령의 전용기에 동승해서 동아일보 기자들이 촬영해서 만든 4 19혁명 기록인 ‘민주혁명의 기록’화보를 기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바로 책을 펴들고 진지하게 살피게 하는 등 4 19혁명의 참뜻을 알렸다.
수많은 취재를 했지만 특히 인상에 남는 취재는‘독도 항공 촬영’이었다. 1960년 독도촬영 기획을 하여 일본이 걸핏하면 주장하는 독도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 제대로 된 독도 사진이 별로 없었다. 계획을 세운지 3년 만에 헬기가 아닌 공군연습기 T33을 타고 촬영하기로 허락이 났다.
저공비행 독도촬영으로 특종상
1963년 12월 1일, 조종사는 절대로 2,000피트 이하로는 하강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은 터라 고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2,000피트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항공 촬영 기회를 얻었는데…“어렵겠지만 한번만 저공비행을 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자 조종사가 세 번째 선회하여 700피트로 저공비행을 하여 촬영을 하게 되었는데 조종사 박 소령은 700피트로 내려간 사실을 절대로 비밀로 하자고 신신 당부했다. 어렵게 촬영에 성공한 독도 사진이 1964년 1월 1일자 신년호를 장식하자 당시 김상만 전무가 특종상금을 두둑하게 줘서 그날 박 소령을 만나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특종상금은 조종사와 그렇게 먹었는데도 남을 정도였다.
4 19도 지나 세상이 조용하니 사회부에서는 사진거리를 자주 찾는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아래 땅속을 뒤져야 하는데 물속이 손쉬울 것 같아 박용윤 기자는 얼음주머니에 카메라를 넣고 렌즈 앞쪽을 투명 유리로 막아 방수 카메라를 만들고 서울 운동장 다이빙 풀에서 여러차례의 착오 끝에 초보적인 수중 사진을 성공 시켰다.
이를 본 최 국장은 본격적인 수중 촬영을 위해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아쿠아 렁’을 일본에 주문하였다. 한국 최초의 수중 사진을 제주 서귀포 앞 바다에서 해녀들의 활약상과 유영하는 물고기 등을 카메라에 담아 보도하였으며(1962년 8월 6일) 수중 사진의 장을 열었다.
그 후 4 19를 취재했던 사진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정년퇴직 후‘한국 신문사진 동우회’를 만들고 자신들이 미처 하지 못 했던 아쉬움 즉 이웃에 대한 배려‘인간애’를 널리 알리고자 1991년부터‘한국 신문사진 동우회 인간애상’을 주도해 신문 사진 동우회 회장으로 후배들을 항상 격려하며 이끌어 왔다.
<후기> 최 국장이 돌아가신지 어언 8년. 2013년 4월 1일이 10주기이다. 9월 초순경 이병대 형으로부터 홍성혁 선배의 지명이라며 원고 청탁을 받아 놓고는 날이 감에 따라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우선자료 수집부터 해야겠기에 동아일보와 접촉을 했으나 별다른 자료가 없었고 다시 인터넷에서 Daum, Naver, Nate, Paran 등을 검색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Goggle에서 26쪽에 달하는 것을 하나하나 검색하여 최경덕이란 이름을 가진 분은 7~8명 있는데 만족하지가 못했다.
다음날 마지막으로 큰아들인 정원과 통화하여‘역사의 목격자’(최경덕 저)를 보관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추석 전날 아침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포천으로 달려가 생존의 얘기들과 여러 증서 등을 기록할 수가 있었다. 또한 그 후에 박용윤 홍성혁 선배가 많은 자료들을 보내와 큰 도움이 되었다.
필자 : 조천용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겸임교수, 프리랜서)
1960년 6월 19일 오끼나와에서 한국을 방문하는 아이젠하워 美 대통령이 비행기안에서 동아일보가 발간한 4.19화보 ‘민주혁명의 기록’을 펼쳐 김주열군의 사체와 고대생들이 깡패에게 습격 당하는 장면을 유심히 보고 있다. 왼쪽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대표 특파원인 홍승면 한국일보 편집국장. <1960.6.19/최경덕>
동아일보에 실린 최경덕의 사진기사들
니코라이 부처추방 1949년 10월 5일자 2면
카메라 해저탐방 1962년 8월 6일자 석간 2면
조국 (5) 금강산이 보인다! 1964년 1월 1일자 9면
최 경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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