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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부도옹(不倒翁·오뚝이)’으로 불린 한라건설 명예회장 정인영(鄭仁永·1920~2007)도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그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에 1980년 기업을 빼앗겼고 1989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시련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기업을 일으키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다.

이러한 그가 기업가가 되기 전 20대 후반을 동아일보 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시기로는 해방 후 정부수립 전후부터  6· 25 발발까지였다.

동아일보사사에는 정인영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해 서울에 들어올 때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마지막 호외를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튿날인 6월 26일 새벽에는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고 적군은 전차를 앞세워 물밀 듯 쳐  내려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적의 진격은 너무나 급속히 진행돼 27일에는 의정부를 거쳐 선봉은 미아리 근처까지 육박해 왔다. 외국기관에 출입하던 정인영 기자는 27일 아침 ‘재경 외국기관들이 서울에서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아침 호외를 낸 후 최두선 사장은 전 사원을 모아놓고 “우리는 적에게 몰려 일단 해산한다”고 선언하고, 신문사의 은행예금을 전액 찾아 상하 구별 없이 똑같이 나누어줬다. 정오 무렵 북쪽에서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농우(農牛)를 끌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동북과 서북 두 방면에서의 포격 소리는 시내까지 울려왔다.

 오후 4시쯤 외근기자가 모두 편집국에 모여들었다. 전황이 절망적이어서 더 이상 취재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텅 빈 공장으로 내려가 호외 제작을 시작했다. 공장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 정인영이 일본 유학시절 문선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어 간신히 채자 작업을 끝내고 공무국장 이언진이 어렵게 직접 조판, 300장 가량의 호외를 수동기기로 찍어냈다.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마지막 호외는 기자들의 손으로 찍혀 나왔고, 그들은 시경에서 지프차를 빌려 시청 앞, 광화문, 중앙청, 안국동을 돌며 뿌렸다. 적의 포탄이 산발적으로 서울 시내에까지 날아드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호외를 뿌린 사원들은 무교동의 설렁탕 집 실비옥(實費屋)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이언진(李彦鎭) 장인갑(張仁甲) 이동욱(李東旭) 조인상(趙寅相) 변영권(邊永權) 김성열(金聖悅) 권오철(權五哲) 최경덕(崔慶德) 김준철(金俊喆) 김상흠(金相欽) 최흥조(崔興朝) 김호진(金浩鎭) 정인영(鄭仁永) 백광하(白光河) 김진섭(金鎭燮) 등이 서울에 마지막까지 남아 최후의 호외를 만든 면면들이다.”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다음은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대한언론인회 발행, 2010)에 “오뚝이 철학정신 일깨운 재계의 부도옹”이란 제목으로 실린 정인영 기자론.

 

○1920년 강원도 통천군 아산마을 출생, 2007년 7월 24일 별세 ◇학력 일본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대학 영어과 2년 수료(43), 전남대 명예법학박사, 미 롱아일랜드 대학 명예인문학 박사 영국 웨일즈대학 명예펠로 ◇주요경력 동아일보, 대한일보 기자(47~52) 현대건설 사장(65~76) 한라중공업 한라시멘트 설립, 회장(77) 한라그룹 회장 한-이탈리아협회 회장, 파푸아뉴기니아 명예영사, 키리바티 공화국 명예영사 ◇수상 금탑산업훈장, 한국경영자 대상, 이탈리아 국민훈장, 제13회 대한언론상(특별상)

 

오뚝이 철학정신 일깨운 재계의 부도옹

 

운곡(雲谷) 정인영(鄭仁永), 그는 언론인이면서 경영인이었다. 1947년 동아일보에 입사, 소용돌이치는 해방정국을 취재했고 현대건설 부사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경영인으로 나서 ‘재계의 부도옹(不倒翁)’으로,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운곡은 1920년 5월 6일 강원도 통천군 아산마을에서 아버지 정봉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 2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의 행정구역은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였다. 아버지는 엄격한 농사꾼이었다. 평생을 농사 밖에 모르고 산 것도 그렇고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집안에서 한숨소리조차 흘러나오지 못하게 할 만큼 엄격했다.

본시 운곡의 조부는 함경북도 길주에서 터를 잡고 살다가 갑오년 동학 혁명 틈새에 남하하여 통천에 정착한 것으로 돼있다.

 

보통학교 입학 전 四書三經익혀

 

운곡은 어려서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일곱 살 때 서당에 가야했다. 그곳에서 2-3년 한학을 배우고 보통학교에 가는 것이 이 고장 관례였기 때문이다. 운곡의 형 정주영도 서당에서 3년 공부한 뒤 보통학교를 다녔다. 千字文부터 시작한 공부는 童蒙先習, 明心寶鑑, 古文眞寶,

小學大學論語孟子中庸으로 이어졌고 唐詩등을 공부하면서 詩作도 길들였다. 운곡은 훈장이 한 대목을 가르치며 외우게 할 때마다 한 번도 막힘없이 줄줄 외어 나갔다고 한다.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고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 했던 이 시대 지성인으로, 학창시절엔 햄릿이나 테스를 원서로 읽고 그도 모자라 거의 전문장을 줄줄 외우곤 했다. 기업을 경영할 때 해외출장을 떠나는 비행기안에서도 운곡은 언제나 경제서적이나 경영관련 잡지를 읽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글 재주로 그는 농사꾼으로 남으라는 부친의 권유를 뿌리치고 1943년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대학 영어과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 운곡은 YMCA가 개설한 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영창중학교 야간반에서 낮에는 인쇄소에서 식자공으로 학비를 벌고 밤에

는 영어를 공부했다.

그가 새벽 5시에 신문로 신문 보급소로 나가 조간신문 200부(아사히신문)를 받아 돌리던 때도 이때였다. 배달을 시작하며 2년 동안 영어공부에 몰두한 덕에 영어의 기초를 닦은 운곡은 좀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운곡은 동경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靑山)학원대학 영어과 야간에 입학,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아오야마학원대학에서의 영어공부도 그에겐 한계가 있었다.

도쿄를 비롯하여 일본에 유학중인 학생들에 대한 일본 경찰의 눈초리가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불안한 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운곡이 내린 결론은 역시 귀국길이었다. 귀국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은신 할 셈으로 보상 없는 고행의 연속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해방 후 뚜렷한 직업 없이 2년을 보낸 운곡은 신문기자가 되기를 결심한다. 동아일보 입사 시험에서는 영어 실력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미 군정 시대라는 배경이 여러 곳에서 영어 실력을 필요로 할 때였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최두선 씨, 주필 겸 편집국장은 고재욱 씨였다.

그 아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해방정국의 복잡한 사건들을 취재 보도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동료는 백광하 기자 등이었다.

당시만 해도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까닭에 운곡은 사회부와 경제부를 오가며 주한 외국단체나 기관을 출입했다. 주로 출입했던 곳이 유엔 韓委다. 유엔 韓委는 정부 수립 후 6 25 발발 때 까지 지속적으로 활동을 계속했으므로 운곡은 늘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특히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 총선 때는 그들의 선거 감시 시찰단을 따라 전국을 누볐다. 외국기관을 자주 출입하면서 얻은 것도 많았다.

그는 또 해방공간에서 조국의 미래와 민족의 안위를 위해 안간힘을 다 하던 정치지도자들의 발자취를 부분적으로 나마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6 25 북한군 남침, 전황 號外만들고

 

1950년 6월, 동아일보 편집국은 북한군의 전면 남침을 알리는 호외를 만드느라 법석이었다. 운곡은 바로 유엔 韓委등 주한 재외공관으로 달려갔다. 국내외 어느 기관보다 정확한 정보망을 갖고 있던 미국공관 몇 곳을 들러보기 위해서였다. 현장 확인 후 편집국에 사태의 급박함을

알리고 난 운곡은 데스크의 지시에 따라 동두천으로 달렸다.

우선 1692부대 사령관을 만났다. 그곳에서 전황을 브리핑 받고 곧이어 보낸 기사 ‘동두천○○기지에서 본사 정인영 26일 1시 30분 발 至急報’였다. 밤샘 하며 호외를 제작하고 있는 동안 운곡은 유엔 한위의 본부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들은 이미 어디론가 철수준비에 바빴다.

그때 동아일보는 식자공중 좌익분자가 모두 잠적해 버린 가운데 편집국 기자들이 직접 채자를 해서 호외를 만들어야 했다. ‘ 적 서울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혈투 중’이 동아일보 호외를 마지막으로 운곡은 부산 피난길에 올랐다.

 

너무 앞서간 의욕 ‘모던 타임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따라 전쟁은 멈췄다. 운곡도 3년 동안의 부산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 떠오른 것이 신문이었다. 언론계를 떠난지 만 4년, 그는 마음속에서 언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신문기자로 복직하기엔 너무 긴 세월이 흘러 있었다. 방법은 한

가지, 직접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신문 발행은 언론에 대한 꿈과 경영의 매력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성맞춤의 사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선은 주간지를 발행하여 기반을 다진 뒤 종합일간지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전후(戰後)였으므로 국민들은 읽을거리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독자들에게 망가진 국가경제와 사회를 재건할 수 있는 의욕을 고취하고 국내외 전반의 조류를 심층취재 보도하는 시사주간지를 만들기로 하고 그 뜻에 걸맞은 모던 타임스’라는 제호를 정했다.

회사 조직 구성과 편집방향설정, 용지 수급, 인쇄소 선정 등 전 과정을 혼자서 뛰었다. 국방부 정훈국에 등록을 신청했다. 휴전이 되었으나 전히 출판물 허가권은 군 당국이 쥐고 있었다. 합동통신 편집부장으로 있던 조동건 씨 등을 객원 편집위원으로 영입, 편집방향 및 원고 선정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조선일보 남기영 기자는 실무차원에서 측면 지원했다. 마침내 1953년 12월 3일 타블로이드 판 16면 체재의‘모던타임스’가 창간됐다. 그러나 주간 단위로 거르지 않고 신문을 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워 지령 20호를 마지막으로 휴간해야했다.

 

‘오뚝이 기업인’‘휠체어 부도옹’

 

언론과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오뚝이 기업인’‘휠체어 부도옹’으로 불렀다. 운곡이 사업가로 변신한데는 6 25 전쟁의 영향이 컸다. 산피난시절 그가 찾은 미8군 후방기지 사령부, 병력과 물자를 일단 합시켰다가 분배하는 일을 주 업무로 하던 곳이다.

번역시험과 면접으로 통역관 시험을 무난히 치르고 본부사령실에서 하는 행운을 얻었다. 운곡은 그곳에 근무하면서 전쟁으로 중단이 된 정주영의 건설 사업을 재개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형 정주영에겐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다.

재기의 꿈을 불태우고 있는 현대건설이 그때 운 좋게 수주한 것은 수산대학교 교실을 개조하고 군 막사를 짓는 일이었다. 부산항 제2부두에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를 지어 보관대행업도 병행했다. 9 28 수복과 께 미 8군 후방기지 사령부는 서울로 올라와 혜화동에 주둔했다. 1 4후퇴, 그에게 닥친 제2의 부산 피난생활이 시작된다.

대한상운 전무를 맡으며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대한상운 전무에서 현대건설 부사장을 맡으며 운곡의 발군한 경영능력은 빛을 보기 시작했다. 1957년에 시작한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는 현대라는 이름을 세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공사를 계기로 현대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 들어서기 전 5대 건설회사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경영현장에 깊숙이 참여하게 되면서 운곡은 나름대로 사업의 본질을 정리 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기업의 원대한 성장을 위해서는 국내시장에 집중

되어 있는 시선을 해외로 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회가 닿는대로 해외시장개척을 기획하고 단양시멘트 공장 건설을 기점으로 해외진출 계획을 서두른 운곡은 우선 AID(국제개발처) 차관을 얻는 일을 주도했다. 1961년 11월 차관 도입선을 AID로 정하고 워싱턴으로 출발했다.

우여곡절 끝에 차관도입에 성공한 운곡은 미국의 공장지대를 견학하고 중공업의 꿈을 불태운다. 드디어 한국 건설사상 최초로 해외공사를 수주하니 목숨을 건 캄란 공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운곡의 경영마인드는 자동차산업의 핵심은 부품이라는 점에 무게가 실렸다.

현대양행의 안양제작소 가동은 품질과 가격경쟁에서 우월성을 인정받았다. 1968년 해운부 신설을 시작으로 소규모이지만 국제해운업을 병행함으로써 무역업을 뒷받침하고 3천톤급 아틀라스 파이오니아호를 도입하여 동남아 운항을 시작하면서 8천톤급 아틀라스 트레이더 호로

미주 중동 지역에 진출, 코리아 아틀라스 라인을 구축하기 까지 운곡의 도전정신은 끝 간 데를 몰랐다.

1970년 2월 쇼크압소바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현대양행의 자동차부품생산은 미국 미첼사와의 기술제휴로 일약 세계시장을 석권 하게된다. 그는 항상 성품이 소탈하고 품행이 단정하기로 유명했다. 왕성한 욕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한국 기계

공업 발전에 선구자 역할을 한 주인공이었다.

 

억울한 누명 씌운 신군부

 

1975년 7월 어느 날 운곡은 정부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책의 중심에 서기를 권고 받는다. 창원공업단지가 그를 불렀고 플랜트 수출 1호 지잔 시멘트공장 건설공사 수주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현대양행, 운곡의 생애에 가장 큰 시련을 안겨준 것은 신군부의 조치였다. 외화 도피 의를 뒤집어 씌워 검찰은 정인영 사장을 구속한 것이다.

그러나 범죄 사실이 없음이 확인돼 석방 됐다. 당시 대검 특수 1과장이었던 허은도 부장검사는 뒤에 이 사실을 후회하는 뉘앙스의 글을 10년이 지난 1991년 고대 동창회보에 실었다. 그를 수사했던 공무원은 그의 결백을 확인하고 미안해 했다는 후문이다.

1989년 7월 23일 새벽, 운곡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이 무슨 황당함인가. 뇌졸중으로 한양대 부속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다시 형 정주영이 운영하는 중앙병원을 거쳐 중풍 치료에 권위가 있다는 일본 도쿄 근교의 국립재활센터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병세는 호전돼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로 귀국, 회의를 주재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 후 줄곧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며 한라 중공업의 흥을 위해 동분서주, 부도옹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인영은 휠체어를 타고 세계를 누비면서 경영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그 바쁜 해외여행 중에도 필자에게 그가 들른 곳에서 어김없이 아름다운 그 고장 풍경이 담긴 그림엽서를 보내는 자상함을 보였다.

때로는 집으로 초대해 그간의 외국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던 운곡, 2007년 7월 24일 유명을 달리 하기까지 그는 대한언론인회 명예회우였다. 부인 김계월 여사와의 사이에 몽국, 몽원 두 아들을 두었다.

 

필자 : 이혜복 (대한언론인회 고문, 전 동아일보 사회부장)

 

 

동아일보에 실린 정인영의 기사들

 

1949년 4월 20일자 1면

대서양동맹과 신무기대여(貸與)법, 무기원재료 등 공급

대한군원도 동법(同法) 적용 호(乎)

북대서양동맹은 다소 상원의 간접적 논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잔여 자유 제(諸) 국가의 압도적 승인이 확실시되는 그 조약 자체에 반대하는 그러한 것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그것은 동(同)조약을 발동 강화하기 위한 군사원조 혹은 무기대여 양안에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이 논란은 주로 일 년 전에 『마샬』안 원조 『딸라』를 무작정하고 삭감하고저 음으로 양으로 공격을 하던 의원들에 의하여 좌우될 것이다.

차등 의원들은 『트루맨·독트린』과 『마샬·플랜』사이에 차이점을 발견한 각계각층의 시민에 향하여 웨칠 것이다.(중략)

정부는 북대서양제국과 함께 희랍 토이기 및 한국을 포함한 기타 제(諸)국가에의 군사원조도 이 군일법안(軍一法案)에 규정하고저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는 관계 제(諸)국가와의 긴밀한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교적 정신적 요소가 필요하니만큼 국무성은 이 법안의 결정에 있어 상당한 언권을 주장할 것이다.

장래에 있어서의 북대서양동맹제국의 재무장의 범위와 수준 혹은 무기대여의 규*는 물론 소련의 태도 여하에 의하여 중축(仲縮)될 것은 의심할 바 아니다. [뉴스·워크 지에서 정인영 기자 역]

 

1949년 6월 30일자

남한점령 수(遂) 종지부, 4년간의 주둔업적지대

오백명 군고문단만 잔류코 미군 철퇴 작일(昨日) 완료

감개무량하다-『콜』 미군 참모장 이한(離韓) 담

인천 발(發) 정인영 본사특파원 특전

과반(過般) 제이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미군은 소위 무적황군을 태평양에서 여지없이 격파하였거니와 특히 유구(琉球) 및 충승(沖繩 오키나와)에서 혁혁한 무훈을 세운 전 주한 미군사령관『하지』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미군제이십사군단이 1945년 9월 7일 인천에 상륙한 이래 어언 4개년 간 미군은 간단없이 독수를 뻗칠 기회를 노리며 준동하는 38 이북을 점령하고 있는소군및 그 괴뢰들의 가진 음모와 모략을 물리치고 모든 정신적 물질적 간난과 싸워가면서 과거 40년간 일제의 제국주의적 법률과 사회관습에 물저진 우리 한인들을 급거 민주주의에로 오늘과 같은 장족 발전을 보게 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에 국한된 민주주의적 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게 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의 수립을 보게 하는 한편 한국전역의 치안과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능히 이에 당할만한 경찰과 국군을 훈련하여 왓던 것이다.

그러나 1947년 11월 14일 소총회 결의에 의하여 미국은 한국군경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어 점령이래 4개년 한국을 위하여 다대한 공적을 남기고 마침내 한국을 철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15일 21일 양일간 한위(韓委) 제3분위 감시 하에 전투부대의 대부분이 철퇴하였고 29일 최종 부대 1천 6백 명이 한위 제3분위 감시 하에 인천항을 떠나 일본 횡빈(橫濱)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이날 상오 6시부터 인천항 제일잔교에서 한위(韓委) 감시 하에 미육군 수송선 『레이몬드·보드윈』 호와 『부류스터』 호 및 『LST』 호 등 삼척에 분승하기 시작하여 동(同) 8시경 관민 다수 환송리(裡)에 동항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한위 제3분위 및 『무치오』대사와 주한 미군사 고문단장 『로버쓰』 대장(代將)은 전 주한 미군 참모장이 통솔하는 이들 최종 철퇴부대를 국군함정으로 소월미도(小月尾島)앞 해면까지 환송하였다. 이로써 한국점령미군은 5백 명의 군고단(軍顧團)을 남기고 완전히 철퇴하였는데 이들은 점령중 소유 무기의 95%를 국군에 양도하고 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 국회는 요지음 1950년도 대한원조액 1억5천만 불 안을 심사 중에 있어 이미 하원 외위(外委)를 통과하였으며 이와는 용도로 가능한 정도의 대한군사원조법이 미국의 대외무기대여법안에 포(包)다되리라고 외전은 전하고 있다.

이날 최종 철퇴부대를 통솔하고 가는 전 주한미군 참모장 『쿨리어』대좌는 이한에 앞서 감상담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한국에 오래동안 체재하였으며 더욱이 가장 흥분된 정세하에 지내왔었다. 그러므로 이제 떠나게 됨에 있어 느끼는 바는 다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일본으로 간다.

 

1950년 5월 8일자 1면

냉전과 열전 라트비아 미(美) 비기(飛機) 실종사건의 진상

조난한 해군 정찰기 조종사의 최후보고는 극히 간단하였다. 동기(同機)는 그날 악천후를 무릅쓰고 『빨틱』으로 향하는 서북향으로 기수를 두고 독일 북해 『부레머하벤』항 상공에 있다고 『웨스바덴』 미 공군기지에 무전을 보내어왔던 것이다.

『아푸리카』방면에서 처음 이 지역에 온 이 4발(發) 해군 정찰기는 이 무전을 치기 약 3시간전에 『웨스바덴』에서 연료 보급을 받는 동시에 장교 4인 정비공 2인 정찰 설비 기술자 3인 및 무전사 1인을 탑승시켰던 것이다.

동기(同機) 『코펜하겐』까지 무착륙으로 훈련비행을 하고 기지에 도라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었다. (중략)

다만 문제는 과연 소련전투기가 동기(同機)를 격추시켰느냐 또는 해상에서 불구자를 만들었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러는동안 동(同)주말에 이르러 사건의 증거물로서 『빨틱』해에서 해군 정찰기형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국무성은 이에 관하여 앞서 『비신스키』의 비난을 반박하는 미온적 항의를 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이러한 사건은 냉전에 있어서 흔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미국이 인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열전이 발발될만한 상극은 없었던 것이다.

[타임지에서 정인영 역]

 

1950년 5월 15일자 1면

자유분위기 시찰, 한위(韓委)일행 부산서 각계와 접촉

(부산에서 정인영 본사 특파원 발)

5·30 총선거의 진행사태를 참관키 위하여 12일 부산에 도착한 『유엔』한위 불란서 대표 『부리온발』 씨 이하 일행은 동(同)일 하오 1시경 경남선거위원회를 방문 동(同)위원장 김옥주 씨를회견하고 도내(道內)선거사무진행과 및 자유분위기 조성상황을 청취 후 부산을구 입후보자 장건상 양한나, 동(同) 병구 박찬현 동(同) 정구 정재설 등 4씨를 동(同) 선거위원회에 초청하여 자유분위기 보장 여하에 대하여 문답을 하였다. 이어서 일행은 13일 부산시내 각처에서 개최된 정견발표 연설을 시찰하였는데 15일 마산 진주 19일 진해를 경유하여 20일 아침 서울에 귀착할 예정이다.

 

1950년 5월 28일자 1면

총선거와 자유분위기, 한위(韓委)시찰반 수행 답사기, 대체로는 순조, 자칭 우국결사대도 횡행

[본사 특파원 정인영 기]

 

1950년 6월 27일자 1면

괴뢰군 후퇴 개시, 전차 8대를 격파

[동두천방면 ○○기지에서 본사특파원 정인영 26일 1시30분발(發) 지급보(至急報)]

 

 

정 인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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