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손기정 선생 마라톤 제패하고…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 일장기 지우고
‘한국인’ 일깨운 두 영웅 81년만의 해후
81년 전 오늘 올림픽을 제패했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생(1912∼2002)과 그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웠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 이길용 기자(1899∼?·사진)가 다시 만난다.
손기정기념관에 이길용 기자의 흉상이 세워지는 것이다. 사단법인 한국체육언론인회(회장 이종세)는 최근 ‘이길용 기자 흉상 제막식 및 이길용 기자의 스포츠와 시대정신 포럼’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체육언론인회와 한국체육기자연맹(회장 정희돈)이 공동 주최하는 이 행사의 장소는 서울 중구 손기정로에 있는 손기정공원과 손기정기념관이다.
손기정 선생은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스타디움을 가득 메웠던 9만여 관중은 2시간29분19초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가 작은 체구의 동양인임을 알고 놀라워했다. 아시아인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었지만 상의에는 일장기가 선명해 망국의 한을 일깨웠다.
10일자 호외를 통해 이 소식을 처음 전한 뒤 이튿날부터 ‘조선의 아들 손기정’ 시리즈를 발 빠르게 연재했던 동아일보는 8월 25일자 2면에 손 선생이 시상대에 서 있는 현장 사진을 게재했다. 일본 현지 언론을 통해 구한 사진 속에 뚜렷하게 있던 일장기가 동아일보 지면에는 보이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치하를 살아가던 한민족의 저항정신을 일깨운 이 사건의 중심에는 사회부 체육주임으로 일하던 이길용 기자가 있었다.
독자들은 크게 반겼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동아일보는 8월 27일부터 무기정간을 당했고 9개월도 더 지난 이듬해 6월 2일에야 복간을 알리는 호외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자신도 해직을 면치 못하고 투옥까지 됐던 이길용 기자는 훗날 이런 글을 남겼다.
“세상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길용 기자는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한국 기자 최초로 ‘조선야구사’를 연재하고 인천의 야구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대한체육회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그를 기리기 위해 체육기자연맹은 1989년부터 매년 체육기자 한 명을 선정해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여하고 있다. 정부는 그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광복 뒤 복직했던 이길용 기자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납북된 뒤 돌아오지 못했다. 이길용 기자의 3남이자 체육기자로도 일했던 이태영 체육언론인회 자문위원장(76)은 “생사도 알 수 없는 데다 유해가 없어 묘소도 쓰지 못했다.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비석 하나 세우는 게 소원이었는데 흉상이 세워진다니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중견 조각가 이용철 작가(57)가 만들고 있는 청동 흉상은 높이 90cm, 가로 64cm, 세로 35cm로 실제 인물의 1.3∼1.4배 크기다. 손 선생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50)은 “여러분의 노력으로 이길용 기자의 흉상이 건립돼 할아버지와 함께 있게 됐다. 마땅히 계셔야 할 곳에 모시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길용 기자 흉상 제막식은 25일 열린다. 손기정 선생 가슴의 일장기를 지웠던 그날이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동아일보 2017년 8월 9일자 A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