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11 취재제1부차장, 정경부장, 편집국부국장, 경제부장 겸, 편집국장대리, 주영특파원, 이사 방송국장 겸, 이사 총무국장 겸, 75. 2 퇴사. ▲ 76. 3 재입사, 판매국고문, 상무이사(현).”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22년 8월 20일 전남 순천 출생, 2002년 11월7일 별세 ◇학력 : 경성대학 문학부 경제과 수료(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48) 미국 인디애나주립대학에서 신문학 수학(65) 영국 웨일즈대학에서 신문경영학 수학(71) ◇주요경력 : 동아일보 기자, 정경부장, 편집국장대리,이사(48~72), 동아방송국장(74), 총무국장, 상무이사, 광고국장, 전무이사, 대표이사 사장(74~85), IPI한국위원회 이사(85) IPI본부 이사(86) 동아일보 사장(85) 자유지성300인회 공동대표(99)
평생을 동아일보와 고락 함께 한 동아 맨
장천 김성열(長泉金聖悅)은 평생을 동아일보에서 일한 대표적인‘동아맨’이다. 동아일보에 40여년 간 재직한 고재욱(高在旭, 1903~1976) 선생을 이야기 할 때 회사 안에서는 곧잘‘이력서가 딱 한 줄인 분’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그가 학교졸업 후 취직한 직장이라고는 동아일보 뿐이어서 경력이“○○○○년 동아일보 입사, 현재에 이름”이라는 단 한줄이라는 것이다.
김성열 역시“1948년 입사, 1991년 퇴사”라고 딱 한 줄로 그의 경력을 쓸 수 있다. 다만 김성열은 1975년 유신독재시대에 발생한 동아일보 기자해직파동으로 약 1년간 회사를 떠나있던 공백기가 있는 것이 고재욱과 차이라면 차이다.
그러나 고재욱 역시 일제 말기인 1940년에 동아일보가 폐간되었다가 해방 후에 복간될 때까지 5년간 강제 실직을 했으므로 공백기로 따지자면 오히려 김성열보다 더 긴 셈이다. 여하간, 1930년대 입사자 중평생을 동아일보에서 일한 대표적인“동 .맨”이 고재욱이라면 1940년대 입사자 중 대표적인‘동아맨’은 김성열이다. 그 만큼 두 사람은 다같이 동아일보의 역사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일생동안 한 신문사와 동고동락을 했다.
김제가 본관인 김성열은 전남 순천시의 중심부인 장천동 153번지에서 제2대 국회의원(무소속)을 지낸 김정기(金正基, 1893~1978)의 3남5녀 중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정기는 일제 때 평양신학교를 나온 기독교 장로로 신간회 간사를 지내는 등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나중에 순천에서 큰 제지공장을 경영하고 해방 후 순천군수와 목포부윤을 역임했다. 김성열은 고향에 애착을 느꼈던지 성장 후 그가 태어난 동리 이름을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이곳은 원래 순천군 장평면에 속했으나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장평면이 순천면으로 통폐합되면서 순천면 장천리가 되었다.
김성열이 9세 때인 1931년에는 순천면이 읍으로 되면서 순천읍 장천리가 되고, 건국후인 1949년에 순천군은 승주군이 되고 순천읍은 시로 승격되면서 순천시 장천동이 되었다. 김성열이 중학을 고향이 아닌, 개성 송도고보를 다닌 것은 그곳의 유명한 기독교계 호수돈여중에 다니는 큰 누님과 함께 있으면서 공부하도록 독실한 부친이 그 곳으로 보낸탓이라고 그의 개인비서 일을 보았던 당조카 김동진(金東珍)씨가 전했다. 625이후 공산치하에서 인천으로 이전한 송도교보 역시 기독교계열의 학교였다.
김성열은 1946년에 경성대 법학부 경제과를 수료하고 1948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46년 미 군정청이 이른바‘국대안’을 실시하면서 경성대의 후신인 서울대 문리대의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국대안이란 경성대와 일제 때 만든 관립 전문학교를 국립 서울대학교로 통폐합한 것을 말한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총동창회 명부에는 김성열이 정치학과 제2회 입학생으로 1944년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일제 때인 경성제대 시절부터 통산해서 입학연도를 정했기 때문이다. 김성열의 정치학과 제2회 동기생 중에는 계훈제, 김운태,박준규, 박한상, 소상영, 엄규진, 정인영, 조규광, 진필식, 채문식, 하영기, 홍경모 등 정계, 관계, 법조계, 학계, 금융계, 언론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았다.
625 전쟁 비극 몸소 겪어
김성열은 대학을 졸업한 해 11월에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이때는 대한민국이 건립된 직후였다. 그는 입사 후 취재1부에 배치되어 경제 부서를 맡고 있다가 입사 후 약 1년 반 만에 625사변이 일어났다. 이날은 일요일이어서 비상연락을 받은 사원들이 세종로 사옥에 모였는데 기자 10여 명이 경무대와 중앙청, 국방부, 주한 외국공관 등에 취재를 해 본 결과 전세(戰勢)가 위급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북한의 남침 사실을 이튿날인 26일자 신문에 정부 발표를 토대로 보도했다. 27일 아침에는 외국 기관들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최두선 사장은 전 사원을 모아놓고“일단 해산하자”고 말한 뒤 신문사가 갖고 있던 은행 예금을 모두 찾아 똑같이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외근기자들은 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해오기 몇 시간 전인 이날 오후 4시경 전원 편집국에 모였다. 김성열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장인갑(張仁甲) 편집국장 지휘 아래 수동 인쇄기로 호외 300부를 찍어 서울시경에서 빌린 지프로 서울 시내 일원에 직접 배포했다.
호외를 낸 뒤 장 편집국장 이하 10여 명의 기자 등 사원들은 무교동‘실비옥’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눈 뒤 각자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많은 기자들이 서울 탈출에 실패해 장 편집국장을 비롯한 일부 편집국원 다수가 인민군에 납치되고 그 중 일부는 북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탈출했다. 김성열 역시 전쟁의 비극을 몸소 겪은 언론인의 하나였다.
북한 남침 3개월여 만인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동아일보는 10월4일 신문을 속간했는데 이날 자 2면에는 색다른 사고(社告)가 실렸다. 행방불명된 20명의 사원을 찾는 사고였다.“ 좌기 본사 사원의 행방이 불명인바 가족 되시는 분은 즉시 본사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인갑(張仁甲, 편집국장) 정균철(鄭均轍, 영업국장) 이동욱(李東旭, 조사부장) 백운선(白雲善, 사진부장) 김성열(金聖悅, 편집국기자) 서정국(徐廷國, 동), 조용근(동) 변영권(邊永權, 동) 김준섭(동) 이성득(李盛得, 정판과장) (하략)….”
김성열은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인민군에 끌려가 동대문서에 갇혔다가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을 친 다음 경기도 용인 매제집과 충남 공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공포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고 그의 여동생인 김복열(金福悅)씨가 전했다. 김성열은 동아일보가 사고를 낸 지 얼마 후인 10월 중순 서울로 돌아와 회사에 복귀했다.그러나 그는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불과 2개월여 만인 다음해 1월초 다시 14후퇴로 회사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자 그곳에서 1953년 환도할 때 까지 근무했다. 그는 줄곧 경제분야에서 일하다가 취재1부차장과 정경부차장을 거쳐 1960년 1월 당시로서는 결코 빠르지 않는 입사12년만에 정경부장으로 승진, 정치경제면을 동시에 책임지면서부터 화려한, 그러나 고난이 연속된, 언론인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이 때는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로 인해 415부정선거와 이에 항의하는 마산의거를 비롯한 전국의 시위사건을 용감하게 보도해 419는 언론혁명이라 할 정도로 언론의 역할이 컸던 만큼 당시 동아일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이듬해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61년 4월, 정경부장인 김성열은 동아일보사가 주관한 유럽경제문화시찰단의 인솔자로 유럽을 방문했다. 그는 시찰단원 겸 현지취재를 하는 특파기자 자격으로 2개월간 17개 서유럽 주요도시를 순방할 예정으로 등정했다. 당시는외환사정으로 언론인마저도 여간해서는 외국에 나가기 어려운 때여서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약 1개월 만에 본국에서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시찰단은 맥이 빠진 셈이 되었지만 일행은 여행일정을 모두 마치고 7월에 귀국했다.
김성열은 4월 29일자 신문에 드골 대통령이 알제리군부반란 실패로 더욱 확고하게 군부를 장악하게 된 내용을 분석한‘프랑스정부 다시 개헌을 개혁’이라는 기사를‘김성열 특파원 29일 지급전’이라는 본격적 특파원기사를 싣고, 5월 30일자에는‘비약하는 이탈리아 경제’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현지르포기사를 실렸다.
박정희 후보 관련 호외로 곤욕 치러
김성열이 귀국해 보니 국내사정은 건국 직후의 정치적 혼돈과 뒤이은 전쟁으로 인한 국가적 혼란에 버금가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516군부세력의 모진 언론탄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시련은 1963년 10월, 3공을 발족시키는 제5대 대통령선거 때 시작되었다.
동아일보는 대선 바로 전날인 14일자 신문에 박정희 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민정당 후보의 심경을 말하는 회견기사를 싣기로 계획하고 박후보 회견은 정경부장인 김성열이 직접 맡았다. 김성열은 14일이 월요일이어서 토요일인 12일 오후 7시 박정희와의 단독회견을 위해 중구 장충동의 최고회의 의장 공관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회견이 시작되고 김성열의 질문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박정희는 며칠 전 자신의 선거유세장에 모인 청중을 동아일보가 적게 보도했다고 비난한 다음 갑자기“그런데 내가 왜 빨갱이입니까?”하고 언성을 높였다.
동아일보사사 3권의 기록에 의하면, 김성열은 이에 대해“언제 동아일보가 빨갱이라고 했습니까”하고 맞받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다시 “동아일보에서 그렇게 보도하지 않았습니까?”라고 거듭 목청을 높였다. 김성열은 그에게 선거에서는 상대방후보가 공개적으로 발표, 주장하는 말은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관례라고 설명한 다음“사상논쟁은 윤 후보의 발언을 그대로 보도했을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김성열은 이어 후보의 경력 주장 능력 등에 관한 엇갈린 의견을 정직하게 유권자에게 알려 판단은 유권자가 내리게 해야지, 여야가 말하는 것을 하나하나 확인해서 보도할 시간여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박정희는 “내가 우리 형 하나 때문에 빨갱이로 몰리고 있지만 난 빨갱이가 아니요” 라고 내뱉고는 응접실 탁자 위에 있는 담배함을 방바닥에 후려 쳤다. 그리고는 옆방으로 가버렸다. 배석했던 이후락(李厚洛)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형욱(金炯旭) 정보부장은 멍하니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성열은 15분 가량 그 자리에 앉아 기다렸으나 끝내 박정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단독회견은 무산되고 말았다.
김성열은 이후락의 권고에 따라 옆방의 박정희에게 가서 회견을 그만두고 물러날 뜻을 표시하자 박정희는“미안하다”고 말했다. 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는“공화당에서 선거유세 스케줄을 너무 타이트하게 짜놓아 (박 후보가) 지난 두 주일 동안 한숨도 잘 수 없었다”면서 김성열에게 이해를 구했다.
그가 작별인사를 끝내고 2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 와 구두를 신을때 그를 바싹 뒤따라 온 육영수는 허리 굽혀 인사하면서“김선생님, 미안해요”라고 그듭 사과했다고 한다.
일요일인 이튿날에는 민정당이 박정희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동아일보 호외가 발행되었다. 내용은 박 후보가 해방직후 공산당프락치사건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이 선고된 사실을 보도한 당시의 서울신문을 복사해 그의 전력을 폭로한 것이다.
이 호외 발행은 선거보도의 윤리 측면에서 상당히 논쟁적인 사건이지만 동아 측의 입장은 그날이 신문이 없는 날이고 투표 하루 전인 월요일 신문에서 당사자의 해명을 보도할 기회를 갖기 위해 부득이 호외를 발행했다고 말한다. 이 호외발행은 박정희정권의 동아일보 탄압의 빌미가 되고, 이 호외의 제작실무책임자인 김성열에게는 혹독한 시련의 시작이었다.
투표당일인 15일 아침 장충동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치고 나오던 박정희 후보는 동아방송의 김남호(金南浩)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들이대면서“오늘 투표를 마치시고 어떻게 소일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또다시 화를 냈다. 박정희는 답변은 하지 않고“이런거 저런거 보다도 동아방송, 거짓말이나 하지 마시요”라고 쏘아 붙였다.
젊고 혈기왕성한 김 아나운서는 기가 죽지 않고“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사실을 공명정대하게 보도하는 것이 동아의 생명입니다”라고 대꾸했다. 박정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이 가시 돋친 대화는 동아일보와 박정희의 숙명적인 대결의 서막에 불과했다.동아방송은 그 후 1964년의 63계엄사태 때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방송칼럼인‘앵무새’프로그램 사건으로 최창봉(崔彰鳳) 방송부장,고재언(高在彦) 뉴스실장 등 6명이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탄압을 겪었다(2개월 후 전원 보석으로 풀려나고, 5년 후 대법원에서 전원 무죄확정). 박정희 시해사건 이후에는 그의 충실한 후계자였던 전두환(全斗煥) 신군부정권의 언론통폐합조치 때 방송국이 KBS로 강제통합 되었다.
언론계 황금기 해외 특파원 시절
유력한 차기 편집국장 후보였던 김성열이 편집국장대리 직위에서 물러나 끝내 영국 특파원으로 전출된 원인은 1967년에도 말썽이 일어난 유세장 청중 수가 결정적이었다. 사단은 박정희의 2기 집권 때인 이해 제6대 대선 유세장 청중문제에서 일어났다.
유세장에 모인 청중의 수는 후보에 대한 인기의 척도가 되기 때문에 이를 보도하는 언론사로서는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니다. 박정희 후보의 장충단공원 유세장에 동아일보는 20여명의 기자가 파견되어 1평당 몇명이라는 방식의 계산에 따라 약 25만명이 모였다고 보도했다.
통합야당인 신민당 윤보선 후보의 남산유세 청중수와 같은 숫자였다. 그러나 여당측 신문들은‘1백만 청중’이라고 보도했다. 중앙정보부는 다음날 이른 아침 김상기(金相琪) 방송국장과 김성열 편집국장대리, 그리고 이동수 뉴스담당부국장을 연행해갔다. 말이 연행이지, 중앙정보부의 처사는 법에도 없는 물리력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이들은 그날 오후 풀려났다.그러나 김성열은 이 때 결정적으로 박 정권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공화당은 같은 해 68국회의원 총선에서 타락선거를 통해 과반수를 확보한 다음 곧바로 박정희의 3선을 위해 개헌을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1968년 12월에는 생트집을 잡아 신동아 사건을 조작해서 김상만(金相万) 발행인과 천관우(千寬宇) 주필을 구인해 가서 닦달을 하고는 천관우를 물러나게 하는 등 동아일보에 족쇄를 채웠다.
이듬해 초 편집국 인사에서 김성열은 영국특파원으로 발령이 났다. 군인에게 참모총장이 꿈이듯 기자에게는 편집국장이 꿈이다. 차기 편집국장 영순위에서 좌절된 김성열은 1969년 6월, 47세의 만년에 해외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런데 해외특파원이라는 직책은 기자에게는 반드시 한 번 겪을 만한 보람 있는 자리이다. 비록 편집국장에서는 밀려났지만 런던특파원 자리는 김성열의 언론인 생활을 빛나게 한 황금기였다.
그가 4년 반 후 귀국할 때까지 임지에서 쓴 기사 전부를 동아일보 복사판인 PDF파일을 통해 검색해 본 결과 그는 젊은 특파원에 조금도 못지않게 열성적으로, 그리고 욕심 많게 취재활동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나지 않아 생긴‘신문경영인 김성열’이라는 기존의 이미지가 일부 수정되었다. 이 원고를 쓰는 필자 자신 특파원으로 해외에 근무하는 동안 일부 타사 편집국간부 가운데 김성열 처럼 자의반타의반으로 특파원이라는 타이틀 아래 해외에 나와 체류하면서 세월만 보내다가 귀국하는 거물급 언론인의 예를 더러 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자신 있게 이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김성열은 런던에서 영국노조의 과격한 파업, 북아일랜드분리운동, 보수당의 집권과정, 롤스로이스자동차회사의 파산 같은 영국 국내문제를 꾸준히 보도하고, 닉슨 미국대통령의 중국방문과 소련방문에 대한 유럽의 반응분석, 그리고 당시 한국인에게는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던 소련에 들어간 전경련 회장 김용완(金容完)과 연출가 유덕형(柳德馨)의 수기를 받기도 했다.
김성열은 이와 함께 많은 문화적인 기사도 썼다. 그는 아놀드 토인비교수와 문명의 위기에 관해 대담을 가지기도 하고, 요트를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다가 조난당해 구사일생으로 한국어선에 구조된 영국인 베일리부부가 데일리 익스프레스지에 실린 수기를 재빨리 단독 입수해서 송고하는가 하면 런던 하이드파크의 낙엽과 테임스강의 안개를 소재로 한 영국의 가을풍경을 스케치한 수필 같은 감성적인 기사도 썼다. 그는 또 유고와 덴마크, 그리고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장문의 르포기사를 썼으며 유럽지역에서 열린 IPI총회에는 본사 김상만 사장과 함께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는 신문뿐 아니라 여러 잡지에도 적지 않은 양의 기사를 썼다. 국회도서관에 등록된 그의 주요잡지 게재기사를 검색해본 결과 그는 정경부차장과 부장 당시 타사에서 발행하는 여러 잡지에 15건의 기사를 썼으며 런던 체재 중에는 본사 발행의‘신동아’에만 4건의 기사를 썼다. 물론 이들 신문과 잡지 기사 가운데는 본사의 지시에 따라 취재한 것도 있겠지만 어느 경우든 그는 자신의 나이나 직급에 구애되지 않고 젊은 기자처럼 열심히 취재하고 열심히 썼음을 알 수 있다.
‘자유지성300인회’발족시켜 공동대표로
김성열은 런던 근무 중이던 1972년 봄 본사 주주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 같은 인사는 오너의 특별한 배려 없이는 불가능한 인사였다. 4년 반 동안의 성공적인 런던특파원 생활을 마친 김성열은 1973년 말 귀국해서 이듬해 방송국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총무국장과 판매국 고문을 거쳐 상무 전무 부사장을 거쳐 1985년에는 드디어 제17대 사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한 번 연임해 4년간 재임하다가 1989년 상임고문으로 물러났다. 그가 사장으로 있는 동안 동아일보는 여전히 한국 최고권위지 지위를 유지했다. 그는 고문으로 물러난 후인 1989년에는 우리 사회의 좌경화 바람을 견제하기 위해‘자유지성300인회’를 발족시켜 공동대표로 10년간 활동하고 별세할 때까지 약 3년간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었다.
이 단체는 1998년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는 그의 좌경정책을 비판하는데 힘썼다. 김성열은 문자그대로 한 줄짜리 이력서의 ‘동아 맨’이자 언론 외길만 걸어온 빛나는 한국 언론인이다.”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평생을 동아일보와 고락 함께 한 동아 맨,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대한언론인회 발행), 2010)
김 성 열
김성열 동아일보사사장은 1985년 12월 23일 서울 광화문우체국의 `1일 우체국장`에 취임, 연말연시를 맞아 바쁜 우편업무에 종사하는 우체국 직원들을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