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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6 편집부장, 취재3부장, 사회부장, 문화부장 겸, 조사부장, 편집국부국장대우, 조사부장 겸, 기획부장 겸, 공무국부국장, 조판부장 겸 공무국장대우, 공무국장. 74. 2 퇴사.〔연합광고사 이사〕”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25년 1월 24일 서울 내자동에서 출생 ▲99년 7월 21일 서울에서 별세 ▲44년 중국(中國) 길림(吉林) 사도(師道)대학 지력과(地歷科)졸업 ▲동년 만주국통신사(滿洲國通信社) 기자 ▲46년~49년 대동신문(大東新聞), 대한독립신문(大韓獨立新聞) 기자  ▲49년 동아일보(東亞日報) 입사, 정리부차장

▲53년 12월 정리부장 ▲55년 1-월 문화부장, 취재3부장 ▲60년 7월 사회부장 ▲61년 1월 조사부장 ▲64년 6월 월간부장 ▲65년~67년 편집국부국장 ▲  67년 8월 공무국 부국장 ▲74년 2월 동아일보 공무국장

 

‘東亞’에만 25년, 다양한 편력

 

  권오철(權五哲)은 1925년 1월 24일 서울 내자동(內資洞…어머니 김신숙(金莘淑)의 친정)에서 출생했다.

  부친 권영우(權寧祐.원적은 충남(忠南) 부여(扶餘)군 규암면 합송리 928)는 강골(强骨)의 교직자로, 권오철은 그의 6남매 자녀중 장남이다.

  8.15이전 아버지가 청주상고(淸州商高) 교사(지리 역사담당)였기에 그곳에서 고등학교인 청주고보(淸州高普)을 나온 권오철은 8.15전 만주(滿洲)로 이사했고, 그래서 길림(吉林)의 사도대학(師道大學) 지력과(地歷科)에서 수학했다. 부친은 그때 ‘하얼빈’의 제3고등공민학교 교사였다. 대학을 졸업한후 44년 그는 만주국통신사(滿洲國通信社 . 일본의 동맹통신(同盟通信)자매회사) 기자로 입사했으나, 세계 제2차대전 말기 소련의 대일선전(對日宣戰)포고로 동북중국(東北中國 . 滿洲)이 전쟁터로 변하자 권오철 일가는 급거 귀국길에 올라 38선 경유, 연고지인 청주(淸州)에 정착했다.(주친 권영우는 그후 청주 주성중학교 교장직을 끝으로 교직에서 은퇴)

  귀국 다음해인 46년에 권오철은 대동신문(大東新聞) 기자로 입사, 이어 대한독립신문(大韓獨立新聞), 현대일보(現代日報)를 거쳐 49년 6월 동아일보에 편집기자로 입사한다. 얼마뒤 정리부차장으로 승진, 53년 12월에 정리부장(지금의 편집부장)으로 발탁된다.

  55년 10월 문화부장 겸 취재3부장, 이어 사회부장(60.7~61.1), 조사부장(61.~61.2), 문화부장(61.12~62.4), 월간부장(64.6~65.5)으로 있을때 복간된 ‘신동아(新東亞)’ 제작을 담당하여 그 기틀을 잡았고, 다시 조사부장겸 기획부장(66.3~67.8)을 거쳤다.

  67년 8월부터 공무부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73년 12월 공무국장으로 승진, 74년 2월 동아일보를 떠날때까지 편집, 취재, 기획, 공무 등 신문제작의 모든 분양에 걸쳐 정력을 쏟았다. 동아일보를 떠난후 한때 연합광고(聯合廣告)의 이사직을 맡아 광고분야에 관여했고, 그후 잠시 출판사 ‘주식회사 신천지(新天地)’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참신한 편집솜씨로 명성

 

  권오철의 편집 스타일은 매우 참신했고 기발한데가 있어 그가 정리부장으로 있을때 동아일보의 성가를 한층 치솟게 하였다.

  그 한가지 예만 들어봐도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자유당 집권시절인 3대 국회때의 일. 야당 국회의원들 집에‘불온문서’가 투입된 사건이 진상이 밝혀졌을 때의 일.

  북한의 첩자가 은밀히 투입한 것처럼 가장, 동아일보의 배달되는 신문지 사이에 끼운 불온한 내용(북한지지 찬양)의 인쇄물을 야당 의원들인 김준연(金俊淵), 신익희(申翼熙), 곽상훈(郭尙勳), 정일형(鄭一亨), 소선규(蘇宣奎) 등의 집에 집어넣은 것인, 여러모로 검토해 봐도 북한측 소행같지는 않았다.

  김준연 의원이 국회 보고 발언을 통해 투입경위를 공개하자, 조병옥(趙炳玉)의원이 사건진상의 철저한 규명을 요구, 내무부(당시 장관 白漢宬)에 진상을 조사,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이때 여당 의원들인 송경섭(宋璟燮), 유봉순(?鳳淳) 등도 진상조사에 동조, 그해 12월 22일 내무부는 중간보고를 통해 문제의 문서는 “야당 의원들에게 보낸 36통 외에도 언론.사회단체 등 각계에 보낼 예정이던 242통까지 모두 278통이었고 범인 2명도 잡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심쩍다고 국회에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 직접 진상규명에 나선 결과 “문서투입 배후 총책은 원용덕(元容德) 헌병총사령관으로 부하 장교(영관급 2명)에게 지시, 문서를 작성했고, 그 문서를 헌병총사령부 소속 임시 문관 2명을 선정 투입하였다”고 밝혔다. (내무부는 사건에 관련이 없었다고 추후에 발뺌)

  불온문서를 조작, 야당 의원집에 투입한 목적은 “야당 의원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려 했던 것”이며“그것은 내가 시켰다”고 원용덕 중사가 국회진상조사위에 실토했던 것. 진상인즉 여당 총재(李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한 원용덕의 과잉충성이었다.

  그때 국회조사단이 국방부(당시는 현재의 병무청 자리가 국방부 청사였음)을 방문, 원용덕 중장과 대면,‘군인들의 정치간여(干與)사실’을 밝혀내는 현장을 지켜본 동아일보 국회출입 김준하(金準河)기자는 엄청난 사실을 ‘스쿠프’, 곧 편집국으로 달려가 단숨에 기사를 써냈다.

  그때 “권오철 정리부장은 기사를 한번 쭉 훑어보더니“내가 시켰다”(원용덕의 지시를 지칭)는 큼직한 활자로 컷을 떠서 중간 톱에 올렸고  돌고 있던 윤전기를 멈춰, 기사를 바꿔치기하는 기민성을 보인데 감탄했다”고 최근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또 한가지, 휴전이후 1군사령부(당시 1군사령관은 송요찬(宋堯讚)중장)가 “6.25이후 망실된 군용담요 수가 사령관이 바뀔때마다 유령 숫자가 사무인계돼 2만여장으로 늘어나 숫자상으로만 존재하니 정리해야 된다. 아예 망실된 것으로 장부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 기사제목은 “담요 2만장 어디로 갔나?” 였다.

  종래의 편집경향은 한자(漢字)로 된 컷이 많았으나 권오철은 순 한글로 제목을 뽑는 과단성을 보였다.“원용덕 장군이 지시(指示)” 보다는 “내가 시켰다!”가 “군용(軍用)담요 2만(萬)장 어디로 갔나?”가 더 실감나는 제목임은 말할 여지도 없다.

 

‘괴뢰(傀儡) 오식(誤植)사건’으로 곤욕

 

 정리부장으로 발탁된지 1년 남짓한 55년 봄. 그는 뜻하지 않은 오식(誤植)사건으로 한때 곤경에 처하게 된다.

  55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1면에 ‘한미석유협정 초안은 이승만 대통령의 귀경을 기다려 최후적인 재가를 받으리라고 한다’(本文)는 내용의 기사제목을 정리부장인 그가 분명히‘고위층(高位層) 재가대기중(裁可待機中) 한미석유협정(韓美石油協定)’이라고 제목(2호 활자 2단)을 달아 문선에 넘겼는데, 인쇄된 지면에는 그 제목위에‘괴뢰(傀儡)’두 활자가 덧붙어 있었다. 당시‘고위층’은 곧 이 대통령을 뜻하는 것으로‘괴뢰대통령’이라는 엄청난 제목으로 둔갑해버린 셈이다.

  편집국에서 넘어온 대장(臺帳.연판을 떠서 윤전기에 걸기전의 최종 점검을 끝낸 가 인쇄지)대로 연판을 떠서 걸어 윤전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그날 오후 4시 30분쯤. 그날 따라 마감에 쫓겨 강판시간이 한시간쯤 늦어진 관계로 발송부의 재촉이 심했다.

  시쇄된 신문을 펴들고 지면을 살피던 문선과장 윤석홍(尹錫洪)이 오식된 제목을 발견, 옆에서 윤전기를 지켜보던 공무국장 이언진(李彦鎭)에게 사실을 보고, 윤전기를 멈췄다. 편집국에 연락, 착오 여부를 재확인한후 연판에서‘괴뢰’두자를 깎아내고야 인쇄를 재개했다. 그러나 이미 인쇄된 것이 9천여부. 한 장이라도 밖에 나가면 안되었기에 사후 대책에 나섰다. 정리부장이 보급부에 연락, 발송중지 지시를 내렸으나 이미 가두판매로 60부, 군부대의 연락병이 받아간 것이 315부 모두 375부가 외부로 나간 후였다.

  국방부 출입지가는 국방부와 연락, 전방부대로 수송중인 차량을 서울 외곽 검문소에서 멈춰 문제의 신문을 회수케 하는 한편 경찰출입 기자는 수사기관에 사실을 알리는 한편, 중앙청출입 기자는 공보실을 방문 오식사실을 보고, 유감의 뜻을 표하는 등 사후 수습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가두판매로 유출된 60부중 한 독자가 15부를 한목에 사서 ‘동아일보’에 반환해 주었을뿐, 군부대에서 회수된 것도 375부중 120부 뿐이었으니, 회수 못한 부수는 300부였다. (당시 동아일보 총 발행부수는 11만 6천부)

  부산 피난시절 반독재.민주수호에 앞장 섰던 동아일보는 반정부 신문으로 미운털이 박혀있었기에 우연한 실수였지만 당시 정부는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공보실(당시 葛弘基 실장)은 동아일보에 3월 17일자로 ‘무기정간’명령을 내렸고, 한편 수사기관은 경위조사에 나서 두 공무국 직원인 식자공 현종길(玄鍾吉), 문성공 원동찬(元東?)은 3월 16일, 정리부장 권오철은 3월 19일에 각각 구속되어 조사를 받게되었고, 두 고위간부인 국태일(鞠泰一)전문와 고재욱(高在旭) 주필도 불구속으로 조사를 받았다.

  동아일보는 ‘오식사건 사후조치’해명서를 당국에 제출, 정리부장과 두 공무국 직원 등 3명을 징계해직, 고재욱 주필겸 편집국장은 감독 불충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고 밝혔다. 그 한달후인 4월 16일 정간은 해제되고 4월 18일자부터 동아일보는 속간되었으며, 구속중이던 권오철 정리부장 등 3명도 한발 앞서 4월 9일 석방되었다.‘오식사건’은 순전한 과실로 밝혀져 관계자 5명 모두 불기소되었고 사건은 매듭이 지어졌다.

  정간이 해제되던 날 동아일보는 사장 최두선(崔斗善)명의로 대정부‘진사(陣謝)진정서’를 냈고 18일자‘횡설수설’(橫設竪設) 칼럼을 통해 독자에게 사과(“智者千慮에 必宥一失格”운운)하였다.‘오식사건으로 퇴사했던 권오철은 그해 10월 거의 1년 반만에 문화부장으로 복귀, 고재욱 편집국장도 편집고문으로 복귀하였다.

 얼마후 동아일보는 지령 1만호(55년 8월 19일)를 돌파했는데 오히려 독자는 크게 늘기 시작, 정간직전 11만6천부였던 발행부수가 불과 석달만에 8만~9만부나 늘어나 다시 국내 최대의 발행부수(20만부)를 자랑하게 되었다.

  ‘오식사건’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오식사건의 전말을 잠깐 살펴보자.

  문제된 제목‘고위층(高位層) 재가대기중(裁可待機中) 한미석유협정(韓美石油協定)’= 2호 활자, 2단이 문선에 넘어갔을때 본문(本文)은 채자부로 돌리고, 제목은 잡호(雜號=4호 이상의 각종 활자)채자부로 돌렸는데, 제목 문선과원이 약 5분전에 넘어온 다른 기사 제목인 ‘괴뢰(傀儡=2호 활자) 휴전협정위반(休戰協定違反)을 미중대시(美重大視=초호활자)’4단 제목과 동시에 채자, 같은 상자에 담아 정판과로 넘겼다.

  정판과원이 우선 ‘한미석유협정(韓美石油協定)’에 관한 ‘2단2호’제목을 식자(植字)할 때 시간에 쫓겨 동이호수(2단) 활자만으로 제목을 작성하다가 같은 상자안에 있던 별개 기사의 제목‘괴뢰(傀儡)’라는 활자를 한데 묶어버려 ‘괴뢰 고위층재가 대기중(傀儡高位層裁可待機中 = 2호 활자)’이라는 제목으로 둔갑했던 것, 정작 ‘휴전협정 위반(休戰協定 違反)’기사 제목에 필요한 ‘괴뢰’ 두 활자가 안보이자 식자공이 다시 문선을 요구, 원고에 있는대로‘괴뢰’두자를 받아 식자, 오식(誤植)했던 것이 사건진상이었다. 두고 두고 생각해봐도 정말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지만 신문제작에서 정확을 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되는지 방증하는 사건이었다.

 

신앙촌 광신도의 ‘동아’습격

 

  4/19의 폭풍이 몰아친후 아직도 사회의 안정이 회복되지 못했던 60년 7월, 권오철은 사회부장의 중책을 맡게된다.

  연일 데모가 일어나고 사이비 언론이 난무하여 사회질서가 바로 서지 못하자, 장면(張勉) 정권의 무능을 탓하는 국민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그해 가을(10월 11일) 국회의사당이 한때 상이학생들에의 의해 점거되자, 국회와 정부는 손을 못쓴채 이에 굴복, 헌법이 개정되고 소급입법의 길까지 열어주는 판국이었다.

  그 두달후인 그래 12월 10일 아침 9시쯤 동아일보 보도에 풀만을 품은 ‘신앙촌’ 박장로 (朴泰善) 신도 수천명이 ‘동아일보사’(世宗路 구사옥)로 몰려와 경비중인 200여명 경찰관을 밀어붙이고 사옥안으로 돌입, 1층 영업국, 2층 총무국, 중역실, 3층 편집국까지 쳐들어가 한시간 남짓 난동을 부려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윤전기만 사원들이 사수하여 안전했을 뿐 모든 집기, 공장 일부도 파괴됐는데 증파된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 한시간후 겨우 진압, 그때 수천명이 검거되었다.

  광신도들이 불만을 품은 기사는 사회면에 연재되던 ‘과학수사연구소 얘기’9회분(12월 7일자),‘말없는 증거물’제하의 사진 감정에 관한 기사속에 박장로가 말하는 소위 ‘성화(聖火)’가 ‘손쉽게 조작 가능하다’는 내용으로 사실이 보도된후‘기사취소’를 요구, 거절당하자 대규모 난동에 나선 것.

  이 난동으로 동아일보 사월 4명이 부상, 40년간 보관된 서류 일부가 분실됐고, 조사부 출판부의 일부 보관지도 분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백주에 언론사를 습격, 난동을 부린 전대미문의 폭거였다.

  문제삼은 기사 내용이 확실한 증거에 근거한 정확한 내용이었음에도 경찰당국의 부실한 대비테세와 광신도들의 난동에 대하여 사건 다음날 동아일보는 ‘무법.무질서를 통탄한다’는 장문의 사설로‘1만명이 동원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도 200명의 경관을 배치한 것은 무능하다는 책임을 모면할 길 없다’고 정부를 질타,‘집단폭력으로 보복을 자행하는 것이 종교인의 진면목이 될수 없다’고 폭력배의 의법처단을 강조하였다. 그후 난동 주모자 수명이 검거되어 1년내지 1년반의 징역형이 선고됨으로써 사건은 매듭을 지었다.

  이 사건은 사회부 책임자 권오철 부장을 포함한 취재기자가 정확한 보도활동을 했음에도 턱없이 겪어야 했던 곤혹스러운 사건이었다. 

  권오철은 호주가(好酒家)요, 재치있는 화술(話術)로 사고의 폭이 넓었다. 둘도 없는 주붕(酒朋)이었던 소설가 한운사(韓雲史)는“문화부장(한국일보)시절 권오철과 하루가 멀다고 주석을 함께 했으나 한번도 주정하는 것을 못봤다. 주흥이 도도해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끼리 언성을 높일때도 있으나 그럴때면 그는 어느 틈엔가 자리에서 사라지곤 하였다. 그야말로 충청도 양반집 아들다웠다”고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이혜복 대한언론인회 명예회장,  ‘東亞’에만 25년, 다양한 편력, 한국언론인물사화-제5권,  1992)

 

 

권  오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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