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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0월 26일 경기도 개성서 출생 ▲97년 2월 서울서 별세 ▲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38년 경성일보 기자 ▲45년 동아일보 기자 ▲46년 한성일보 사회부장, 정경부장 ▲48년 대동신문 편집국장 ▲49년 서울신문 편집국 참여 ▲51년 대한통신 편집국장 ▲52년 중앙일보 편집국장  ▲54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상임논설위원 ▲60년 평화신문 상무겸 편집국장 ▲63년 대한일보 전무겸 주필 ▲신문기자 총 근무연한 35년 2개월 15일 ▲한양대학교에서 신문학 강의 15년

 

깨끗한 선비, 그리고 선비다운 신문인

 

벌써 반세기가 지난 옛날 이야기지만 미군정이 청사로 쓰던 일제때의 총독부 건물에서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이 직접 나와서 기자회견을 했다. 해방 직후라 혼란은 극에 달해 있었다. 정치인도 많았고… 무슨 신문사가 그리도 많았던지 ‘기자증’을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하지 중장과 늘 만나는 20여명 기자들은 모두 대단한 사람들 뿐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만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야말로 군웅이 할거했다고나 할까. 회견장에는 백담 강영수(白潭 姜永壽)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한 모습이었다. 물론 할 말은 다했고 쓸 것도 다 썼지만 떠들지는 않았다. 목소리 큰 사람이 빨리 출세하는 해방 직후였는데도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하지 중장과 회견하는 날에도 구태여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조용했다. 그리고 점잖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넷이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그는 어린 후배들을 유난히도 따듯이 감싸주었다.

  그래서 후배 기자들은 그에게서 많을 것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그는 서재필(徐載弼) 같이 호리호리하고 훤칠하게 키가 컸다. 그리고 언제나 옷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었다. 말은 길게 늘여놓는 법이 없었다.

  예의범절이 깍듯했다. 12년 개성(開城)이라는 개성이 뚜렷한 고장에서 태어난 기독교 신자다운 그였다. 그 시대를 마지막 보내는‘깨끗한 선비’그리고‘선비다운 신문인’이었다.

  그로부터 50년, 그는 한성일보, 대한통신, 중앙일보, 경향신문, 평화신문, 대한일보를 거쳐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는 기독교신문에 몸담고 있었다. 이토록 그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을만큼 한국 신문계를 위해서 살았다.

  지조를 굽히지 않는 깨끗한 선비, 언론계 선배로서 그는 지금도 많은 후배 언론인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 … )

  백담은 12년 10월 26일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부친 강치호(姜致鎬)가 3.1운동에 연구돼 북행길에 오르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만주땅 국자가(局子街 . 지금의 연길)로 옮겨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나온뒤 함경북도 경성고보(鏡城高普)를 거쳐 서울로 유학, 38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후 경성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약관 23세의 나이로 문화부 차장 자리에 앉았다. 45년 광복을 맞은 동년 12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옮긴지 석달만인 46년 2월, 새로 창간된 한성일보로 스카웃되어 사회부장, 정경부장을 지냈으며 다시 대동신문 편집국장, 서울신문 편집참여를 거쳐, 50년 6.25때는 편집국장, 수복 이듬해까지는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맡아 쉴틈도 없이 신문가도(新聞街道)를 달리면서 민족의 길과 영욕을 함께 했다.

( … )

 

공부하는 記者像 심어

 

  그 후에도 백담이 펴낸 <맥아더 장군> <나의 기자 시절> <행복한 왕자> 등의 책자를 탐독하면서 평생 존경했던 선배의 사랑을 미처 보은하지 못한채 97년 2월 한양대학병원 영안실에 조용히 잠든 백담 영전에서 4차원의 세계에서 다시 만나 뵈올 생명과 부활앞에 긴 명복을 기도할 뿐이었다.

  세상을 뜨기 이태전이 95년, 꽃샘 찬바람이 매섭게 불던 어느 이른 봄날 오후였다. 83세의 나이지만 대한언론인회보에 투영된 모습은 고령답지 않은 정정한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정든 강남 반포아파트에서 평수가 좁은 서초구 방배동 궁전아파트로 옮긴지 한달째. 방문한 후배에게 요즘 신문의 제작태도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요새 신문 면수가 너무 많아요. 한 신문 읽기도 벅찬데 이 신문 저 신문 마구 집어넣고 ….증면(增面)도 그래요. 아무리 광고물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해도 내용과 개성이 앞서야지, 이건 내용도 개성도 없이 덮어놓고 면수만 늘려가니까 반 이상을 광고로 채울 수 밖에. 석간 신문들이 중앙 지방 가릴 것 없이 줄줄이 조간으로 바뀌어가고 아무리 배달사정 때문이라고 해도 조간으로만 모두 몰려들어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잘 안가요. 결국 출혈경쟁을 하는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말이요.”

  정치인은 정치를 떠났을때 정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신문인은 신문을 떠났을때 신문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현자(賢者)의 말처럼 아마도 평생을 신문과 함께 하면서 살아온 백담은 이것이 그의 황혼길에서 다시 태어나도 언론인이 되고 싶다는 그의 천의무봉(天衣無縫)한 ‘동심 왕국’의 마지막 애정어린 쓴 소리였다.” 

 

  (강승훈 대한언론인회 이사, 깨끗한 선비, 그리고 선비다운 신문인, 한국언론인물사화-제5권, 1992)

 

 


 강  영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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