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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황산덕(黃山德)

Posted by 신이 On 6월 - 16 - 2017

“▲1917년 6월 18일 平南 陽德군 舊邑에서 출생 ▲89년 10월19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별세 ▲41년 京城帝大 법학과 졸업 ▲48년 高麗大學 법정대학 부교수 ▲52~66년 서울대 법대 조교수, 부교수, 교수 ▲60년 서울대학교 법학박사 ▲62년5월~66년12월 東亞日報 논설위원, 재임중 필화사건으로 구속 기소, 4개월만에 석방 ▲66~74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학장, 대학원장, 총장 ▲74년 법무부 장관 ▲76년 문교부 장관 ▲85년 학술원 정회원

 

  석우 황산덕(石隅 黃山德)은 법학자, 불교학자로서 언론인으로, 그리고 법무부장관과 문교부장관 등을 역임, 다채로운 생애를 살다간 인물이다.

  서울대법대· 고려대 등에서의 연구, 강의를 통한 그의 법철학이론은 지금까지 서양학자들이 해결하지 못하던 존재와 당위의 2원론을 극복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또 그는 언론계의 논객으로 부정부패와 권력의 남용을 질타하는데 앞장 서 정의구현에 힘쓰다가 동아일보 필화사건으로 투옥되는가하면 정비석(鄭飛石)의 인기소설 ‘자유부인’을 문제삼아 논쟁을 벌임으로써 우리나라 논쟁사의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석우는 1917년 6월 18일 평남 양덕(陽德)군 구읍(舊邑)소재 감리교회의 목사 배정일(裵貞一· 외조부)의 사택에서 평양고보를 나와 양덕금융조합에 다니던 아버지 황경손(黃慶孫)과 경성이화학당 출신의 어머니 배현도(裵現道)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 석우는 중년시절 그가 섬기던 김범부(金凡父)가 지어준 것으로 “우리나라 강토를 따지고보면 커다란 돌이 부서져서 된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큰 돌의 한구석을 맡으라”는 그런 뜻이었다.

( … )

 

  □ ‘국민투표가 萬能은 아니다’社說로 獄苦도…

 

  60년 9월 30일 수년간 미뤄오던 법학박사학위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수여되며 62년 5월 1일에는 동아일보 비상임논설위원으로 취임, 7월 28일자에 쓴 동지 사설로 인한 필화사건으로 구속, 군사재판을 받다가 4개월 후인 12월 7일 석방된다.

  그 무렵 군사정부에서는 민정이양후의 헌법에 관하여 1961년 8월 12일자 박정희장군의 성명을 통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석우는 62년 7월 17일의 제헌절을 맞아 제정형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설을 썼다.

  헌법을 새로이 제정하면 국가의 동일성이 파괴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그후 박정희장군은 이른바 ‘車中담화’에서 헌법은 ‘개정’형식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종전의 태도를 바꿨다.

  그러나 개정형식을 취할 경우 제2공화국 헌법에 의한 국희를 통해서 개정할 것인가, 아니면 국민투표방식에 의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었으며, 그 당시 헌법심의위원들은 대체로 국민투표방식을 취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7월 28일자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제하의 사설을 통해 제2공화국 헌법에 의한 국회를 통해 헌법을 개정할 것을 주장했다. 그때로서는 사뭇 과감한 주장이었다. 사설이 나가자 동료인 이동욱(李東旭· 당시 논설위원) 도 소총(小銃)사설이 아니라 대포(大砲)사설이었다면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그 사설로 인해 7월 30일 밤에 광교에 있던 중앙정보부 수사국 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된다. 허위사실유포죄에 해당하느냐의 여부가 신문의 초첨이었는데 “…나중에는 김종필 부장이 직접 나섰다. 김부장은 그 누구보다도 예리했으나 죄가 될만한 단서는 끝내 집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태흥 판사가 발부한 영장에 의해 정식으로 구속되었고 사건이 검찰로 넘어감에 따라 마포교도소에서 서울구치소로 옮겨졌다”고 석우는 그무렵을 회고했다.

  65년 들어 한일협정비준 무효화를 외치는 학원사태가 위수령 발동으로까지 확대되자 그는 학생데모를 감쌌다는 이유로 이른바 정치교수로 몰려 서울대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래서 그는 66년에는 변호사개업을 하는 한편 성균관대 법정대학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74년 석우는 성대총장에 취임하지만 취임 한달여만에 제24대 법무부장관에 임명되고 다시 76년에는 문교부장관으로 옮겨 앉게 된다.
  만년에 그는 단국대 대학원대우교수로 계속 강단에 섰다가 89년 10월 19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72세로 별세했다.

  저서로는 법철학, 법철학서설, 현대법철학입문, 법철학강의, 법학입문, 법학개론, 국제사법, 형법총론, 형법각론, 막스 베버, 자화상, 불교교과서, 무엇이 돌아오나, 복귀(復歸), 중론송(中論頌), 삼현학(三玄學), 여래장(如來藏), 창조주의 복귀 등이 있다.

  생전의 친우 이항녕 교수는 석우가 “친구를 좋아하고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리 두터웠던 것은 그가 타고난 풍류인이었던데서 온 것 같다”면서 “자연을 즐겨서 그는 등산을 좋아했고 가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결한 정서가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하여 많은 주옥같은 문학적 저술도 남기게 했다”고 기리고 있다.”
 

(김덕형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장, 自由夫人’ 논쟁으로 유명했던 學者· 言論人, 한국언론인물사화-8.15후편(하), 1993)

 

 

황  산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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