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9. 9 문선, 퇴사연월 불명. ▲ 1933. 9 재입사, 문선, 사원(정리부), 1940. 8 폐간.〔소설가, 호 효민(曉民)〕”
(동아일보사사 1권, 인물록)
“▲1904년 1월 21일 京畿도 連川군 連川읍 출생 ▲1975년 9월 21일 별세 ▲일본 東京正則英語학교 수료 ▲27년 東亞日報 學藝部 기자. 문예동인지 ‘第三戰線’발간 ▲44년 生活新報 편집국장 ▲45년 東邦文化· 새한民報 편집국장 ▲46년 文學新聞 주간 ▲50년 大田日報 논설위원· 政治大學 강사▲53년 弘益大學 교수 ▲60년 韓國文人協會 理事, 評論分科 위원장
홍효민(洪曉民)은 열중과 체념을 두 극단의 축으로 삼고 이 양극단을 걸어간 인물이다. 정직하며 소박한 성품이므로 수식과 왜곡을 꺼리며 무뚝뚝한 표면과는 달리 내면엔 순정, 강인한 생명력의 소유자로서 억센 기개로 일관한 평생을 살았다. 신문사의 학예부 기자로 있으면서 동반자 문학운동에 가담하며 수많은 역사소설과 문예평론을 주로 썼다.
□ 이해엔 초월한 실천에 옮기는 의지의 사나이
경기도 동북부에 위치한 연천군(連川郡)에는 옛이름 칠중하(七重河), 곧 임진강이 흐르며 신라· 고구려의 교통로로서 나당연합군과 고구려가 싸웠던 유적인 칠중성(七重城):연천군 積城면 소재)이 있다. 고구려 때는 공목달현(功木達縣), 신라 때는 공성현(功城縣), 그리고 고려 충선왕 때에 연천현(連川縣)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년)에 연천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명승 고적으로는 보개산(寶蓋山) · 감악산(紺嶽山) · 용추(龍湫), 또한 고려태조 및 7왕을 제사지내던 사당인 숭의전(崇義殿)등이 유명하다.
홍효민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옛날 고구려와 신라의 접전지이며 또한 고려 태조 및 고려의 일곱 임금을 제사지내던 사당이 있는 역사의 유서깊은 연천군 연천읍에서 1904년 태어났다. 소년기의 일화에 관해서는 알려진 자료가 없다. 다만 홍효민보다 세살 위인 박영희(朴英熙)가 20년 10월에 두 번째로 도일(渡日)하여 홍효민과 같은 학교를 몇해 앞질러 단기 8개월에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홍효민이 서울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아마도 19년 3.1운동 참가 이후인 20년대 중반기로 추정된다. 이리하여 그는 일본의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를 수료하고 돌아와 곧 동아일보 공무국 문선공으로 취직했다. 수식하지 않고 무리한 일이라도 이해(利害)를 초월해서 실천에 옮기는 남성다운 남성으로 직업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 學藝部기자 되고 동인지 ‘第三戰線’ 발간
27년 24세의 홍효민은 차분한 정서가 일찍부터 형성되어 사람을 끄는 매력이 두드러져 그다지 친절한 말을 걸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문선공에서 일약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동한 홍효민은 신경향파 곧 계급주의 안에서 따로 구분지을 수 있는 동반자적인 경향파 문학운동에 참여해 왔고 25년 8월 25일 카프(KAPF)가 결성된 뒤에 온 1차 방향 전환기인 27년 9월에 그는 세칭 ‘동경 유학생 소장파’로서 등장했다.
이 때 그와함께 등장한 사람은 조중곤(趙重滾) 김두용(金斗鎔) 한식(韓植) 이북만(李北滿) 등이었으며 이들은 카프 속에서 문예동인지 ‘제3전선( 第三戰線)’을 발간하여 기염을 토했는데 홍효민은 당시 문예시평으로 문단에 나왔다.
이리하여 홍효민은 초기에는 평론가로서 신경향파 문학을 두둔하는 입장에 서서 행동주의론을 한국에 소개하는 한편 기자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늘 예리한 비판과 통찰로 문학의 사회적인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비평활동을 펼쳤다.
여기서 잠시 신경향파라는 말을 살펴보면 이 말은 홍효민이 다녔던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출신 선배인 박영희가 당시 ‘개벽(開闢)’지에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라는 글을 발표한 이후부터 생긴 용어로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는 24년 이후 ‘백조’파 ·‘창조’파의 낭만주의 및 자연주의문학을 반대 비판하고, 사회주의 경향의 힘찬 새 문학유파를 지칭하는 말로서 고착되었으며 카프가 성립되기 전후의 몇해 동안에 걸쳐 부각됐던 프로 문학의 전기 현상이었고 별칭 동반자 문학이라고도 분류되었다.
□ 해방전에 生活新報 편집국장으로
일제는 고의적으로 만철(滿鐵)폭발 사건을 조작하여 중국과 전쟁을 일으켜 점령한 만주에다가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웠는데 이 만주사변(滿洲事變)발발 직전인 31년 2월서 8월까지 1차 70여명, 만주사변 뒤 일제가 국제연맹을 탈퇴한 다음해인 34년 2월서 12월까지 2차 80여명의 카프회원이 검거되었다. 민족운동 및 문학활동등을 통한 항일운동에 대한 탄압이 가속화됨으로써 마침내 카프는 35년 5월 21일 김남천(金南天)이 경기도 경찰부에 해산계를 제출, 없어지게 된다.
더욱이 악랄한 일제는 36년 12월 12일부터 소위 ‘조선 사상범보호관찰령’을 시행했으며 이를 전후하여 전향한 카프의 수문장격이던 박영희와 김팔봉(金八峯)은 38년 7월 3일에 이른바 ‘시국대응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을 발기, 결성준비위원등으로 참가했다. 이와 같은 암흑기에 들어왔을 때 홍효민의 나이도 벌써 30대 중반기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그는 동아일보에서 떠나 이번에는 매일신보(每日新報)학예부 기자로서 근무하면서 이따금씩 마지못해 쓰는 르포수필(국어 및 일본어)을 남겼다.
일단 해야 할 일을 처리해 버리지 않으면 못견디는 성미, 정이 깊고 의협심도 있는 당시의 홍효민은 일제가 더욱 무겁게 가해오는 탄압앞에서도 좀처럼 굴하지 않았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제격에 맞지않으면 참지 못하며 또한 인생살이에서 역점두는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딴사람의 뒷바라지에 있으므로, 40세가 되는 44년에 접어들자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생활신보(生活新報) 편집국장에 취임, 언론 창달에서 숨통을 틔어 보려고 애썼다.
□ 言論人 작가로 역사소설 量産
홍효민이 8.15광복을 맞은 때 나이 42세였다. 어둠 속에서 신음하던 민족이 서광을 눈부시게 받으며 자칫 그대로 주저 앉아버릴뻔 했던 지난 날을 멀리 밀려나게 하고 이제 새로운 자기 결정의 능력을 기르기 시작했다.
홍효민은 해방이 되자 곧 동방문화(東邦文化)편집국장, 새한민보(民報)편집국장을 거쳐 46년 4월 6일에는 주간지인 문학신문(文學新聞)주간으로 추임, 바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자신이 발행인인 이 문학신문 주필에는 이북만, 편집장은 엄흥섭(嚴興燮)이 맡았는데 모두 옛 신경향파 또는 동반자문학 동우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주간 문예 전문지의 효시로서 선보인 ‘문학신문’은 당시 정가 1부 3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빈곤과 사회혼란이 극도에 달했던 열악한 풍토에서 그 이름만을 지속시켜 가는 데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결국 겹치는 악조건 때문에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이를 그만두게 되었고 곧 이어 6.25전쟁이 터졌다.
홍효민은 50년 47세 때에 호구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잠시 대전일보(大田日報)논설위원으로 있게 되었으며 이어 서울의 정치대학(政治大學)강사로 출강하는 등 대단한 생활고속에서 허덕였다. 그러다가 50세 때인 53년부터는 홍익대학(弘益大學) 교수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평론가인 홍효민이 작가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은 광복 이후 그것도 6.25발발 전시기의 기간에 정력적으로 수많은 장편 역사소설을 발표함으로써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홍효민의 생애에서 보더라도 일대 전기에 해당된다. 그는 비약성에도 관계가 깊은 대범한 성품이므로 때론 기상천외한 구상을 만들어내며 스케일도 남다를 수 없게 넓은 편이었다.
그는 45세 때인 48년에 두개의 장편 ‘양귀비(楊貴妃)’와 ‘태조대왕(太祖大王)’을 발표했으며 이듬해인 49년에는 세 개의 장편, 곧 ‘여걸민비(女傑閔妃)’‘영생의 밀사’‘인조반정(仁祖反正)’을 냈다. 또한 이밖에도 ‘끝없는 사랑’‘남이장군(南怡將軍)’등이 있다.
6.25뒤인 54년에는 ‘신라통일(新羅統一)’을 발표했고 그의 대표작인 ‘인조반정’은 그동안 영화화도 되어 널리 알려진 명작이 되었다.
동반자 문학으로 출발한 홍효민이 해방이 되자 시작을 바꾸어 “문학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 일관한 큰 면모를 보인 것은 그의 평론집 ‘문학과 자유’에 잘 반영돼 있다.
그가 해방 뒤에 한때 순수문학을 비판하는 진영에 서기도 했지만 6.25뒤는 애국주의 문학론을 주창하는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그런 가운데 주요 평론으로 ‘문학의 사회적 성격’ ‘역사소설의 근대문학적 위치’와 인물 및 작품론으로 ‘춘원 이광수론’ ‘만해 한용운론’등을 남겼다.
그리고 57세 때인 60년에 와서 한국문인협회 이사가 되었으며 평론분과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리하여 언론인으로, 평론가로, 작가로, 교수로 한 평생 끝없는 도약을 시도해온 홍효민은 75년 72세로 눈감기까지 많은 업적을 이룩해 놓은 이름 그대로 역사의 파란속을 살아온 한 사람의 우긋한 ‘새벽녘의 백성’이었다.”
(민용기 현 한국교열기자회 고문· 작가, 이해엔 초월한 실천에 옮기는 의지의 사나이 필자 민용기, 한국언론인물사화-8.15후편(하), 1993)
“나의 청춘은 동아일보사에서 다 보냈다. 지금 생각하여도 유쾌한 그 시절이라 가끔 떠오르는 때가 많다. 내가 입사하기는 24세의 가을이다. 우연히 동아일보를 보니 종업원을 모집한다고 광고가 해지에 나왔다. 그때 나는 우리집안이 한말의 지사의 집이 그렇듯이 역시 영체(零替)하여 나는 주경야독을 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동아의 광로를 보고 달려갔다. 그 알량한 기술을 가지고 동아를 달려갔다. 나의 기술이란 서울에서 K인쇄소에서, 또는 C신문사에서 약간 배운 것을 가지고 동경에 건너가 그 서투른 기술을 가지고 벌어먹고 지내다사 하기휴가에 돌아와보니 자주(慈主)가 병환중이면서 도동(渡東)을 단념하고 있을 때에 동아에서 종업원 모집하는 광고가 나왔던 것이다. R우(友)에게 이력서를 대필시켜 가지고 달려갔다. 달려가니 그대로 채용이 아니다. 단 2일의 기간인데 벌써 12명의 지원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12명의 지원자를 놓고 그 익일, 채용시험이 시작되었다. 12명중에서 단 1명을 채용한다는 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면면이 모두 긴장해가지고 그때의 서무부장 김철중씨의 지휘를 받았다. 눈부신 기술경쟁이 약 15분 지냈다. 그때의 심사원은 전기 김철중씨와 공장장 조의순 씨로 내가 당선을 했다. 여기서부터 동아일보생활은 나의 기념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때의 동아일보는 자타가 민족적 표현기관으로 기자에서 사원, 또는 종사원에 이르기까지 지사적 기풍을 가지고 지내던 때다. 종업원의 봉급이 결코 사원이나 기자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첫 봉급이 지금도 기억에 새로운 일금 오십원야이었다. 편집국기자도 전문출신은 사십오원야인데 나는 약간 높은 봉급을 받았다. 그 무렵 우리나라에는 잡지 붐이 일어나 동아일보의 종업원이면서 잡지에 그 알량한 평론과 수필을 쓰고 동아일보에도 가끔 썼다. 그때의 학예부장 서항석씨는 나더러 평론같은 것, 또는 동화같은 것을 쓰게 하여 실어주었고, 동아일보가 이내 조석간으로 되게 되니 그것도 급작스럽게 되게 되니 말하자면 조선일보에서 조석간을 먼저 서둘러 사고가 나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말없이 조석간을 조선일보보다 먼저 내맨서 사고까지 겸해 내었다. 조석간 사고가 불과 1일전에 나오고 그 다음날 조선일보보다 먼저 나왔다. 여기에 나도 편집국으로 넘어가 정리부의 말석을 점하고 앉으니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그것이었다. 그때 편집국장 소오 설의식씨는 각별히 나를 좋아하였고 고하 송진우 선생은 나에게 가끔 우스운 말씀도 보내주었다. “자네는 사회주의자란서…”하던 말씀이 지금도 새롭다. 그때 내 대답이 걸작이지 않을 수 없다. “아니올시다. 사회민주주의자올시다.”하여 모두 사내를 웃긴 적이 있었다.
나는 사내에서 총애받게 되었다. 그것은 종업원으로 편집국에 와 앉아있는 것도 이유이었지마는, 나의 성격이 일에 대하여 꾀가 없었다. 조간을 할 때, 곧 야근이 되는 때에는 정치부를 비롯하여 경제부, 사회부, 또는 학계부의 일까지도 도왔다. 그때의 사회부장은 현진건 씨였으니 그는 사회부장으로 있으면서 ‘무영탑’같은 좋은 소설을 썼었고, 경제부장 고재욱 씨는 새로 입사하여 경제부에 단좌하여 자연(紫煙)을 공중으로 풍기면서 내가 쓴 ‘횡설수설’을 곧잘 고쳐주었다. 나의 문장은 예나 이제나 함부로 써내어 시국에 걸리는 문구가 많았던 것이다. 또한 재주를 피워쓴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메주’가 되는 때가 많아 웃긴 때도 많았다. 이런 일은 자랑같아서 우습지마는 나는 항상 연말이면 정근상을 타고, 사내의 일을 이곳저곳 도왔다는 이유로 특별상을 받은 때가 많았다. 나는 틈만 있으면 조사부에 올라가 거의 서고에서 살았다. 일테면 공부하는 측으로 사내에 알려졌으나 한편으로 연애도 하였던 것이다. 지금의 나의 아내가 이때에 연애가 되어 때마침 미국 ‘네이슌’지의 동아일보 10주년 기념축사가 말썽이 생기어 정간이 되었을 때 결혼을 하였던 것이다.
정간이 무려 13개월이란 1년하고도 한달을 더한 그 이듬해 6월 2일에 풀리었다. 다시 활기를 얻은 사내는 그새 뒤떨어졌던 동아일보의 기반이 다시 성운을 돌리게 되고 ‘신동아’란 참신한 잡지가 나왔다. 잡지가 대형으로 되기는 나 알기에는 ‘신동아’가 처음이었던 듯 생각되었다. 사내사람이 많이 집필하게 되어 나는 거의 매월 집필하게 되었고 색채 있는 글은 내게로 왔다. ‘신동아’는 첫 호가 소오 설의식 편집국장이 자신 스스로 편집하는 그런 성의를 보였고, 그 다음 최승만 씨가 입사하여 주간이 되면서 소설가 이무영 씨가 실제에 편집을 맡아하다가 또다시 ‘신가정’이란 여성잡지가 나오니 노산 이은상 씨가 그것을 담당하였고 다재다능한 최영수씨가 유머를 풍기면서 삽화는 청전 이상범 씨였지마는 잡지의 삽화는 최영수 씨였던 것이다. 최씨는 엉뚱한 일을 좋아하여 돈푼이나 있는 기자는 입사하면 ‘입사턱’을 내는 버릇이 있었다. 경제부장 고재욱 씨가 ‘입사턱’을 내는 정도이었는데 최씨는 대답하게도 ‘입사턱’을 한턱을 잘 내었다. 그러나 최씨는 이것을 물기에 무려 1년을 걸리었으니 그것을 꼬박꼬박 월부로 갚아간 것이다. 동료들이 보기에도 민망하였으나 ‘이것이 내멋이야!’하면서 월급봉투를 털어보이었던 일이 어제 같다.
이 때에 이채로운 일은 원앙기자가 생기게 되었다. 나 알기에는 내가 입사하기 전에 춘원 이광수씨가 그 부인 춘강 허영숙씨와 같이 입사하여 원앙기자의 이름이 생기었다. 그 다음은 여기자로 있던 이현경 씨가 같은 한 부의 기자 임원근씨와 있었다가 모두 퇴사하고 일점홍의 최의순씨가 홀로 있다가 퇴사하고 다시 원앙기자가 생겼으니 그는 최승만 씨의 부인 박승호 씨가 학예부 기자로 들어오고, 그 때 글줄이나 쓰던 김여순씨가 ‘신가정’ 기자로 입사하여 한꺼번에 여기자가 둘이 생겼던 것이다. 그 다음 김여순씨는 이내 결혼을 하면서 퇴사하고, 이은상 씨도 최사를 하게 되니 그 다음으로 그 자리에 들어온 사람은 소설가 주요섭씨다. 그리고 신가정 기자로는 김자혜 씨가 입사하여 나중에 두 분이 결혼하고 보니 원앙기자가 또 한 조가 생기게 되었었고, 그 다음은 사회부 기자 임봉순 씨의 부인인 황신덕 여사가 정리부 기자로 입사하게 되어 원앙기자가 3조가 생기는 성운을 보여 이것을 부러워하는 축들도 있었다. 원앙기자가 인기라면 총각기자가 또한 인기이었으니 이때 총각기자는 정치부장 김장환 씨를 비롯하여 ‘신동아’ 기자의 이무영 씨 또는 최영수 씨가 있었고, 정리부 기자의 이갑 씨가 있었다. 이래서 가끔 총각기자가 결혼해가는 문제가 나서 나중에 이무영씨는 아래층 광고부의 신영균 씨의 매작(媒酌)으로 그의 처제인 고일신 씨와 결혼을 만들어주는 일도 있었다. 동아일보사내에서 개인의 연애사건같은 것은 아무런 물의도 없이 되는 것이 한 개의 좋은 기풍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현재의 사장 일석 이희승 씨는 중앙고보의 교사로서 그의 콤비는 월파 김상용 씨다. 월파 김상용 씨는 이화여전의 교수로 가끔 이희승씨와 학예부장 서항석 씨를 찾았다. 이때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은 2층으로 2층 층계만 올라서면 바로 편집국 정문이 되고, 정문의 바로 앞이 정리부로 그 정문만 열면 내가 먼저 눈에 띄게 되어 “당재(瞠齋)”하면서 월파가 나에게 눈짓을 하던 것이다. 또한 멀리 앉았어도 정문을 향하고 앉은 분이 서항석 씨로 ‘당재’는 그의 별호로다. 그는 주르르 나가 한바탕 농담을 주고받고 하는 일이다. 나중에 일석이나 월파를 알아 재미있게 생각하고 좋아졌지마는 처음에는 이 자들이 신문사를 무엇으로 알고 찾아와서 고성으로 농지거리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 때가 있었다. 월파는 걸걸거리면서 웃기 잘하는 축이어서 듣기에 거슬리는 소리도 많았고 불쾌하게 생각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월파는 나중에 나의 별명을 만들어 돌리어 역시 험구의 한 사람인 것도 알았다. 얌전하게 보이는 축인데 신문사에 와서는 방약무인한 태도로 편집국 정문 앞에서 설레는 것이 그들의 통례이었던 것이다. 이때에도 미안한 일은 만해 한용운 선사가 원고료 때문에 1층, 또는 3층의 강당에서 기다리던 일이 생각나고 있다.
내가 있던 시대의 가장 큰 사건은 ‘일장기말소사건’이다. 이 일장기말소는 그 때의 사회부의 편집기자 장용서 씨가 처음 일장기 ‘마크’를 단 손기정 선수의 가슴을 들여다보다가 운동부의 유일의 기자 이길용 씨와 논의하고 지워버리기로 하였다. 이때쯤은 대담한 일이 아니면 아니되었다. 조사부의 기자 이상범 씨는 그대로 그것을 분칠하여 내려 보냈다. 신경을 날카롭게 쓰는 그때 日政이 이것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나는 야근으로 늦게 들어가 막 앉자마자 허심이란 친구가 찾아와 조사부에서 주고 받고 한담을 하고 있는 때에 편집국에 형사가 나타나 제1착으로 데려간 사람이 여 급사이었고, 여 급사가 말한 것을 근거로 사진부를 샅샅이 뒤지고 사진부가 전부 한바탕 경을 치는 봉변이 있었다. 일장기말소는 그때 사진부의 서영호 기자가 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 사회부가 한바탕 경을 치게 되어 현진건 사회부장을 비롯하여 임병철 차장, 장용서 씨, 이길용 씨 등이 순차로 잡혀갔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신동아’, ‘신가정’도 폐간이 되고 간부 진용이 통 바꾸이게 되었으니 그것은 그때의 사장은 고하 송진우 선생이었던 바 사장에 근촌 백관수 선생이 입사하게 되고, 주필에는 낭산 김준연 씨이었던 것이 아주 주필이 없어지고 편집국장에는 고재욱 씨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일장기말소사건으로 통양(痛痒)이 가시기도 전에 한 1년이나 지내었을까? 또다시 동아일보 폐간이 일정에서 제의되어왔다. 그것은 그때 2월 11일인 저들의 ‘기원절’에 자진하여 폐간해 달라는 것이다. 이때의 통분은 일필난기(一筆難記)이다. 합법적 기관이란 이런 때에는 큰 난관이다. 철면피의 저들 일정은 꼭 2월 11일 기원절을 택하려 하였으나 그 일은 그대로 되지 않아 그해 8월 10일에 민족적 표현기관이 폐간된 것이다. 그해 2월 초순에 그 소리를 듣고 나는 객혈을 하였다. 우연히 난 ‘디스토마’로 돌리었지만 그 실 통분이 일어 그리 되었던 것이다. 그래 고 편집국장이 휴가 3주간을 주어 조금 고치어 가지고 온 일이 지금도 뼈저리게 생각되고 있다. 동아일보사가 세종로 일우에 흘연히 그대로 서 있음을 볼 때 통쾌도하고, 감개가 자못 무량하다.”
(홍효민, 동우 1964년 9월호 6~7쪽 )
홍 순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