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4.11 종업원(사진부), 기술원, 1926. 4 퇴사. ▲ 1931. 10 재입사, 기술원, 1934. 9 퇴사. ▲ 1937. 12 재입사, 사원, 1940. 4 퇴사.”
(동아일보사사 1권, 인물록)
“▲1900년 8월 3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출생 ▲69년 7월 23일 별세 ▲15년 휘문고등보통학교 2년 수료 ▲16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제도과 용원 ▲20년 조선총독부 산림과 제도수 겸 사진과 조수 ▲24년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26년 10월 조선일보 사진부 기자 ▲30년 12월 조선일보 퇴사 ▲31년 10월~34년 9월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37년 12월 세 번째로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40년 4월 퇴사
□ 영원한 사진기자 문치장(文致暲)
동아·조선일보의 창간 이후 일반인들 사이에는 사진기자가 ‘쇠사진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로 불리어진 적도 있었다. 쇠사진이란 사진을 신문에 인쇄하기 위해 아연이나 구리로 사진판을 만드는 새로운 기술을 일컫던 당시의 유행어였다. 사진취재와 제판까지 맡아서 했던 초기의 사진기자들이 오늘의 신문 사진을 개척했던 선구자들이다.
안바코(暗箱)란 목제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어놓고 사건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은 하나의 진풍경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화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20년대에 신문사에 입사하는 조건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능력만 있다고 해서 사진기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사진가 또는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면 유명인사였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손꼽을 정도로 수수에 불과했으며 이러한 희귀성과 특이한 기술로 해서 새로운 직업이었던 의사나 변호사들에 대한 인기만큼이나 사회의 존경을 받는 분야였다. 그럼에도 사진가로서의 능력만으로 사진기자가 될 수는 없었다. 여기에는 필수적인 사진제판 기술이 이보다 더 존중되었으며 사진기자가 되려면 반드시 사진제판기술에 익숙해야 한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요건이었다.
당시의 사진제판기술도 사진촬영 기술만큼이나 각광 받았던 신종기술이었다. 인쇄소나 신문사에서는 사진제판기술의 보안을 위해 외부인은 물론 회사내에서 까지도 사진제판을 하던 작업장은 출입이 통제되었으며 철저한 비밀속에 작업이 진행된 뒤 신문에 사진을 보도할 수 있었다.
사진술과 사진제판 기술, 이 두가지를 습득해야만 사진기자가 될 수 있었던 20년대의 신문사 사진기자, 이들이 한국신문 사진을 개척한 선각자들이며 문치장(文致暲)은 바로 그 주역의 한 사람이었다.
20년 총독부 산림과 제도수 겸 사진과 조수로 사진을 시작한 문치장은 22년 5개월 동안 한국의 산들을 기록하는 일들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직업에 만족하지 않았다. 총독부의 사진기록작업에도 관여하면서 그의 꿈은 새로운 세계로 활짝 열리게 되었다. 총독부 사진과 조수로 일하면서 평소에 기계를 만지기 좋아했던 그는 마치 사진이 자기를 위해 있는 것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달리게 되었다. 산림과에서 관장했던 산이나 나무들을 촬영하면서 한편으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조수로 따라다니면서 행사나 여러 가지 중요 사건들을 촬영하는 것을 눈여겨 보고 이러한 촬영술을 열심히 익혔다. 사진 촬영에 자신감을 얻은 그의 목표는 갓 출발한 민간지의 사진 기자가 되기 위한 꿈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2년 9월 총독부 사진과 조수를 그만두고 경성사진 제판소에 입문하게 된 이유도 사실은 사진기자가 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16년부터 총독부 토지조사국과 산림과 등에 민족수탈을 현장에서 봐왔던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눈을 돌리게 한 것은 바로 일제의 수탈이었으며 그와 싸워 평생을 보낼 결심을 갖게 된 것도 일제의 통치에 대한 반감이었다.
사진과 조수 시절 새로운 기술이었던 사진을 배운 것은 영업 사진관을 개업해 초상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부 보다는 일제의 만행을 사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사진기자에 대한 큰 꿈이었다.
이의 실현을 위해 당시 사진기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했던 사진제판소에 들어가 제판기술을 배우기 위해 총독부와 결별하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 최초의 사진기자 취재방해 사건
24년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활약하기 시작한 이후 민간지가 폐간되었던 40년까지 문치장은 신문사진으로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고 그것을 기록했다. 여느 때는 일본 경찰의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검열에 막히여 신문에 보도가 불가능한 적도 있었지만 그는 사건의 현장을 사랑하고 사건 현장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독립투사들의 무장 항일투쟁 현장은 항상 차단되고 검열에 걸려 보도되지 못했지만 그때그때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현장을 촬영할 수 있는가에 대해 그의 기지는 일경들의 예상을 항상 앞질렀다.
65년 4월 1일 ‘거추장스럽던 생각’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그의 글에는 취재원에 대한 차단이라는 상황에서 사진기자들이 어떻게 대처했던가를 말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당시는 대부분의 뉴스원이 폐쇄되고 있어 더구나 사진 취재는 전부 금지되다시피 되어 곤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루마기 속에 ‘앙코’라는 큰 사진기를 감추어 가지고 일본 경찰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사진을 찍었고 그러다가도 발각이 되면 찍지 않은 딴 원판을 슬쩍 바꿔치기를 해서 내 주는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신문사진 기자로서의 자기의 영상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는 물론 그밖의 모든 것과 싸워야 하는 오늘의 사진기자들에게도 문치장의 얘기는 똑같이 적용되는 사진기자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름을 바꿔치기하는 기지가 일경들에게 항상 통용되던 것은 아니었다. 25년 4월 20일 밤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를 무산시킨 영찰당국을 성토하는 시위 취재 때는 촬영한 필름은 물로 여분의 필름까지 모두 빼앗긴 적도 있었다. 이것이 한국신문사상 최초의 사진기자 취재 방해사건이다.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는 이렇게 적었다.
“경찰당국으로부터 무리한 금지와 해산을 당한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 대의원 수백 명이 재작일 밤 아홉시경부터 대오를 정제하여 가지고 무산자 만세!를 고창하면서 일대 시위를 거행하였다 함은 기보(旣報)한 바이어니와 그 당시 현장의 광경은 실로 근대에 보지 못하던 대혼잡 대살풍경을 이루었으며 더욱이 혈안에 뒤집힌 20여명 정사복 경찰들의 무리 회포한 행동은 실로 언어도단이었다는바 그들은 현장의 혼잡한 광경을 촬영하는 동업 시대일보 사진반 마도노에게 폭행을 더하여 수백원짜리 사진기계를 때려 부수고 그 다음에는 마도노를 구타 인치하였으며 또한 동업 조선일보 사진반 야마하나도 파고다 공원 앞에서 몰려나오는 군중을 자진 찍으려다가 역시 공원앞 파출소에 무리하게 붙들려 들어갔고 본사 사진반 문치장도 사진을 박았다가 경관의 무리한 강제로 종판(種板) 압수를 당하는 등 전횡적으로 무리하게 집회를 금지 해산하는 동시에 불법 횡포한 경찰권은 언론기관에까지 가혹하게 행사되었다더라”(1925년 4월 22일자)
시대일보의 마도노, 조선일보의 야마하나등 일본인 사진기자와 함께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문치장이 일본 경찰에 당했던 취재방해사건은 민간지 모두가 기사로 사설로 논평으로 그리고 항의단을 경무국장에게 파견하는 강력한 입장을 취했으나 결국 유아무야되고 사진 취재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어져 사진기자들의 취재활동은 항상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일제하에서 활동했던 사진기자들 중에서 문치장 만큼 많은 신문사를 옮겨다닌 사진기자도 없을 것이다. 당시의 신문사 마다의 사정도 있었지만 사진기자로서의 그의 재능, 그리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했던 성격때문이기도 했다.
24년부터 26년까지 동아일보에, 26년 4월부터 5개월 동안을 시대일보에서 그리고 그 해 10월부터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30년까지 약 4년간 근무했다. 조선일보를 퇴사한 후에는 청진의 북선일보에 잠시 근무한 적도 있었으나 31년에는 또 다시 동아일보에 돌아와 34년까지 근무하다가 다시 퇴사, 37년에 세 번째로 동아일보에 입사하는 특이한 이력을 남기게 되었다.
문치장이 신문사를 옮겨다닐 때마다 그에게는 항상 큰 사건이 일어나곤 했다.
26년 4월에 입사했던 시대일보에 근무할 때는 순종 국상과 6.10만세 사건이 일어났으며 조선일보에 근무할 당시에는 광주학생사건, 동척 경성지점 폭탄투척사건, 장호원서 총검 도난사건등 독립항쟁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던 때였다.
31년 동아일보에 재입사한 이후에도 크고 작은 사건은 마치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 무렵에는 공산당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으며 33년 5.30 간도공산당 폭동사건은 공산당사건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37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무기정간이 해제된 그 해에 세 번째로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일제애 의해 민간지들이 강제 폐간되었던 40년 4월 퇴사함으로써 그의 사진기자로서의 활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24년부터 통산 16년가 그 사이이에 거쳐온 신문사만 해도 네 개 신문사에 여섯 번을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수없이 옮겨다녔던 그의 신문사 편력과는 달리 그가 취재했던 사진들 소에는 뛰어난 재질과 사진기자로서의 우수성이 옛날의 니면속에서 아직도 빛나고 있다. 이길용과 동승해서 항공촬영으로 연재한 ‘신록의 대경성부감기’ 그리고 목숨을 걸고 취재했던 ‘울릉도 설해참상 현장. 매년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났던 수해 참상의 현장사진등은 수많은 신문사진들 속에서 기억될만한 걸작들이다. 문치장이 카메라로 사건 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경성지법의 독립인사들의 공판 때였다. 경성지방법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생생한 모습을 촬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취재는 경쟁이 가장 심했다. 공판이 열리는 날은 이른 새벽부터 앙코 카메라를 휴대하고 재판정 입구에서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끝없이 대기해야 했다. 비공개로 열리는 재판일 경우에는 용수를 쓰고 차에서 내려 입정하는 장면을 촬영해야 하는데 간수들의 극성스런 취재 방해로 이 장면을 잡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장의 사진에 승부를 건다는 말이 시작된 것도 이 때였으며 어느 순간을 포착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사진기자의 기민성과 예견에 달려 있었다. 문치장이 촬영한 사진들이 돋보이는 것도 바로 결정적 찬스를 끈질기게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개인 개인의 출정일 경우에는 카메라에 감정을 불어넣고 많은 사람일 경우에는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내 독립인사들의 기백을 나타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 했다. 당시의 신문기자들이 대부분 애국열에 불탔던 것처럼 문치장의 사진도 이러한 정신에 초점을 맞추었다.
( …)
“기술이래야 사진기술뿐인데 이제는 눈이 어두워 더 할 수가 없다”
말년에 후배들에게 독백처럼 남겼던 말들, 그 속에는 일제의 억압을 벗어나 자유스런 나라에서 사진기자로 웅지를 펴보지 못한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생계의 어려움에 따른 한탄이기도 했다.
6년 7월 망막장애와 노안으로 병석에서 투병중이던 문치장은 후배들에게 “요즘 세월 참 좋아졌어. 정신차리고 일 해야 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인진 동아일보 사진부장, 영원한 사진기자 문치장(文致暲),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후, 1992)
문 치 장
이분이 저의 친할아버지 이십니다
존경하는 할아버지의 지나간 생의 흔적을 감명깊게 읽습니다
감사 합니다
Comment by 문광순 — 2018/11/30 @ 9:59 오후
증조 할아버지 너무 멋진 분이셨네요~^^
차례지낼대 사진으로 만 뵈었던 할아버지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수 있어서
너무 감동입니다
Comment by 문영주 — 2019/02/07 @ 1:02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