ㅊ“△ 63.1 편집국장, 문화부장겸, 신동아주간겸, 이사주필, 동아연감주간겸, 68.12 퇴사. △ 70.2 재입사, 이사(상근), 71.12 퇴사.”
(동아일보사사 3권, 인물록)
“▲1925년 6월 2일 충북 제천군 금성면 북진리에서 출생 ▲91년 1월 15일 서울에서 별세 ▲42년 청주 제1공립중학교 졸업 ▲44년 京城帝國大學 예과 문과을류 입학 ▲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졸업 ▲51년 大韓通信 기자 ▲54년 한국일보 조사부차장· 논설위원 ▲58년 朝鮮日報 편집국장 ▲60년 民國日報 편집국장 ▲61년 서울 日日新聞 주필 ▲63년 東亞日報 편집국장 ▲65년 동아일보 주필 겸 이사 ▲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대표 ▲81년 민족 통일중앙협의회 의장
□ 확고한 역사의식, 호방· 강직한 언론인
1960년대 말의 어느 날이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나는 조선일보 주필이고 소설가이기도 한 선우휘(鮮于煇)와 한가로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말했다.
“선우선생이 평안도 출신이기에 하는 말인데 나는 평안도 사람을 만나면 그들이 하도 억세기에 얼마간 기가 죽어요”
“아니, 정반대라구요. 평안도인 나는 오히려 충청도 사람들이 무섭다고 보아요. 대가 대단히 센 사람들이지요. 손병희 선생,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등 옛날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해방 후만 봅시다. 윤보선, 박헌영, 김종필씨 같은 사람이 모두 충청도 아닙니까. 삼선개헌에 반대한 정구영 옹 같은 분은 옛날의 사육신만큼 용감했다고 하는데 그분도 충청도고 언론계에서 가장 대가 세다는 천관우씨도 그렇고…”
선우휘는 평소에 그 문제를 얼마간 생각했던 것처럼 이야기가 줄줄 나온다. 확실히 천관우는 언론계에서 가장 강직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안목이나 문장력에도 출중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91년 1월 15일 67세로 천관우가 별세하자 동아일보는 “치열한 역사의식과 함께 호방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닌 언론인, 역사학자”라고 추모했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다. “서서 죽을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세로 불의와 대결한 것이 치열한 역사의식이고 동료나 후배와 어울리면 소주를 대여섯 병씩 두주불사로 마시는 호방한 성격이고 그러면서도 가족문제나 예의문제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유교적 선비이다.
천관우는 충북 제천군(후에 제원군으로 개칭)금성면의 상당한 부잣집에서 태어나 청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마친후 얼마동안 미국 유학도 했다. 51년 피난당시 부산에 있던 대한통신에서 출발하여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한국일보 논설위원, 민국일보 편집국장, 서울 일일신문 주필 등등 여러 신문사에서 계속 중책만 맡았다.
52년 나는 외삼촌이 살고 있는 청풍에 간 일이 있었다. 나의 외삼촌댁과 천관우의 자당은 동네 친구로 자주 만나 지내는 처지인데 그때 천관우가 미국 유학중이라며 칭찬이 대단했다. 청풍(5세때 청풍면으로 이사)이 낳은 신동이고 그가 고향에 돌아온 어떤 때는 국민학교 밴드까지 동원되어 환영한 일이 있을 정도란다. 앞으로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게 고향의 공론이었다. 그가 미국유학후에 쓴 ‘그랜드 캐넌’이란 기행문은 대단한 명문으로서 학교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 후 천관우를 만나게 되었다.
□ 신문제작의 절정, 민국일보時節
천관우는 사상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다. 해방 후 대학생 시절에는 우익 학생운동에 가담했고 예를 들어 4.19후 사상적 백화제방기에 있어서는 진보적 언론인들과 명확히 선을 긋고 보수의 논조를 계속했다. 보수라고 해서 수구라는 것은 절대 아니고 그는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에 관한한 누구에게도 못지않게 투철했다. 그래서 내가 민주주의와 언론자유가 성취된 이후의 방향이나 내세울 알맹이는 무엇이냐고 슬쩍 논쟁을 걸기도 했는데 그는 민주주의만 되었으면 되었지 그 후는 제대로 잘 될것인데 왜 따지느냐고 짜증을 냈다. 그래서 천관우는 진보적 지식인들과는 관계가 소원했던 것 같다.
천관우는 ‘보수’와 ‘진보’에 관해 이런 글을 한국일보에 쓴 일이 있다.
“젊어서는 이상이 앞서는 대신 현실을 잘 모르고 나이가 들수록 그 반대가 되는 것이 통례라고 하지만 그것이 단지 노화현상만은 아닐줄로 안다. 우선 그것은 진실한 책임감에서도 오는 것이 아닐까. 우선 달라져놓고 보면 그 다음은 또 어떻게 되겠지 하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뒤에 너도 나도 과연 더 좋아져있을까 하는 걱정이라고도 할수 있다.
젊은이의 기가 죽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이상은 사회‘원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대안가운데서 생각이 덜 미친 부분은 다듬어주고 보족(補足)을 해주는 것이 이른바 기성세대의 할 일이겠다. 또 미완성세대는 너무 일찍부터 자기의 대안을 고정시켜서 문을 닫아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어느 청년과 담소하다가 ‘상당히 보수적이시군요’하는 평을 듣고는 “내가 벌써?”하고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 …)
□ 빛바랜 民統의장, 외로웠던 말년
역사학자로서의 천관우도 언론인으로서의 천관우 못지않다. 학사논문인 ‘반계 유형원연구(磻溪 柳馨遠硏究)’가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한다. 처음에는 실학을 주로 연구했으나 나중에는 상고사나 현대사까지 전분야로 범위를 넓혀‘한국사의 재발견’‘근세조선사연구’‘인물로 본 한국고대사’‘한국근대사산책’‘고조선사-삼한사연구’‘가야사연구’등 많은 저술을 냈다.
그는 ‘六十자서’에서 한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남선의 책을 읽고서 부터라고 말하고 있다. 또 실학에 열중하게 된 것은 해방전야 우연히안재홍과 한집에 기거하면서 그로부터 개인교수를 받은 인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말년에, 연초에 단 한사람 최두선에게 세배를 다닌 일이나, 안재홍의 전집 편집을 주간한 일이 이해할만 하다.
( … )
언론인, 사학자 말고 그는 그와 거의 같은 비중으로 민주투사라고 할 수 있다. 언론계의 민주화 노력은 물론이고 권력에 의해 언론계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참으로 치열한 민주화 투쟁을 했다. ‘민주수호국민 협의회’등의 공동대표로 활약한 모습은 그 당시의 신문에 잘 보도되었다.
그러한 민주투쟁의 맹장인 천관우가 80년을 고비로 위상이 달라졌다. 그해 전두환 대통령의 간청을 받아들여 ‘민족통일중앙협의회’의장에 취임한 것이다. 본인은 통일문제엔 여야가 있을 수 없고 범민족적인 것이기에 수락했다고 말했다. 물론 그가 대항하여 투쟁했던 박정권도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일단 투쟁을 멈추려 했던 때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 당시 그를 따르고 그의 집에 문전성시가 될 정도로 모여들었던 이른바 재야의 지식인들은 거의 모두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 후 외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한 외로움은 별세할때까지 계속되었다.
( … )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의 인사들은 천관우를 포섭하려고 애를 썼다. 국회의원을 시키려고도, 문공부 장관을 시키려고도 여러 가지로 손을 뻗쳤다.
그런 유혹을 그는 항상 물리쳐 왔다. 그러면서도 내심 자기를 알아주는 것이 싫지는 않다는 표정이었다. 옛날 선비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한 천관우가… 정말 아쉽다.
천관우는 천안 공원묘지에 안치됐으며 그는 생전에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남재희 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주필, 확고한 역사의식, 호방· 강직한 언론인,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편(상), 1992)
“신문사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나라 저날리즘의 기원은 조보(朝報) 니 저보(邸報)니 기별(寄別)이니 하는 것에 있다고들 한다. 조정의 정책, 인사 등 중요한 결정을 승정원(왕의 비서 같은 구실을 하는 승지의 관청)에서 발표하면 이것이 조보다. 이것을 중앙의 각 관청이나 경저(지방관청의 서울출장소 같은 것)에서 사람을 시켜 필사케하여 돌려보는 것이 저보다. 우리말로 기별이라고도 했다한다.
신문의 전달성이라할까 공시성이라할 일면에서 보면 이 조보(朝報) 저보(邸報)가 그 기원이라 하겠지마는, 신문의 비판적 지도적 기능 혹은 그 기록적 기능이라는 일면을 생각해본다면 언관 사관이라는 직책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고 또 어느 기회인가에 그런 이야기를 써본 적도 있다.
사헌부라는 관청은 문무백관의 기율을 감찰하는데요, 사간원이라는 관청은 군왕의 판단과 명령의 잘잘못을 간하는 데로서, 이 둘을 합쳐 양사(兩司)니 대간(臺諫)이니 했다. 말하자면 비록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언론을 담당해서 정책이나 인사, 그밖의 정치 전반에 관여해서 이것을 비판하는 기능을 가졌던 것이다.
홍문관이라는 관청은 본래 군왕의 학문이나 문서같은 것을 맡는 데지마는 또 군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여 역시 언론의 일부분을 담당했다. 양사에 홍문관을 합쳐서 ‘삼사’라하고 그 관원들을 ‘언관’이라했다.
전제군주의 나라-여기서는 군왕의 명령이 곧 법령이요 모든 정치가 이 명령을 통해서 이루워 진다. 삼정승 육판서를 비롯한 문무백관은 이 군왕의 정치를 보필하고 집행하는데 불과하다. 이 정치, 곧 군왕의 언행을 항상 감시하고 비판하여 그 노선이 빗나가는 것을 막고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을 북돋아주는 것이 언관들의 소임이었다.
여기에는 비상한 기개가 필요하였다. 군왕의 말 한마디로 즉각 생명이 좌우되기도 하는 시대-그 속에서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이 언관의 책임이었다. 서거정 같은 이는 이 언관의 기개를 말하여 “항뇌정(抗雷霆), 도부월(蹈斧鉞), 이불사(而不辭)”라고 했다. 아주 풀어서 말한다면 “벼락이 떨어져도 목에 칼이 들어가도 서슴치 않는다”고나 할까.
또 실지에 있어서도 언관들의 지위는 무슨 월등하게 높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아무리 고관 혹은 종적(宗寂)이라도 이를 규탄해야할 때는 서슴치 않았고 물론 군왕에 대해서도 항상 극간하는 것을 본령으로 삼았으며, 또 그로 말미암아 원류(遠流) 심지어 죽엄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양사(兩司) 또는 삼사(三司)는 필요 있을 때마다 각각 상소로써 언론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지마는, 단독으로는 의사가 관철되지 않으면 양사(兩司)가 공동으로 상소를 하고 그래도 안되면 삼사가 공동보조를 취한다. 이것이 ‘양사합계(兩司合啓)’니 ‘삼사합계(三司合啓)’니 하는 것이다. 그래도 되지 않으면 양사 또는 삼사의 관원들이 일제히 대궐 앞에 엎드려서 군왕의 번의(?意)를 요청하기도 한다. 이것이 합사복합(合司伏閤)이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만큼 자기의 소신을 주장하였고 또 그만큼 자기의 소신에 책임을 졌던 것이다.
군왕이 정책을 결정하는데는 여러 중신들이 참여한다. 이 회의의 자리에는 중앙 지방에 걸친 중대한 사건들이 모두 의제에 오르고 그것을 갑론을박하여 결론을 내리면 그것이 군왕의 재가라는 형식을 밟아 법령이 된다. 이 자리에는 반드시 ‘춘추관’이라는 관청의 ‘사관’이 참석하여 그 논의의 경과를 일일이 기록하여 누구든지 단독으로 군왕에 알현(謁見)하는 이른바 ‘독대(獨對)’라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사관의 이 매일매일의 기록은 빠짐없이 축적되었다가 그 군왕이 돌아간 뒤에 그 일대의 ‘실록’으로 꾸며 내는 것이니, 이것이 지금도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이다. 사관은 사실 그대로를 직필하는 것이 생명이었던 것이며, 신문을 그 기록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우리 저날리즘의 기원을 이런데서도 찾을 수 있을듯하다. 이 사관은 대개 ‘승정원’의 승지와 ‘예문관’원이 겸하였다.
언관은 오늘의 비판을 맡는다면 사관은 내일의 비판에 예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언관이나 사관은 주로 자질이 준수하고 기백이 늠름한 젊은 관원에서 뽑혔다. 사관을 뽑을 때는 그 선발의 책임을 지는 이들이 단을 모아 향을 피우고 “내가 만일 적임자 아닌 사람을 천거한다면 재앙을 받아도 좋다”고 천지에 맹서한 뒤에 선발을 하였다고도 한다. 또 언관의 어떤 직책은 자신의 생활이 결백함을 상징하여, 비록 부유한 집의 자제라도 누추한 토홍색 단령을 입고 떠러진 안장에 비루먹은 말을 타고 다닌 때가 있었다한다. 언관 사관의 소임은 이렇게 원체 막중한 것이었다.
전제군주의 체제에서도 정치의 방향을 감시비판하는 ‘언관’이 필요했고 그날그날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사관’이 필요했다. 또 그들에게는 비상한 책임감과 기개가 요구되었다. 다만 옛날의 언관이나 사관은 모두 관으로서 관에 충실하는 것이 있음에 대하여 오늘날의 저날리즘은 민으로서 민에 충실하는 것을 생명으로 하는데에 근본의 차이가 있다. 새삼스럽게 고담을 끌어낸 이유는 이 이상 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줄 믿는다.”
(천관우, 언관사관(言官史官), 동우(東友) 1963년 6월 20일 발행 3쪽)
천 관 우
동아일보 1970년 4월 20일자. 4.19기념 강연회에서 강연하는 천관우 동아일보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