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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조인상(趙寅相)

Posted by 신이 On 6월 - 14 - 2017

“▲ 49.10 취재부장, 54. (?) 퇴사.”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13년 1월 9일 서울 종로구 수하동 9번지에서 출생 ▲84년 2월 2일 별세 ▲36년 일본 早稻田대학 법률학과 졸업 ▲36년 朝鮮中央日報 기자 ▲38년 京城日報 기자 ▲44년 京城日報 사회부 차장 ▲45년 京城日報 사회부장 ▲47년 朝鮮日報 정경부장 ▲49년 東亞日報 취재부장 ▲54년 구 中央日報 편집국장 ▲56년 中央日報 논설위원 ▲58년 審計院 편집실장 ▲ 63년 大韓再保險公社 공보실장

 

□ 1년에 두 번 월급을 타오는 사람

 

 언론인 조인상(趙寅相)을 잘 아는 사람은 그를 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은 좀 다른 면도 있었다. 기자이면서 기자 행세를 하지 않았고 남의 일이라면 이해관계를 떠나 두 팔 걷고 나서는 사람이었으며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면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인정 많고 의리 깊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사생활에 있어서는 ‘내일은 내일, 오늘은 오늘’이라는 낙천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돈만 있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을 나누는 호탕불기(豪宕不羈)한 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문사에서 월급을 제대로 집으로 가져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상여금 봉투만은 손을 대지 않고 고스란히 집에 전해주어 그의 부인은 “우리 남편은 1년에 두 번 월급을 타오는 사람”이라고 했다.
 작달만한 키에 언제나 웃음을 띠고 다정한 서울 말씨로 남에게 싫은 인상을 주지 않았으며 돈과 여자를 멀리했다.

 조인상은 사생활 면에서는 좋은 평점을 받지 못했어도 처신에는 나무랄 데 없는 청빈하고 강직한 언론인으로 살다간 사람이다.

 조인상은 1913년 1월 9일 서울 수하동(水下洞)에서 태어났다. 그는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밤에는 신문사에 나가 신문발송 포장하는 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우유 배달도 해가며 집에서 보내주는 학비 외의 수입은 고학하는 친구를 도와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가 대학시절 도움을 주었던 친구들이 후일 신문사를 그만두고 놀고 있을 때 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후일담도 전해지고 있다.

 36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첫 번째로 취직한 신문사가 당시 서울 종로 견지동에 있던 조선중앙일보사였다. 그는 은행에도 취직자리가 내정되어 있었으나 마다하고 신문사로 가게 된 동기가 재미있다.
 그가 양정고보 2학년 때 자전거를 타고 옛 신신백화점 자리에 있던 종로경찰서 앞을 지날 때 일인 순사에게 자전거의 감찰이 없다고 해서 걸려든 것이다. 바로 그날은 자전거 무감찰 단속을 하는 날이라 경찰서 마당에는 단속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그중 한사람으로 끼어 있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동네 사는 신문기자가 그를 발견하고 기자는 일인 순사에게 무엇이라 말을 건네고는 그를 데리고 나왔다. 그때 조인상은 어린 나이에도 기자란 대단한 직업이로구나, 나도 커서 기자가 되리라 하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조선중앙일보사로 가게 된 것은 양정 선배인 조백(趙栢)이란 사람의 추천으로 입사했으나 얼마안가 신문사가 문을 닫게 되자 그만두고 38년 2월 경성일보(일문신문)에 입사했다.

 경성일보로 가게 된 것도 대학시절의 선배인 일인 아라마기(荒巻)란 자가 편집국 차석으로 있어 그를 찾아갔다가 그의 추천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일문 기사를 일인 보다도 잘 쓴 그는 지방부에서 1년여 지국에서 올라오는 기사를 정리하다 39년 5월 사회부로 배속을 받아 종로·동대문 두 경찰서를 출입하게 되었다.

 어린시절 종로서 마당에서 자전거 무감찰 단속에 걸려 기자가 되겠다던 그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남달리 부지런했고 천부적인 재질을 발휘하여 44년 6월에는 사회부 차장으로 승진했다. 조인상이 종로서를 출입하고 있을 때 많은 일화가 있다.

( … )

 그해 8월 15일 일본은 패망했고 조선에서의 식민지 통치도 끝나 경성일보사도 자진 해산을 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의 양심적인 자책감에 사로잡혀서 이었는지 주야로 취기로 끊일 날이 없었다.

 조인상은 다시는 문필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2년여의 실직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주위 친구들의 권유로 심기일전, 생각을 돌려 47년 5월 조선일보사 정경부장에 취임해 1년 반 만에 조선일보를 사임하고 동아일보 취재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아일보에 재직 중 6·25를 당해 숨어 지낼 때 그를 위하여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은밀히 전해주고 먹을 것까지 구해다준 사람이 바로 이강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9·28 수복후 이강을 찾으려 했으나 그의 소식은 알 길이 없어 영영 만나지 못했다 한다.

 

□ 言論에 바친 23년, 지워지지 않는 발자취

 

 조인상은 6월이 되면 생각나는 이강의 이야기를 하고 그의 의리, 깊고 고마웠던 신세를 잊을 수 없다고 되뇌기도 했다.

 54년에 중앙일보(현재 중앙일보의 전신) 편집국장에 취임했고 56년에는 동사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58년 중앙일보를 끝으로 모두 23년간의 언론인 생활을 끝마친 그는 심계원에서 발행하는 월간 잡지의 편집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 … )

 조인상은 “나는 많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세상을 살아왔다. 내가 신세진 친구는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내 생전 그 신세를 다 갚지 못할 것 같다. 세상의 재물   가장 큰 재물은 좋은 친구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글은 그가 어는 주간지에 쓴 수필의 한 구절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부터 미리 예감이라도 한 듯이 친구들을 찾아 차 한 잔이라도 나누며 지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필자는 그와 일제하에서는 신문기자로 일선에서 같이 뛰고, 해방 후에는 동아에서 같이 일을 한 동우의 한사람으로 그의 심성이나 행적을 되돌아 볼 때 배짱 있고 아부를 모르고 고집도 대단한 멋진 언론인이었다.

 그는 84년 2월 2일 칠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문필의 재사요, 양심 있는 언론인의 한사람으로 그가 우리 언론계에 남기고 간 발자취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김호진 전 대한통신 편집국장,  1년에 두 번 월급을 타오는 사람, 한국언론 인물사화-8.15전후, 1992)

 

 

조  인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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