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4 기자, 취재2부(사회부)차장, 60. 1 퇴사. ▲ 60. 3 재입사, 지방부차장, 출판부장, 65. 7 퇴사.”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25년 7월 20일 忠南 保寧군 靑蘿면 昭陽리에서 출생 ▲77년 2월 15일 별세 ▲50년 東國大學 졸업 ▲48년 7월 재학중 서울신문 기자 ▲54년 2월 京鄕新聞 사회부 기자 ▲56년 4~6월 東亞日報 사회부 기자 ▲60년 3월~65년 7월 東亞日報 지방부 차장·출판부장 ▲64년 8월~66년 3월 한국기자협회 초대, 2대 회장 ▲65년 9월 中央日報 사회부장 ▲66년 中央日報 편집부국장 ▲67년 中央日報 논설위원 ▲68~71년 中央日報 부국장 대우 지방부장·판매부국장 ▲ 73년 4월 퇴사
□ 정치적 사건 다룬 사회부 기자
이강현은 전형적인 사회부 기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그마한 사건 기자가 아니라 정치적인 사건을 다루는 사회부 기자였다. 자유당 독재를 비판했고 4·19의 도화선이 된 마산의 김주열군 살해사건을 폭로했다. 그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지방부차장, 출판부장을 거쳐 중앙일보 초대 사회부장과 편집부국장을 역임했고 한국기자협회 초대와 2대 회장을 지냈다.
이강현은 충청남도 보령(保寧) 출생으로 동국대학교를 졸업했다. 48년 7월 동국대 재학중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그의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사회가 안정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대학 재학중에 언론사에 입사하는 사람도 흔히 있었던 무렵이다. 그는 6·25전쟁 기간 동안 서울신문에 근무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2월 경향신문으로 옮겼다. 기자경력이 5년 무렵이었던 1953년에 나온 오소백의 ‘신문기자가 되려면’이라는 책은 이강현을 “특히 법조 출입기자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취재도 정확하고 붓도 잘 듣는다. 매우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기자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장기영이 한국일보를 창간하자 한국일보로 옮겼다.
56년 4월에는 동아일보로 직장을 바꾸었는데 이강현은 여기서 사회부 기자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강현은 각지에서 자행되고 있는 3·15 부정선거를 파헤쳤다. 지프를 타고 전국을 누비던 이강현은 자동차 사고로 부상하는 일도 여러번 있었다. 56년 가을에는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작고한 후 그의 선거구였던 광주군에 보궐선거가 있었는데 이강현은 이 선거를 취재하러 지프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상처를 입은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채 자신의 결혼식을 치르기도 했었다.
이강현은 4·19를 전후하여 용기있는 민완기자로서의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60년 3월 동아일보의 순회 특파원이 되어 영호남과 충남일대를 돌며 자유당의 부정 선거운동 사례들을 취재하여 3월 6일자부터 ‘3·15 선거 카르테’라는 제목으로 선거 전날까지 매일 연재했다. 자유당 후보에 찍어야 한다는 유령편지 보내기, 공무원마다 번호표 10장씩 확보하는 운동, 3인조 9인조 조직, 민주당 선거위원의 협박에 의한 사퇴, 공개투표의 연습, 야당집회에 가는 자의 졸업취소, 낡은 사건 들처 협박하기, 탈당강요, 대리투표 및 무더기 투표 조작, 심지어 ‘이대통령’이라는 제목으로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작문을 쓰게 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정수법을 파헤쳤다. 그의 이러한 폭로기사는 자유당의 말로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마산에서 김주열(金朱烈) 군이 살해 당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강현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그곳의 사태를 충실히 보도하여 동아일보 지면을 빛내었다. 마산에서는 3부 합동수사위원회가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강현은 대검의 어떤 검사를 여관으로 불러 단독면담을 실시하여 마산에 집결한 여러 내외 기자들보다 훨씬 생생하고 핵심을 잡은 특종을 쓸 수 있었다. 김주열 사건은 4·19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강현은 4·19후 ‘민주혁명의 발자취’를 편술했다.
□ 초대 記協회장으로 기틀 마련
동아일보 지방부 차장이었던 64년 8월 17일 기자협회가 창립되면서 이강현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기자협회의 창립에 앞서 7월 28일 공화당 정부는 언론규제를 목적으로 한 언론윤리위원회법과 학원보호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언론윤리위원회법은 6·3사태 후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에 목적이 있었다.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발족하고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민정이양 직후인 이듬해 2월 제6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이른바 ‘3분(三粉) 폭리’의 진상을 폭로했고 3월들어 한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데모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어수선했다.
학생들이 격렬한 가두데모 끝에 일부 파출소를 점거하고 파괴하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오자 정부는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6·3사태였다. 박정희는 6·3사태가 “일부 정치인의 무궤도한 언동,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인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에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한 뒤에 언론규체 입법을 시도했다.
언론계는 이 법의 폐기를 위해 공동보조를 취했고, 각 부처 출입기자단은 이 법을 반대하여 ‘기자단 공동투쟁협의회’를 결성했다가 이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8월 17일 신문회관 3층 강당에서 역사적인 한국기자협회를 창립했다. 창립총회는 동아일보 사회부 차장 이강현을 초대 회장으로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이강현은 기자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기자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최선의 적임자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이강현을 선출한 것은 기자협회의 창립준비는 사실상 정치부 기자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기협 창립 후의 집행부는 정치부 이외의 기자가 맡도록 한다는 방침도 작용했지만 자유당 시절부터 사회부 기자로서 독재정권에 저항한 경력으로 보나 그의 원만한 대인관계와 포용력으로 보아 기협의 기틀을 다지는데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강현은 기협회장에 취임한 후 당면과제였던 악법철폐 투쟁을 벌이는 한편 기협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창립초기의 기협은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창립 당시의 선언문과 결의문이 밝힌 방침에 따라 언론인의 권익옹호와 자질향상, 국제교류를 위한 토대를 구축했고 언론계의 자체정화를 위해 사이비 기자를 일소한 캠페인을 벌였다. 초대 회장 이강현을 중심으로 시작한 사업들과 사이비 기자의 일소 캠페인은 기자협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장기사업으로 오늘날까지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이강현은 이러한 사업들과 함께 대내적으로는 경영주들에게 기자들의 급료인상을 요구하고 대외적으로는 언론자유의 수회를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11월 10일에는 기자협회보를 창간하여 언론자유의 수호와 일선 기자의 대변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데스크에 앉아 좀이 쑤신 생래의 일선기자
기협이 창립된지 20일 후인 9월 7일 언론계 대표들과 박대통령과의 유성회담에서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은 보류되었고 전국에 걸친 기협의 조직도 완료된 뒤인 이듬해 4월 1일 기협은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이강현을 제2대 회장에 다시 선출했다.
이강현은 동아일보의 출판부장을 거쳐 65년 7월에는 동아에서 퇴사하여 같은 해 9월에 창간된 중앙일보로 옮겼다.
( … )
그가 사망한 후 한국기자협회는 처음으로 기자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러주고 그의 공적을 기렸다.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 공원묘지, 그의 딸 정옥은 연세대학교 불문학과를 나와 KBS기자로 활약하고 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 신방과 교수, 정치적 사건다룬 사회부 기자,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후, 1992)
이 강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