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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11 기자(사회부), 방송뉴스실), 방송뉴스실차장, 사회부차장, 방송뉴스부차장, 지방부차장, 지방부장, 논설위원(현).”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 1930년 11월 5일 평북 선천군 신부면에서 출생 ▲ 85년 12월 3일 별세 ▲ 50년 서울 용산중학교(6년)졸업 ▲ 54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학과 졸업 ▲ 58년 제3회 동인문학상 수상 ▲ 59년 조선일보 문화부기자 ▲ 60년 동아일보 사회부기자 ▲ 63~68년 DBS뉴스부 차장 ▲ 69~70년 동아일보 지방부 차장 ▲ 71~72년 동아일보 지방부장 ▲ 73~85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작가기자 ‘오스트로'(별명), 경찰출입 자청

 

오상원은 58년 제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기성작가로서 언론계에 29세때 발을 들여놓는다.

첫발을 디딘 언론사는 59년 조선일보였으나 문화부기자생활에 싫증을 느껴 몇달뒤 동아일보 사회부로 옮긴다. 상상과 창작의 세계에서 사회현실에 뛰어들어 사회의 바닥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앞으로의 작가활동에 보탬이 되리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뜻하지 않게 필력이 뛰어난 작가출신을 얻는 셈이 됐다. 기자로 변신한 오상원은 경찰기자를 자청하여 나이 어린 젊은 기자와 취재경쟁을 벌이면서 말과 글에서 간접 경험했던 사회의 밑바닥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이때 오상원은 하루 24시간의 고된 경찰기자 생활로 수염깎을 틈이 없어 구레나룻을 기르게 되었는데 당시 세계의 스타 쿠바의 카스트로 수상 모습을 닳아 `오스트로`라는 별명을 얻어 명물 경찰기자로 이름을 떨친다. `오스트로`라는 별명의 명명자는 당시 동아의 사회부장 권오철(權五哲)이다.

당시 각 신문사회면은 6 · 25전쟁의 궁색한 경영에서 점차 벗어나 기지개를 편 휴전후 지면 늘리기 경쟁에 돌입하여 4페이지의 작은 지면에서도 읽을거리 내리다지 게재경쟁 시대를 맞게 된다. 따라서 동아에서 작가출신 오상원의 역할이 눈부시게 지면을 장식하게 된다. 그중의 하나, 세계를 무전여행한 김찬삼(金燦三)의 장기기획물 시리즈가 읽을거리로 장안의 화제였는데 엄밀히 말해 이 방랑기는 오상원의 필력이 가미된 두사람의, `공동작품`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상원은 이미 53년(23세) 서울대 재학시절 극협(劇協)의 장편회곡 모집에 `녹스는 파편`이 당선되어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55년(25세) 단편 ‘猶豫’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고 이어 ‘龜裂’ ‘죽음에의 훈련’등의 단편을 발표했고 26세였던 56년 그의 대표적인 단편 ‘謀反’을 비롯 ‘죽어살이”亂影’`證人`, 희곡 ‘殘影’ 등을 발표했다. 57년(27세)엔 처음으로 장편 ‘白紙의 기록’이 나온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유예’는 우리나라 종래의 소설에`불신`을 제기한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는 행동적 휴머니즘이 일관해 흐르고 있었다.

또한 구성에 있어서도 극적방법의 도입이 신선했으며 묘사에 있어서의 박진감, 그리고 삶과 죽음이 찰나적으로 엇갈리는 존재의 극한적 묘사가 문단의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의 문장의 특징인 속도감은 그가 쓴 글을 읽기 시작하면 단숨에 다 읽어 내려가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러나 작가 오상원의 단점으로서는 그의 소설이 강한 인상을 주는만큼 소설의 이야기가 단순하게 떨어진다는 점 다시말해 설화성(說話性)이 약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딜레마의 돌파를 통한 차원높은 작품의 소재를 구해 그는 사회현실에 뛰어드는 신문기자 사회부기자를 자원했을지도 모른다.

신문기자 오상원의 대표적인 글은 70년(동아 지방부차장 당시)동아일보 1면에 29회에 걸쳐 장기연재된 `땀흘리는 한국인, 遠洋漁夫’를 들 수 있다. ‘고려원양’소속 광명81호(선장 趙南直)에 2개월동안 동승해 참치잡이 원양어선을 탄 바닷사나이들의 피눈물나는 선상기록이었다.

이 시리즈의 첫머리에서 오상원기자는 정치 지도력의 지향할바를 다음과 같이 울부짖고 있다.

“진정한 국가발전은 전시효과적인 건설이 아니라 온 국민이 땀흘려 일하는데 있다. 그렇다면 정치의 진정한 지도력은 그러한 국민의 땀방울을 억울하고 슬프지 않도록 결정(結晶)시키는데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서문으로 시작된 시리즈는 원양어선에 탄 근로자의 선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리얼한 문학적 묘사로 그려져 내려간다. 당시 한국 큰 외화벌이의 근원이었으나 근로조건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남태평양에 출어하면 최소 3개월이나 가족을 떠난 선상생활이며 50톤급 선박으로 파도와 폭염과 싸우는데 월수입은 3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사들은 국민들이 처음 알게된 노사부조리에 대한 고발이기도 했다.

인기 절정의 ‘땀흘리는 한국인-원양어부` 11회분(70.4.27)은 그가 탄 제81광명호에서 일어난 기관원 조봉천의 병사와 수장의 집행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흐린날씨에 비마저 뿌린다. 유해위에 태극기가 덮여졌다. 선장의 애끊는 조사와 함께 마지막 술잔이 바쳐졌다. 묵념. 관에서 꺼낸 유해를 길다란 철물에 꽁꽁 붙들어 매고 그밑에 무거운 철물을 달았다. 유해가 물위에 뜨면 안되는 것이다. 왼쪽현문(舷門)이 열렸다. 조업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 동료선원의 명복을 길이 비는 선원들의 손에 의해 유해는 바다 속깊이 물거품을 남기며 사라져갔다. 관에 입던 옷을 넣어 불을 지른다음 바다에 띄웠다. 훨훨 불길이 타오르며 파도에 떠가는 관의 처량한 모습. 기적은 선원의 가슴을 에이듯 길게 구슬프게 울리고 배는 유해가 사라져간 바다 주위를 세번 서서히 맴돌았다. 선원들이 나직이 고인을 위해 불러주는 `고향의 봄`노래는 어느덧 눈물로 번져가고 있다. 고 조봉천. 당년 42세, 제주출신, 노모와 처,슬하에 4남매”

그가 동승한 광명81호 선원 그리고 이 기사가 인연이 되어 알게된 수산대 출신 선장들과 오상원과의 교류는 동승(同乘)취재 이후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 원양어부 水葬광경 생생히 그려

 

오상원의 소년시절을 그의 어릴적 친구들은 여성적으로 얌전한 소년으로 기억한다. 그는 용산중학(6년제)시절은 고학생의 모임인 후생부장시절 엄한 선배로 기억한다. ‘용산’시절 축구선수이기도 했다. 대학시절만해도 수줍은듯 문약했던 문학청년 오상원의 성격은 기자생활을 하면서 돌변해 괄괄해지며 두주불사의 술꾼이 되어 크게 변모한다. 그러나 비록 거치른 입은 무해무익한 `드라이 조크`일뿐 독이 없었고 사람을 대하는데는 속물을 철저히 미워하여 차별성을 유지했다.

동료문학인의 회고담이다. “그는 작가 서기원, 이호철의 동연배이며 한국문학사의 근간이 될 동세대인이다. 이 동연배들은 술자리에 자주 어울린다. 술좌석에선 서기원을 제외하곤 딴 사람이 말할 여유를 주지 않고 지껄여대는, 마치 `청석골`패거리들의 술판이 되기 일쑤다. 이런 좌석 에서도 구레나룻이고 수염을 기르기로 유명한 오상원은 미소를 띠고 어디까지가 정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모르는 소리를 혼자 도맡아 떠들었다. 좌우간 오상원과 술마시면 유쾌하면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소설가 박연희, 작가 스케치, 오상원 PP452에서).

오상원은 별세할때까지 동아에서 일한다. DBS개국 얼마후(63년) 뉴스부차장에 자리를 옮겨 방송뉴스로서는 `서울이 청취권인` DBS뉴스를 라디오 청취율 1위로 끌어 올린다. 그의 DBS데스크시절은 3선개헌반대 · 한일협정반대 학생시위 등으로 격동하던 10년간이었다. 60년대 후반부터 DBS는 `라디오는 동아(DBS)`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고 있었다. 굳이 ‘라디오는 동아’라는 슬로건을 새삼스럽게 내건 데는 라디오 매체만 가지고 있는 DBS의 한계성을 자인,그 특성을 강조하는 자위적 의도와 함께 TV시대의 라디오 기능을 보강, 극대화 함으로써 라디오 방송, 라디오뉴스의 존재가치를 제고하려는 적극적의사, 그리고 집념때문이었다. 이 DBS뉴스데스크에서도 오상원은 명데스크로 후배의 존경을 받는다.

70년의 우리나라 정치상황은 국민이 바라고 우리 방송계가 기대한 대로 안정과 번영의 방향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정권의 정통성과 정부불신때문에 격동과 사회적 혼란, 또한 언론에 대한 군사정부의 규제강화로 시종했다. 세계적으로는 미국의 아폴로우주선이 성공적으로 월면(月面)활동을 벌이는 등 우주공간에서의 세기의 쇼를 벌이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71년 10월 서울시일원에 위수령이 선포되고 12월 박정회대통령의 비상사태선언, 12월 24일 ‘국가보위법’의 국회변칙통과, 72년 7월 남북한 공동성명발표, 8월 3일의 대통령 긴급재정명령발동,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과 함께 유신(維新)체제 돌입등 숨가쁘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 밀려난 대통령의 弔花

 

오상원은 이런 정치적 격변으로 숨막히게 된 언론상황에서 동아방송의 간부로서 자칫 사기를 잃기 쉬운 후배를 격려하며 외압에 굴하지 않는 반역아의 몫을 하게 된다. 암흑의 기간동안 오상원은 곡필아세(曲筆阿世)하는 자와 적당히 타협하며 입신출세만 노리는 속물들을 멀리한다.

그는 싫고 좋은 것을 분명히 나타내는 강직한 성품을 발휘한다. 그리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만 차별적으로 교제했는데 오상원의 친교는 김중배(한겨레신문 사장)등 한두사람에 한정된다. 마음을 닫고 사는 외롭고 어두운 나날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이 빛을 잃은 70년대 후반 오상원의 창작활동은 다시 활발해졌다. 단편 `下午`(한국문학·77)를 비롯해 ‘잃어버렸던 이야기'(世代 77) ·`美軍병사와 전쟁’ (文學思想·84) ‘山'(小說文學·81)등.

78년 그는 `오상원萬話’를 발행한다. 이것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날카로운 사회, 정치비평이며 문명비평이기도 했다. 작가로서의 마지막 오상원의 작품은 ‘겹친 過去'(北韓誌 · 85)였는데 고향을 이북에 두고 온 실향민인 그가 마지막 작품을 북한지에 남긴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신장결석증수술로 쇠퇴해가는 건강이 작용한 귀소(歸巢)본능이 아닐까?

그는 85년 12월 3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미발표작품으로는 ‘文學30年`이 있다. 오상원의 빈소는 그가 숨을 거둔 서울대학병원 영안실.그의 유해가 안치된 영안실은 박정희와 함께 권세와 영화를 함께누렸던 박종규(朴鍾圭)경호실장과 벽하나를 두고 이웃하고 있었다. 두 빈소에는 전두환대통령의 조화가 각각 보내졌다.

오상원 빈소에서는 당시 전두환 대퉁령이 보낸 조화의 위치를 놓고 문상온 동료, 후배들이 술렁거렸다. 결국 동아일보 위패바로 옆에 갖다 놓은 전두환의 조화는 위패 곁으로 밀려났다. 아마도 대통령의 조화가 뒷전으로 밀린것은 오상원 빈소가 전무후무한 일일것이다.

작가 오상원과 신문기자 오상원에 대한 재조명의 날이 필시 올것이다. 기인같기도 했던 그의 언동에 대한 의견도 물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오상원은 본시 착한 그리고 정직한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위선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자신 위악자(僞惡者)행세를 즐겼을 뿐이다.

그의 언론행적이나 작품에는 그의 특유한 휴머니즘이 일관돼 있었다. 그가 문단에 데뷔한 ‘유예’를 비롯해 그의 소설 대부분에서 독자는 극한상황에 놓여있는 인간의 실체를 보게 되며 상황과 인간의 갈등이 치열하고 첨예할수록 인간에 대한 오상원의 따뜻한 사랑과 옹호를 읽었다.

또한 ‘모반’이나 ‘유예’ ‘백지의 기록’등이 그 시대를 증언하고있고 해방후의 혼미와 전쟁의 상처속에서 몸부림치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언론인 오상원의 별세소식은 85년 12월 4일 KBS 9시뉴스 앵커 최동호(崔東鎬)에 의해 전파를 타고 전국에 나갔는데 그 원고는 많은 사람의 흉금을 울렸다.

“고 오상원선배는 휴머니즘으로 일관된 그 많은 기사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산으로는 오래된 17평짜리 아파트뿐이었습니다. 향년 55세였습니다”

오상원은 청빈했으며 군사통치 아래 민주언론에 참여한 부하직원의 사표를 받으라는 상부지시에 ”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왜 그만두게 하는가”고 그가 도리어 자신이 사표를 냈던 일이 있다.”

(이정석 대한언론인회 이사, ‘오스트로(별명), 경찰출입 자청’,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후,1992)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생존하는 언론계 선배, 동료,후배들이 남긴 일화를 전함으로써 1960~1980년대를 빛냈던 언론인들이 남긴 뒷얘기를 기록하고 기리는 뜻에서 실명을 쓰려고 한다.

턱수염을 싹 밀고

역시 술과 관련된 일화들은 당시 기자들이 친밀하게 부르던 애칭 썩배 (당시 김중배 차장. 술을 많이 해 위장이 썩었을 것이라며 사회부에서 붙여준 별명)와 오스트로(오상원 차장. 동인문학상의 `모반`작가. 카스트로처럼 수염이 많아 붙여진 별명). 그리고 이정석 차장(현 대한언론인회 회장) 트리오에 얽힌 얘기가 많다. 오상원 차장과 이정석 차장은 신의주 초등학교 동문으로 오스트로가 1년 위였으나 말을 놓는 사이였고, 특히 사회부와 논설위원실에 함께 있던 오스트로와 썩배가 함께 잘 어울렸다.

이정석씨가 동아방송 뉴스부장으로 있다가 KBS TV 초대 보도국장이 되었을때 (DBS는 KBS에 강제합병) 하루는 비번 날인 대낮에 오스트로와 썩배 두 분이 기분 좋게 한잔하고 “야, 정석이한테 쳐들어가자” 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오스트로가 들어가며 여비서에게 한 말은 생략하고, 오스트로가 이정석 국장을 책상 앞 카펫에 유도식으로 쓰러뜨리곤 배에 올라타 “술 살 거야, 안 살 거야” 소리치며 껄껄댔다. “알았어. 알았어” 하고 저항이 있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이정석 국장은 혹시 또 오스트로와 썩배가 쳐들어올지 몰라 커다란 백지에 오스트로의 화상을 그려 출입문 경비실에 내려다 주고 당부했다. 물론 화상엔 오스트로의 카스트로 같은 턱수염을 잔뜩 그려놓았다. “이런 사람이 나를 찾아오면 절대 출입시키지 말라”고.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오스트로는 이발소에서 턱수염을 싹 밀고 전혀 딴모습이 되어 썩배와 다시 쳐들어왔고, 경비실을 무사통과했던 것이다. 이정석 국장의 낭패가 이만저만 아니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느 날 논설실에 함께 있던 썩배와 오스트로는 같이 한잔하고 기분이 그렇지 않았다. 썩배가 주필로 모신 천관우 선생댁에 인사 가자는 말에 두 분은 불광동으로 향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천 선생댁 현관에 들어선 썩배가 이색적인 행동을 보였다. 손님을 맞으러 나왔던 천 선생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썩배으 이색적 행동은 요새 말로 하면 천 선생을 뵈니 기분이 좋다는 일종의 `골인 세러머니`같은 것이었다. 여하튼 천 선생과 두 분은 방으로 옮겨가 취토록 마셨다고 한다.

60년대 후반 당시 사회부원들, 특히 명 사회부장으로 유명했던 이혜복부장(전 대한언론인회 회장) 지휘하에 있던 사건기자팀은 신용순, 김치석,김중배,고수균,한우석 선배들을 곧잘 입건해 많이 마셨다. 밤 12시가 넘으면 대개 사건차(지프)를 타고 집에 갔는데, 그 당시 수유리 벌판에 살던 썩배는 함께 간 후배들을 곧잘 집으로 데리고 가 마지막 한잔을 논했다. 그 논밭 벌판에 내려서자마자 썩배는 `안행자,안행자`하고 큰 소리로 부인을 불러댔는데, 부인께선 그 밤중에라도 일어나 술상을 보아오고 꿀물을 타 왔으며, 술에 떨어진 젊은 기자들의 잠자리까지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사실 너는 내 아들이다”

80년대 초, 오스트로가 마침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다. 특파원으로 있던 우리 집에서 머물렀는데 그날 저녁 이정석(당시 KBS 특파원), 이문희(한국일보 특파원),장두성(중앙일보 특파원)씨 등과 함께 오전 1시까지 마셨다. 이튿날 아침 일찍 옆방에 가보니 오스트로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아래층 거실로 내려가니 벌써 몸소 냉장고를 열어 캔맥주를 꺼내놓고 해장술을 마시고 있었다.

다음날 저녁 오스트로는 죽마고우인 이정석 특파원댁으로 옮겼다. 사단은 여기서 왔다. 그 이튿날 아침, 멕시코로 떠나는 오스트로를 덜레스 공항으로 환송하기 위해 이 특파원댁에 달려가니 오스트로와 함께 이 특파원의 어린 큰아들이 륙색을 메고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전날 밤 아들 방에서 함께 잔 오스트로가 이 특파원 아들에게 “사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어렸을 때 형편이 안되어 잘 길러달라고 보낸 것이다.”라고 설득한 것이 그만 큰아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물론 장난이었다. 진짜 아버지를 따라가겠다는 큰아들에게 오스트로가 장난임을 고백하고, 우리도 진실을 설명하며 떼어놓느라 한참이나 애를 먹었다.”

(문명호, 묻혀두기 아까운 얘기들, 관훈저널 가을호 2004년 가을호 통권 92호, 98,99쪽)

 

 

오  상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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