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2 편집국장, 54.10 퇴사.〔경향신문 편집국장〕”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14년 3월 24일 충남 稷山에서 출생 ▲83년 별세 ▲35년 普成專門 法科졸업 ▲35년 4월 일본 聯合通信 기자 ▲38년 4월 每日新報 기자 ▲45년 11월 서울신문 기자 ▲ 中央日報 편집국 차장 ▲ 東亞日報 편집부장 겸 국차장 ▲49년 2월 京鄕新聞 편집부국장 ▲53년 2월 東亞日報 편집국장 ▲54년 11월~55년 9월 京鄕新聞 편집국장 ▲65년 新聞倫理委員會 위원
□ 과묵한 ‘웃음의 천재’
우리 언론계의 명편집자이자 큰 별 민재정(閔載禎). 오늘의 젊은 기자들은 그의 이름석자를 대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국장급 이상의 언론인들은 그를 모른다고 말하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일정때부터 오랜세월 여러신문을 거쳤지만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대표적인 직함으로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다.
본인 자신도 그 두 직함만을 애착심을 가지고 항상 대외적으로 내세웠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 … )
□ 외압이 통하지 않는 명편집자
민재정의 고향은 충남 직산이다. 천석꾼의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35년 보성전문을 졸업했다. 학교를 나오자마자 일본 연합통신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으며 매일신보 편집기자로 근무하다가 8.15광복을 맞았다.
일인들이 경영하던 매일신보는 광복과 더불어 서울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었고 자동적으로 민재정은 서울신문 편집부기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빼어난 편집솜씨가 인정되어 곧이어 중앙일보 편집국 차장으로 발탁되더니 얼마 안가서 동아일보 편집부장 겸 국차장으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는 장안에서 명편집자로 명성을 날렸다. 한번 펜대를 잡으면 어디서 그런 멋들어진 명제목이 순식간에 나오는지 칼날같고 또는 가슴을 때르는 명 제목으로 지면을 장식하여 동료들은 물론 독자들의 혀를 차게 했다.
쏜살같이 편집을 끝내고 공장에 들어서면 단 몇분만에 판을 짜고 손을 털고나면 더도 덜도 남아나는 기사가 한꼭지도 안남는다니 가히 명편집자라 할만했다.
그러나 정부수립 얼마후인 48년 5월21일자 동아일보는 2면 톱에 게재된 이승만대통령과 동 부인 및 김구(金九)선생이 모란꽃을 배경으로 나란히 섯 찍은 사진(실은 기자의 미확인 기사를 토대로 몽타즈한 것)이 문제가 되어 주필 겸 편집국장 고재욱은 편집고문으로 물러앉고 김삼규(金三奎)가 그 자리에 임명되고 편집부국장 민재정은 취재부장, 김홍수(金泓洙)는 해임, 동아일보를 떠났다.
‘탐스러워라 牡丹꽃 李大統領夫妻와 金九氏 夕陽의 德壽古宮에서 團欒’이라는 멋들어진 사진 설명 제목이 그대로 현실이었더라면 건국이후의 정국의 전개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두거물이 그날 덕수궁을 찾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서로 만나 담소할 처지도 아니었다. 취재기자의 지나친 흥분, 그리고 그것을 냉정하게 걸러내서 지면 제작에 활용하지 못한 결과로 그후 한달남짓 후에 김구선생이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졌으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역사의 흐름이라 실로 예단을 불허한다고 할까?
어떻든 거의 반년이 지난 49년 2월 민재정은 경향신문 부국장으로 다시 언론계로 돌아와 그곳에서 6.25를 겪게 된다.
국군이 북진 당시에는 평양(平壤)까지 쫓아올라가 전선판(前線版)을 현지에서 발간 하는 등 능동적인 역할을 했고 1.4후퇴때는 역시 대구(大邱)와 부산(釜山)을 오르내리며 ‘피난지신문’을 만드는데 지휘봉을 잡았었다. 당시 모든 언론인이 그랬듯이 미군복에 워커를 신고 신문을 만들었는데 타블로이드신문을 제작하고 나면 의레 대폿집을 내집인양 드나들며 고달픈 피난살이를 달래기도 했다.
피난지에서 민국장은 두주불사, 한번 취하면 엄동에도 웃옷을 활활 벗어던지고 붉고 쪽쪽한 육체미를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 건강한 체구였지만 그렇다고 남을 해치거나 힘으로 누르려는 만용은 한번도 부린적이 없는 건장한 신사였다.
그러다가 정보가 환도하던 53년 2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옮겼고, 54년 11월 다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그러고보면 민국장은 55년 9월 경향신문을 물러날 때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야당지에서만 몸담아 온 셈이다.
편집국장시절의 에피소드도 적지 않았다. 경찰이나 기타 기관 정치인이 기자나 편집국간부에게 기사를 빼달라고 부탁해도 통하지 않으니까 줄을 타고 신문경영진에 부탁내지 압력을 가해오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럴때면 민국장은 OK대장만내면 슬며시 자리를 떠 누구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한다. 윤전기는 돌기시작하고 외압에 못이겨 경영진에서 기사를 빼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편집국장 지시가 아니면 아무도 윤전기를 못세우는 당시의 불문율 앞에서는 별도리 없이 신문은 그대로 배포되게 마련이다.
그렇게도 언론에 대한 굳은 소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부하들에게는 언제나 관대하고 친근하게 지냈다.
( … )
그후 65년 신문윤리위원으로 몸담았다가 그만둔 후로는 종적을 감추다 시피하여 행방이 묘연하더니 끝내 83년 김포(金浦)의 어느 여관에서 운명했다는 것이다. 이때 70세였다.
당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아마도 조문을 간 후배는 단 한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다정하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갖고 있던 민국장의 생전에 비하면 너무나 쓸쓸한 마지막 길이었다.”
(유승택 전 신아일보 편집국장, 과묵한 ‘웃음의 천재’,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후, 1992)
민 재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