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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강점기 마지막 사장 백관수(白寬洙)

Posted by 신이 On 6월 - 7 - 2017

근촌 백관수는 1937년 6월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1889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소년시절부터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와 친분이 있었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와 함께 한국 근대사에 큰 맥을 이룬 근촌(芹村) 백관수는 1889년(고종 26) 고창군 성내면 생근리에서 태어났다. 선조때의 명신이자 이름난 선비였던 백인걸(白仁傑)의 10대손으로 아버지는 도진(道鎭),어머니는 고씨(高氏)였다.

그는 5살부터 호남의 거유인 간재 전우(田愚) 문하에서 한문을 익혔다. 하지만 당시는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민비 시해사건이 터지는등 국내외 정세가 뒤숭숭하던 때였다. 그가 15살되던 해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에는 망국의 을사조약이 체결 되었다. 이 무렵 백관수는 평생의 동지 김성수와 함께 신학문의 스승인 한승이(韓承履)를 만나게 되어 2년에 걸쳐 군산 금호학교에서 물리 수학 영어 등을 배웠다.
이에 앞서 그는 김성수를 통해 송진우를 만나게 된다. 송진우는 김성수를 집으로 찾아갔다 김성수가 백관수와 더불어 변산 내소사 청연암으로 공부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같이 입산했던 것이다. 송진우와 김성수는 담양의 창평학숙에서 만나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때 의기가 투합, 입지(立志)를 세운 세소년은 나중에 까지 서로 협력하며 같은 길을 걷게 된다.
금호학교를 졸업한뒤 김성수와 송진우는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나고 백관수는 부모의 뜻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 경성법률전수학교에 들어갔다. 1915년 학교를 마치고 바로 YMCA에 들어간 백관수는 민족지도자인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으로 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애국계몽운동과 사회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적극적인 YMCA 활동 덕분에 백관수는 1917년 일본에 유학할 기회를 가졌다. 비록 28살의 만학이긴 하나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明治) 대학 법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인 학우회에 가입, 주도적인 활동을 벌였다.
때마침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자 국내외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독립운동이 힘을 얻게 되었다. 장덕수가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고 이승만의 밀사가 서울을 다녀 가는등 자못 움직임이 활기를 띠었다.
동경에 유학중이던 백관수도 송계백을 송진우에게 보내 독립선언서 내용을 전달했다. 이 선언서는 백관수가 기초하고 춘원 이광수가 손을 본 명문으로 꼽힌다. 동경에서는 이 선언서를 인쇄할 곳이 없으니 활자만 구해 보내주면 국내와 시기를 맞춰 동시에 거사하자는 뜻에서 였다. 그러나 송계백이 상처를 입으면서 까지 짊어지고 온 활자는 일경의 감시 때문에 인쇄시설을 확보하지 못해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독립선언서는 프린트에 의존해 찍어야 했다. 유학생 10여명이 백관수의 하숙집에 모여 1주일 동안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 1만부를 찍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2·8 선언이 탄생한 것이다.
1920년 3월 출옥한 백관수는 중단했던 학업을 1921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후 기독교청년회의 일을 보는 한편 언론계에 투신, 1924년 조선일보사 취체역(取締役)을 맡았으며 1926년 12월부터는 편집인과 영업국장을 겸임했다.”  (전북일보 『20C 전북50인』)

 

인촌 김성수나 고하 송진우와의 오랜 교유관계로 보아 그가 동아일보에 먼저 발을 들여놓음직하지만 백관수가 일본에서 옥고를 치르느라 늦게 귀국하는 바람에 동아일보 창간계획에 동참하지 못해 1924년 혁신된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백관수는 1928년 사설 ‘보석(保釋)지연의 희생’이 문제가 되어 주필 안재홍과 함께 구속되고 이로 인해 조선일보는 1년4개월간 신문발행이 중단됐다. 백관수는 1932년에는 홍문사(弘文社)를 설립, 월간지 동방평론을 발간했으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3년만에 폐간당했다. 백관수는 홍문사를 근거지로 하여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등은 물론 당시의 각계 인사들과 교유했다. 백관수의 시작(詩作)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한강에서 유명인사가 회유(會遊)하여 한시 지은 시축(詩軸)을 펴놓고 시화를 평하는데 그 중에는 고하 송진우 선생, 추강 김용무 선생, 근촌 백관수 선생, 가인 김병로 선생, 위당 정인보 선생 등의 시가 쓰여 있었는데, 나도 옆에서 보고 듣다가 특히 고하 선생의 연구(聯句)중에서 一字直(염법의 높은 字)이라야 할 것을 一字平(낮은 字)으로 된 것을 발견하고 하기이성(下氣怡聲)으로 진언하니, 송 선생이 대경하여 나에게 소년이 어떻게 그 자의 평음을 아느냐고 물음에, 나는 고시 중에 낮게 쓰인 시구를 외어 응답하니 고하 선생이 다시 나에게 묻기를「군은 이 시축(詩軸)중에 어느 분의 시가 우수하다고 보는가」하므로 연하자인 나는「감히 말 못하겠습니다」하니 다시 말씀이 시는 그렇지 않아서 재하자(在下者)로서도 존장(尊丈)의 시를 평할 수 있다고 하시므로 나의 우견대로「근촌선생 작(作)이 좋다고 봅니다」언급하니 선생이 나의 말을 옳다고 말씀한 일이 있었다… 』(김관호, 동아일보 사내보 동우 21호, 65.6.30일자)

 

그는 동아일보에 들어온 뒤, 그 전 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정간 당했던 동아일보의 복간에 힘썼다.

 

 “동아일보의 제7대 사장에 취임한 것은 1937년 5월 31일이었다. 그가 동아일보의 임시주주총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된 것은 인촌과의 두터운 교분과 인간적인 의리도 없지 않았겠으나 그보다는 그의 탁월한 식견과 안목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장 겸 주필, 편집국장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동아일보는 1936년 8월1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기록영화 소개기사 중 사진 속에 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실었던 것이 말썽이 되어 이길용 이상범 현진건 등 11명이 문초를 받는 한편 송진우 사장과 설의식 편집국장이 물러나고 동시에 동아일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근촌이 사장에 취임한 그들 뒤에는 정간이 해제되고 다시 발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소위 조선총독부는『사(社)의 대표 즉 사장이 발행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발행인 겸 편집인에 근촌을 등록하게 하였다. 이제까지는 발행인 편집인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대표간부급을 피하고 그 아래선에서 등록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당국이 발행인 명의를 사(社)대표로 하라고 함으로써 이후 모든 책임을 사대표에게 묻겠다는 배포를 보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같은 해인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듬해에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지원병제를 실시하고 때를 같이해서 한글교육의 폐지를 단행했으며 다시 1939년 9월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공격이 벌어지면서 2차대전의 막이 오르자 창씨개명 등을 요청하는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언론인 강영수, 인물론-근촌 백관수, 신문과방송 61호, 1975 12.)

 

백관수는 발행인과 편집인에다 편집국장까지 맡아 일제의 집요한 언론탄압에 맞서야 했다. 이같은 탄압에 굴하지 않자 일제는 동아일보를 강제로 폐간했다. 그는 이에 저항하여 끝내 폐간계를 날인하지 않아 1개월간 구금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 끝끝내 거부한「자진폐간」

 

  근촌은 우선 사내를 정비했다. 지배인 겸 업무국장 임정엽(林正燁)을 상무취체역으로 끌어 올리고 편집국장대리 고재욱(高在旭)을 편집국장에 앉히는 한편 영업국장대리 국태일(鞠泰一)을 지배인 겸 영업국장으로 올렸다. 험난한 기국에 대처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민족이 소위「황민화」를 표방한 일제가 우선 눈을 돌린 것이 바로 민족수호의 마지막 보루처럼 돼있었던 언론계였다.

  그리하여 39년 12월 상순부터 총독부는 동아.조선 두 민족지의 자진폐간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전해부터 동아일보 제호의 무궁화를 삭제하도록 강요해온 총독부는 일반가정뜰안에 무궁화를 심는 것조차 단속하는 신경과민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마침내 미하시(三橋)경무국장이 근촌과 고하 두사람을 초대해놓고 동아일보의 자진폐간을 종용한다. 너무나 어이 없어서 둘은 즉석에서 거부했다. 그 후에도 별의별 수단을 총동원, 위협도 하고 달래기도 했으나 반년을 두고 일관해서 거부했다. 그러자 그들은 최후 수단으로 엉뚱한 경리부정을 구실 삼아 임정엽상무취체역과 국태일 지배인 겸 영업국장을 전격적으로 구속했다. 이어서 사건의 허구적인 확대를 노린 총독부는 공금유용과 탈세 등을 새로운 구실로 내세워 사장 근촌을 협박했다. 이는 자진폐간만 하면 모든 일을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촌의 태도는 시종일관 의연했다. 총독부는 다시 인촌에게 보성전문학교가 동아일보에서 빌려간 5만원의 경위를 추궁, 그 차용행위에 간부의 결의가 없었다는 점을 트집잡아 배임, 횡령이라고 협박한다. 그리고 급기야 7월 중순경 형사2명이 사장실로 찾아가 근촌의 임의동행을 요구했다. 그는 일본의 발악이 올데까지 왔다고 보고 형사들의 임의동행에 응했다. 신문사를 떠나는 길에 편집국에 들른 그는 “내 손으로는 죽는한이 있더라도 동아일보 폐간계에 서명날인하지는 않을 것이니 사원 여러분은 계속 신문발행에 일치협력해 주기 바란다”는 요지의 고별사를 남기고 태연히 걸어 나갔다.

  근촌은 종로서에 구속된 뒤에도 끝끝내 폐간계에 서명날인하기를 거부했다. 이렇게 되고보니 막다른 골목에 몰려든 총독부측이 오히려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동아일보의 발행인 겸 편집인 명의를 사장 근촌으로부터 상무취체역인 임정엽에게로 변경토록 한뒤 임정엽 명의로 합법을 가장해서 폐간계를 억지로 내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침내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 함께 40년 8월 10일자, 지령 제6819로써 강제폐간, 파란 많던 2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청천의 날벼락 같은 강제폐간이 끝내 현실로 나타나자 동아일보의 전사원들은 윤전기며 발송대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사장 근촌은 자진폐간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무더위 속에 한달동안을 묶여 있었다. 임정엽 상무취체역이 폐간계를 낸 뒤에 풀려나온 그는“내가 사장인데 대체 어느 누가 폐간계를 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를 다시 구금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근촌의 담대함과 용기로도 당시의 시국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 한민당 산파역때도 언론과는 끈끈한 관계…

 

  강제폐간을 당한 동아일보는 12일 하오 1시 본사 3층 강당에서 상엄한 감시 속에 해산식을 강행했다. 근촌은 강단에 오르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기에 바빠 말문조차 열지 못했다. 그 자리에 모였던 사원들 역시 모두가 흐느껴 울었다. 한동안의 울음 바다가 가라앉은 뒤 간신히 입을 연 근촌은 “우리는 사중구생(死中救生) 합시다. 죽음속에서 생을 건집시다. 그리고 우리가 또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을 믿읍시다!”라는 간절한 인사로 해산식을 끝냈다.”(강영수 전 대한일보 전무 겸 주필,월남의 추천으로 <조선>에 입사, 한국언론인물사화 1권, 1992, 333-341쪽)

 

백관수는 광복 후 1949년 7월 동아일보 취체역이 되었고, 정계에 투신해 한국민주당 총무, 민주의원 의원, 입법의원 의원을 거쳐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6·25 때 납북됐다. 그는 평양시 신미리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묘지에 안장돼 있는데 묘비에는 ‘백관수 : 동아일보 사장/1951년 10월 25일 사망’이라고 씌여있다. 

 

 

 백 관 수

 

  1919년 2.8선언 주역들. 가운데 줄 왼쪽으로 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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