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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대표주주 김성수(金性洙)(6)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6

사후死後 생각

 

“잊을 수 없는 것은 강직한 인간, 겸허한 인간인 인촌으로 내가 수십 년 간 수많은 사람과 정을 나누고, 뜻을 같이하고, 경륜을 도모함에 있어 그 첫째요, 또 마지막으로 손꼽을 수밖에 없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원만하고 관후寬厚한 태도로 누구나 마음 놓고 심회心懷를 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한다. 이제는 한 토막 고초와 슬픔의 역사로만 상기되는 지난날의 항일운동에 있어 많은 지사들이 무한한 고생을 겪으며, 해내海內 해외海外에서 투쟁할 때, 그는 말없이 그들의 여비를 걱정해 주고, 두툼한 봉투에 감사와 애정을 담아 주었던 것이다. 혹 어떤 이는 그가 재력이 있으니까 그쯤이야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할지 모르겠으나, 그때 우리나라에 그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이 인촌 선생 외에 없지 않았을 것이요, 또 그것은 결코 재력만으로는 행할 수 없는 일임을 말해 두고 싶다. 꾸준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행行하고, 행行하면 전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김병로金炳魯 초대 대법원장)

 

“잊을 수 없는 것은 강직한 인간, 겸허한 인간인 인촌으로 내가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과 정을 나누고, 뜻을 같이하고, 경륜을 도모함에 있어 그 첫째요, 또 마지막으로 손꼽을 수밖에 없는 단 한 사람이었다.
또 하나 잊혀 지지 않는 것은 수상手上, 수하手下, 동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절대로 각박한 말을 하지 않는 점이다. 그는 언제나 원만하고 관후寬厚한 태도로 누구나 마음 놓고 심회를 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한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머리가 숙여지는 일은 어떤 사업과 경륜도 애국애족의 정신을 떠나서 한 것이 없고, 그의 동지에 대한 뒷받침도 공로를 의도함이 아니요, 다만 그 동지애의 자연발로이었던 점이다. 이제는 한 토막 고초와 슬픔의 역사로만 상기되는 지난날의 항일운동에 있어 많은 지사들이 무한한 고생을 겪으며, 해내海內 해외에서 투쟁할 때, 그는 말없이 그들의 여비를 걱정해 주고, 두툼한 봉투에 감사와 애정을 담아 주었던 것이다. 혹 어떤 이는 그가 재력이 있으니까 그쯤이야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할지 모르겠으나, 그때 우리나라에 그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이 인촌 선생 외에 없지 않았을 것이요, 또 그것은 결코 재력만으로는 행할 수 없는 일임을 말해 두고 싶다. 그리고, 나는 또 그의 부지런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꾸준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행行하고, 행行하면 전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사업에 있어서나 무슨 특이한 재주를 꾀하려 하지 않고 다만 평범, 순리의 길을 부지런히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제 인촌 선생은 많은 일을 우리 앞에 이루었고 또 많은 일을 우리에게 남기고 가셨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밝은 별이 되리라 믿는다.”
(서상일徐相日 독립운동가, 1·5대 국회의원)

 

“마음이 결백하고, 언행이 올곧고 활달하여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고, 한평생 소신을 굽히지 않고 더럽히지 않았으며, 지내온 그대와 더불어 나라 일을 같이하며,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면서 앞날을 기약했는데 이제 그대가 믿기지 않게도 가고 마니 진실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도다.”
(신익희申翼熙 전 민의원 의장, 제3대 대선 민주당 후보)

 

“선생은 부이불치富而不侈라 하면서도 사치하지 않고, 귀이불교貴而不驕라 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빈이불굴貧而不屈이라 하면서도 굴하지 않는 성품과 도야된 인격의 수양을 가진 분으로서, 부유한 환경 속에서 안일을 택하지 않고 자기의 부를 사회의 공공복리를 위하는데 희사하였으며, 자기의 명성 및 사회지위가 높아감에 따라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겸허하였으며, 자기의 사재가 있었다고 해서 윤택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대하여서도 한 번도 범속凡俗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이 덕망과 고절과 인자와 겸허한 양심적인 선생이었기 때문에 일을 해도 앞에 나서지를 않고, 또 한 번 신임한 동지나 선배에게는 좀처럼 의심치를 않아 그 포용력이야말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를 스스로 수그러지게 하였던 것이다. 사실 필자가 마음을 터놓고 양심적으로 냉정히 말해 본다면 인촌 선생과 같이 애국 애족 단성丹誠의 애국자 및 지도자는 오랜 민족사에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조병옥趙炳玉 전 내무부 장관, 제4대 대선 민주당 후보)

 

“일제식민지하는 물론 해방 후의 건국과정에서 가장 이 민족을 위했던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인촌 김성수라고 대답하고 싶다. 인촌 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 당시에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사업에 손대지 않았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이 나라를 지배하던 일본인들이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인촌은 일본인들이 싫어하는 일, 아니 어떤 방해에 부닥칠지라도 민족의 오늘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정열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항상 친구는 물론 선배나 후배들을 겸양으로 대해온 사람이다.
자기의 재력으로 자기의 계획으로 큰일을 하면서도 명예나 직위는 항상 남에게 양보하였다. 이것이 바로 겸양의 덕이었다. 인촌은 평범한 위인이었다. 인촌은 남의 말이 자기의 뜻과 다른 경우에도 정면으로 반대하기를 꺼렸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하고자하는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설득시키려 애쓰고 결국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사람을 대하는 데는 온화하지만 뜻을 펴는 데는 강직하였다. 그는 아침잠이 많은 대신 밤늦게 방문한 친구를 대하거나 친구 집을 방문하는 것을 즐겼다. 자기의 사업을 어떻게 민족의 진로에 맞출 것인가, 어려운 역경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상의하다보면 밤을 새우다시피 했고 이러한 가운데 불면증이 심했기 때문으로 알고 있다. 그는 일시에 모든 일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일초일목日草一木을 손수 가꾸었고 벽돌 하나 화강암 한모서리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윤보선 전 대통령)

 

“그는 교육 사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정당 조직의 일선에 나서거나 정당의 중요한 자리를 맡지는 않겠으며 뒤에서 힘껏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촌은 일은 자기가 하더라도 자신을 앞세우지는 않으려고 하는 분이었다. 그가 이룩한 수많은 업적을 우리는 알고 있거니와, 어떠한 일에서나 그는 자신의 명성이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가능한 한 뒤에서 실질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그 공로와 영광은 남에게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분이었다.”
(허 정 전 국무총리)

 

“1923년부터 1945년까지 나는 사적 유물론을 믿는 사회주의 사상의 대표자였던 까닭으로, 일제 때의 나의 가까운 친구는 모두가 사회주의자, 계급혁명의 선도자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러시아로 망명시킨 공산당 간부도 있었지만, 그들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로서는 러시아로 망명한 사람들의 거개가 모두 인촌 선생으로부터 노잣돈을 얻어가지고 망명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 당시 서울로부터 울라디보스톡으로 밀항해 가지고 모스크바까지 다라 날려면 일본 돈으로 3백 원 내지 오백 원만 가지면 족하였다. 그래 사회혁명을 획책하다가 일본경찰에 붙들렸다든지, 혹은 미행을 따버리고서 피신하고 있다가 노령露領으로 고비원주高飛遠走하게 된 혁명투사들이 돈이 없어서 쩔쩔 매다가 그들과 사상은 다르지만 그들한테 동정해 줄만한 사람으로는 인촌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서 그들은 계동 인촌 댁으로 밤에 남몰래 찾아가든지, 혹은 믿을만한 친구를 대신 보내든지 해가지고서 노잣돈을 청구할라치면, 인촌 선생은 아낌없이 3백 원, 때로는 5백 원 돈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일제의 철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준 일이 비일비재였다. 공산당원이거나 민족 사상운동, 혹은 직접 행동을 음모하다가 붙들려갔든지, 서대문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람, 혹은 감옥에 들어가 있다가 병보석으로 나와 있는 사람으로서 만주나 노령露領으로 망명하고 싶었을 때 인촌 선생한테서 돈을 얻어가지 아니한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 추상하고 있다.
1923년의 제1차 공산당사건 이후 1931년 제3차 공산당(속칭 ML당)사건 까지 10년 동안, 일제에 대한 공산투사 가운데서 인촌 선생으로부터 3백 원~5백 원의 돈을 얻어간 사람은 10지十指를 꼽을 수 있건만, 지금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ML당의 이성태李星泰라는 이름뿐이다. 대관절 민족주의 사상가이었던 인촌 선생으로서 공산당이나 무정부주의 운동자에게 아무 차별 없이 3백 원, 5백 원씩 손만 벌리면 선뜻 내준다는 일이 용이한 일이냐? 신봉하는 사상과 주장하는 주의가 상이하면, 보통이 이런 때 외면하고 도와주지 않는 것이 십중팔구이다. 그렇건만, 인촌 선생은 아무 차별없이 민족독립운동자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대우하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주의와 사상은 자기와 다르지만, 일제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려는 목표에는 일치하는 까닭에 인촌 선생은 그들을 도와주었을 뿐이라고,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김팔봉金八峰 경향신문 주필, ‘좌우익 가리지 않고 도와준 인촌’ <사상계思想界>, 9집 2권, 1961년, 213~219쪽)

 

“반민특위 활동이 시작될 무렵, 특검부장은 김상돈金相敦 의원이었고, 그 중 특별검찰관의 한 사람으로 독립 운동가였던 장홍염張洪琰 의원이 끼어 있었다. 그는 반민자反民者들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정부에서 보관 중에 있던 총독시대의 기록을 가져와 부일협력자와 일제에 반항한 애국지사들의 기록을 살펴봤다. 뜻밖에도 인촌 김성수 선생에 관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일제 치하에 독립단원 한사람이 그의 집을 찾아가 돈을 훔쳐갔다는 대목이 있었다. 사랑방에 주인이 없는 새 도둑이 들어와 금고를 털어 돈을 가져갔다는 것이었다. 이 때 김성수 선생 댁을 찾아가 독립자금을 달라고 졸라댄 사람이 바로 장홍염 의원 자신이었다. 자신의 간청을 받자 전후사정을 알아보고 신분을 확인한 선생은 사랑방에 있던 금고문을 열어 제치곤 돈이 들어있다는 시늉을 한 후에 용변을 보러간다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기에 그제서야 주인이 없는 새 돈을 가져도 좋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독립자금을 가져가 요긴하게 쓴 일이 있었다. 스스로 독립자금을 준 것과 다름이 없었는데도 육영사업과 언론사업,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렇게 선생은 용의주도하게 도둑을 맞은 것으로 일제의 눈을 속였다. 이 사실이 제헌국회에 전해지자 인촌 선생의 우국충정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서병조徐丙 전 연합신문 편집부국장, <정치사의 현장> 제1공화국 편, 중화, 1981년, 196~197쪽)

 

“3·1운동과 관련해서 할아버지와의 대화로 남아 있는 내 10대의 기억들을 몇 가지 정리해 두어야겠다. (1) 3월 1일 거사에 쓸 문서들을 작성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다. (2) 거사 성공의 결정적 계기에 대해서다.
할아버지는 인촌 김성수로부터 받은 운동자금을 기독교 측 남강 이승훈에게 전한 2월 21일경 회합이 거사 성공의 결정적 계기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김성수가 구태여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3·1운동 준비 과정에서 당신이 김성수에게 받아 이승훈에게 전한 거사자금이 아니었으면 그만한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할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신 일이 있다. 김성수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3·1운동 준비과정에서 당신이 김성수에게 얻어 이승훈에게 전한 거사자금이 아니었으면 그만한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다고.
내 할아버지와 김성수는 말이 없어도 서로 믿고 아끼는 사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 분은 한국 근대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은 쌍벽이었다. 한 분은 역사학으로 쓰러진 민족의 자긍심을 일으켜 세웠고, 다른 한 분은 교육과 언론을 통해 국권회복을 준비했던 것이다.”(최학주,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근대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 나남, 2011년, 158쪽과 179쪽)

 

“1956년 경 육당에게서 들은 얘기다. 3·1운동 당시 천도교 쪽은 최린이 있고, 북쪽 기독교 세력(서북 기독교)은 이승훈, 남쪽 기독교 세력은 이상재가 대표적이었다. 최린과 육당은 일본 유학을 같이 한 친한 사이다. 평양 쪽 기독교의 이승훈 선생을 천도교의 참여 세력에 합류시키려 서울로 불러왔는데 종로 YMCA 건물 옆에 황금여관에 묵었다. 거사 자금 분담금 문제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 인촌이 육당을 불렀다. 인촌이 ‘기독교가 내야 할 몫이 얼마냐’고 물어서 육당이 얼마라고 얘기하니까 인촌은 말없이 주머니 속에서 몇 천원을 꺼냈다.
인촌은 ‘이것을 내가 낸 것으로 하지 말고 이승훈 선생이 기독교 몫으로 낸 것으로 하라’고 말했다. 육당은 이 돈을 보자기에 싸서 그길로 황금여관으로 달려가 이승훈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내가 육당한테 이 얘기를 듣게 된 것은 한용운 선생이 독립선언서의 뒷부분 공약 3장을 썼다는 논란이 나오던 무렵 독립선언서가 나오기까지의 전 과정을 육당에게 시간대 별로 여쭤보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홍일식洪一植 전 고려대 총장)

 

“당시 변호사들 중에 독립운동 사건을 맡을 경우 남몰래 무료 변호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병로金炳魯, 이인李仁, 허헌許憲 등이 많이 했는데 알고 보면 변론비는 동아일보에서 은밀히 대주는 경우가 많았다.
인촌은 그 사실도 감추었다. 그리고 인촌은 수많은 장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는데 지급하면서도 기록을 하거나 겉으로 나타내지를 않아 누가 얼마나 도움을 받았는지는 당사자들 밖에는 모른다. 일제시대 그의 도움으로 공부를 한 장학생 수를 보면 초중고등학교 학생은 제외하고 전문학교 대학생(국내와 일본)약 680명, 그리고 미국이나 영국 유학생 50명 등 약 730명에게 장학금을 주었다고 집계되고 있다. 그렇게 인재를 아끼고 도와준 이는 일찍이 없을 것이다.”
(김승문金勝文 전 동아일보 영업국장)

 

<멋쟁이 인촌>

“인촌은 술을 좋아하고 소리를 좋아하고 양복을 입을 줄 안다. 술 맛을 알고 소리 맛을 알고 양복을 잘 입을 줄 안다. 한말로 하면 ‘멋’을 아는 ‘멋쟁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들과 술을 잡수실 때에 처음에는 사양도 하고 손이 더디 올라간다. 그러나 술이 약간 취하고 밤 열두시쯤 되면 “한잔 더 먹세, 한잔 더 먹세!” 하면서 두 시, 세 시까지라도 음주하기를 사양치 아니하는 벽이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주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리를 좋아하는 것은 친우 간에는 유명한 이야기다.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타령 등 남도소리를 더욱 좋아한다.
소리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지만 그 도를 넘는 일은 없었다. 인촌 선생은 상식적이고 가정적이고 따라서 평범하다. 기상천외의 명론탁설도 그 분에게서는 들을 수가 없다. 계산적이고 살림꾼이다. 그러나 명철한 두뇌의 소유자이고 상인해물지심傷人害物之心이 없는 고집쟁이다.

 

‘고집쟁이 인촌!’ 남의 의견을 잘 듣고 태도를 결정하나 한번 결정하면 요지부동으로 나간다. 한번 사람에게 맡기면 그대로 신임하고 나아간다. 동아일보, 중앙학교, 고려대학교, 경성방직회사 등등의 경영에 있어서 그러하였다.”(김준연金俊淵 전 동아일보 주필)

 

“한번 맘먹으면 끝내 관철하시며 의지가 굳으시고 계획이 퍽 신중하고 치밀하여 무슨 계획이든 일단 설명과 토론 과정을 거치시고도 그 이튿날 다시 검토를 거듭하셔 밑에서 도우려면 오히려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러한 성격으로 선善과 정의의 길을 지키고 양심과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투철하신 것이 한마디로 인촌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 당신의 사생활은 아주 검소하시면서 다른 분들에게는 늘 다정스럽고 겸손하셨다. 친구들이나 손아래사람에게도 좀처럼 거만하지 않고 인덕仁德이 커서 한번 인촌 밑에서 일하기로 한 사람은 떠나는 사람이 없었다. 부하의 말이라도 옳은 의견을 높이 사고 자기 의견은 고쳐 가는 아량에 누구든지 감복했던 것이다.
인촌 선생은 파괴형의 혁명가적 애국자라기보다는 한평생 묵묵히 건설해가는 경세가적 애국자였다. 내가 깊이 인촌 선생을 존경하고 이 분이야말로 기라성 같은 우리 민족지도자 가운데 모든 사람의 가슴에 길이 남을 분이라고 생각되는 까닭은 이 분의 고매한 식견 때문만도 아니요, 이 분의 사업이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그것 때문만도 아니요, 또는 부통령이란 막중한 지위에까지 나가셨다는 그것 때문도
아니고 이러한 모든 이 분의 식견 사업 영예의 근원에 놓여있는 무엇이, 이 분으로 하여금 이러한 업적을, 이러한 족적을 남기실 수 있게 하였는가 하는 그 근원이다. 그것은 바로 인촌 선생의 인품, 인격이다.”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

 

“1919년 3.1운동 전후로부터 1960년에 이르는 약 40년 동안, 즉 우리나라 근대화운동이 다시 말하면 민족독립의 정비작업과 민족국가 건설작업의 시기에 있어서 주춧돌적인 위치에 있던 분, 대들보적인 위치를 점하였던 분이 누구냐? 곧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고 저는 결론짓습니다. 이것은 결코 아전인수我田引水적인 결론이 아닙니다.”
(주요한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선생을 병석에 방문한 이는 누구나 아시리라. 병석에 누워서도 방문객을 대하면 매양 국제 정세를 염려하시고 시국을 걱정하시고 납북 인사의 안위를 생각하시면서 비감에 복 바치어 눈물을 참지 못하시는 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생의 이룩하신 업적이 저처럼 컸던 것은 그의 이러한 인격의 위대를 말하는 것이다. 무릇 사업의 성패를 시회時會의 인연보다 인화의 득실에 좌우되는 것이라 하면 인촌 선생의 공업功業은 인화에서 얻은 것이요 그의 인화는 그의 인격에서 유래한 것이다. 선생의 불행은 민족의 불행이다.
선생의 불멸의 공탑功塔은 특히 고려대학에서 빛나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 하에서도 민립대학을 꿈꾸시고 국가 민족의 장래 명맥을 여기에 붙혀 보려는 은연隱然한 생각에서 사재를 털고 유지를 찾아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10전, 1원식 주워 모아 지으신 것이 바로 이 빛나는 고려대학의 건물이다. 돌 한개 기와 한 장이 다 그의 정성이오, 나무 한대 풀 한 폭이 모두 그의 심혈이다.”
(이은상 예술원 종신회원, 전 동아일보 기자)

 

“6.25 사변 때 보전교수로 계시다가 서울대학으로 갔다가, 나중에 월북하신 분이 계신다. 윤행중尹行重 선생님이다. 6·25 때 윤 선생님을 만났다. 윤 교수는 날 만나더니 ‘인촌 선생 남하하셨을까?’ 하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남하하시지 않았을까요.’ 라고 했다.
윤 교수는 ‘남하하셔야지. 내가 공적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참 훌륭하신 분이야. 남하하셔야지’ 하셨습니다.”
(김진웅金振雄 전 고려대 총장 서리)

 

“선생님이 제일 좋아한 소리는 수궁가와 심청가 였는데 특히 수궁가를 좋아하셔서 언제나 그걸 듣자고 하셨다. 한 대목만 들으시는 게 아니라 장장 3시간이나 걸리는 한 마당을 다 들으셨으니 얼마나 그 분이 우리 국악을 좋아 하셨는지 알만 하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심사가 울적하신 날이 많아 그런 때는 꼭 청해 들으시곤 눈물을 흘렸다. 병석에 계실 때 두 번 갔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좋아하시는 소리라도 해 드리고 와야겠다, 생각하고 찾아뵈었다. 중풍으로 누워 계셨는데, ‘초월이가 소리를 헌다는데 내가 누워서 들을 수 있나? 부인, 나 좀 일으켜 줘요’ 그러시며 만류하는 데도 굳이 일어나 들으시겠다는 것이었다. 그 날도 수궁가를 완창 했는데 그이도 울으시고 나도 울었다. 거기 오신 다른 분들도 모두 다 울었다.”(박초월 명창)

 

<쏘려면 우리를 쏘라>

“한번은 식도원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과 친일파 박춘금朴春琴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화가 난 박춘금이 육혈포를 꺼내 인촌 선생을 겨누는 바람에 방안은 초긴장 상태였다 한다. 이때 기생들은 재빠르게 인촌 선생 주위에 둘러서며 ‘쏘려면 우리를 쏘라’고 막아서는 바람에 박춘금은 총을 거두었다. 이날 인촌 선생께서는 많은 기생 중에서 대표 격인 이연행을 자택으로 불러 부인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셨다고 하니 인촌 선생의 덕과 인자하신 모습을 보는 듯 선하다.”
(이난향李蘭香,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1’, 중앙일보 185~187쪽, ‘사상기생思想妓生’)

 

“왜정 밑에서 압박이 극심할 때 이분이 집안 재산을 털어서 교육 사업을 시작했으며 일면으로는 신문을 내어서 일정에 반대하여 왔으니 이것만으로도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군정시대 미인들이 미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서 우리를 권하여서 공산당과 합작하여 연립정부를 세워야 된다느니 혹은 신탁통치를 받아야 된다고들 할 때 임시정부 측의 여러분들은 거의 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합동을 할 적에 김 공이 나를 도와서 지지하여 준 것과 공개적으로 구호한 것은 그 당시 우리 입장을 백절불굴하고 나가는 자리에 막대한 힘을 주었다. 이 몇 가지만 가지고 보아도 그 분이 애국적인 성심과 앞길을 보는 정견으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는 개인의 득실과 이해를 헤아리지 않고 지켜서 싸워온 분이므로 우리나라 모든 지도 계급 여러 사람 중의 특출한 인물이었으며 애국지사 중에 유일한 자리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그는 지금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정치가라고 불리우기는 합당치 않는 사람이었으니 그도 이것을 싫어하여서 정당 방면으로 나서기를 대단히 싫어했던 것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난세亂世의 현인賢人 인촌>

“인촌 선생은 무엇보다도 모든 유형의 사람을 한품에 포용하는 마음의 주인공 거인이었습니다. 누구나 그 그늘에 가서 쉴 수 있는 거목이었습니다. 선생은 중앙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설립 운영했지만 인기 있는 교사나 유명한 학자는 아닙니다. 또 경성방직을 설립한 것은 사실이나 대재벌의 기업가도 아닙니다. 동아일보를 창간했어도
대기자가 아니며 해방 후 한민당의 산파였으나 대정치가라 하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덕망 있는 교사나 유명교수가 인촌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많이 나오고 훌륭한 기술자나 산업역군이 인촌 선생의 기업에서 나오고 일제의 폭압에 대항하고 민중의 참 길잡이가 되는 대기자가 인촌의 신문사에서 쏟아져 나오고 인촌 선생이 창당한
정당에서 나라의 동량이 될 만한 대정치가가 나왔습니다. 인촌 선생이야말로 한 시대를 이끌어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 없이 배출한 지도자의 산파요,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입니다. 인촌 선생의 또 다른 특징은 ‘평범의 비범’ 이랄까, 매사를 평범 속에서 구상하고 이를 겸허하고 성실하게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항상 겸양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뒷자리에 앉아서 남의 공로를 드높여 주는 것이 인촌 선생의 국량이요 경륜이었습니다.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 ‘담박명지淡泊明志’ 등 인촌 선생의 좌우명이 모두 이 같은 ‘평범의 비범’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몽양 여운형이 해방 후 건준을 거쳐 공산당에 휩쓸렸을 때에도 설산 장덕수를 시켜 끝까지 설득케 하고 그가 언젠가는 제자리에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인촌 선생은 내면적으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한마디로 그는 ‘담박명지淡泊明志’의 무욕한 천성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인촌 선생 스스로도 ‘옆에 있어서 일개 조언자가 되기를 좋아하되 직접으로 그 국에 당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바가 아닙니다.’라 말한 것처럼 그는 항상 믿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자신은 뒷전에 물러서서 이들을 돕는 것으로 직분을 삼았습니다. 그는 당대에 부호 소리를 듣는 대 경영인이면서도 사생활은 일반 서민들의 궁핍에 비견할 만큼 검약과 절제와 극기를 닦았습니다. 일제말기 온 국민들이 식량난을 겪을 때 그 역시 점심을 거르는 일이 자주 있었으며, 새로 재생한 양복에 기운 구두를 신는 등 겉으로는 볼품없는 촌로와 같았습니다.
인촌 선생의 인간적인 위대한 모습은 바로 이 같은 극기와 겸양의 실천으로 세인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담박淡泊과 명지明志로써 천하의 인재들의 마음을 산 것입니다.”(김수환 추기경)

 

“인촌 선생과 함께 지내게 된 것을 나는 평생에 걸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애국심과 대인관계의 지혜로움은 지금도 본받고 싶은 심정이다. 일제시대에 인촌과 같은 이들이 국내에 없었다면 과연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내가 아는 애국자들은 스스로 애국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그랬고 고당 조만식 선생도 그랬다. 유한양행의 창설자인 유일한 씨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지금도 존경하고 있다.”(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인촌 김성수, 그는 그가 남긴 글처럼 ‘담박명지淡泊志明’ ‘신의일관信義一貫’ ‘공선사후公先私後’의 한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난세亂世의 현인賢人이었습니다.

 

 출처: 동아일보 2020위원회 교열, 자립자강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2011년, 117~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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