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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대표주주 김성수(金性洙)(3)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6

만고불후萬古不朽하리라

 

1891년 10월 11일(양력) 태어난 인촌이 네 살 때인 1895년, 조선의 국모國母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됐습니다. 그 이듬해(1896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암담하던 시절, 프랑스 파리에는 1889년 에펠탑이, 뉴욕에는 1931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세워지고 1929년 아카데미 영화상이 생겼습니다.
인촌은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1908년 17세 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동경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곳에서 융성하는 일본의 모습을 보며 초라한 조국의 현실에 너무나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동경 유학 중 경술국치(1910년)를 당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이 나라, 이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3·1운동 후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꾸자 고하 송진우는 인촌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늘이 기회를 준 거야. 분골쇄신이란 말도 오히려 부족하지. 눈을 뒤집고 일을 해야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민충정공閔忠正公처럼 자문自刎하지 못한 답변이 될 것이요, 안중근 의사처럼 교수대에 오르지 못한 설명이 되어주는 거요. 죽어서 민족에게 이바지하는 것도 애국의 한 방편이지만, 살아서 적과 싸워 이긴다면 이 얼마나 좋은 애국인가.
학교도 하고, 신문도 하고, 공장도 차리고…. 학교에서는 열 명, 백 명의 충무공이 나올 것이오, 백 명, 천 명의 안중근 의사가 나와 준다면 우리가 망국일에 죽지 않은 보람도 날 것이 아닌가.”

 

많은 지우知友들과 번뇌하다 결심했습니다. 먼 훗날을 기약하며 우선 인재를 키워야겠다, 그리고 백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는데 일조해야겠다고. 와세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인촌은 양가養家와 생가生家의 두 부친을 도쿄로 모셔 그가 다닌 와세다 대학을 보여드리며 자신도 조선에 돌아가면 사람을 키우는 학교를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인촌은 <삼천리> 1934년 5월호에서 “이 교문에서 뒷날 일본 헌정憲政을 운전하는 수백數百의 유명한 정치가와 또 사회 각 방면의 인재를 배출시키어 일본의 문명을 건설한 그 국가적 공로를 생각하면 오직 경복敬服할 뿐이다. 대외大(오쿠마) 백佰(백작, 두 차례 총리대신을 지냄-인용자 주)은 모든 정치적 공로가 매몰되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와세다 대학을 통한 교육 사업가로서의 공적은 만고불후萬古不朽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만고불후萬古不朽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귀국 후 24세 때(1915년) 그는 백산학교 설립을 계획했습니다.
왜 ‘백산白山’이란 교명校名을 생각했을까요. 백산白山은 백두산입니다.
총독부는 백산白山이란 이름부터 불경하다는 이유로 학교설립신청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윤식金允植, 이상재李商在, 유근柳瑾, 유진태兪鎭泰 등의 권유로 운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1915년 4월 인수했습니다. 오늘날 중앙중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내가 편입한 1916년의 중앙은, 지금의 경기고교 앞, 낡은 한옥 한 채를 교사로 쓰고 있었다. 교실은 벽과 대청을 터서 만든 것이었는데 언제나 좁고 어두웠다. 운동장이란 것도 2백여 명이 뛰어놀기에는 너무 작았다.
인촌 선생은 학교를 맡으면서 두 가지 일을 서둘렀다. 하나는 유능한 교사를 모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계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교사를 신축하는 것이었다. 당시 교장은 유근柳瑾 선생, 학감은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선생이었다. 교사진은 기하에 이강현李康賢 선생, 화학에 나경석羅景錫(여류 화가 나혜석의 오빠), 대수에 백농 최규동, 조선어에 이규영李奎榮(주시경周時經 선생의 제자), 지리, 역사에 이중화李重華 선생, 그림에 고희동高羲東 선생, 창가(음악)에 이상준李尙俊 선생, 체조에 김성집金聲集 선생 등이었다. 교장 석농 선생도 한문을 가르쳤고, 학감 민세 선생은 수신修身을 맡았으며, 인촌 선생 자신은 경제원론을 가르쳤다. 경제원론은 교재가 없어 인촌 선생이 일일이 필기를 시켰는데, 공부시간의 그분은 매우 자상하면서도 근엄한 분이었다.
틈틈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말씀을 들려주곤 하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다. 학생들은 선생님 알기를 정말 하늘처럼 생각했다.
선생님들은 모두 높은 학식과 인격을 갖춘 애국자들이었다. 그런 선생님들 밑에서 나는 지독한 공부벌레로 파고들었다.
조선어 문법은 김두봉金枓奉의 ‘조선말본’으로 배웠다. 외는 것이 많아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는 과목이었으나 나는 그 과목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이희승李熙昇,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5년 11월 18일자 4면)

 

계동 1번지 지금의 중앙중고교 자리로 터를 정하고 4천3백 평을 사들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북악산 줄기를 뒤로 한 계곡으로 울창한 송림松林만 들어찬 산골짜기. 인촌은 즉시 새 교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인촌과 교사,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함께 땀을 흘렸습니다. 그 보람으로 1917년 8월, 건평 2백여 평의 붉은 벽돌 2층이 솟아오르면서 장안의 화제가 됐습니다. 백산학교 설립계획을 거부하며 인촌을 ‘김 군’이라고 불렀던 세키야 데이자부로關屋貞三郞 총독부 학무국장은 신 교사 낙성식에 금줄 번쩍이는 제복에 긴 칼을 늘어뜨리고 나타나 ‘김 선생’이라 존대하며 몇 번이나 장한 일을 했다고 치켜세웠습니다.
그 중앙학교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교로 남아 영화 ‘겨울연가’의 촬영지가 되며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의 하나가 됐습니다.

 

“나는 인촌 선생께서 학교를 인수하신 그 다음해에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후 첫 소풍을 강화도에 갔었는데 그때의 일은 오래도록 나에게 어떤 충격처럼 남아있다. 전교생이 함께 갔다. 유근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중에는 물론 인촌 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도 마니산의 첨성단에 올라갔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단군성터에서 단군설화를 얘기하시면서 목이 메었고 인촌 선생님께서도 소리 없이 눈물을 짓고 계셨다. 학생들도 그제서야 나룻배까지 빌어 타고 강화도에 소풍을 온 까닭을 깨닫고는 모두 함께 울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 바로 옆에서 단정한 자세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리시던 인촌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유홍柳鴻 전 국회의원)

 

인촌 선생은 교지敎旨를 ‘웅원雄遠, 용견勇堅, 성신誠信’으로 정했습니다.
전 중앙학교 교사였던 제등권차랑薺藤權次郞 일본 암수岩手대학 강사는 “중앙중학교의 모표는 무궁화로 둘러싸여 있는데, 무궁화는 조선 이래의 국화다. 이 모표에서도, 또 교무실의 한가운데에 걸려있는 ‘웅원雄遠’이라는 큰 글씨의 액자에서도 나는 민족 독립의 은밀한, 그러나 강한 정신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중앙학원을 민족 독립의 근원지로 해서 웅원한 큰 뜻을 가지고 은인자중 비원 실현의 날을 기다리며 우선 민족교육이라는 기본적 사업에 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선생은 신임인 나를 자택(지금의 인촌기념관)으로 불러 저녁을 대접해 주셨다. 그 분은 하얀 한복을 입고 계셨는데 따스함과 너그러움이 넘치는 대인의 태도로 ‘뭐 특별히 부족한 점은 없소?’하고 물으시더니, ‘내 자식도 맡겼습니다만 엄하게 가르쳐 주시오. 게으름을 피거든 용서 없이 낙제시켜 주시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씀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인촌 선생께 이런 질문을 했다. ‘선배님이기에 여쭈어 봅니다. 교무실에 걸려 있는 액자의 웅원雄遠이라고 하는 글의 뜻은 민족의 독립을 뜻하는 것입니까?’
당시 일본 관헌의 눈은 학교에까지 미쳐서 선생은 일본 측에서 본다면 요주의 인물이었으나 표정을 흩트리지 않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습니다.
제등권차랑薺藤權次郞은 경사가 있을 때마다 ‘어축御祝 김성수金性洙’라 쓰인 족자를 안방 한가운데에 걸어 놓고, 반세기나 되는 먼 옛날 잠깐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생애 잊을 수 없을 만큼 깊은 감명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 선생’을 생각하곤 하며 그때 받은 연초합煙草盒과 소포의 꼬리표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일제는 학생들에게 해군사관복 비슷한 것을 착용토록 했습니다.
그러나 인촌은 말총과 무명으로 만든 교복을 입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구정舊正을 쇠지 못하게 하고 신정新正을 쇠게 했습니다.
정초正初 총독부는 각 학교에 하례賀禮 축하 선물로 일본 황실의 문장紋章인 국화 무늬가 든 ‘모찌’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지만 중앙학교만은 인촌 집에서 직접 만든 고물에 묻힌 인절미를 한지에 싸서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고향 전남 순천順天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성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를 나와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경신학교는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기독교계 학교였다. 4학년에 진급하자 학교에서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다. 나는 주동학생으로 몰려 퇴학을 당했다. 경신학교에서 처벌을 받고 쫓겨난 학생 1, 2, 3, 4학년 합쳐서 수십 명에 이르렀다. 중앙학교에서는 그들을 모두 받아주었다. ‘이젠 끝 장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촌 선생이 용단을 내려 받아 주시니 우리들의 사기는 충천할 뿐이었다.”
(정문기鄭文基 수산학자, 1919년 중앙학교 졸업)

 

“나는 처음 보성학교에 다녔는데 4학년 때 일인 선생에 대한 배척운동을 벌였어요. 이때 교장은 최린 선생이었는데 우리가 자진퇴학원서를 냈거든요. 그런데 학교 당국은 ‘퇴함을 명함’이라는 방을 내걸었어요.
그래서 최린 선생 댁을 찾아갔어요. ‘우리가 자진해서 퇴학한다는 데 왜 그것을 수리하지 않고 퇴학을 명합니까? 우리들은 인제 퇴학을 당해서 다른 데도 갈수 없는데 이렇게 우리들의 길을 막을 작정입니까’하고 항의했더니 너희들 잘못은 없지만 학교 체면으로서는 할 수가 없으니 이해해달라고 하시면서 인촌 선생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에요. 아마 우리 문제로 상의하신 모양인데 인촌 선생께서 모두 받아 주신다고 하신 모양이에요. 소위 문제아들인데 인촌 선생은 모두 받아들였어요. 웬만한 교육자적 결심이 없으면 힘든 일이지요. 또 1929년경 몇몇 사람이 뜻을 모아 문화원을 하나 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운영비를 염출할 방법이 없었어요. 인촌 선생을 뵙고 말씀 드렸더니 쾌히 응낙하시더군요.
그 일이 성사되진 못했지만 역시 젊은이의 뜻을 이해하신 인촌 선생의 일면이 나타난 것이지요.”(서항석徐恒錫 극작가)

 

<중앙학교 숙직실이 3·1운동의 산실産室>

중앙학교의 숙직실은 우국지사들의 집합소 중 한 곳이었고 3·1운동 논의가 이 숙직실에서 깊이 이루어졌음은 여러 사료들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중앙중학은 항일 학생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이러한 항일의 교풍을 이어받고 있던 터인데, 중일전쟁 후로 학교 당국은 조선어 과목을 수의과목隨意科目(선택과목)으로 돌려 과목 이름만 두었다가 1939년부터는 일어 상용을 강조하면서 민족문화에 관한 과목은 전면 폐지하게 하였다. 이것은 전국 각 급 학교에서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었으며 중앙중학의 일각에서도 여기에 저항하는 학생 활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중앙중학의 현상윤玄相允 교장은 수신 시간에 민족정신을 환기하는 강의를 하였고, 김상기金庠基는 4천년의 민족사를 비밀리에 이야기했으며, 지리를 담당한 최복현崔福鉉은 수업 중에 임진왜란 때 이 충무공의 전승과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또한 최복현은 때로 시국담을 하였는데, 중일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으니,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하였다. 즉 사제 간에 반일의 저류가 엄연히 흐르고 있었다.”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9권, 학생독립운동사>)

 

동아일보 1922년 2월 3일자 1면 사설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로 시작된 민립대학 설립의 꿈은 그러나 쉽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실패는 일제 총독부의 탄압이 최대 원인이었지만, 거기에다가 1923년 여름의 수재와 9월 일본 관동지방의 대지진 등으로 경제공황이 몰아쳤고, 다시 1924년 남부지방의 한재旱災가 겹쳐 농민들이 도탄에 빠지고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른 자연적인 재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한 조건을 안겨 주었다.”
(김호일金鎬逸 중앙대 교수, <한국독립운동사사전 총론편 상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일제는 조선인을 위한 민립대학 설립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습니다. 조선인을 위한 민립대학의 설립이 불허되고 경성제국대학이 생기자 남강 이승훈 선생은 민립대학기성준비회 간판을 두고 “보기 싫으니 그놈의 간판 떼어 버립시다.”고 하고 이상재 선생은 간판이라도 그대로 두고 봅시다”고 했다고 합니다.(전영경全榮慶 전 동아일보 사사편찬부장, <조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의 전말>)

 

“그 대신 예수교는 연희전문을, 김성수 선생은 보성전문을, 불교는 불교전문을, 유교는 명륜전문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해서 교육, 산업의 두 기둥 위에 우리 민족의 역량을 길러 일본 세력을 내몰고 자주 국가를 세울 터전을 마련하려고 한 것입니다.”(유광렬 동아일보 창간기자)

 

인촌은 1929년 세계 일주에 나서 1년 8개월여 구미歐美 각국의 대학 교육과 시설을 둘러봤습니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파리,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콜롬비아, 하버드, 예일, 듀크 대학 등의 모습을 무비카메라에 담아 돌아왔습니다. 인촌이 돌아오자 그를 반갑게 맞은 사람들은 보성전문 인사들이었습니다. 보성전문은 1905년 이용익李容翊 선생이 설립한 조선인 최초의 사학이었으나 경영이 어려워 천도교 측이 맡았지만 역시 여의치 않았습니다.
1932년 3월, 인촌이 보성전문을 인수한 것은 뜻있는 애국지사들의 꿈인 동시에 2천만 동포의 소망이었던 민립대학 설립의 염원을 대신한 것이며 장차 민족의 최고 학부로 육성해 보겠다는 포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전 교장에 취임한 인촌이 서둔 것도 교사 신축. 안암동 일대 7만여 평을 사들였습니다. 당시 안암동 일대는 경성부京城府에 편입되지 않은 변두리로 군데군데 초가들이 있는 쓸쓸한 농촌이었습니다. 인촌은 곧바로 본관 신축을 시작, 안암산 기슭 동남쪽 성동벌판을 바라보는 자리에 총건평 1천1백44평의 고딕 양식 석조 3층 건물을 지었습니다.
당시 경성의 석조 건물은 총독부 청사를 빼고는 없던 때였습니다.
백악白堊의 3층 본관 입구 좌우에 호랑이의 두상頭像을 조각하여 붙였고, 후문 두 기둥에는 무궁화 같기도 하고, 조선 왕조 국화인 이화 같기도 한 꽃을 새겨 놓았습니다.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고자 할 때 내 할아버지에게 춘부장님을 설득해 달라 해서 할아버지가 정읍까지 다녀온 일까지 있었고, 당시 김성수의 부친은 조선사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와세다 대학에서 막 돌아온 당신의 어린 동생 최두선崔斗善을 김성수에게 일을 시키라고 보낸 것은 할아버지 자신이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할 때 내 할아버지의 조언을 구했고 보성전문학교의 부지가 부족했을 때 할아버지는 교분이 두터웠던 박한영朴漢永 스님에게 부탁해 현 교지의 상당 부분을 기증받도록 했다. 당시 박한영 스님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이면서 조선불교총무원장이었다. 또한 할아버지의 동생 최두선이 보성전문학교 재단 전무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최학주崔學柱,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근대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 나남, 2011년)

 

유진오兪鎭午 전 고려대 총장은 “인촌이 구체적으로 구미의 어떤 대학의 건물을 본받아 보성전문 본관을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영국의 케임브리지, 미국의 예일대학 등의 건물이 인촌의 머릿속을 왕래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튼튼하고 웅장하고 호화로운 보전 본관 건물은 외관에 못지않게 내부도 호화찬란했다. 그 중에도 특히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층마다 두 개씩 있는 화장실의 시설이었다. 내부를 전부 고급 백색 타일로 발라놓은 데다가 벽으로 돌아가면서 5, 6개의 거울과 번쩍이는 세면기가 달려 있었고 변소는 모두 수세식이어서 선머슴 같은 학생들이 쓰는 학교 변소라느니 보다도 일류 호텔의 시설 같은 감이 드는 것이었다. 지금 안목으로 본다면 이런 정도의 시설은 그렇도록 놀랄 정도의 것은 아닐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로서는 총독부 건물이나 가면 몰라도 그 외에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초호화판이었다. 인촌의 근검 절제는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그 인촌이 그 지독한 일정 압제하에 왜 그렇게 호사스런 교사를 지었을까. 그곳에는 무언의 깊은 듯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것은 오기요, 반항이요, 겨레에 주는 격려요, 스스로의 분발이었던 것이다.”

 

오기요, 반항이요, 겨레에 주는 격려요, 스스로의 분발로 키워가던 보전은 일제 말 가혹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왜정倭政도 말기에 가까웠을 때의 일이다. 학원에 대한 왜정의 간섭이 날로 심하여 연희전문학교에 대하여는 이미 탄압이 시작되어 학교는 수색을 당하고 몇몇 교수가 검거를 당하였던 때인지라 같은 사학의 처지에 있는 보성전문학교로서도 언제 머리위에 일제의 철봉이 떨어질는지 모르는 그러한 상태에 있던 때의 일이다. 입학시험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학교에는 사복을 입은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이 나타났다.
요꼬야마橫山라는 그 경부警部는 소위 사상범 정치범에 대한 잔혹한 고문으로 이름 있는 자였다. 얼마 후 요꼬야마가 나가는 것을 본 나는 곧 교장실로 달려가 인촌 선생께 그자가 온 까닭을 알아보았다. 인촌 선생은 심히 불쾌한 얼굴로 학생의 입학 청을 하러 왔던 것이라 대답하였다.
그자의 입학 청은 2중으로 불쾌한 것이었다. 하나는 그자가 우리를 죽이려면 죽일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요, 하나는 그자가 특별입학을 시켜달라고 청하는 당자當者가 그 당시 일제에 아부 협력함으로써 거부를 쌓은 유명인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요꼬야마의 입학 청은 몹시 끈질긴 것이었다. 본인이 직접 3, 4차 왔을 뿐 아니라 부하 형사를 보내어 위협을 일삼았다. 나중에는 ‘애국자의 아들을 왜 안 넣는다는 것이냐’하고 대어 들었다. 물론 인촌 선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입학시험 성적이 부족하면 입학은 허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응수하였다. 합격자 발표를 하루 앞둔 날 요꼬야마는 정복정모에 칼을 차고 고등계 형사 3, 4인을 대동하고 학교에 나타났다. ‘아차 이제는 총검거로구나’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학교를 폐쇄하고 우리를 총검거하려면 할 수 있는 구실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교장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그리하여 오후 네 시경이나 되었을 때 인촌 선생이 몹시 피곤한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내방으로 들어오셨다.
‘갔습니까?’ 나는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네’(인촌 선생은 몹시 말공대에 주의하시는 분이었다. 나와는 연령이 15년의 차이지만 최후의 날까지 ‘응’하는 대답을 하신 일이 없다). 그리고 선생은 내 책상 옆 의자에 앉으시며 ‘사람이 무엇에 집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의껏 해보다가 안 되면 단념하는 것이지요. 일에는 집착하여 의를 구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하시었다. 이 얼마나 강철 같은 신념의 표현인가. 전 사재와 전 정력을 기울여오던 사업이지만 일제의 압력에 굴하여 한 명의 부정입학을 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사업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인촌 선생은 위대한 인물이시라 배울 점이 많은 것은 물론이지만 그 중에도 특히 나는 선생의 신념의 굳음을 배우려 한다. 아니 그것을 배우려는 노력으로써 나의 연약한 성격을 조금이라도 보강해보려 한다.”
(유진오, 경향신문 1955년 2월 24일자 2면)

 

보성전문은 일제 말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격하됐습니다.

 

“보성전문을 경성척식拓殖경제전문학교로 강제 개편하는 과정에서의 대 총독부 교섭은 내가 맡아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또 한 번 경무국 시학관에게 수모를 당하여야했다. ‘당신 학교 척식과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소.’ 사뭇 명령조였다. 훑어보니 그것은 척식과 교과 과정을 되는대로 끄적거려 놓은 것인데 먼저 나하고 합의한 것과는 정반대로 농업계통을 주로 하는 안이었다. 그것이 40년 전통을 자랑하던 보성전문의 싱거운 최후였다.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 창설자 이용익 선생이 망명지 해삼위에서 최후의 숨을 거둘 때에도 황제에게 ‘請廣開 學校 敎育人材以後國權 청광개학교 교육인재이후국권’(청하옵건데 널리 학교를 열어 인재를 교육하여 국권을 회복하옵소서)이라는 유소遺疏를 남기어 못 잊어 하던 보성, 경술국치 후의 어두운 시절을 손병희 선생이 정성을 다해 가꾸어오던 보전, 인촌 김성수 선생이 명실상부한 민립대학으로 키우려고 심혈을 경주해오던 보전, 허다한 민족의 일꾼을 배출하고 유사시에는 젊은 기개와 투지로 기꺼이 민중의 선두에 서오던 보전은 이렇게 해서 소리도 크게 못 질러보고 일제의 폭압 앞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교직을 물러나기로 결심하였다.
인촌은 나에게 개편된 척식경제전문학교의 척식과장을 맡으라 하였으나 이 마당에 척식과장을 맡는다는 것은 생각만하여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나는 개편 교섭의 결과를 자택에 누워있는 인촌께 보고하고 나의 결심을 표명하였다.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나는 이 이상 더 수모를 참아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결심도 인촌의 간곡한 만류에 또 한 번 꺾이고 말았다. ‘그렇게들 그만 둔다면 학교는 누구더러 하라는 것이냐, 나(인촌) 혼자 하라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일인들 앞으로 팽개쳐 버리라는 것이냐’는 인촌의 호소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유진오)

 

“1939년 9월 어느 날 부민관(현 국회의사당)에서 쵸오長 대좌라는 사람의 노몬한사건에 관한 보고강연회가 있었다. 보전에서도 교장 인솔 하에 학생들을 참석시키라는 공문이 와서 인촌을 모시고 법, 상, 양 과장과 생도감이 지정된 수만큼의 학생을 데리고 부민관으로 갔다.
총독부 시학관 야스오까安岡라는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기미 후센다로’(자네 보전이지)하고 반말지거리를 하였다. 야스오까는 나 보다 4, 5세 위기는 했지만 내가 그자한테 반말지거리를 받아야할 까닭은 없다. 그와 나와는 인사도 교환한 일이 없는 사이였다. 분이 치밀어 올라 마주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으나 어찌하겠는가. 꾹 참고 ‘하이’하였더니 ‘그러면 자네네 학생들을 이쪽 앞좌석으로 나와 앉게 해’ 상전이 하인에게 명령하듯 뱉어버리고 야스오까는 다른 학교 학생들 쪽으로 갔다. 나는 야스오까가 시킨 대로 학생들을 앞쪽 빈자리로 나가앉게 하였으나 금방 받은 인간적 모욕은 분해서 참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쵸오 대좌의 강연이 시작되자마자 자리를 떠서 바깥 복도로 나갔다.
마침 벽 앞에 벤치가 있기에 앉아서 담배를 붙여 물고 몇 모금 깊이 빨아 길게 내뿜었으나 벌렁거리는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왜 그러시오?’
‘저, 과장 노릇 오늘로 그만 둘 랍니다.’
‘그건 왜 별안간?’
‘아까 그 꼴 못 보셨나요? 그 야스오까라는 자가 글쎄 기미 기미하고 나한테 마구 반말지거리를 하지 않아요? 과장이 아니었으면 오늘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게고 그런 자한테 수모도 안 당했을 게고…’
그러자 인촌은 웃음을 띠면서
‘그걸 가지고 그러시오? 여보, 나보고도 그 자는 기미 기미 합디다.’
인촌 말에 의하면 지난 하기방학 직전, 학무국장 시오바라鹽原가 학교 시찰한답시고 번쩍번쩍하는 긴 가죽 승마화를 신고 말 등에 높이 앉아 보전에 왔을 때에도 야스오까는 국장을 수행했는데 그 때 교장실에서 셋이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인촌 보고 자꾸 ‘기미’ ‘기미’ 하더라는 것이다. 보다보다 딱했던지 시오바라가 야스오까의 말을 중간에 잘라가지고 일부러 ‘긴 센세이’, ‘긴 센세이’(김 선생님, 김 선생님) 하면서 ‘센세이’에 액센트를 주어 말하더군요. 야스오까란 본래 그렇게 경망한 자요. 그러고 나서 인촌은 ‘유 선생은 오늘 비로소 인생 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이런 꼴 저런 꼴 다 안 보려면 세상을 살지 말아야지. 세상을 살아가려니 별별 꼴 다 보는 것 아니오? 유 선생 보고 과장 하라 길 잘했지. 과장을 안했더라면 언제까지나 유 선생은 책상물림을 면하지 못 할 뻔하지 않았소?’ 하고 허허 웃었다. 웃고는 있으나 바닥에는 침울이 깔린 표정의 이 분한 처지를 누구한테 호소하나 하는 얼굴이었다.
맞붙들고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유진오)

 

<인촌의 꿈이 낳은 교명校名>

임종국林鐘國 선생은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에서 “인촌이 재단을 인수하면서 보성전문은 새로운 모습으로 백 년을 향해서 웅비하기 시작했다.
송현동 시절, 도서관은 고사하고 도서실조차 없었다. 축구장도 회의실도 연구실도 없었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목조 2층집. 선생들처럼 교무실 1개로 복작거리면서 월급을 털어 경비에 보태기 예사였다. 그러던 중 인촌이 암야暗夜에 불기둥처럼 보성전문의 경영을 맡고 나섰다. 빚투성이던 재정을 정리하는 한편, 안암동 현 위치에 6만 2천여 평의 광활한 부지까지 마련하였다. 장래는 대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인촌의 안목에 의해서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기초가 마침내 완성을 본 것이다. 인촌의
생각은 보성전문의 구출 유지가 아니라 향후 백 년이었다. 1920년대에 태동하여 좌절되고 만 민립대학에의 꿈. 그 찬란한 꿈은 석조 도서관의 설계에 의해 보다 완벽한 것으로 현실화되었다.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서 전국 방방곡곡, 미주에서까지 열성적으로 갹출하여 보내어 온 겨레의 성금. 그렇기 때문에 석조도서관의 건물은 인촌이나
당시의 교직원 혹은 기념사업회의 역원 같은 한 개인이나 일부의 인사들에게만 공로를 돌릴 성질이 아니었다. 겨레가 합심해서 이룩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겨레의 공로이자 땀의 소산으로 돌아가야 할, 즉 겨레의 재산이요 꿈이자 희망이었다. 좌절된 민립대학에의 꿈을 바탕으로 하여 출발한 인촌의 야망. 그렇기 때문에 인촌은 도서관 하나만이라도 민족의 힘의 총화總和에 의해서 마련하고 싶었으리라. 보성전문
은 1946년 8월 15일자로 대학에의 숙원을 달성했다. 교명은 ‘고려대학교’. 이것은 인촌이 직접 명명한 것이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국명이자 지명인 코리아, 또 대大 고구려의 민족정신과 청자의 높은 문화성이 깃들인 고려, 인촌이 관립인 경성대학교에 빼앗길까 봐 퍽 심려했다는 일화를 남긴 채 ‘고려’는 우리의 교명이 된 것이다.”고 보성전문의 발전사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김성수 씨, 민립대학을 만드세요. 일대의 최대 사업으로>

문: 지금 다수의 사람들은 반도에 권위 있는 대학 하나가 출현되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달達하여 주는 큰 교육가와 사업가가 하로 급히 출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선생은 10여 년래로 중앙학교을 위시하야 보성전문학교 등 큰 학원을 여러개 붙드시고 수십만의 거재巨財를 투投하야 영재 교육에 진력하시는 터이라 경진일보更進一步하야 다수한 사회인민이 기대하는 이 대학을 창설하시지 않으렵니까. 벌서 지난번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인수 경영하자 다수한
세인은 그를 대학 창설의 첫 계단이라고 보고서 앞날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듣건대 대학이 창설되자면 100만원의 거재가 있어야 하리라는데 이만한 거금을 움직일 수 있는 분으로는 선생도 유력한 그 중의 한 분이 될 줄 압니다. 선생은 대학을 만들어 민족의 문화에 큰 광명을 던져 주시지 않으렵니까.
김성수: 나에게 그렇게 과분한 기대를 가져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2천만 명이나 사는 큰 땅 안에 관립대학이 겨우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은 전대前代의 찬란한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우리니만치 더욱 부끄러운 일이외다. 전년年前 민립대학운동이 기起할 때 얼마나 그의 실현을 기대하였든가 함은 방방곡곡의 수만 인사의 열성을 통하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일로 그동안에 비록 세월이 흘러 지났으나 대학 창설을 기대하는 생각에는 조곰도 변함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학에 대하여는 나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여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단과 대학 하나 만들 때도 건물 기지基地에 20만원, 도서관 30만원, 정부에 바치는 보증금 50만원 그리고 연년年年 유지비의 재원으로 100만원 그려니 적어도 200만원을 쥐고야 실현이 됩니다, 그 거액의 돈이 있으리까?
그러기에 지금 무엇이라고 책임 있는 답변은 하기 어렵습니다마는 나도 그의 출현을 열열히 희망하고 있는 이 땅 사람 중의 하나인줄만 알아주십시오.”(<삼천리三千里> 1932년 10월호)

 

조선인을 위한 민립대학을 세우려던 이 땅, 한 사람의 꿈, 2000만 동포의 꿈은 일제의 압제를 벗어난 후에야 이뤄졌습니다.

 

 

2000만 동포에게 조선 옷을 입히자

 

인촌의 꿈은 컸습니다. 2000만 동포가 ‘일제日製’가 아닌 ‘조선제朝鮮製’를 입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인촌 선생의 꿈은 거창했다. 조선 땅에서 태어나 그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으며, 어찌 일본 사람의 광목으로 옷을 해 입으랴는 생각이었다. 나는 서기로 임명받았다. 하는 일이란 매일매일 장부를 정리하고 잡다한 서류들을 만지는 것이었다. 그 해가 가고 1919년 3·1 운동이 터지자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총독이 물러가고 재등실齋藤實 총독이 부임했다.
무단정치를 지양하고 문화정책을 편다는 것이었다. 차제에 인촌 선생은 본격적인 방직공업과 언론기관을 세울 결심을 굳혔다. 먼저 경성방직 설립준비부터 서둘렀다. 나에게 맡겨진 일은 설립신청서 등 제반 준비 서류를 작성, 정리하는 일이었다. 계동 인촌 선생의 자택 대문에 간판을 내걸었다. 나는 그 집의 사랑채에서 숙식을 하며 밤낮으로 잔 일손을 거들었다. 그 해 9월 5일 자본금 1백만 원으로 경방이 설립되고 10월 5일 명월관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나는 다시 서기로 임명됐다.
사장에는 박영효 선생, 중역진은 인촌을 비롯 이강현李康賢, 박용희朴容喜, 현준호玄俊鎬, 이일우李日雨, 장두현張斗鉉 선생 등이었다. 박영효朴泳孝 선생을 사장으로 추대한 것은 총독부와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경성직뉴의 지배인이었던 이강현李康賢 선생이 경방의 지배인이 되었다.
사옥은 현 인촌기념관에서 계동 쪽으로 올라간 곳에 있는 한옥이었고 경성방직회사란 간판을 달았다. 처음에는 직원이 다섯 명밖에 없었다.”
(이희승李熙昇 국어학자, 전 동아일보 사장)

 

인수한 경성직뉴는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의 부친이 만든 회사였습니다.
“수구문水口門(광희문光熙門) 근방에 선친(윤치소尹致昭)이 운영하던 경성직뉴 회사가 있었다. 왜식 2층집이었는데 문 밖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었다. 공장은 병목정竝木町(쌍림동雙林洞)에 있었고 3대의 족답식足踏式 직기織機와 한 대의 수직기手織機가 있어 가지고 댕기, 염낭 끈, 분합, 허리띠, 주머니 끈, 대님 등을 만들어 냈다. 직공은 약 오륙십 명쯤으로 기억되는데 처음에는 회사가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회사가 생긴지 6년쯤 지난 1916년경부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옷차림이 크게 달라져 댕기니 염낭 끈이니 허리끈 등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 경영난에 빠진 듯하다. 그때 그 회사를 선친으로부터 김성수 씨가 인수했다고 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경성직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력을 사용하여 직조를 한 근대식 소규모 공장이었다고 한다.”(윤보선 전 대통령)

 

인촌의 생각은 깊었습니다.

 

“상표는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이므로 도안은 전문가에게 맡기더라도 아이디어만은 회사에서 내놓아야 한다며, 그 중 하나로 태극무늬를 제시했다. 태극무늬 천으로 만든 전주지방의 태극선 부채처럼 상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태극’이야말로 우리나라 국기에 들어 있는 나라의 상징이자, 민족혼의 상징이므로 경성방직의 설립 정신과도 부합되는 것이었다.”(경방 사사)

 

“인촌 선생이 귀국한 1914년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에는 일제의 면직물이 대량으로 유입하여 국내의 수공업적인 면업이 몰락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실정을 인촌 선생은 무심히 보아 넘기시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인촌 선생이 후에 인수하신 경성직뉴회사도 이미 영세공업으로 경영난에 빠졌던 것이며 몰락 직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1917년 인촌 선생께서 경성직뉴회사를 인수하게 된 이 해는 바로 일본 사람의 자본에 의한 조선방직회사가 부산에 설립되려는 기운이 나돌고 있을 때입니. 이러한 시기를 맞아 경제학의 소양을 가졌고 민족 산업 건설에 뜻을 둔 인촌 선생이 방직업에 착안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인촌선생께서 이강현李康賢 선생 같은 협력자를 얻지 못했다면 선생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 조금 더 늦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강현 선생은 1888년생으로 인촌 선생보다 4세가 위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이 ‘구라마에藏前’ 고등공업(현 동경공업대학의 전신)학교에서 방직기술의 교육을 받았으며 1911년에 귀국한 후 한국의 기술 계몽에 힘써 온 분입니다. 선생은 1910년 이래 경성조선인상공회의소에서 발간되는 상공월보에 거의 매호 글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방직업에
관한 것과 방직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기술적인 것 등 계몽적인 글을 발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상공 지식 보급에 힘썼던 분입니다. 이 이강현 선생이 인촌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인촌 선생이 중앙학원을 인수한 후 이강현 선생이 학원에서 교편을 잡음으로써 알게 된 것입니다. 이강현 선생의 평소의 소원은 우리나라에 방직회사를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방직회사는 그가 원할 뿐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같이 인촌 선생께서 뜻을 같이 하는 이강현 선생을 만나신 것은 당시로서는 하늘이 도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의 기술이 인촌 선생의 방직회사 설립의 결심을 촉진시킨 요소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경방의 창립에m관해서는 당시의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습니다. 인촌 선생의 친구 되시는 분들은 우리 손으로 방직회사를 만든다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며 또 무모한 계획으로 조금 더 지연시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당시 조선총독부의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의 민족자본에 의해서 대규모의 방직회사가 설립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갖은 방해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일인 관리들은 한국 사람들이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고 경영능력도 없으면서 그러한 대규모의 회사를
 든다는 것은 괜한 일로서 그들의 뜻일 뿐이지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묵인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묵인이 결국은 방직회사의 허가를 얻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선생께서 당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자기 재산만으로는 이 회사를 설립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촌 선생께서는 우리나라에 처음 설립하는 방직회사를 우리 민족자본으로 해야겠다, 전국적으로 우리 민족의 회사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전국을 돌아다니시
면서 주주를 모으고 또 전국의 유지들 거의 모두가 이에 참가했습니다. 경방의 창립에는 당시 지방의 지주, 상인들이 많이 참가했고 재산은 많지 않았으나 뜻에 찬동한 사람들이 가담했습니다. 비교적 많은 주를 인수한 사람은 김기중金祺中 김경중金暻中 형제, 영남지방의 대지주인 이일우李一雨 최준崔俊, 이 두 분은 후에 대구은행을 창설한 분입니다.
구포龜浦은행을 창설한 윤상은尹相殷, 영광의 지주인 조설현曺鉉, 서강의 객주 박용희朴容喜, 서울의 실업가 장춘재張春梓 장두현張斗鉉, 황해도의 거상 이승준李承駿 제씨였습니다. 그밖에 군소 지주 1백82명이 가담했습니다.
한 기업체의 설립에 이같이 거족적인 참가를 호소하고 또 참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기업체가 민족 경제의 자립을 목표로 하고 창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경방은 전적으로 민족 자본과 민족의 기술에 의해서 창립되고 운영된 것입니다.”(조기준 전 고려대 교수)

 

“영등포에 공장을 짓고 도요다 회사에서 대폭 직조기 45대를 사들여 ‘태극성’ 상표의 광목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인촌은 민족 기업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태극성’을 상표로 삼은 것인데 일본 당국자들은 이것을 문제 삼아 한동안 말썽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곡절 끝에 우리 민족의 힘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옷감’은 이상하게도 인기가 없었다.
일본 동양방직에서 나오는 3A표 광목과 조선방직에서 나오는 계룡표 제품이 당시 우리나라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는데 그 틈을 뚫고 들어가기란 힘든 일이었다. 종로의 포목상에 사람을 보내 ‘우리 힘으로 만든 광목이니 팔아 달라’고 하면 물건을 받아는 주었지만 물건을 찾는 사람이 없어 그대로 쌓였다. 회사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 선전원을 보내는 등 안간힘을 썼다. 맨 처음 반응이 나타난 곳은 기독교 문화가
일찍 침투했고 민족의식이 강한 서북西北 지방이었다. 회사는 비로소 조금씩 용기를 갖게 되었고 세월이 감에 따라 품질 향상과 생산가 절하에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다가 때마침 물산장려운동이 일기 시작하자 ‘태극성’ 광목은 날개가 돋치기 시작했다. 서북지방으로 나간 물건은 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까지 팔려 나갔다. 그러자 생산이 달리기 시작했다.”(이희승)

 

“경방은 창립 초부터 어려운 시련에 부딪쳤습니다. 그 하나는 1차 세계대전 후의 불황이 닥쳐왔고 따라서 기업계는 심한 자금난에 봉착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강현李康賢 선생이 일본에 기계를 구입하러 갔다가 일으킨 재산적인 손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촌 선생은 이러한 위기를 당해서도 초지를 관철했는데 이것은 선생 개인의 회사가 아니라 민족의 회사이고 이 회사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문제로 민족의 장래를 점쳤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 밖에 조선총독부의 관리들이 조선
민족이 무슨 큰 이런 기업회사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냉소한데 대해 선생은 민족의 울분으로서 이것을 해결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경방을 창립한 인촌 선생은 두 분의 심복에게 회사의 운영을 맡겼습니다.
제품의 생산은 이강현 선생에게, 회사의 경영은 인촌 선생의 백씨 되시는 수당 김연수 선생에게 일임했다고 전합니다. 또 이 사업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조선 사람을 위해 만든 물건이 조선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있어 이때 대단히 슬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나가신 것은 이강현 선생의 기술적인 혁신과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선생의 경영적인 혁신이 경방을 살려나간 큰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 자본이나 일본인 기술자는 일체 받아들이지 않은, 전적으로 민족의 자본과 기술로 설립, 운영된 것이다. 경방의 제품은 태극성, 농구, 불로초, 산삼, 삼신선, 천도 등 한국 민족이 즐겨 쓰는 명칭의 상표를 택했고, 민족기업 제품의 애용에 호소하여 주로 경기와 관서, 관북지역에서 시장을 개척했다. 경방은 민족의 기업으로 설립되었고, 민족의 힘으로 육성되어 성공을 거둔 1920년대 민족 기업의 전형적 모델이다.”(조기준)

 

출처: 동아일보 2020위원회 교열, 자립자강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2011년, 7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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