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민진시화중인居民塵是化中人
속세에 있어야 중인衆人을 교화할 수 있다. 탄허呑虛 스님이 장자莊子에서 인용해 하신 말씀입니다.
“어느 날 탄허 스님에게 물어봤다. 일본에 있으면서 독립운동사를 관심있게 보고 있는데, 어떤 때는 민족반역자가 독립운동가로 평가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독립운동가가 민족반역자로 나오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그 문제를 바라보는 혜안이 없으십니까, 그랬더니 탄허 스님이 ‘장자의 이야기 중에 불을 끄는데, 바깥에서 불을 끄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불안에서 불을 끄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깥에서 운동한 것은 오히려 좋은 여건에서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독립 운동한 것은 가장 힘들었는데, 그것이 김성수’라 했다.”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 원장)
이강훈李康勳 전 광복회장은 “물론 선생은 몸소 총칼을 들고 일제와 맞싸우거나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한 것은 아니다. 선생은 독립운동 일선을 뒷받침하는 ‘제2선’의 독립운동을 자임했다. 동아일보나 중앙학교 보성전문학교 경성방직 등은 모두 일선의 독립운동을 성원하는 제2선의 독립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총칼로써 왜적 몇 사람을 해치울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거대한 국력을 등에 업고 밀어닥치는 제국주의 침략을 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온 겨레의 독립의지를 일깨우고 자라나는 청소년을 잘 가르쳐 내일의 민족 역량을 배양하고 국민 경제의 자립을 통해 국력을 비축하는 길이 오히려 확실한 독립을 담보하는 지름길이었다. 인촌 선생의 언론, 교육, 산업 활동은 바로 독립의 길로 국민들을 인도하는 독립자강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인촌의 교육, 산업, 언론을 통한 구국활동을 ‘3전사상三戰思想’으로 부를 수 있다. 일본에 유학하며 게이오慶應대학의 설립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나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설립자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를 동경하며 교육을 통한 구국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됐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론言論’의 ‘삼전론三戰論’과 도산 안창호가 주창한 교육, 산업, 출판을 통한 민족 운동과 비견된다. 이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첫째 민족을 떠날 수 없고, 둘째 국토를 떠날 수 없고, 셋째 민족과 동고동락하면서 투쟁한다는 방법을 택한 것은 어떤 형태의 독립운동에 못지않은 것이다.”
(강주진姜周鎭 박사, 국학자)
“국내에서 민족정신 고취하고 독립운동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호랑이 잡으려면 굴속에 들어가야지 굴 밖에서 잡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호랑이 굴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현승종玄勝鍾 전 고려대 교수, 전 국무총리)
“이 땅을 떠나서 이 겨레가 있을 수 없고, 이 겨레 없이 이 땅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이 땅, 이 겨레의 자유는 우리의 정열과 의무로 방위하고 발양할지며 이 땅, 이 겨레의 이익은 우리의 의지와 권리로 옹호하고 확충할지니라.”(인촌)
일제하에서 거민진시화중인居民塵是化中人하자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습니까. 그래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아침잠이 많은 대신 밤늦게 방문한 친구를 대하거나 친구 집을 방문하는 것을 즐겼다. 자기의 사업을 어떻게 민족의 진로에 맞출 것인가, 어려운 역경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상의하다보면 밤을 새우다시피 했고 이러한 가운데 불면증이 심했기 때문으로 알고 있다.
인촌 노끈 꼬는 것은 그 때 당시 일화로 우리가 다 알고 있었는데 그게 이제 화풀이입니다. 그 분이 외유내강하지요. 그러나 울분을 못 참으니까 노끈 꼬시면서 화를 진정시키는 겁니다. 그 분 그 술 잡수는 것도 그 분이 그 술이 한 잔만 들어가면 술주정이 나옵니다. 그건 뭐 유석 술주정 이상 입니다. 유석은 술만 취하면 잤는데 인촌은 술 취하면 그날 밤 누구든지 붙들리는 사람은 꼼짝달싹 그날 밤 새웁니다.
좌우간 내 집에 와서 술 그러니까 일제히 금주지. 자꾸 술 가져오라고 하지만 내오기만 하면 밤새우니까. 절대 아침 5시, 6시까지는 안 떠납니다, 인촌이. 그래 인촌만 오시면 우리 집 안에서 쏘가리를 사다가 국을 끓이고 이제 경상도에 헛제삿밥이라고 있습니다. 제사 지낸 밥 같이 비빔밥을 해서 인촌만 내려서면 그거 안 내오면 벼락이 나니까 그 날 헛제삿밥만 준비 안하면 안방으로 쫓아 들어가 내 며느리 니가 그 시애비가 왔는데 시애비 좋아하는 것도 몰라? 이러고 야단이 나니 안 장만할 도리가 없으니까. 그래 인제 헛제삿밥을 장만해서 열한 점 반 내지 열두 점 정도에 그걸 내오면 인촌이 그걸 달게 잡수세요.
신문이 독립을 위한 신문이요. 공장이 독립을 위한 공장이요. 모든 게 그저 독립 그게 표준입니다. 지금 무슨 경성방직이 돈벌이하는 경성방직이 동아일보가 무슨 부수를 많이 늘려가지고 회사가 부자 되고 그게 아닙니다. 지금 사고방식하고 그 때 사고방식이 180도로 다릅니다.
그저 독립. 독립의 한 도구로 돼가죠.”(장택상張澤相 전 국무총리)
‘김성수 군은 거절했어요’
1945년 2월, 인촌 김성수 선생은 일본 천왕이 내린다는 귀족원의원 제의도 거절했습니다. 인촌에게 귀족원 의원을 제의했던 엔도遠藤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인촌 선생이 ‘나는 지금까지 민족주의자로서 살아 왔다. 지금 와서 그런 일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일제 고등경찰의 총책인 야기八木 당시 조선총독부 보안과장은 어느 날, 인촌에게 산강철주山岡鐵舟(덕천德川막부 말기 3대 무사의 한 사람-인용자주)의 횡액을 선물하며 “철주鐵舟는 덕천德川막부의 충신이었으나 일단 명치유신이 성취한 후, 명치 천황의 시종으로서 충성을 다한 인물입니다.
귀하와 같은 한국의 대표적 민족주의자가 총독정치에 협력하여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용이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원願인줄 알고 있습니다만” 하자 인촌은 웃으면서 “기其 원願은 매우 무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횡액은 고맙게 받겠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아베 총독 시대의 개관: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에게 듣는다>
일시: 1959년 9월 16일
신국주申國柱 전 동국대총장: 저기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칙선 귀족원 문제인데요, 대체로 16명이 지명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엔도: 아니야.
신국주: 그렇다면 어느 분으로 결정한 겁니까. 16명의 이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기록…
엔도: 내가 16명을 확실히 결정했다는 것은 지금, 기억에 없어요.
신국주: 기록에는…
엔도: 내가 꼽아 볼께요. 내가 직접 교섭한 사람은, 지금 말씀드려보면, 첫째는 김성수 군. 그런데 김성수 군은 거절했어요. ‘나는 지금까지 민족주의자로서 살아 왔다. 지금 와서 그런 일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했어. 나는 김성수 군의 마음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했지. 그래서 김성수 군에게는 자네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은 취소하겠네 라고 했지. 다음은 누구였나, 잊어 버렸네.
신국주: 대전 사람으로, 지금 조선은행 총재로 있는 데이운요…그 쪽도 있고, 16명이 대체로,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이름은…
엔도: 혹시 소문, 아니었습니까. 마지막으로는 내가 결정하지 않으면 안됐지.
미야타: 선생님께서 모르고 계셨다면 말이에요.
엔도: 그건 여러 가지 소문이 있었어요. 그 때는요. 예를 들면, 이 혼란기에 누구누구가 정무총감 자리에 앉는다든가, 누구누구가 어디 지사가 된다든가 여러 소문이 있었는데, 우리들이 예측한 것과는 다른 소문도 많았어.
신국주: 선생님, 제가 질문했던 것은 저기 선생님이 어떤 기준으로, 이른바…
미야타: 어떤 방침 아래.
신국주: 어떤 방침을 갖고 어떤 사람을 내정했을까 하는, 이른바 내용판단에 대해서입니다.
엔도: 그건 정치상 편의 같은 것보다는, 역시 인격과 식견이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지방장관, 각 도 지사의 의견도 여러 가지로 듣지 않으면 안됐지. 대체로 우리도 알고 있는 사람들인데, 맨 먼저 거명된 인물이 김성수 군. 김성수 군은 당시 누구의 눈에도 정말 훌륭한 사람으로 보였다고 생각해요. 정치상으로야,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알고 있었으니까 칙선의원을 삼아도 될지 어떨지 라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별 문제였어. 훌륭한 사람을 보낸다는 것이 방침이었으니까.
신국주: 그래도 이런 말은 좀 이상하지만, 일본에 협조적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내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독립 사상을 갖고 있는데도 조선의 지도자로 간주되는 사람을 모두 포함시켜 판단했다고 보기에는 좀…
엔도: 물론, 민중의 지도라고 합니까, 그런 걸 전혀 도외시하지는 않았어요. 방법론적으로 조선에서 민중의 지도전선에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귀족원의 칙선의원을 삼고 싶었어요.
(<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조선총독부 고위관리의 육성 증언>, 도서출판 혜안,
2002년, 286~288쪽)
“정무총감 비서실에 들어가서 명함을 내자 비서관이 들어갔다 오더니 바로 들어가시라 하더란다. 그러자 면회를 대기하고 있던 일본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저 조선 사람이 누구냐며 수근거렸다. 인촌 선생을 만난 엔도 총감은 사업이 잘 되느냐 어쩌고 겉치레 인사말을 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천황이 ‘내선일체’ ‘일시동인’의 홍은을 조선의 유력 인사들에게 내리기 위해 금번 귀족원 의원 및 준의원 몇 석을 내리려 하고 있다고 배경 설명을 하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인촌 선생은 순간적으로 이건 강제 임명이 아니라 의사 타진을 하는 것으로 보아 융통성이 좀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어서 선생도 벌떡 일어나(천황을 들먹거릴 때는 모두 일어서게 돼 있었다.) 고마우신 말씀이라 답하고 자리에 앉자, 총감도 벌떡 일어났다가 앉더란다. 그러더니 다시 총감이 김 선생도 의원이 돼 달라고 고압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거절하면 재미없다는 식으로 나오려 할 때 선생은 다시 벌떡 일어나서 천황의 하해와 같은 은혜는 잊을 길 없으나 일본을 위하여 아무런 공헌을 한 일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자격이 없어 받을 수 없다고 말하자 총감도 떡 일어나서 들었다. 다시 앉자마자 총감은 또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생은 나는 일본의 후쿠자와와 같이 아무 벼슬도 않고 오직 교육자로 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므로 정치와 관련을 가지면 안 된다고 거절의 유를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실랭이가 오래 계속되자 엔도는 귀족의원을 하지 않겠다는 인촌 선생의 뜻이 굳은 걸 알고는 설득을 포기하는 듯 했다. 이윽고 그는 이번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라며 돌아가시라 하더란다. 그걸 승낙 했더라면 꼼짝없이 친일파로 몰렸을 뻔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윤택중尹宅重 전 국회의원)
<참정권 시행의 경위를 말한다>
일시: 1958년 8월 26일
다나카: 예, 꼭 하지요. 경무국장으로 곧 죽을 것 같지도 않으니까. (웃음) 그래서요,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조선을 어쨌든 병합하고 다스려 나간다는 전제, 이미 빼앗아 버린 거니까 그 후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어떻게 고민했는지에 대해서 입니다. 이것은 이미 쓰쓰이 군의 말에서도 나왔습니다만, 조선총독부에 접근하려는 이른바 친일을 팔려는 자, 그런 자들 가운데 제대로 된 사람은 없다고 까지야 극언할 수 없지만, 전혀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보다는 역시 병합에 반대하여 우물에 빠져죽은 사람의 자식이라든가, 작위를 절대로 거절한 사람의 자식이라든가 친척 같은, 조선에 굳게 터전을 잡고 있는 그런 사람들과 역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면에서는 역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위정당국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역시 일본 내지의 국민과 조선 현지에 있는 일본인을 납득시키면서 해야 하는 것이 정치니까. 그것에는, 저 사람은 의지가 될 것 같으니 가능한 한 우리 쪽 사람으로 만들려고 아무리 공을 들여도 절대 복종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복종한다 해도 반드시 바로 관리로 삼기에는 불가능한 사정도 꽤 있었다.
그래도 가능한 한 애써서 상당한 지위를 주어 일하게 한 것이 천도교의 저 뭐랬나…
쓰쓰이: 최린.
다나카: 아아, 최린. 만세소요 때 저,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해주었는데, 코밑에 수염 기른 할아버지, 뭐랬더라, 잊어버렸네. 시부야 씨, 예, 윤치호尹致昊. 그리고, 뭐 이 사람은 관리로 등용하지 못했지만, 살해당한 여운형呂運亨 그리고 민간에서는 김성수가 있었는데, 김연수는 마지막까지 저항하여…
(고이소 내각의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서기관장)
<민족주의 진영 거두巨頭와의 교유交遊>
Y: 그런데 나는 이와 같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진정신眞精神에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 외도 보성전문학교 교장 김성수 씨,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씨 등 당시 한국 내에 있어서 민족주의 진영(김구 씨 등 해외망명자는 제외)의 최고봉이라고 지목되는 인물과도 상호 입장을 초월하여 인간적 교유관계를 가졌던 것이네. 다시 말해서 상호간 상대의 입장을 알면서 인간 끼리로서의 교유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라네.
K: 오월동주吳越同舟가 아닌 오월우호吳越友好인가.
Y: 나는 김 씨 및 송 씨와는 상당히 친히 교제하였다. 어떠한 날 김 씨 댁에 초대를 받았을 때 산강철주山岡鐵舟의 횡액을 선물로 지참한 일이 있네. 그 무렵 상호 농담까지 교환할 수 있을 정도로 친근하였지.
나는 기其 횡액을 김 씨에게 주면서 웃으면서 “철주鐵舟는 덕천德川막부의 충신이었으나 일단 명치유신이 성취한 후, 명치 천황의 시종으로서 충성을 다한 인물입니다. 귀하와 같은 한국의 대표적 민족주의자가 총독 정치에 협력하여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용이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원願인줄 알고 있습니다만” 하고 이와 같은 뜻을 표명한 것이네. 김 씨 또한 웃으면서 “기其 원願은 매우 무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횡액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고 쾌히 수납하였네.
(야기 노부오八木信雄, <일본과 한국>, 일한문화출판사 한국지점, 1981년, 261~263쪽)
<한일 막후 괴물 최서면의 현대사 비화>
“고등경찰의 총지휘자인 조선총독부 보안과장을 지낸 야기 노부오八木信雄를 잘 압니다. 술 한 잔을 하며 ‘당신쯤 되면 한국 사람을 전부 다 안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 사람 중 진짜 애국지사를 한 명만 골라보라’고 했더니 주저 없이 김성수 선생을 꼽아요. 총독의 명령으로 귀족원 의원을 임명하려고 김성수 씨를 찾아가 도장을 찍으라고 하니까 아무 대답이 없더래요. 시간을 너무 끌어 야기 노부오가 ‘빨리 도장을 찍어 달라’고 하니까 ‘신문사, 방직회사까지 다 내놓았는데 이것을 안 하려면 또 무엇을 내놓아야 하느냐’고 하더래요. 이 순간 야기 노부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그의 본심이 항일에 있었다는 것을 느꼈답니다.”
(최서면, <월간조선>, 2002년 6월호, 416~417쪽)
“총독부가 인촌 김성수에게 귀족원 작위를 받으라고 했는데 거부했다. 인촌이 작위를 거부한 것으로써 총독부 관리들은 일제 36년 통치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김성수에 대한 존경론이 해방후에도 있었다.” “야기 노부오 전 총독부 보안과장이 해방 후 한국에 왔을 때 내가 일민 김상만 선생께 데려가 소개시켜줬는데, 이 자리에서 야기는 ‘내가 귀족원 작위 받으라고 그렇게 권했는데 받지 않아 배신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아, 조선 사람 지배에 실패 했구나’하고 느낀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야기 과장은 실제 책에서 ‘조선 민족은 우리가 도저히 지배할 수 없는 민족이다. 우리는 실패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 같은 얘기를 들은 일민은 빙긋 웃으며 ‘제게 재미있고 훌륭한 일화를 들려주시니 저도 선물을 하나 드리겠다.’며 고려대 본관 쪽으로 안내했다. 고려대 본관 후문 입구 바로 위쪽 벽에 개구리 모양 비슷한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일민이 아버지가 남겨준 이 문양을 야기에게 보여주니 야기가 깜짝 놀랐다. ‘이 건물 지을 때 우리가 민족정신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며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던 것인데 결국 여기 있었단 말이냐.’고 속았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서면, 2004년 9월 19일과 10월 18일)
<동아방송 정계야화 장택상 증언>
장택상: 아니 이걸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요. 인촌 만나고 친하고 참…친구들 지금도 허다하고 많이 있지만은 나의 인촌의 인상은 이거에요. 그 오척단굽니다. 그 키도 우리 키 보다도 적으니까 좌우간. 그 뭐 또 농을 잘하고 이 뭐 참 친구끼리 뭐하든지 이러면 말 열 마디 나오면 일곱 마디는 농으로 그 양반이 참 행세를 하니까. 허나 어떠한 그 대의명분에 딱 걸려서요, 괘씸한 일이 있다든지, 나라나 민족에 관한 그 일에 딱 봉착할 때는 서릿발 같습니다. 참. 매와 같은 위엄이라는 거는 도저히 당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을 갔다가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넣으려니 인촌이 듣나요?
사회자: 대개 어떤 사람들이 공작을 했었나요? 그 때
장택상: 그 때 그 공작은 한국 사람으로서 한상용 씨라고 우리나라선 친일파론 참 거물입니다. 그 분이 역할도 많이 했지만. 그것 보담도 팔목八木, 야기라고 조선총독부 보안과장으로 있던 자지. 그 분이 인촌을 자주 만났고…고하, 인촌, 낭산 다 자주 만났습니다. 그 양반이 그 세 사람만 삶으면 조선반도에 대한 저희들 정책은 다 원활하게 돌아갈꺼라 하는 그러한 복안으로. 야기가 갖은 술책과 참 모든…금전도 아마 얼마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인촌을 귀족원 의원으로 내세울라고.
인촌만 내세우면 대한제국은 합병당하고 다 없어졌지. 앞으로 새싹 트는 우리 독립정신이라는 건 고대로 소멸되고 만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고. 또 저들도 그렇게 생각했고…인촌 하나의 문제니까 좌우간.
인촌만 엮어 놓으면 뭐 앞은 탄탄대로다. 한국에 대해선 더 이상 걱정할 여지가 없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건 자타가 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인촌을 끌어넣으려고 갖은 술책을 다 썼지.
사회자: 팔목八木이라는 보안과장은 결국 해방 직전까지 있었던 사람이죠?
장택상: 그 자가 한국을 6, 7년 동안을 통치했습니다. 한반도를. 총독 밑에 불과 경무국 과장이지만은. 과장으로서 행세한 게 아니고 직무는 과장이래도.
사회자: 특수공작.
장택상: 네. 특수공작. 기밀비라는 게 그 때 돈으로도 수천만 원을 썼고. 또 똑똑한 자야.
사회자: 결국은 인촌 선생이 창씨도 물론 안하셨고. 뭐 일체 가담 안하셨…
장택상: 그런 얘기. 말씀조차 내지 마쇼. 창씨가 뭐야. 인촌이 창씨 했으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수립되나요?
(동아방송 정계야화 제9회, 1965년 2월 19일)
출처: 동아일보 2020위원회 교열, 자립자강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2011년, 60~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