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본사의 전도가 심히 험하도다. 그의 운명을 누가 가히 예측하리오. 오인(吾人)은 오직 민중의 친구로서 생사 진퇴를 그와 더불어 같이 하기를 원하며 기(期)하노라.”

  192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사를 쓴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1894~1947.12.2).

  그가 쓴 창간사의 마지막 말처럼 동아일보의 전도(前途)도 심히 험했고, 그의 운명도 심히 험했습니다.

  한국 언론 최초의 순직 기자 장덕준은 그의 형이고 동생 장덕진(張德震, 1898년)은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려다 중국인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1924년 8월). 3형제가 비명(非命)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론정연하고 웅변가였던 설산 장덕수는 26살 때 동아일보 창간 주간, 그 후 초대 주필(1921.9~1923.4), 부사장(1921.9~1937.1)으로 16년 8개월을 동아일보에 재직했자만 국내에 있은 것은 3년여에 불과했습니다. 13년여는 ‘해외상주 특파원’ 이란 한국 언론 사상 전무후무한 직책으로 미국과 영국 등 해외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소위 ‘레닌자금수수설’ 때문이었습니다.
 ‘레닌자금수수설’ 로 설산은 공산당원들의 테러 표적이 됐습니다. 

  “그때 청년 사이에는 장덕수 씨가 홀로 낭비하였다고 오해하고 칼을 들고 장 씨 뒤를 쫓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상 중국에서 그 돈의 일부를 낭비하였다는 김립(金立)은 암살됐다. 이것은 1921년부터 일어난 일로 1923년에는 공기가 험악하였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년)

  곽복산(郭福山) 전 중앙대 교수의 전언(‘다정다감한 인격자-장덕수’, ‘거인은 사라지더라도’, 송건호 편, 휘문출판사, 1973년)

 “1920년 1월 소비에트 공산정권은 2백 루블(인용자 주-액수는 착오)의 원조를 미끼로 임정의 공산화를 획책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상해에 고려공산당이 조직되었고 그 지령을 받은 좌익계는 부단히 국내에 잠입하여 청년연합회의 분열공작을 벌였다. 이 영향으로 1922년 4월에 좌익계의 김사국, 이영 등이 서울청년회를 조직하고 때마침 열린 조선 청년연합회를 파국에 몰아넣었는데, 이즈음 상해에서 공작금으로 들여온 자금 4만원을 장덕수가 낭비하였다는 풍문이 나돌았다.…(중략)…그를 제거하려는 서울청년회계 공산분자들의 테러 위협이 그의 신변을 압박하였다.…(중략)…미행자는 요코하마 항까지 따라가 그에게 가해하려 했다 한다.”

 

동아일보 1923년 4월 18일자 2면,  2개월 예정으로 장 본사 부사장 도미(渡米)

 

 1923년 4월 19일자 1면, 본사 주필 장덕수 군을 송(送)함

 

  2개월 예정으로 떠난다고 했지만 장덕수 선생은 10년 넘게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 기간 중 그는 런던대학에서 노동문제를 연구하고 1936년 미 콜롬비아 대학에서 ‘British Methods of Industrial Peace’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산업평화( Industrial Peace)’ 란 말이 그때 조선에 처음 소개됐습니다. 일제하 조선시대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사에서 민주주의, 민족주의, 문화주의를 주창한데 이어 1936년 ‘산업평화( Industrial Peace)’ 를 얘기하는 그는 역시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였습니다. 그의 논문은 귀국 후 그가 몸담았던 보성전문(현 고려대) 도서관에 보관돼 있습니다.

 

 1936년 5월 23일자 2면 정덕수 박사논문 통과

 

 13년여를 해외에서 떠돌다 돌아온 그는, 그가 보고 느낀 바깥 세상의 일들, ‘영미(英米) 정치 학계의 일단(一端)’ 3회 등을 동아일보를 통해 전합니다.

 

1938년 1월 9일자 1면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전기를 쓴 이경남 선생은 신동아 1981년 9월호, ‘풍운(風雲)의 설산(雪山) 장덕수’에서 그를 13년여 만에 고국에 돌아올 수 밖에 없게 한 ‘레닌자금수수설’의 발단과 결말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1920년 봄부터 설산은 우리에서 풀려난 호랑이가 산정과 계곡에서 마음껏 포효하듯 붓으로 입으로 혹은 손짓으로 거의 무소불통이었다. 노동공제회, 서울청년회, 청년회연합회, 조선체육회, 민립대학기성회, 조선물산장려회, 지방 순회 강연회…등 설산이 관여한 사업은 너무나 많았으며, 그러한 조직과 운동은 설산의 이름과 두뇌를 필요로 하였다. 그는 어느덧 이 나라 사회의 명사로 등장했으며 각광을 한 몸에 받는 지도자가 되었다. 인촌 김성수의 절대적 고애(顧愛)와 동아일보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해준 것이 사실이었지만, 아무튼 20대 청년인 설산이 당시에 차지했던 사회적 명망은 가위 전무후무한 ‘기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돋아 오른 못은 정이 먼저 맞고, 가지가 무성하면 바람을 많이 타게 마련인 법, 설산은 ‘반장운동(反張運動)’이라는 역풍에 직면하게 된다. ‘반장운동(反張運動)’이란 ‘타도 장덕수’ 운동을 뜻하는 것으로서…(중략)…물의의 발단은, 소련의 ‘레닌’이 한국독립운동 지원 자금으로 상해임시정부에 보낸 자금을 좌파 국무총리 이동휘가 농단하였는데, 그 중 국내 공산당 조직을 위해 들여보냈던 5만원을 장덕수가 받아 탕진하고 말았다는 미스터리 같은 이야기였다. 당시 돈 5만원이라면 금값을 기준으로 환산하는 경우 지금의 화폐 2억 원 정도가 된다. 이 사건은 흑백은 여하 간에 설산의 명성을 실추시켰으며, 1920년대의 한국민족운동사상 가장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필자가 이 문제에 대하여 수집한 제 자료(문헌과 증언과 항설)를 유형별로 정리해본 결과 그 갈래는 다음과 같았다.

 1. 설산이 그 자금을 착복한 혐의로 빗발 같은 비난을 받았다는 내용(착복의 진부는 가리지 않고 그런 혐의를 받아 구설수에 말려들었다는 어의<語意>이다).
2. 설산이 추궁과 비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국유학길에 올랐다는 내용(착복 탕진을 기정사실로 단정하는 것이다).
3. 설산이 그 자금의 일부를 가지고 미국유학 학자금에 썼다는 내용(역시 착복 횡령을 기정사실로 단정하는 것이다).
4.설산은 돈 문제에는 청백하였으며 착복설은 좌익분자들이 반장운동의 무기로 사용한 중상모략이라는 내용.

   이상의 네 가지 설(자료)중 1~3은 설산의 명예를 대소 간에 해치는 것이며 4는 설산의 결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하늘 아래 진실은 오직 하나 일 텐데 설산은 어느 항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유광렬 선생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유광렬 선생은 설산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동지이며 설산이 미국으로 떠난 후에도 줄곧 언론계에 몸담아온 사계의 원로이시다.

-내가 매일신보에 있던 1940년경의 일이었다. 하루는 이봉수가 나를 찾아와서 “이제는 독립운동하기도 어려운 세상이 됐으니 종석에게 바른 역사기록을 위해 한마디 증언이나 해두겠다”하며 설산과 독립운동자금 관계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봉수의 말인즉, 상해에서 5만원을 가지고 서울에 들어와서 장덕수를 만나 그 돈을 넘겨주었더니 설산은 그 가방을 열어보지도 않고 최팔용을 오도록 해서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다. 최팔용은 그 돈을 좌익 선전 잡지 ‘신생활’을 출판하는데 쓰고 일부는 낭비도 하였는데, 이봉수는 그의 말을 이렇게 맺었다. “종석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니까 꼭 알아두었다가 훗날 밝혀야 해요. 장덕수는 사상노선이 다르긴 해도 그 자금문제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어.” 이렇게 말해준 이봉수란 일본 유학 후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하여 중국과 국내에서 지하공산당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언론계에도 종사한 바 있었고, 8.15 해방 후에는 평양으로 달려가 소위 북조선인민위원회 재정부장이 된 공산주의자이다. 사상적으로는 설산과 불상용의 관계에 있었지만 이봉수가 이렇게 실토했다는 1940년경이라면 일제의 탄압이 하도 철저해서 한국의 공산당조직은 지리멸렬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실의와 패배주의 상태에 빠져있던 무렵이므로 이봉수 역시 지하투쟁에서 손을 씻고 체념적인 감상에 접어 있었으므로 뒤늦게나마 20년 전의 그 ‘반장모략’의 진상을 털어놓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증언(이봉수의 고백과 유광렬 선생의 전언)에는 진실을 천착함에 있어서 논리상의 소누점(疏漏點)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상해에서 5만원의 붉은 자금이 국내에 들어올 그 시기에 이봉수가 상해에 있다가 서울에 잠입한 행적이 있느냐 하는 알리바이 아닌 현장실재 확인 모호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의문은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하게 하는데, 그것은 이봉수의 고백내용에 있어서 이봉수 본인이 직접 그 돈을 가지고 입국했다는 말인지, 이봉수의 동지(공산당원)가 돈을 가지고 들어와서 설산과 접선했었다는 것을 이봉수가 증언하는 식으로 말한 것인지의 미묘한 차이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광렬 선생은 하도 오래된 일이 돼서 그 미묘한 어의의 차이는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미스터리의 마지막 열쇠고리는 얼마 후에 곧 풀렸다.

작년(1980년) 여름이었다.
동아일보사 김상만 회장께서 귀중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당시 설산 전기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필자를 위하여 설산과 동시대를 호흡한 생존인사 몇 분을 롯데호텔에 모셔다가 회고담을 겸한 회식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이 자리에는 양원모 김철수 옹과 유홍 김선기 함동욱 선생, 그리고 이동욱 사장, 임순묵 동아일보사 출판국장(당시) 등이 배석하였다. 양원모 김철수 옹은 설산과 와세다대학 동창이며 설산 보다 한두 살 씩 연상이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89세의 김철수 옹이 아직도 쇠소리가 울리는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60년 전의 일을 이로정연하게 증언하는 것이었다.

-그 돈은 내가 가지고 국내에 들어왔다. ‘레닌’에게서 상해에 먼저 온 40만원 중 이동휘와 그 측근이 일부를 축내고 18만원이 남았었는데, 국내 지하당 조직자금으로 5원을 보내기로 했다. 나는 현금 5원을 이중가방에 넣고 상해에서 천진까지는 배편으로, 천진에서 신의주 서울까지는 기차 편으로 왔다. 나는 서울에 들어오자 ‘비전옥’이라는 여관에 투숙하고 곧 장덕수를 불렀다. 3.1운동 직전, 상해에서 헤어진 후 2년 만에 만난 우리는 두 손을 마주잡고 재회를 반가와 했다. 감격파인 설산은 눈시울을 적셨다.…(중략)…

-나는 설산에게 자금 이야기를 꺼내 유용하게 쓰라고 말했다. 그러나 설산은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는 이중가방을 풀어보지도 않고 “나는 돈 문제는 관여하지 않겠어. 독립운동이나 정치문제에 관해서 의논을 하고 참모역할이라면 또 모르지만 자금문제는 노 터치하겠어.”

그는 손가방을 밀어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몇몇 동지들 이름을 짚어보다가 최팔용에게 낙착되었다. 최팔용은 동경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사건’ 때 주동자였고, 급진적 사상을 가진 나의 동지였다. 나는 최팔용을 은밀히 불러 그 자금을 전달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갔던 것이다…. 필자는 오랜 체증이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을 맛보았다. 동석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김 옹 옆에 앉으신 양원모 옹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그렇다면, 설산이 그 자금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어째서 그 빗발 같은 비난에 대꾸하지 않았으며 과격파 김사국 폐거리가 폭력을 휘두르며 돈을 내놓으라고 극성을 부렸는데도 “아뭏든 자금문제는 모를 따름이다”라는 소극적 반응으로 일관하여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지 않았을까? 이 소극적 부인태도 역시 자금 관련설 못지않게 의혹을 가중시키는 미스터리였다. 여기에 대하여 김철수 옹은 계속 증언했다.

-상해로 돌아간 나는 국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설산이 그 자금을 사사롭게 유용, 탕진했다는 누명을 쓰고 그의 명성이 실추되고 있다는 말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실은 최팔용이 그 돈의 일부로 ‘신생활’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좌익잡지를 발간하였고 일부는 사사롭게 썼던 것이다. 최팔용은 본시 부자 집 아들이었으므로 그의 돈 씀씀이에 대하여 일본 경찰은 가산을 축내는 것이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설산은 자기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 최팔용의 이름을 끌어대면 그만일 것이지만 “나는 모른다.”는 소극적인 부인만으로 일관했다. 동지를 팔아서 자기를 건지는 그런 얄팍한 짓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설산이 이데올로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항일반체제투쟁에 나선 사람들을 일본 관헌의 검거에서 보호하려고 입을 굳게 다문 그 처신에 대하여 감탄하고 존경해마지 않았다. 만일 설산이 자기 결백을 입증하려고 진실을 토해냈다면 일본 관헌은 손 안대고 코 풀 듯이 최팔용과 ‘신생활’에 관여한 사람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철수 옹은 증언의 끝부분에 가서 물 끼 젖은 음성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설산의 인간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설산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국내 동지들에게 자금수수 진상을 분명히 가려주지 못한 것은 최팔용이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설산보다 더 나에게 가까웠으며 그 좌익사상 잡지 발행에 지장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설상은 속죄양이었다. 나는 대학동창인 그에게 몹쓸 짐을 안겨준 셈이다….

설산의 붉은 자금관련설의 진상은 이날 결정적으로 가려진 것이다. 김철수 옹은 연대로나 학식으로나 박헌영을 앞지르는 조선공산당 초기조직의 핵심이었다. 일제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파쟁 와중에서 박헌영이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써 8.15 해방 후 조선공산당. 남로당 역시 박헌영의 독단장이 되었지만 김 옹은 소위 ‘인민공화국’의 체신부장 대리 중앙인민위원 등으로 해방정국에서 좌익 중진간부로 활약하다가 박헌영 일당과 결별, 지금은 고향인 전북 부안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김철수 구술자료(정진석 소장본, 284~285쪽)

 장덕수보고 40만원 다 먹었다고 허는 놈들은 고의나 혹은 모리고 허는 소리지. 장덕수에게 내가 돈 그때 4만8천원인가 갔어. 4만 8천원도 아니여 4만원인가 되는 것 같어. 조선 안에 들어 온 돈이 통 40만원에서 4만 8천원 들어온 것 같으여. 그런 게 5만원이지 약. 그런디, 내가 가지고 들어온 것이 4만원 가직 들어와서 먼저 달리 또 씨고.

 가지고 와서 장덕수를 일본여관으로 오라고 해 가지고, 이거 가지고 나헌테 만족 같을꼬, 암호로 쓴 문서 가지고 왔은 게 이놈 가지고 빨리 가라고. 내가 잽힐른지 모른 게 빨리 가라고. 그런 게 돈 안가지고 갔어. 나 그러면 빨리 가서 최팔용을 보낼 테니 최팔용허고 얘기해라. 그 사람이. 왜 그럴 것 뭐 있냐? 아 그래도 각기 의무가 있인게…최팔용 보내고 돈을 안 받어. 그래서 최팔용이가 나중에 왔다 말여. 와서 최팔용이게 건네주고. 그렇게 장덕수한테. 아 저 동아일보 사장에 있으면서 만년필 하나를 못 산 사람인데 뭔 돈 40만원을 장덕수가 먹어? 멀쩡한 돈인데 40만원 밲에는 통 안 나왔는데, 노서아에서. 아 가져오니라고 자동차허고 저 김태준인가 이태준인가 돈 받으러 가다가 죽었어. 자동차까장 뺏기고. 그러고 상해서 임시정부 개조운동허니 라고 돈 다 써지고. 공산당에다 내 놓기를 돈 15만원 내 놨어. 그 돈 15만원 내가 받어 가지고 공산당 재무로 씨고 있는데. 김립이가 죽어버린 뒤여. 국제당에서 ‘돈 씬 것 보고를 해라’ 그래기래. 내가 다 보고해 줬다. 그거 시방, 저 조선중앙 잡지에 이놈들이 뭐라고 함부로 냈길래 내가 중앙잡지에다 내가 40만원에 대한 것, 그 전부 그것 써서 발표를 했어. 근게 고건 내가 시방 살어 있는 사람 가운데 나보담 더 알 사람 없지. 그것 내가, 그것 쓸 적에 내가 어디서든지 시방 이런 것 말헐 적에 내가 사사로운 말 만들어서 그렇게는 안 헐라고 그려. 내 양심껏 당파적으로 헐라고는 안혀. 그려”

  그래서 송진우 당시 사장과 인촌은 그에게 해외상주특파원이란 직책을 주어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김철수 구술자료(김소중 소장본, 179~185쪽)
“장덕수를 여기다가 그냥 두어서는 장덕수 감옥에 들어갈 거 아니여? 자꾸 이놈들이 그냥 장덕수. 그런 게, 그런 게 김성수 씨가 꾀를 내 가지고, 장덕수를 부사장으로 해 가지고…(중략)…그래 가지고 미국에다 유학을 보내고 장덕수를 여기서 공격을 안 되도록 미국에 유학 보내면서, 신문학 연구를 하라고 보내 분지고, 여그 조용하게 만들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곽복산(郭福山) 전 중앙대 교수는 그의 일생을 간결하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1894년 12월 10일 황해도 재령읍 매화리 나무리 벌판에서 한 빈농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3,4 세 때 그의 부친이 사망하니 그의 맏형 덕주, 중형 덕준과 아우 덕진, 여동생 덕선 등 5남매는 편모슬하에서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1900년 7세 때부터 모친의 열성으로 한문사숙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이후 사립 연의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1907년 이곳을 졸업하였다. 1908년 14세 때 그는 집안 형편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 통감부의 진남포 이사청 급사로 취직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일어로 된 중학 강의록과 보통 문관 시험 강의록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1911년 9월에는 총독부에서 시행하는 제임(制任)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치 않고 와세다대학의 문학 강의록과 정경과 강의록을 독학하여 1912년 7월까지 이를 전부 수료하였고 이해 초가을에는 도일하여 와세다 대학 고등 예과에 편입하였고 1913년 7월 5일 이를 수료하였다. 이후 그는 동 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학문도야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특히 웅변에 유의하여 동 대학 재학시절 전 일본 웅변대회에 출전, ‘동양평화와 일본의 민주주의’라는 연제로 당당 1등에 입선한 일도 있었다. 이 시절의 그의 고학 생활은 참담했던 모양으로 일본 군인의 집에 하인으로 일하며 총도 닦아주고 잡역에 종사하며 남루한 복색으로 통학하였으나 이런 역경을 태연히 극복하였다 한다. 1916년 7월 3일 그는 동 대학 정경과를 2위로 졸업하였다. 이 무렵 와세다 대학에는 한국인으로 최두선이 철학과를 1위로, 현상윤이 사학과를 1위로, 이광수가 특대생으로 영문과에 재학 중이어서 몇 사람 안 되는 우리 대학생들이 와세다를 압도한 감이 있었다. 장덕수는 웅변대회의 연제에서 엿보이듯이 이때부터 민주주의 사상의 신봉자가 되었고 평생을 민주주의 투쟁을 위해 헌신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장덕수는 잠시 고향에 돌아가 모친의 가업을 도우며 소일하다가 중국 상해에 망명하였고 1918년 말경에는 그곳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맹원이 되었다. 이 망명의 길이 그가 나라와 겨레를 위한 평생 동안의 민주주의 투쟁의 첫 발자국이었다. 이때는 세계 제 1차 대전 후 대두된 민족자결사상이 약소국들 간에 팽배되어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나 독립운동자들도 이를 계기로 하여 우리나라의 독립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 12월 말 경 당시 상해에 망명 중이던 여운형, 조동호, 김철, 김규식, 선우혁, 장덕수 등은 그곳에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특사로 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하였다. 그리고 장덕수를 일본과 국내에, 김철, 선우혁, 서병호 등을 국내에, 여운형을 노령에 파견, 종교계 및 각 사회단체 유지들과 독립운동의 실행 방안을 의논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장덕수는 그해 12월 27,8일경 상해를 출발하여 요코하마를 경유, 2월 3일에는 동경에 도착하였고 17일 동경을 출발, 20일에 서울에 잠입하였으나 이내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잇달아 일어난 3 1운동을 그는 경찰부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맞았으며 이 운동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던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하였다. 이해 11월 일본의 하라게이 내각은 조선독립운동의 해결책으로 ‘국내에서는 48인의 옥중회의를 열게 하고 해외 독립운동자와의 접촉으로 조선을 자치로 해결하려는 안’을 내걸고 상해에 체류 중이던 일본인 목사 와다세쯔네요시에게 의뢰하여 임시정부의 대표를 초청토록 하였다. 일본 척축국장관 명의의 초청을 받은 임정에서는 외무차관 여운형을 파견키로 하니 여운형은 일본어 통역으로 장덕수를 대동할 것을 제의하여 쌍방이 이에 합의하였다. 니히시마에서 풀려나온 장덕수는 여운형의 통역으로 일본에 건너가 이해 12월 11일 동경제국호텔에서 2백여 명의 기자를 상대로 한국독립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때 이 연설을 들은 이들은 여(呂)의 본 연설보다 장의 통역이 훨씬 훌륭하였다고 말했다 한다. 뒤이어 이들은 요시노 소오조오의 신인회원 30여명에게 역시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여 만장의 갈채를 받고 무정부주의자 대삼영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일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은 당시 팽배하였던 배일사상에 부합되어 많은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고 이는 다음해인 1920년 봄에 창간된 동아일보에 주간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의 동아일보 창간사 ‘주지를 선명하노라’는 이 신문의 전래인 사시인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천명한 글로서 전년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 선언문 중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선진국의 범(範)을 수(隋)’한다는 귀결을 제외하고는 최초로 민주주의를 공언한 문장이라는 점에서는 의의가 크다 하겠다. 1921년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그는 부사장 겸 주필이 되었으며 계속 정치 경제 기타 사회문제에 대한 논설을 집필하였다. 이 시기는 3·1 운동 이후 잠시 퇴조하였던 민족주의운동이 민족실력양성운동으로  전환하여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청년회연합회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던 때이다. 장덕수는 1920년 6월 장도무, 오상근, 안교 등과 함께 YMCA 회관에서 전국 청년단체 1백13개 대표를 회집하고 조선 청년연합회를 결성, 민족청년 운동의 통일화를 실현하였다. 또한 그는 이 해 노농공제회 결성에도 참여하는 등 청년운동의 선봉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월 소비에트 공산정권은 상해 임시정부 특파원 여운형, 한형권 등을 맞아 2백 루블의 원조(실재 원조는 60만 루블)를 미끼로 임정의 공산화를 획책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상해에 고려공산당이 조직되었고 그 지령을 받은 좌익계는 부단히 국내에 잠입하여 청년연합회의 분열공작을 벌였다. 이 영향으로 1922년 4월에 좌익계의 김사국, 이영 등이 서울 청년회를 조직하고 때마침 열린 조선 청년연합회를 파국에 몰아넣었는데, 이즈음 상해에서 공작금으로 들여온 자금 4만원을 장덕수가 낭비하였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실상은 설산이 이 돈을 받아가지고 최 모에게 넘겨주었고 최 모가 그 일부를 낭비하고 그 중 2만원을 공산당 기관지인 ‘신생활’의 발행에 썼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장덕수의 명성은 퇴조하기 시작했고 그를 제거하려는 서울 청년회계 공산분자들의 테러의 위협이 그의 신변을 압박하였다. 그는 신변의 위험을 피할 겸 도미 유학을 결심하고 1924년 5월에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미행자는 일본 요코하마 항까지 따라가 그에게 가해하려 했다한다. 동아일보사의 부사장 자격을 지닌 채 미국에 건너간 그는 오레곤 대학 신문학과와 콜롬비아 대학 경제과를 마치고 석사학위를 얻었다. 이때 그는 허정, 서민호, 김양수 등과 ‘삼일신보(三一申報)’라는 국문판 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에 수학하며 노동문제를 연구하였고 1936년, 모교인 콜롬비아 대학에서 British Methods of Industrial Peace(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보관 중)란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그의 미국 유학생활은 비교적 안온했던 듯싶다. 이곳에서 그는 이화여자전문을 졸업하고 유학중인 박은혜와 결혼, 이때가 그의 일생 중 한 때의 꽃 시절이었다. 박은혜의 술회에 의하면 남녀 유학생이 모여 학생극을 할 때 그가 각본을 썼다 하니 그는 이때 문학에도 열중하였던 듯하며 다각적인 그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1936년 12월 그는 13년만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다시 언론계에 돌아오지 않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세계대전을 일으켜 한국은 식민지 통치에 더욱 가혹한 탄압을 가하여 국내 지도자들에게 전쟁수행을 위한 협력을 강요하여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는 은인자중, 학교를 지키며 청년 학생들에게 난국에 대처하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해방이 되자 장덕수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김성수, 송진우 등 동지들과 한국민주당을 조직하고 정치부장으로 취임하여 민족진영을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46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으로 신탁통치 문제가 제기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국내 정계는 이에의 참가 여부로 양론이 대립되어 우익세력 간에도 의견이 상충하였다. 설산은 ‘우리는 마관(馬關)조약 이래 항상 국제회의에 참가하지 못하여 더욱 피해를 당하였으니 이번에는 꼭 참가하여 그 안에서 싸워야한다’는 주장으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참가론을 들고 나왔다. 또한 그는 이 미소공위가 대개 실패한 것을 예견하고 그때는 유엔에 호소하여 총선거를 실시해야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니 그의 비범한 정치역량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1947년 12월 2일 오후 6시 설산은 서울 제기동 149번지의 4호 자택에서 종로경찰서의 경사 박광옥의 카아빈 총에 저격당하여 우해(遇害)하니 향년 53세였다. 범인이 20세 내외의 청년인 관계로 배후 조종자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재판정에서 한독당 영수 김구를 환문하기도 하고 그의 비서 김석황이 유죄판결을 받은 바도 있으나 이 테러사건은 역사의 안개 속에 감추어지고 말았다. 그는 일본과 미영 유학을 합해 20년 이상을 학구에 면려한 박식한 언론인이요, 정치가요, 총명한 인격자였다. 그는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라. 그러나 공경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외쳤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하며 항상 같이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는 신념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1947년 7월 19일에는 여운형이 암살되고 정계의 공기가 험악하여 설산은 항상 테러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 대하여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태연자약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그는 다정다감하고 겸손한 인격자였다.”(‘다정다감한 인격자-장덕수’, ‘거인은 사라지더라도’, 송건호 편, 휘문출판사, 1973년, 125~131쪽)

 

  춘원 이광수는 장덕수 선생을 “설산은 호 그대로 개방적이요, 결백하고 어린애와 같이 표리가 없는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설산(雪山)과 나’ (이광수전집 제17권, 삼중당, ‘인물론’, 428~431쪽)의 기술.

설산은 왜 설산(雪山)이라는 호를 지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설산이라는 호는 그의 시원한 성격을 잘 표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훤출하게 툭 트인 인격자다. 개방적이라고 하는 성격자다. 내가 설산을 처음 찾은 것은 일본 동경 조도전(早稻田)대학 근방의 어떤 하숙에서였다. 때는 여름, 2층의 그의 방은 앞뒷문을 다 떼어 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에 첫 인상이 ‘비밀 없는 개방적인 사람’ 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과연 그러하였다. 그 후 나는 설산과 만날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조도전대학 재학시대에 설산은 모의국회의 정당 총무도 되었고 학생웅변대회에 모교를 대표하여 출연도 하였다. 그때에 설산은 영정유태랑(永井柳太郞)에게 웅변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3·1 이후 그는 동아일보의 주간으로 건필(健筆)을 휘둘렀으나, 웅변가로 더욱 이름이 높았다. 나는 한 번 종로청년회관에서 그의 연설을 들었는데, 역시 당시 웅변가로 명성이 높던 박일병(朴一秉)의 연설이 끝난 뒤에 그가 단에 오르자 내 곁에 두 학생이,
“야 털보다!”
하고 열광적으로 박수돈족(拍手頓足)하여 환영하는 것을 보았다. 설산은 수염이 많아서 그를 좋아하는 학생들 간에 털보라는 애칭을 얻은 것이었다. 조도전 재학시대에 설산이 구단판(九段坂) 하(下)에 있는 어떤 예수교회에서 서양 노(老)부인의 영어 성경반에 다니고 있어서 나도 그를 따라서 몇 번 출석해 보았다. 설산은 그 성경반에서 간사 일을 보는 모양이었다. 청중은 전부 일본인 대학생들이었다. 설산은 어디를 가나 무슨 일에나 충실하고 몸을 아니 아끼기 때문에, 또 어른다움이 있기 때문에 일본인 학생들 간에서도 매양 지도자의 일을 맡은 것이었다. 설산이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은 신유년인가 임술년인가, 출발 전에 나는 그를 마주동(磨珠洞) 내 우거에 청하여서 석반을 대접하고 일석(一夕)의 환담을 하였다. 당시 설산은 상해를 거쳐서 들어온 레닌의 돈 처분 문제로 일부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 돈은 이봉수(李鳳洙) 편에 들어와서 설산에게 전해진 것인데 설산은 이것을 최팔용(崔八鏞)에게 주었다고 나는 들었다. 아무려나 나는 이봉수와 장덕수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그 30만원인가 한 돈에 대하여서 손을 아니 대었을 뿐더러 일순의 애착도 아니 느꼈을 것을 믿는다. 그러하건마는 설산의 명성이 높았던 것에 대한 시기와 대금(大金)이 설산의 손에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설산에게 이 불명예를 씌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설산은 그것을 변명하려고도 아니하고 나도 그것을 물으려고도 아니하였다. 설산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잘 먹고 잘 떠들었다. 미국으로 간다는 것도 그에게 대단치 아니한 일인 것 같아서 송별의 정회를 가진 내가 도리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당시에도 일류 명사인 것은 조도전 대학시대와 다름이 없었다. 설산은 앉으면 허리를 빳빳히 펴지 않고 앞으로 굽히고 머리만을 잔뜩 젖히고 속히 두 손으로 무슨 장난을 하면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도무지 점잔을 뺄 줄을 몰랐다. 어린애 같았다. 꾸밈이 없었다. 설산은 그날 저녁 늦도록 놀다가 갔다. 이것이 내가 평생에 처음으로 설산과 장시간 담화한 기회요, 또 어떤 의미로는 마지막이었다. 그 후, 소위 대동아전쟁말기에 설산은 효자동 내 집을 찾은 일이 있었으나 그때에는 좌중에 다른 객도 있어서 시국담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십수년  영미의 유학도, 박사의 학위도, 혼인도, 두 아기의 아버지가 된 것도 그의 천진난만한 성격을 변할 힘이 없었다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는 머리가 벗어지고 군자노태(君子老態)를 보였고 그럴사 하여서 그런가 다소 시무룩한 맛이 있었다. 그는 내 좁은 방 들어오는 문 옆에 20년 전과 다름없이 허리를 꾸부리고 앉아서 종이조각을 뜯고 비비고 하는 손장난을 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 갔다. 이것이 나와는 최후의 작별이었다. 나는 내가 설산과 상해에서 만났던 이야기를 빼어 놓았다. 기미년 2월 하순, 내가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을 해외동포와 세계에 선전할 임무를 갖고 상해에 도착하자 바로 내가 내린 배를 타려고 부두에 나온 것을 만났다. 참말 기우(奇遇)였다. 설산은 신한청년당의 사명을 띠고 동경과 본국에 독립운동을 일으키려 가는 길이란 말을 하고 나는 동경에서 계획한 일과, 내가 상해에 오는 사명을 말하였다.
“춘원, 여비 남은 것 있나? 있거든 다 털어서 나를 주어” 하길래 나는 내 주머니를 다 털어서 일화로 25원 몇 십전을 주었더니 설산은 우수리는 내게 도로 주고 25원만을 가지고 좋아라고 떠났다. 내가 조동우(趙東祐)를 만난 것도 이 기회에서였다. 나는 설산이 있던 방, 설산이 자던 침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동우는 이로부터 나와 동실지우(同室之友)가 되어서 독립신문을 준비하였다. 설산은 동경을 거쳐서 인천에 상륙하다가 일본 관헌의 손에 체포되어 해남에 귀양살이를 하던 중 기미 익년(翌年)인가 여운형(呂運亨)이 일본 수상 전중의일(田中義一)을 만나기 위해 동경으로 갈 때에 통역의 필요가 있다는 핑계로 일본 정부에 청하여 설산을 석방시켰다는 말을 나는 상해에 있으면서 들었다.

이상에 나는 설산과 나 개인과의 직접 관련된 몇 가지를 적었거니와 나와 설산과는 그리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조대에 입학한지 일 년에 설산은 그 학교를 졸업하였고, 내가 상해에 갔을 때에는 설산은 수일로 상해를 떠났고, 설산이 미국으로 돌아온 때에는 나는 칩거생활을 하고 있어서 동석에 상대한 것은 모두 10회가 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매우 피차에 인연이 박한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설산을 아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그것은 설산이 동경 하숙에서 본 그대로 개방적이어서 허위도 가식도 없이 적나라하게 자기를 노출하는 성격자인 까닭이라고 믿는다. 그렇다 하면 내가 설산을 아는 모양으로 다른 사람도 설산과 사귀어 본 사람이라면 다 설산을 정해(正解)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왠 일일까, 이러한 설산을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어서 심지어는 그를 모략가라고 중상하는 자까지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나는 설산은 호 그대로 개방적이요, 결백하고 어린애와 같이 표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나는 설산의 모당(母堂)과 그 중(仲)씨 덕준(德俊), 수(秀)씨, 덕진(德晉)도 알거니와 그들이 다 솔직하고 물욕에 염담(恬淡)하고 애국심이 강렬하다는 것보다는 물욕이 없기 때문에 애국 밖에 가진 생각이 없었다고 믿는다. 정직과 무욕(無慾)은 국사(國士)의 근본 자격이요, 우리 중에 많지 못한 덕이다. 그런데 설산은 정직과 무욕에다가 학식과 열성과 웅변까지 구비하였던 인물이어늘 이 사람을 잃은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말할 것은 설산과 인촌 김성수(金性洙)와의 관계다. 나는 설산이 전실(前室) 상을 당할 때에나, 설산 도미 후에나 인촌은 설산의 모당과 매(妹)씨를 친족과 같이 부양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이는 인촌의 동지애의 한 발로(發露)여니와 설산도 인촌에 대하여서 충실한 우정과 신뢰를 끝까지 유지한 모양이었으니 이는 진실로 미담이라 아니하는 수 없다.

(후기) 심계원(審計院) 비서관 함동욱(咸東旭) 씨가 무려 5, 6차를 나를 찾아서 설산의 추억을 쓰라고 청하였으나 나는 이 영광을 사퇴하려 하였다. 그는 나 자신이 명예롭지 못한 인물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유족과 위원 제씨도 내 추억을 원하신다는 함동욱 씨의 말씀을 믿어 이 무해(蕪解)를 적기로 하였다.

 

  설산은 송진우(1945년 12월 30일), 여운형(1947년 7월 19일) 선생에 이어 해방공간에서의 정치적 암살 세 번째 희생자가 됩니다.

KBS 다큐멘터리극장 ‘정치암살의 희생자들 3’ (1994년 2월 20일 방송)

경찰: 빨리 불어 이 아편쟁이야! 김중목이는 이미 얘기 다 끝냈어.
신일준(한독당원): 말하리다. 제발….
경찰: 너 또 거짓부렁 하면 알지!
신일준(한독당원): 알았소. 알았소. 알아서 협조하리다.

1948년 3월 12일 장덕수 암살사건 미국 군정재판
김용식(변호사): 장덕수 씨를 잘 아십니까?
김구(백범): 잘 압니다.
변호사: 언제부터 아십니까?
김구: 그가 일곱 살 때부터야.

정치암살의 희생자들 제3부 설산 장덕수

해설(고원정, 작가): 안녕하십니까. 고원정입니다. 오늘은 여운형이 암살당한지 불과 5개월만인 1947년 12월에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947년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정국의 변화가 극심했던 해였습니다. 일제가 물러간 뒤 이미 두해가 지났지마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가장 시급했던 민족적 과제는 여전히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 정치세력간의 분열과 대립은 더욱 그 골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46년에 결렬되었던 미·소공동위원회가 이해에 2차로 다시 열렸지만은 역시 합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끝내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됐고, 유엔에서는 총선거안을 가결합니다. 바로 그 1947년이 저물어갈 무렵에 장덕수 암살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암살당할 당시 그는 한국민주당의 정치부장이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고하 송진우나 몽양 여운형에 비해 그의 정치적 비중은 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암살사건은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던졌습니다. 특히 이 사건으로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백범 김구까지 법정 증언대에 서게 됨으로써 큰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 정당의 정치부장인 장덕수는 왜 1947년 그 시점에서 암살당했는가. 그리고 백범 김구는 무슨 혐의로 법정의 증언대에 서게 됐는가. 모든 정치 암살사건이 그렇듯이 장덕수 암살사건에 감춰진 진실은 당시 정국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 중 좌우익 충돌

해설: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찬탁과 반탁으로 양분된 채 팽팽하게 맞서있던 좌익과 우익의 관계는 1947년 봄 극도로 악화됩니다. 3·1절 기념식을 남산공원과 서울운동장에서 각각 치른 양측이 가두시위 도중 남대문 근처에 이르러 대규모 유혈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좌우 갈등의 골은 결코 메울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습니다. 세계 각지에서도 좌우익의 대립은 팽팽했습니다. 동유럽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해갔습니다. 이 무렵 미국은 냉전시대의 막을 올리는 중대한 정책전환을 단행합니다.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1947년 3월 12일 발표)으로 소련에 대해 적극적인 힘의 대항을 선언한 것입니다. 냉전은 유럽을 동서로 분단시킵니다. 1947년 5월 협의대상단체의 자격미달로 결렬됐던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됩니다(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2차 미·소 공위 역시 각 정당단체의 참여여부가 또다시 큰 문제가 됩니다. 이승만과 김구는 불참을 선언합니다.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미·소 공위 참가가 곧 찬탁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우익정당과 사회단체가 두 정치지도자와 입장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한민당은 신탁통치는 반대하되 미·소공위에는 참여한다는 당론을 확정했습니다.

1947년 6월 돈암장
장택상(수도청장): 설산이 공위에 들어가자고 한 이후부터 나라가 들끓고 있습니다. 설산이 그리하는 것은 미군정의 의사가 아닐까요?
이승만: 그 사람 군정청 왕래가 너무 잦아. 그러나 어디까지나 미국사람은 미국사람인 게야. 창랑, 여러 단체에서 공위 참가를 반대한다고 하던데?
장택상: 나라가 이대로는 아니 되지 않습니까?

1947년 6월 경교장
김구: 자네 말이 일견 옳아. 하지만 공동위원회는 우리가 지난번에 봤듯이 우리 일을 따지고 발전시키고 하는 일엔 적합하지 않아. 백성들이 진실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도 전에 국가와 민족에 대한 것을 섣불리 결론지을 수는 없는 게야.
장덕수(한국민주당 정치부장): 그러나 선생님, 민족이라는 것이 현실과 유리된 절대적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김구: 그게 내 얘기야. 민족은 현실 아닌가.
장덕수: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지금 협상과 타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김구: 음…소련 측이 주장하는 조건을 보게.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는 단체만이 공위에 들어올 수 있다고 우기질 않는가.
장덕수: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는 단체라고 정해있긴 하지마는 그것이 곧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단체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죠. 참가하려면 얼마든지 참가할 수가 있습니다.
김구: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네.
장덕수: 선생님, 공위 참가가 민족진영에 대한 배신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봐 주십시오.

해설: 이 당시 정국구도에서 표면상 가장 영향력이 있는 세력은 역시 이승만과 김구였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촉성국민회의를 이끌면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합니다. 남한만이라도 하루빨리 정부를 세워서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얻고 우리 힘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것. 그것이 이승만이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조기총선을 주장한 이유였습니다. 김구는 2차 미·소 공위 불참 결정에 이승만과 공동보조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조기총선, 단정수립안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그는 임정 요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을 이끌면서 반탁과 미·소 공위 불참을 선언하는 한편 자주통일정부의 수립을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진정한 통일정부란 좌우합작을 통해서 설립돼야 한다는 데 입장을 같이하고, 미·소 공위 참여를 촉구했습니다. 미군정과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한국민주당은 소련과 협상을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입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소 공위 참가라는 한민당의 정책 결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장덕수였습니다. 그는 미국의 정책 방향과 국제정세를 읽고 있었습니다. 우익진영의 참가 여부를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상태에서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개막됩니다. 회의장 밖에 나붙은 반탁 벽보들은 점점 격렬해졌습니다.

1947년 6월 제2차 미·소공동위 참가에 관한 우익단체 연합회의
이종영(독립촉성국민회의):반탁주의의 강고한 전개와 미·소 공위 참가 절대불가를 동의안으로 올립니다. 다음은 이승만 박사님과 백범 선생님의 공동성명에 따라 미·소 공위를 분쇄할 것도 아울러 동의합니다.
참가자들: 찬성이요! 찬성이요!
진행자: 자자, 이의 없습니까?
참가자들: 찬성이요! 찬성이요!
장덕수(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이의 있습니다! 발언권을 좀 주십시오.
진행자: 네, 말씀하세요.
장덕수: 여러분의 아량어린 관심으로 우리 한민당은 여러분들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근데, 여러분!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있습니다. 삼천만 동포의 생과사가 갈리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준비가 필요하고 단결이 필요한 것입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을 해방시킨 연합국 일원인 미국과 소련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장입니다. 그러나 거기 마주앉은 두 나라 대표들은 알래스카의 귀속문제를 논의하는 것도 아니고 시베리아의 개발을 논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삼천만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그 두 나라 코쟁이들이 마주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명운이 속한 문제를 그 두 나라 코쟁이들이 멋대로 의논하라고 내버려두고 회의장 밖에서 성명서나 낭독하고 와와 소리만 지르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도 참가해야만 합니다. 민족의 유일한 이 길이 어찌 반탁진영에 배신행위라 할 수 있습니까!

이상돈(83·당시 한민당 중앙선전부 차장): 지금 듣고 보니 들어가야겠다. 여기서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다. 들어가서 싸워야겠다. 이렇게 들어가더란 말이야. 아까 말했듯이 대문 앞에서 우리가 떠들어봐야 소리가 들리느냐. 우리말을 듣느냐 그 사람들이. 우리가 들어가서 한 마디 한 마디 우리 의사를 이것이 우리 민의다. 우리 뜻이다. 이렇게 주장을 해야지 여기서 떠들어 뭘 하냐고. 이게 또 100% 전향이 됐어. 거기에서도 저 양반 자기 생명에 대해서 참… 대재는 불경신이라. 큰 재주는 너무 가볍게 사람 앞에서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그날 그 위력을 보고서 말이야 저 사람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들 가졌을 게야.

배희범(대한학생총연맹원): 이건 배신입니다! 설산 그자가 민족을 배신하는 겁니다! 박 동지,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왜놈들 앞에서 설치던 자들 아닙니까! 박 동지, 이젠 설산이 민족자주까지 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박광옥(대한학생총연맹원): 미·소공동위 참가를 반대하던 단체들까지 흔들리고 있어.
배희범: 박 동지, 좌시만 해야 하겠습니까!
박광옥: 그놈들 큰소리가 곧 들어갈 거야!

최서면(66·본명 최중하, 당시 대한학생총연맹 의장): 우린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한독당만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한민당만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신탁통치 반대라는 이 선에서 움직이는 우리 단체에서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사람이 민족진영에서 나왔다. 아주 충격적으로. 그래가지고 뭐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야 이러다가 장덕수 한민당 정치부장이 그 당사자다. 이자가 학병 가라고 강요까지 하고 돌아 댕기고, 뭐 임시정부 배신하고 들어왔다는데 막판에 이런 짓까지도 하느냐.

김준연(한국민주당 삼임위원): 하하하하하. 사자후였어. 사자후였어. 평생에 한번 들을까말까 한 대단한 웅변이었어! 하하. 앞으로 정부가 수립되면 설산은 관방장관을 맞으셔야겠습니다.
장덕수: 하하하하. 글쎄요. 전 국회에 나가서 원내총무나 한번 해볼까 했는데. 하하하하.
이종영(독립촉성국민회원): 이는 내 식견이 소견에 불과하다는 거. 내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하하하. 오늘 내가 동의안을 내기 전에 설산의 연설을 들었다면 오늘 같은 망신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이해들 해 주시오. 하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설산의 웅변을 들을 수가 있어서 결과는 대만족입니다. 하하하하하.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다 같이 건배합시다. 오늘의 영웅 설산 만세! 하하하하하하.

해설: 장덕수의 설득으로 참가를 결정한 많은 우익 정당단체들이 덕수궁 회의장에 신청서를 제출합니다. 이 무렵 미·소공위 재개와 함께 좌우합작의 세력 결집에 박차를 가하던 여운형이 암살당합니다(1947년 7월 19일).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좌우합작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정국은 더욱 혼란해집니다. 이때 조선의 정세 파악을 위해 미국은 웨드마이어 장군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조선에 파견합니다(1947년 8월 26일). 중국과 북한을 거쳐 서울에 온 웨드마이어는 장덕수를 포함한 국내 주요 정치지도자들을 차례로 만났습니다.

장덕수: 웨드마이어가 마샬 장관에게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쓰도록 해야지요.
김성수(한국민주당 위원장): 그리된다면 나로서도 얼마나 좋은 일이겠나.
장덕수: 걱정하지 마십시오. 웨드마이어 면담 후 제가 미국 조야 인사들에게 우리당 명의로 로비를 해보겠습니다.
김성수: 설산, 우린 이제 더 이상 정부수립을 연기할 수가 없네.
장덕수: 그렇습니다.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 실시안은 반드시 유엔에서 통과돼야 합니다.
김성수: 그래. 설산이 알아서 애 좀 써줘야겠어.

1947년 8월 미국 군정청
해설: 국내외 정세 파악에 누구보다도 정확했던 장덕수는 웨드마이어를 만난 자리에서 미·소 공위가 결렬된다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할 것을 주장합니다. 가능한 지역부터 선거를 해서 유엔이 승인하는 합법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웨드마이어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미국무성과 상하원, 유엔 등에 그 같은 내용의 편지를 띄웁니다. 미·소공위의 결렬을 그는 이미 내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우익단체들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됩니다(1947년 10월 28일 미·소 공동위 결렬 후 소련대표 스티코프 일행 떠남). 소련 측이 반탁을 주장하는 우익정당들을 협의대상에서 탈락시킨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소련과의 회담이 시간낭비라고 판단한 미국은 조선 문제를 유엔에 넘깁니다. 마침내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한국 총선거안을 가결하기에 이릅니다.

1947년 11월 돈암장
조병옥(경무부장): 하하하하. 이거야 정말 경축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승만: 모든 일에는 음양이 있는 법입니다.
조병옥: 음양이라니요?
이승만: 난, 전부터 11월 총선을 주장해 왔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나라가 홀로 서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병옥: 물론 그렇습니다. 어찌 한시가 급하지 않겠습니까.

1947년 11월 경교장
김구: 남쪽만이 선거한다면 북쪽인들 가만히 있겠는가.
김규식: 우리라도 나서야지 안 되겠습니다.
김구: 이거 이 나라가 어이 되려고 이러는지.
김규식: 한민당은 오늘 경사랍니다. 장덕수가 웨드마이어와 만날 때 예견을 했어야 하는 건데.
김구: 그 사람. 재주가 있기는 있는 사람인데.
김규식: 그 재주를 민족을 위해서 쓰지 않는 게 큰 탈이 아닙니까.

이상돈(83·당시 한민당 중앙선전부 차장): 선거가, 아주 급전직하로 선거가 온다. 선거대책을 강구하자 그거지. 그렇다고 그때 선거대책 위원회를 만들면 또 곤란하니까. 만들진 않아도 실질적으로 지방조직이니 뭐니 전부가 벌써 선거대책으로다가 전부 전환하려 그랬어요. 각지에 입후보할 사람 후보자 인선, 그 다음에 조직, 그 다음에 이제 선거자금. 이 자금이 뭐 사실 그때 자금이 있소? 우리나라 그때 민족자본이라야 토지 가진 것뿐인데. 산업이 발달된 것도 아니고. 자금문제, 이런 것을 아주 거기 주력을 했어요. 제일 거기에 표본이 됐을 거요. 암살의 목표가.

해설: 조선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고, 설산 장덕수가 발 빠르게 선거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한 1947년 말, 우익의 정치세력은 대략 이와 같은 사각 구도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그리고 한민당은 빠른 시일 안에 가능한 지역에서의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입장을 같이했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분단정부 수립의 가능성이 커진 유엔 안에 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미군정, 이승만, 한민당과 김구의 관계는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무렵 그동안 같은 입장을 취했던 이승만과 한민당과의 관계도 이후에 전개될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미묘하게 변합니다. 이승만은 유엔결의에 상관없이 조기총선을 주장하지만, 한민당은 미국, 유엔과의 협조 하에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그 지지 세력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볼 때 한민당은 이승만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민당은 미군정이 주도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민당에는 설산 장덕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덕수는 누구보다도 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그런 식견을 가진 정치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장덕수는 미군정과의 관계가 가장 원활했던 한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따라서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장덕수는 정국의 주도자로 부상하게 되고 모든 정치세력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배희범: 박 동지?
박광옥: 아, 일찍 왔구만.
배희범: 설산의 움직임이 전보다 기민해지고 있습니다. 벌써 선거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잖습니까.
박광옥: 알고 있어. 그잔 역시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야.

장덕수의 약력
1894년 12월 14일 황해도 재령 출생
1916년 7월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과 2등 졸업
1918년 상해에서 여운형과 독립운동
1920년 4월 동아일보 초대 주간
1936년 미국 콜럼비아대 박사학위 취득
1939년 3월 보성전문 교수 취임
1945년 9월 16일 한국민주당 창당 참여

해설: 장덕수는 김구과 같은 황해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외국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와 정치 이론에도 해박한 인물이었습니다. 일본유학 후에는 여운형과 함께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그 후 동아일보 초대 주간과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보성전문시절 몇몇 친일단체에 간여함으로써 친일행적이라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던 그는 해방이 되자 정당 창당을 서두릅니다.

1945년 9월 16일 동대문구 제기동 장덕수의 집
장덕수: 우선 당부터 결성해야겠어. 그게 급선무야.
허정: 뉴욕에서 같이 삼일신보 만들 때 생각나나?
장덕수: 어떻게 그때를 잊겠나.
허정: 그때 구상했던 이상적인 민주당을 만드세
장덕수: 윗분들과 상의를 해야겠네. 인천에서 금명간 상경하실 인촌께서는 적극 찬동해 주실 거고. 고하를 찾아봬야겠네.
허정: 그리하시면…

해설: 1945년 9월 16일 창당된 한국민주당에서 장덕수는 외교부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미군정과 한민당 사이의 가교역할을 맡았습니다. 1946년 2월 좌익은 이른바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거대 조직을 결성(1946년 2월 15일)하여 우익을 긴장시킵니다. 따라서 창당 초기 서로 불편한 관계였던 한독당과 한민당은 합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1946년 4월 7일 한민·한독 합당교섭위원회
조완구(한국독립당 교섭대표): 인촌 선생, 우리 대국적으로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김성수(한국민주당 교섭대표): 이 자리에 여러분 모였으니 이제 결론을 내릴 때도 되었고.
조완구: 무슨 일을 하시든지 대의를 중시하는 인촌께서 현명한 단을 내리리라 생각합니다.
김성수: 좋습니다. 대승적 견지에서 우리 조건이야 어떻든 합당하기로 하겠습니다.
김구: 인촌, 잘하셨소. 고맙소, 인촌.

장덕수: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하셨습니다. 제 불찰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김성수: 기왕 이리된바 합당 절차를 밟아야겠어.
장덕수: 중앙집행위원회 표결을 얻어야 하는데, 당을 갖다 바치는 일이라고 집행위원들의 성토를 받을게 틀림없는 일입니다. 합당만이 애국은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해설: 몇 차례 거듭된 합당시도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주당과 한국독립당의 결합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박광옥: 배 동지.

박정덕(70·당시 대한혁명단원): 민족반역자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누구냐 하면 장덕수. 그 당시 한국민주당 정치부장으로 있었던 장덕수와 또 배은희도 그때까지 한민당의 주요 간부였었고, 또 그리고 안재홍 씨도 그런데 찬성한 사람이다. 이래가지고 박광옥이 하고 배희범이는 그 세 사람 중에서 장덕수를 가장 중심, 주요 인물로 보고 이 사람은 여하한 일이 있어도 처단해야 되겠다.

내방객1: 그 듣고 보니 박사님 얼굴 거북상이 맞군요. 관상쟁이 말대로 무병장수하십시오.
내방객2: 본인 면전에서 암살 운운하니 기분 어떻습니까?
내방객1: 노파심이었겠지요. 몽양 선생도 그리 갑작스레 비명에 가실 줄 뉘 알았겠습니까.
내방객2: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금 맡고 계신 일이 얼마나 중차대합니까. 자칭 애국자인 극열분자들 조심하셔야 합니다!
장덕수: 고맙소.
내방객2: 총선이 내년 봄이니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죠.
장덕수: 의원수가 240명이니까 인구 10만 명당 한사람씩 뽑는다 보면 될 겝니다. 유권자가 반은 될 터이니까 2만 표는 얻어야 당선되지 않겠어요?
내방객1: 면책 하나에 850호씩 운동하면 당선이 가능하겠군요.
장덕수: 하하하하. 아, 그렇게 되나요? 하하하하. 자, 한잔씩들 합시다.
내방객1: 어째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1947년 12월 2일 동대문구 제기동 장덕수의 집
배희범: 계십니까?! 계세요?!!!
가정부: 누굴 찾아 오셨어오?
배희범: 저, 여기가 장덕수 박사님 댁 맞죠?
가정부: 그런데요?
배희범: 박사님 계십니까?
가정부: 박사님, 박사님, 손님 오셨어요.
장덕수: 누군데?
가정부: 경찰서에서 왔답니다.
장덕수: 이상돈인가? 오, 어떻게 오셨는가?
배희범: 박사님께서 그저께 절 만나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장덕수: 그저께? 그런 적 없는데?
배희범: 몸이 불편해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금 시간 있으시면…
장덕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난 그런 기억이 없어. 내방객이 있으니까 지금은 안 되겠고, 할 말이 있으면 5일 후에 만나기로 하지. 지방에 다녀와서.
배희범: 잠깐이면 됩니다.
박광옥: 배 동지, 가야 되겠어. 갑시다.
장덕수: 허허. 그렇게 하시게. 정히 할 말이 있으면 5일 후에 찾아오시고.

1947년 12월 2일 저녁 7시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피살

해설: 1947년 12월 2일 저녁 7시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는 피살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54세였습니다.

1947년 12월 8일 장덕수의 장례식

해설: 장덕수는 민족진영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가 연합장으로 애도하는 가운데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있는 유족들로부터 장덕수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 하나를 입수했습니다.

 

장덕수의 육성
미·소 공위는 미·소 양국의 대표만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만일 어떤 한나라 대표가 이견 불합의 이유로서 퇴석하면 해결의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민주당은 미·소공동위원회의 구성을 확대해서 관계 4개국의 대표와 조선의 영도자를 포함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전연 방법을 달리해서 조선의 독립 문제를…

해설: 1947년 6월 17일자로 기록된 이 연설에서도 그는 미·소 공위 참여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인 이상 미군정과 협조하면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그의 현실주의적 정치노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또 미·소 공위가 결렬된 것으로 보이자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주장했습니다. 그가 예측한대로 한국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됩니다. 그리고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예상했다는 듯 그는 선거 준비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정치적 비중과 역할이 커지던 바로 그때 장덕수는 암살당합니다. 따라서 당시에도 암살의 배후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장택상(수도청장): 경찰관복을 입은 자라면 단서는 벌써 얻은 것 아니야! 2800명 전 경찰 모두 소집해. 알았나!
경찰: 알았습니다.
장택상: 서울 일원 물샐 틈 없이 수색하고. 이 사건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 잘 기억하라고! 48시간 이내에 범인을 잡지 못하면…알았나!
경찰: 알았습니다.
장택상: 알았다는 소리만 하지 말고 빨리 나가봐!
경찰: 알았습니다.

해설: 서울의 전 경찰관을 일제히 소집한 결과 유일하게 빠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로경찰서 외근 감독으로 있었던 경사 박광옥.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수배에 나섰습니다.

경찰: 실례합니다. 검문 나왔습니다.
경찰: 실례합니다. 신분증 좀 봅시다.
박광옥: 아 저, 없는데요.
경찰: 고향이 어딘가?
배희범: 이북입니다.
경찰: 무슨 일들을 하나?
박광옥: 아 저 지금 일자릴 찾고 있습니다.
경찰: 그래? 이놈들 봐라. 소지품 모조리 내놔. 이거 뭐야! 혹시 너희들 장덕수 선생 살해범 맞지?! 꼼짝마라!
박광옥: 구태여 숨기진 않겠소. 그렇소. 우린 대한혁명당 당원으로 민족의 반역자 장덕수를 처단했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이오.

1947년 12월 4일 장덕수 살해범 체포

해설: 사건 발생 이틀 뒤인 12월 4일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23·장덕수 살해범. 대한혁명단원)과 배희범이 장덕수 암살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됩니다. 이들은 자칭 대한혁명단의 단원이었습니다. 당시 우익의 청년단체들로는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그리고 전국학생총연맹, 대한학생총연맹 등이 있었습니다. 대한혁명단은 대한학생총연맹 소속 열혈청년단원들이 결성한 비밀단체였습니다.

박정덕(70·당시 대한혁명단원): 그때 대한학생총연맹 위원장으로 있는 연대생 최중하, 지금 최서면이라고 하고 있습니다마는 최중하가 주동이 되었고, 거기에 총무부장으로 있는 저와 또 그 다음 대한학생총연맹의 평 맹원으로 있는 박광옥이 하고 배희범도 여기에 참여해서 1947년 8월 대한혁명단을 결성을 했던 겁니다.

1948년 1월 16일 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 장덕수 암살 관련 혐의로 체포

해설: 한 달 뒤 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체포됩니다. 김석황의 체포로 한독당의 관련 여부가 거론되고 그 배후 혐의는 김구에게 까지 미치게 됩니다.

경찰: 다시 한 번 더 묻는다. 당신, 한독당의 중앙상무위원 맞지?
김석황(34·한독당 중앙위원): 그렇소
경찰: 중앙상무위원이면 당의 간부가 아닌가.
김석황: 그렇소
경찰:당의 간부라면 당 대표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겠고. 대답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김석황: 그렇소. 난 백범 선생님의 측근이오.
경찰: 측근과 심복은 같은 의미 맞나? 김종목, 신일준은 당신이 심복이지?
김석황: 가까운 사람들이오.
경찰: 박광옥, 배희범은 대한혁명단이라는 악질 테러단체의 단원이고, 이 단체는 김종목이와 신일준이가 지도해왔다. 그리고 그 김과 신은 당신 지시에 순응하는 사람들이다. 여기까지 맞나? 장덕수 씨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한독당의 노선에 반대해 왔고, 때문에 백범 선생은 걱정을 많이 했다.
김석황: 아니오! 하늘이 조금이라도 두렵거든 선생님과 결부시키지 마시오.
경찰: 허허. 역시 한독당의 중앙상무위원 자격은 있구만.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당당한가  두고 봅세!

경찰: 자, 서로 인제 인정할 것은 인정하지. 백범이 죽이라고 했지?
신일준(한독당원): 아니오.
경찰: 그럼, 죽여야 될 놈이라고 말했던가? 하하하하
신일준: 제발…제발…
경찰: 알다시피 김종목, 조상화 모두가 자백했어. 우리 쉽게 쉽게 가자고. 백범은 장덕수를 가리켜서 너희들 앞에서 죽일 놈이라고 말했지? 허허허 그렇지?

최서면(66·본명 최중하. 당시 대한혁명단 결성 주역): 취조 받고 와서 뭐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는 아니지마는 참 뒤집어쓰고 온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갈수록 우리 자신은 죽인다는 모의를 한 일이 없는데 모의가 한 걸로 해가지고. 그것도 우리끼리 학생들끼리 했다면 또 모르지만은 뭔가 자꾸 확대해가는. 그런 걸 눈에 보면서 아까 말한 그 모임이 이제 마지막에서 여기서 죽는구나. 우리가 박정덕, 배희범, 박광옥, 조엽, 나 이하. 누군가가 범인이 돼야 된다. 한사람이 했다 그래도 안 된다. 해서 우리가 용감스럽게 공판장에 가서 내가 했다. 내가 했다. 사실 내가 죽이라고 명령한 일 없지만은 희생양의 각오를 단단히 했기 때문에 서슴지 않고 내가 했다. 내가 했다.

최서면 
당시 장덕수 암살관련으로 수감 후 출소, 현재 일본 거주

1948년 1월 8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내한

해설: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수사가 점차 확대되고 있을 때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합니다. 메논(K.P.S.Menon)을 대표로 한 임시위원단은 국내 주요 정치가들을 만나 정세를 파악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범위 내에서 선거를 치를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조사활동에 들어갑니다. 이승만은 끝까지 남한만의 조기 총선을 통해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반면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과 북의 지도자 협상을 통한 통일총선을 주장합니다.

1948년 1월 26일 이승만, 남한 단독선거 강조
1948년 1월 26일 김구, 남북협상 통한 총선거 주장

1948년 2월 경교장
조완구: 예. 예. 선생님께 전하겠습니다. 예.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완구: 선생님, 드디어 지난번에 발표하신 성명에 대한 하지 장군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이박사와 셋이 만나잡니다.
김구: 소득을 기대하면은 실망하기 마련이야.
조완구: 하지 장군이 직접 주선하는 일이니만치…
김구: 양인들 마음이라고 해서 헤아리지 못할 바는 아니지마는, 만나자고 하니까 뭐 만나 봐야지. 그래. 언제가 좋겠는가?

1948년 2월 돈암장
조병옥: 이번 기회에 하지와 화해를 하시죠.
이승만: 흐름에 거스를 수는 없는 겁니다. 미국은 이제 날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협력을 할 생각입니다.
조병옥: 화합의 결과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 갈라설 일은 갈라서는 게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난 하지를 만나러 갑니다. 그에게 말할 작정입니다. 3월 1일 이내에 선거 일정을 확정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난 내 길을 갈 겁니다.

1948년 2월 19일 하지 중장, 이승만 김구와 회담

해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조사활동중인 상태에서 국내 주요 정치지도자들이 분열되자 군정사령관 하지는 이승만과 김구를 한자리에 초대해서 의견통합을 종용합니다.

1948년 2월 23일 이승만, 3월 1일내 선거 결정 못되면 독자 계획 추진 언명

해설: 그러나, 군정청의 조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담의 성과는 없었습니다. 유엔이 3월 1일 이내에 남한만의 조기 총선을 결정하지 못하면 독자적인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언명한 이승만.

1948년 3월 8일 김구, 남북협상 제의

해설: 남북협상을 통한 자주통일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제의한 김구. 두 정치지도자가 선택한 길은 그렇게 달랐던 것입니다. 백범 김구가 남북협상을 공식 제의한 바로 그날 공교롭게도 경교장에는 미합중국 대통령 트루먼의 친서로 된 소환장이 날아듭니다. ‘김구 씨, 법정에 서주시오.’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나와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일제 암흑기부터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추앙을 받아오던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한다는 사실은 세간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줬습니다. 남북협상을 제의해놓고 통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38선을 베고 쓰러지겠노라든 백범 김구 자신에게도 이 일은 커다란 정치적 상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1948년 3월 12일 장덕수 암살사건 미국 군정재판
김용식(변호사): 김석황에게 생활비를 주신 적이 있으십니까?
김구: 아니오.
김용식: 1947년 8월 중순 김석황, 신일준, 조상화 등이 선생님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까?
김구: 그 사람 종종 우리 집에 왔기 때문에 그때 왔는지도 모르지.
김용식: 그들에게 장덕수 씨에 대해 어떠한 지시를 내린 적이 있는지요?
김구: 없어요.
김용식: 대한혁명단이란 단체를 아십니까?
김구: 단체들이 하도 많으니까.
김용식: 그 단체의 혈서나 사진을 받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김구: 모르겠소. 보내오는 것들이 하도 많으니까. 손가락까지 잘라서 보내는 사람들도 있소.
김용식: 대한혁명단 단원들이 설산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모르셨습니까?
김구: 전혀 알지 못했소.
라만(검사): 미·소공동위에 들어가면 민족반역자라고 하거나, 애국심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김구: 공위에 들어가는 것은 삼천만 국민들이 응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소.
라만: 김석황과의 교분은 언제부터인가?
김구:3 0년 전에 알았소.
라만: 장덕수가 불만의 대상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있는가?
김구: 나는 불만이면 불만이라고 그 본인에게 직접 말할지언정 체면상 타인에게 말하진 않는다.
라만: 장덕수가 미·소공동위에 참가한 것은 나쁘다. 처치해야한다 라고 말한 적 있는가?
김구: 그런 말 한 일도 없고!
라만: 작년 8월 신일준이 외 세 명이 찾아와서 장덕수를 처치해도 되는지 물은 적 있는가?
김구: 뭐라고!
라만: 반문은 허락지 않는다. 본 검사의 심문 내용만 답변토록 하시오.
김구: 난 피고가 아니야! 피고인으로서 심문 받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런 터무니없는 심문을 받고 고분고분 답변을 해야 하는가!
라만: 선생의 본심을 아랫사람들이 오해해서 사건을 일으킨 것은 아닙니까?
김구: 어떻게 생각하다니?
라만: 선생의 본심을 아랫사람들이 오해해서 사건을 일으킨 것은 아닙니까?
김구: 나는 우리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오. 그러한 나로서 어떤 좌석에든 그놈 죽일 놈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라만: 그런 정신이라면 무의식중에라도 말하지 않았소.

김용식(당시 장덕수 암살사건 담당 변호사): 미군정에서 생각하는 것은 이 분들이 한독당에 관계하는 분들이고, 범인들이. 그리고 또 그 사람들이 한독당은 김구 선생이 정신적이나 모든 면에서 사실상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한독당의 당론으로써 결정한 게 아닌가 하는 이걸 갖다가 미군정에서는 상당히 의심스럽게 생각해가지고 집요하게 이 검사가 심문을 했습니다. 했지마는 김구 선생 말씀이 뭔고 하니 나는 본시 애국 일본사람, 일인들 외에는 내가 사람 죽이라고 한 일이 없다. 일인을 죽이라고 한 문제에 관해서도 윤봉길 의사가 상해에서 일인들을 갖다가 살해한 일이 있는데, 그 당시 내가 지시를 했다. 그런데 그 지시는 윤봉길 의사를 보고 직접 내가 하지 절대로 다른 사람을 넣어가지고 안한다. 나는 그런 거 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주 단호하게 말씀을 했어요. 또 그 말씀하는 태도가 아주 의연하고, 퍽 신빙성 있어 보였습니다. 내 보기에는요.

해설: 미국인 검사는 김구에게 장덕수 암살과의 관련 여부를 집요하게 추궁합니다.

라만(검사): 지난 금요일 심문서 모두 모략에서 나온 것 같다고 했는데, 모략이란 뭔가?
김구: 내가 할 말은 이미 다 했소. 이 사건에 대해 시종 아는 바 없다고 말을 했으니, 나를 죄인으로 본다면 이 자리에서 기소를 해서 구속하시오. 아니면, 난 그만 돌아가겠소.
선생님! 
판사: 검사 심문에 답변을 요구하는 것은 선생의 죄 여부를 가릴 것 같아서다.
김구: 난 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오. 근데 어떻게 죄 여부를 말하라는 게요? 장덕수가 죽은 것을 가장 분해하는 것은 나요. 근데, 검사가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겠소.
라만: 모략이란 무엇을 말 하는가?
박광옥(피고): 이놈들아! 내가 다 말해주지! 이건 완전 모략이야. 저분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그리고 이놈들아! 이 땅은 우리 땅이야! 태극기! 태극기 달아!

해설: 김구의 암살 관련 혐의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암살범의 배후로 증언대에 섰다는 자체가 그에게는 중형인 셈이었습니다. 장덕수 암살사건의 결심공판 결과 김석황,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게 사형이, 조엽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이 각각 언도됩니다.

1948년 4월 2일 김석황,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게 사형 언도
6·25 발발 후 김석황, 박광옥, 배희범 대전형무소에서 처형

해설: 김석황, 박광옥, 배희범이 처형된 것은 6·25 발발 후 대전형무소에서였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

해설: 장덕수 암살사건이 더 이상의 배후나 진상을 밝히지 못한 채 종결된 뒤 생전에 장덕수가 예견하고, 대책까지 세웠던 총선을 통해 정부가 수립됩니다. 이후 정국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의 무대였습니다. 장덕수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한민당의 커다란 정치적 손실이었습니다. 한민당은 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을 눈앞에 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을 잃습니다. 정부 수립 과정에서 한민당은 뒷전에 밀린 신세가 되고 맙니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 정치드라마가 이승만의 권력 장악과 김구의 몰락, 그리고 한민당의 세력 약화로 특징지어진다면 바로 그 기점에 설산 장덕수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이미 흘러간 역사에 만일이라는 가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장덕수가 암살당하지 않고 정치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해방 정국과 건국 전후의 우리 역사가 지금과는 다르게 기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암살의 주동자로 묘사된 최서면은 위 방송이 나간 뒤 9년여가 지난(2004년 11월 30일 면담) 시점에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송진우나 여운형의 암살사건은 대법원의 최종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장덕수 암살사건은 한차례의 군정재판으로 끝났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찬성한다. 나는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알려진 희생자다. 진상규명하려면 기준이 있어야한다. 왜 장덕수 사건만 군정재판으로 끝나야하는가. 장덕수 암살사건은 김구가 법정에 선 사건으로 유명하다. 미군정 법정이었으니까 가능하다. 우리나라 법원이었으면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에서 다시 이 사건을 재판하자고 이인 법무장관에게 말했는데, ‘미군정이 도움을 줘서 세운 정권인데, 미군정에서 판결한 재판을 어떻게 다시 판결하느냐’고 해서 안됐다. 장덕수 암살사건을 군정재판으로 가져간 것은 친일경찰인 노덕술의 작품이다. 미군정은 9월 6일 서울에 들어오기 전에 치안을 너희들이 맡아 라고 하면서 일본 경찰들에게 숨 쉴 틈을 주었다.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것은 이승만이 아니다. 자기도 반일운동한 사람인데 그럴 리가 없다.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것은 일본 경찰의 잔당들이다. 송진우, 여운형, 마지막 김구 까지 죽여야 자기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구 암살은 이승만이 시킨 것이 아니라, 신성모 같은 이승만 충성분자가 만들어낸 사건이다. 송진우를 죽인 한현우는 도조 히데키를 죽이려했던 사람이다. 한독당의 배후가 아니다. 전혀 관계없는 단독범행이다. 장덕수 암살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만들어낸 것이다. 장덕수는 신탁통치를 찬성했다. 나는 신탁통치를 찬성한 장덕수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을 뿐이고, 장덕수는 우리 조직의 회원인 박광목 배희범이 죽였다. 내가 장덕수 암살의 배후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이 ‘협상 합시다’고 했다. 조작된 사건이다. 당시 한독당이나 한민당이나 미소공위의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그런데 장덕수는 이튿날 성명서에서 신탁통치 찬성 성명서를 냈다. 이 때문에 조소앙도 뒤에서 그럴 수 있나하고 화를 냈다. 당시는 새로운 정부수립에 참여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한민당도 입장이 난처했다. 장덕수가 암살당하는 순간에 이시영 부통령은 나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이인 법무장관에게 재판 다시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미군이 세운 정부가 어떻게 재판을 다시 하느냐고 거절당했다. 대신 이인이 공문편지를 보내서 나는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그리고 대사령이 내려서 2~3년 뒤 사면됐다.”

  설산 장덕수 선생이 해방공간에 쓴 글은 단 두 편입니다. 두 편 글의 요지는 ‘미소공위(美蘇共委)에 참가하자는 것은 신탁통치, 즉 나라의 자주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미소 양국의 합의에 의해 어차피 만들어질 기구이니 들어가서 당당히 우리의 주장을 펴자는 것’ 입니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21일자 1면, 미소공위(美蘇共委)와의 협의에 관하여(상)

 

 1947년 6월 22일자 1면(하)

 

   KBS 다큐멘터리극장 ‘정치암살의 희생자들 3’ (1994년 2월 20일 방송)에서 ‘보성전문 시절 몇몇 친일단체에 간여함으로써 친일행적이라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던 그’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와 함께 보전에 있었던 유진오 선생은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유진오, ‘양호기’(고대출판부, 1977년, 107쪽, 총독부의 지원 강요)
 총독부는 학교 당국에 대해 학생들을 지원시킬 것을 연거푸 강요하는 한편, 총독의 담화·동원된 ‘명사’들의 강연·이해관계를 통한 압력, 기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자기네의 목적을 관철하려 했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지원하지 않는 학생은 ‘징용’으로 끌어가겠다 위협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보전의 경우에는 11월20일의 마감을 일주일 앞둔 11월 12,3일 경에 이르도록 적격자 2백60여 명 중 지원서를 제출한 학생은 4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저조한 상태였다. 어찌되려는가 싶었다. 총독부와 학생들, 또는 총독부와 조선 민족 전체가 칼을 빼들고 정면으로 대결하는 자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자연의 추세로 학생들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지원 거부의 지하운동이 서울시내 각 학교 학생들 사이에 횡적으로 퍼져 나갔다. 밤이면 내 집에도 학생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무엇인가 독자적인 저항운동을 추진하는 모양이었다. 경성제대 철학과의 이혁기(李赫基) 군은 학병 문제와 관련해 문제되는 역사, 문화, 정치, 민족 문제 기타 여러 문제에 관해 꼬치꼬치 나의 의견을 캐어물었다. 이렇게 해, 온 천하가 술렁거리던 어느 날, 그 때 ‘경성부회 의원’이던 조병상과 시인 C씨로부터 학교로 연락이 왔다. 보전 간부들을 총독부의 학무, 경무 양 국장이 면담하고 싶어 하니, 그날 밤 부민관(현 시민회관 별관) 2층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교장, 부교장, 양 과장, 생도감, 그리고 교수 중에서 2, 3인이 무슨 담판에나 임하는 각오로 나갔다. 보전 교수가 총독부의 고관과 마주앉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조병상과 C씨는 자기들이 저녁 회합을 알선하였다면서, 보전의 지원율이 이렇게 저조해서야 되겠느냐, 하도 딱해서 보다 못해 이 회합을 마련한 것이니, 학병 지원에 장해가 되는 문제점들을 서로 흉금을 털어 놓고 이야기해서 피차 이해의 길을 트도록 하자고 번갈아가면서 이야기하였다.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것을 강요당하는 판이니, 보전 측으로서는 그렇게 안할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입에 발린 둔사(遁辭)로는 모면할 길이 없는 마지막 판국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을 위한 전쟁에는 무조건 학생을 보낼 수 없다’는 말만 빼놓고 갖은 소리가 다 나왔다. 특히 장덕수 씨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흥분한 목소리로 통박하였다. 권리 면에서는 차별을 하면서 병역 만은 일본인과 같이 지라 하니 학생들이 그 말을 듣겠느냐는 것이다. 설산이 말하는 도중에 “아니, 그 문제는…” 하고 C씨가 끼어들었다가 “당신은 가만있어. 당신하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야”하고 호되게 핀잔을 맞기도 하였다. 총독부의 기만적인 정책에 대한 공격도 나왔다. 자진해 지원하라 해놓고 어째서 강요하는 것이냐, 총독은 점잖게 지원하든 안하든 ‘자유’다 하고 있는데, 학교 선생은 학생들에게 어떻게 지원을 강제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만은 양 국장은 보전 측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점잖게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취하였다.

 

 

 

왼쪽부터, 모친 김현묘 여사, 장덕수, 여동생 장덕희.

 

  1930년 로마에서 김성수와 장덕수. 장덕수의 자필 사진 설명.

 

                           1932년 장덕수 모친 회갑연 때 명월관에 모인 축하객들.
앞 줄 좌로 부터 김성수, 장덕수의 장형(長兄) 장덕주(張德胄), 그 뒤 오른쪽이 여동생 장덕희(張德姬),
한 사람 건너 모친, 오른쪽 끝이 여운형. 가운데 줄 좌로 부터 김도연(반쯤 앉은사람) 허정, 한 사람 건너 윤보선,
뒷 줄 좌로 부터 최두선, 9번째 부터 백관수, 허헌, 송진우. 

 

 서울 성북구 제기동 149의 4번지. 1947년 12월 2일 7시경 피격 당해 숨진 집.

 

                                 동아일보 1947년 12월 4일자 2면

 

  1947년 12월 8일 장례식.

 

 동아일보 1948년 1월 17일자 2면.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를 받은 김석황(金錫璜)의 체포기사.
수신인 불명의 편지는 미군정 당국의 보도금지로 삭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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