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웃음이 없던 시절, 웃음을 그린 일송 최영수(一松 崔永秀).
“최영수의 만화는 1930년대가 그 전성기였다. 그의 작품은 신문을 통해 유명세를 탔지만, 잡지라는 발표무대를 통해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다양한 장르의 만화창작은 물론 다수의 만화관련 이론을 잡지매체에 발표했기 때문이다. 최영수 만화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1930년대 우리 만화사의 한 단면을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손상익 만화평론가, 한국만화통사, 프레스빌, 1996년, 314~315쪽)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일본의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塾)에서 공부한 일송 최영수가 동아일보 지면에 등장한 것은 유학생으로 고향에서 활동할 때입니다.
“안성학우회 조직-이재효 김제영 서병각 김종욱 조성업 최영수 박용삼 제군의 감상담이 잇슨 후….” (‘유학생의 회합’, 1928년 8월 8일자 4면)
“안성읍내 면려(勉勵)청년회 주최 웅변회는 거 9일 오후 8시 서리 예배당에서 민홍식 씨 사회로 개최하였든 바… 박용석, 김종욱, 최재영 이창섭, 주장성, 최영수 등 연사가 강연중 임석 경관으로부터 이창섭 최영수 양군의 강연은 논지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중도에 금지하였다는데….” (‘웅변회 재금지’, 1928년 8월 13일자 3면)
최영수는 1933년 6월 동아일보 자매지 ‘신동아’에 입사하기 전 고향에서 동아일보 안성지국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이 미산리(美山里)는 양잠(養蠶)뿐만 아니라 제사, 제탄 등등의 부업이 대규모로 실시되어있음으로 겸하여 소개하고자한다.” (안성지국 최영수, ‘양잠(養蠶)모범촌인 미산리 답사기’, 1931년 4월 21일자 5면)
이때 최영수는 스케치 기행에 나서 ‘군산을 다녀와서’(1931년 9월) ‘송도를 차저서’(1931년 10~11월) 같은 연재물을 싣습니다.
“지국장의 권(勸)함을 바더 군산시찰(群山視察)의 길을 떠나기는 팔월 십오일! 홍염(紅炎)이 끓어오르는 날이었습니다. 이 제 각종탐사, 조사, 답사의 기록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스케치 몇장과 아울러 소조(蕭條)한 추풍과 같이 선물로 바칠까하나이다.”(1931년 9월 8일자 5면)
“필자가 동아일보와 연분이 없음을 개탄하였더니 윤씨는 필자에게 기자되기를 청하므로 승낙한 것이 필자가 본보와 인연을 맺기 비롯한 것입니다.…소화 4년 4월 1일부터 임씨는 사면하고 필자의 단독경영으로 되엇음니다. 그동안 외무원 한용덕(韓用悳), 기자 우종안(禹鍾安), 최영수(崔永秀) 제씨가 다년간 폐지국을 위하야 공헌이 많음은 감사하는 바이나…” (김태영<金台榮> 안성지국장, ‘20년을 회고하며’, 동아일보 1940년 6월 25일자 4면)
“필자는 동아일보 분국 지국을 관계하는 동안에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던 당시 명망가 박태병(朴泰秉) 박화병(朴華秉)…기자 최영수씨는 뒤에 본사기자로 또 다른 신문사 기자로 언론계에 공헌이 많은 분인데…” (추수 김태영<秋水 金台榮>, ‘지방에서 본 동아 45년’, 동우 1965년 4월호 24쪽)
그는 그후에도 사생화를 짧은 글과 함께 연재합니다. 1932년 그의 기행문은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을 한탄하고 안타까워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최영수는 ‘한양춘색(漢陽春色)’(1932년 3월 18일~3월 30일)이란 제목으로 글과 삽화를 7회 연재합니다.
“헐리어진 헐리어가는 성지(城址)에 춘양(春陽)의 사선(斜線)이 나려 쪼여 잔디 우에 봄빗이 물들어간다…춘궁(春窮)에 울던 토막민의 애달픈 소리도 이제는 찾을 수 없으니 한강수의 봄 소식은 무엇을 상징함일까?…북한산 및 토막민을 바라보니 단장(斷腸) 알바 없으니 내 가슴만 답답(畓畓).” (‘한양춘색-성지(城址)의 춘색’, 1932년 3월 18일자 5면)
“쫏김의 선구자 광화문에도 춘광이 나려 쪼인다. 전날의 영화를 추상하면서….” (‘한양춘색-광화문’, 1932년 3월 24일자 5면)
최영수의 ‘도회(都會)의 비가(悲歌)’ 연재는 ‘기픈밤 어둔 거리에 구슲다! 야끼모 소리’(1932년 12월 6일), ‘밤거리에 사모 치는 어린군밤 장수의 넉’(12월 7일), ‘환락과 비애의 쌍선(雙線)에 우는 여급일기’(12월 8일), ‘항가(巷街)로 범람하는 실업군(失業群)의 한숨, 절규’ (12월 11일) 등으로 역시 우울한 주제입니다.
최영수는 이즈음 동아일보와 신동아에 본격적으로 만화를 싣습니다.
“신동아에 실렸던 토막만화로는 ‘벼룩퇴치’와 ‘월급날은 서러워’(1932.11.)를 비롯해 ‘실업자와 양산’(1934.6.), ‘어쩌라구 깽깽’(1934.11.) ‘용두문미’(1934.11.) 등이 있다.”(손상익, 한국만화통사, 315~318쪽)
동아일보 1932년 4월 1일자 4면부터 실리기 시작한 ‘복남의 탐험기’는 아동연재만화입니다.
동아일보 문예면에 실은 최영수의 ‘전억망 일대기(一代記)’(1933년 10월~12월)는 성인연재만화입니다.
“일송 최영수 작화, 작가로서-세상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돈과 사랑이요, 넘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애와 모순일 것이외다. 그리하여 돈과 사랑에 굶주리고 비애와 모순의 상처를 받은 인생이라고 하는 가련한 병자는 바야흐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외다. 그것을 통털어 이르되 ‘야릇한 세상’. 여기 ‘전억망’이라고 하는 만화적 가상인물을 하나 내세우고 그의 일대기를 그리어 그것으로 그 ‘야릇한 세상’을 해부하여 거기에 웃어운 때 한번 웃고 서러운 곳에 일적(一適,종지 그릇만큼)의 눈물을 흘려보려는 것이 이 만화의 목적입니다.” (연재만화 ‘전억망 일대기’ 예고, 동아일보 1933년 10월 2일자 4면)
1933년 10월 5일자 3면, 연재만화 전억망-실업편
최영수는 만화 ‘얼간선생’(1935년 10월~12월)과 ‘뚱단지 영감님’(1938년 3월~6월)도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과감히 여성을 만화의 주인공으로 채택한 선구자적 만화작가가 최영수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작가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신동아 1932년 10월호에 실린 최영수 만화 ‘남이 조와하는 여자’는 반페미니즘 경향을 드러낸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최영수의 여성관은 신동아 1935년 5월호에 기고한 ‘그 여자’란 제목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1932년 6월호 ‘서정어화’를 비롯해 1933년 7월호 ‘일인일미 미혼남녀 레뷰’, 1933년 10월호 ‘알고도 모를 여자의 마음’등이 그것이다.”(손상익, 한국만화통사, 315~318쪽)
최영수는 자신의 문학적 소양과 필력을 과시할 수 있는 ‘만문만화(漫文漫畵)’에 특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최영수는 1933년 4월 문화(文畵)를 모두 맡아 ‘봄이 쓰는 만문(漫文), 봄이 그리는 만화(漫畵)’를, 1934년 3월과 4월에는 만문만화 ‘춘광점묘(春光點描)’를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봄을 맞는 젊은이의 가슴을 결코 심상치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금강으로 봄맞이를 온 것도 그것은 오로지 내 마음의 빈 한구석을 채워보려 함이었다. 한 사나이가 사랑하는 한 여자에게서 배반을 당할 때 그의 마음동산에는 눈물의 싹이 돋는 것이오, 주검을 동경(憧憬)하는 이상한 심정이 떠도는 것과 같이 금강영봉(金剛靈峰)으로 봄을 찾아 지금 늙은 잣나무 밑에 지극히 궁한 호흡을 짓고 있는 나의 가슴에는 그렇게 거룩한 봄도 그렇게 정다운 봄바람도 오히려 눈물의 꽃을 피게 하고 주검의 동경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중략)…바른편으로 삼일포를 격 (隔)하야 해금강의 물결소리가 철서덕-왼편으로 팔선봉의 위엄한 자태에 스스로 고개를 숙이면서 차는 혹은 밭을 지나면서 모든 아름다운 풍경을 역력(歷歷)히 보여준다.” (‘춘광점묘’, 1934년 4월 6일자 3면)
1934년 4월 6일자 3면, 춘광점묘
일송 최영수는 만화관련 이론을 신동아를 통해 설파하기도 했습니다.
“약간 오래된 것을 들추어보면 ‘멍텅구리’(조선일보) ‘허풍선이’(동아일보) ‘엉터리’(동아) ‘정수동’(중외일보) ‘구리귀신’(시대일보) ‘뚱뚱이 말러꽹이’(중외) ‘박문수’(중외) 등의 연재만화가 있었고 동아일보의 ‘동아만화’와 조선일보의 ‘철필만화’란 시사만화란이 있어 계속 발표하였으며 그 외에 수개의 아동만화가 연재되었었다.…(중략)…조선의 저널리즘이 먼저 만화를 알고 또 저널리즘이 가져야할 만화와의 동반성을 잘 인식하는 동시 세계 저널리즘과의 만화대세를 실피어 거기서 조선 저널리즘이 가져야할 정도를 깨달아 그 깨달은 바를 하루바삐 이루어야할 것” (‘조선신문만화의 과거 현재 급(及) 장래’, 신동아 1934년 5월호, 97~98쪽)
최영수는 신동아소속이었지만 계속 동아일보에 기사와 그림을 실어 1934년 8, 9월에는 다도해의 여러 섬을 다니면서 본 풍경을 ‘다도해순범(多島海 巡帆)’이란 이름으로 스케치합니다.
최영수가 1935년 6월 병을 얻어 요양 생활을 하러 간 석왕사에서 자신의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글을 쓴 ‘자연의 요람에서’ 중 중(中)과 하(下) 편에 스케치 형식의 삽화를 함께 실었습니다.
최영수는 1935년 8, 9월에도 계속 동아일보에 만문만화 ‘추광곡(秋狂曲)을 연재했습니다.
“신문연재를 통해 유행하기 시작했던 만문만화(만화만문)는 1930년대 들어 잡지 쪽에서도 연재붐을 일으키게 된다. 이의 선두에 선 작가가 바로 최영수였으며 문화(文畵) 모두에 능했던 그에게는 이상적인 창작장르였다. 때문에 그는 이시기의 언론매체를 통해 최고의 만문만화 작가로 인기를 끌었다.…신동아에 실린 최영수의 만문만화는 1934년 8월호 ‘한양우물타령’을 비롯해 ‘만춘변주곡’ (1936년 5월호) ‘학교는 눈물이런가? 한숨이런가?’ (1936년 6월호), ‘하숙구걸행장기’ (1936년 7월호), ‘빈대타령’ (1936년 9월호) 등이 있다.…‘하숙구걸행장기’에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 겪었던 실업자 시절과 동아일보 재직시 5년간에 걸친 서울하숙생활의 애환을 묘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글에는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 동료였던 주요섭과 함께 하숙집 구하는 광고를 신문(조선일보)에 냈던 에피소드, 4개월마다 한번 꼴로 이사를 다녀야했던 비참한 하숙생활의 실정 등을 적고 있다.…신동아에 발표된 최영수의 만화만문은 ‘제-발 빕니다’ (1933.2.)를 비롯해 ‘이때가 오면’ (1933.3.), ‘아깝지 않습니까?’ (1933.4.), ‘이런 의술이 생겼으면’ (1933.6.), ‘1940년의 여름’ (1933.8.) ‘유행은 그녀를 울렸습니다’ (1933.11.) ‘세모풍경’ (1933.12.), ‘한강어부기담’ (1934.2.), ‘세기말적 풍경’ (1934.6.), ‘고서(苦署)! 고소(苦笑)!’ (1934.8.), ‘금광(金鑛)! 금광(金狂)!’ (1934.9.), ‘치통행진곡’ (1934.10.), ‘만화자가 본 세상단편’ (1935.2.), ‘신춘소보’ (1935.4.), ‘통계유언’ (1935.5.), ‘백화점 풍경’ (1935.6.), ‘세모잡경’ (1935.12.)등이 있다.”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318~323쪽)
1936년 1월 1일자 23면, 스포츠 조선의 세계적 등장과 제패의 쾌기록조감
최영수는 1935년 말 신동아를 떠난 뒤에도 동아일보 기고를 계속했고 해방 후 경향신문에 시사만화를 그리기도 했으나 6.25 때 납북됐습니다.
“문(文), 화(畵) 최영수-일년에 한번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덥다는 것은 사람이면 다 아는 것이라 치드라도 그러타고 사람이면 누구나 피서를 해야한다는 법칙…” (‘해수욕장풍경(1)’, 동아일보 1936년 8월 5일자 7면)
“문(文), 화(畵) 최영수-수평선, 해안선, 여긔에 반라곡선…” (‘피서지통신 11’, 동아일보 1937년 8월 10일자 8면)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납북인사북한생활기.
“금천을 거쳐 해주에 도착하자 이미 해주 중학 안에는 무명납치인사들로 꽉차있었다. 8월17일 밤 11시쯤이었다. 미리 모의를 한 50여명의 무명인사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경비원의 입을 틀어막아 질식시킨 후 뒷쪽 산등으로 도망을 쳤다. 비상소집으로 급거 동원된 인민군 경비대원들은 공포를 마구 쏘며 시내는 물론 야산 일대와 해변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새벽녘 그 중 20명이 붙들리고 해변에서 3,4명이 사살되었으머 나머지 전원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날이 밝자 인민군경비대장은 8백여명의 피납무명인사들을 모아놓고 붙잡아온 20명에 대한 군중재판을 열었다. 사전에 이미 군중 속에는 그네들의 푸락치가 배치되어 있었다. 주모자급 5명에 대해 ‘옳소!’식 재판으로 총살형이 언도되고 나머지십 5명은 징역형이 언도되었다. 총살형이 언도된 5명의 무명인사중에는 하문진(河鎭文,변호사) 박윤선(朴允善,중앙청과장) 최영수(崔永秀, 기자)등이 끼어 있었다.” (내외문제연구소제공, ‘죽음의 세월-납북인사북한생활기’, 동아일보 1962년 4월 2일자 2면)
“다재다능했던 최영수
일송 최영수(一松 崔永秀)형을 내가 마지막 본것은 6.25때 어느 뒷골목 으슥한 술집에서였다. 눈을 피해 싱검털털한 막걸리 한사발씩을 나눈 후 헤어지는데
“몸조심 합시다.”
이것이 나에게 준 그의 간곡한 작별인사였다.
일송형은 내 고향의 선배며 나와는 처남매부간이다. 남달리 두터운 사이였다. 그는 다재다능한데다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정들기 쉽고 정들면 끝내 잊지 못하는 결연을 맺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는 청춘기를 동아일보사에서 월간잡지 ‘신가정’을 편집하는데 보냈고 6.25 직전까지는 경향신문사에서 ‘신경향’ ‘부인경향’을 편집하고 있었다.
그의 수필집 ‘곤비(困憊)의 서(書)’에서 그는 고백 비슷한 편집자의 신세한탄을 하였는데 문득 그가 그리워 질 때는 읽어보며 나는 서글픈 감회를 이기지 못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의 옛집인 동아일보사가 건재하고 그의 정든 집인 경향신문사가 또한 건재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맏아들이 고등학교를 나와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는지 아버지가 일하던 경향신문사 문화부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숙명의 사진(寫眞)틀을 어떻게 어디다 버리고 지금쯤 어디서 그리움에 지쳐 쓰러져 있는가.” (소설가 이봉구<李鳳九>,‘6.25에 생각나는 사람들’, 동아일보 1962년 6월 25일자 4면)
최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