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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문사(文士)기자 변영로(卞榮魯)

Posted by 신이 On 11월 - 4 - 2016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논개’)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 1898~1961)

1933. 9. 정치부, 잡지부 기자, 1938. 1. 퇴사

 

 

  이은상이 1935년 4월 퇴사하고 후임으로 정치부에 있던 수주 변영로가 ‘신가정’의 편집 책임자가 됐습니다.

‘신가정’을 만드는 변영로의 편집 방침. 
‘너무 취미기사가 적다’, ‘너무 점잖다’, ‘왜 눈에 뜨일만한 재미있는 것을 아니 적어내나’ 등등.
모두 우리 ‘신가정’에 대한 흉이라면 흉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반대로 그러함을 큰 자랑으로 알고 동시에 큰 영예로 볼 이유와 긍지도 있습니다.
총혜하신 독자들께서 모르실바 아니지만 자칫하면 남의 저급 취미만을 북돋고 남의 야비한 호기심과 고상치 않은 본능을 건드리기 위하여 소위 취미라는  미명 아래 함부로 떠드는 것입니다.  이곳에 유두분면(油頭粉面)한 요악한 여자 하나와 그만큼 사람 끄는 요술은 적은 채 수수하게 차린 순직해 보이는 여자 하나가 있다,
상상하시고 그들 중에 어느 것을 택하면 해가 있고 어느 것을 택하면 복이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신가정’이 사람에 비긴다면 전자일까 후자일까? 짐작케 되실 줄 확신합니다.

 

  “천의무봉한 성격을 지녔던 수주는 그 재담으로 온 방안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를 가리켜 ‘방송국’이라고 했다. 어데서 듣고 왔는지 사내외의 소식이 누구보다도 빠른 정보통이었던 것이다. ‘수주는 군더더기 같은 글을 자르는 명수였다. 나는 간결하게 글 쓰는 법을 그한테서 배웠다. 인간적 매력이 풍부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학예부장이었던 서항석의 말이다.” (이문환 여성동아부 차장,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수주 변영로는 동아일보 1920년 5월 14일자 4면에 처음 등장합니다.

보시오 하시오 마시오

남의 글 알고 남의 일 알면서 내 글은 모르고 내 일을 모르면 어떻다 할런지 생각해보시오.
분명코 지묘한 우리의 언문 모르면 못 쓰고 안해선 안되니 뜨거운 맘으로 공부를 하시오.
(중략)
적설은 녹아서 흔적도 없고 고목은 잎 피어 녹음을 이루니 순환과 성쇠는 두말을 마시오.

 

 1920년 5월 14일자 4면

 

 1920년 7월 7일자 4면 동양화론(東洋畵論) 재(在) 동경, 변영로

 

  1922년 1월 15일자 3면 백의백벽( 白衣白壁)의 폐해, 예술상으로 본편견( 片見)의 일단(一端)

 

 1923년 12월 9일자 3면 현하(現下) 조선인 생활상태의 별견(瞥見, 얼른 슬쩍 봄) 변영로(영문란)

 

 1930년 2월 9일자 4면 섹스피어  일작(一作) 변영로 역(譯)

 

 1930년 9월 6일자 4면 일경일수(一景一首), 백두산 갔든 길에

 

 1934년 3월 14일 3면, 동키호테의 무후(無後)

 

 1934년 4월 5일 3면 나의 아호, 나의 이명(異名), ‘수주(樹州)’의 유래

 

 1935년 1월 1일자 1면 회고 갑신정변 서재필 박사 수기(변영로 역)

 

 1935년 1월 3일자 1면 체미(滯米) 50년(상) 서재필 박사 수기(변영로 역)

 

 1955년 1월 29일자 4면

 

(동아춘추) 손 선수와 다리 소동

이것은 필자가 동아일보 재근시대에 일어난 조그마한 사건의 하나이다. 손기정 선수가 백림에서 개최되었던 올림픽대회에서 마라톤 일착(一着)을 하였다하여 그가 꼴 라인에 들어오는 사진을 실릴 때 이북 납치된 이길용 군의 대담한 창의와 청전(이상범)의 불운의 가필(加筆)로 손 군 흉간(胸間)의 일장기를 말살할 탓으로 전기 양 이군은 물론, 사회면 편집책임자이던 고 현진건 군 등이 기억도 새롭게 경기도 경찰부(현 경기도청 자리)로 끌리어가서 가지각색의 고초를 치르던 무렵, 하루는 종로경찰서 형사 2명이 돌연 내사하여 필자에게 심상치 않은 질문을 하였다. 이렇게 적어 내려가다가는 독자가 두서를 차리기 어려울 염려도 불무하여 간단하게 경로부터 말하려한다. 당시 잡지부에는 최승만 부처, 황신덕, 고형곤, 이무영, 최영수(납치), 고 김원경, 최형종 등 몇몇 사람이 선후의 차이는 있으나 교교(交交) 편집에 종사를 하였는데 신동아 편집책임자는 최승만 씨고 신가정 편집책임자는 필자이었었다. 신문에 만이고 잡지에 라고 손 선수의 세계 제패하던 사진이나 기사를 대대적으로 게재치 않을 도리가 있었으랴. 필자는 개권(開卷) 벽두에 손 선수의 화보를 넣었는데 필자 딴에는  평범을 떠난 효과적의 사진을 넣는다는 생각으로 상반신(손 선수의)을 잘나버리고 양각(兩脚)만을 확대하여 ‘세계를 이긴 이 다리’란 설명을 붙이어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고 이것에 말썽이 붙어서 전기 양 형사공들의 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일 형사는 닷자곳자로 필자에게   “당신은 참으로 지능적이요.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니까 다리만내이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그리한 것이 아니요? 답할 말이 있으면 해오시오!”하며 자못 기세불온하게 얼러 메었다.

필자는 극히 태연한 어조(자신이 있었기 때문)로  “손 선수의 상반신을 잘라버리고 양각(兩脚) 만을 확대하여 내인 이유를 설명하겠소. 손 선수가 세계를 제패하였다니 그가 무엇으로 세계를 제패하였겠소? 두뇌가 명철하니 두뇌로 세계를 제패하였겠소? 흉회가 활달하니 흉회로 세계를 제패하였겠소? 이것저것 다 아니라면 결국에는 그의 무쇠 같은 두 다리가 세계를 제패한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화보적 효과를 백퍼센트로 내려고 그 다리만을 확대 게재한 것이요. 그리고 잘라버린 사진 동강에는 일장기 마아크가 아니고 양정고보의 ‘양(養)’자 마아크였었소. 입증 삼아 찾아서 뵈오리다.”하고 선선히 말을 하였으나 형사는 종시 미신 적게 여기는 태도였다. 필자는 갈 데 없으려니 하고 사무 상아래 휴지 넣는 용수를 뒤지었다. 꼭 있을 줄 알았던, 기어코 나올 줄 믿었던 그 말썽 붙은 사진 토막은 간데 온데가 없었다! 아 풀사! 큰 일 났고나! 이제껏 냉정 일관이던 필자로도 당황하기 시작하였을 것을 자백하여 둔다. 각일각(刻一刻)으로 경찰서 연행의 시각은 닥아 오는 것이었다. 형사들의 태도도 급격히 경화(硬化)하여지었다. 아무리 열 번 스무 번 용수를 쏟아놓고 뒤지고 골라본들 없어진 것이 나올리는 만무하였다. 필자는 형사들의 불쾌 막심의 냉소를 온몸에 홈박 받으며 창피하고 구차함을 무릅쓰고 “기어이 찾아 놀 터이니 수삼분의 시간의 말미를 달라”하고서는 위아래 층 사동(使童)들을 총동원시키어 사옥 남측에 있는 쓰레기 모아 버리는 데를 내려가서 손으로 혹은 쇠꼬챙이로 일제 대 수색을 최종 노력으로 감행하였다. 혹시 어름어름하다가 내빼지나 않을까, 경계 불태의 형사들은 이제는 현연히 귀에 들릴 정도로 코웃음을 치며 명부사자(冥府使者) 같이 따라다니었다. 에누리 없이 참으로 기가 막히였다. 유치장 행이 겁나서 보다도 형사들에게 야비한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분하였다. 이윽고 사동(불행히도 성명을 잊었다)하나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이겐가요”하고 필자에게 갖다가 보이는 것이었다. 틀림도 없는 잘라버림 손 선수의 뚜렷이 양(養) 자 마아크가 그리어진 상반신의 사진 쪼각이었다. 행여 틀리기를 바라며 대어보고 또 대여보아도 트집 잡을 길 없는 ‘바로 그쪽’이었다. 형사들은 기대에 어그러진 실망에서인지 떡심이 풀리어 싱거운 웃음을 입가에 띠우며 “미안하였소이다.”란 말을 남기고는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세상에는 별별 가지각색의 화(禍)가 많은 것이다. 붓대 잘못 돌리어서 필화(筆禍)도 있고 입 끗 잘못 늘리어서 설화(舌禍)도 있겠지만 필자 경우에는 화를  당하지 까지는 않았드라 하더라도 손기정 군 다리 바람에 각화(脚禍)를 당할 번하였다.(필자·시인·코리언 리퍼부릭 사장) 

 

이상범, ‘일장기말소사건 20년 전의 회고기’ (동아일보 1956년 8월 19일자 4면)

  “그 다음날인 26일에는 대강 우리를 취조해보더니 웃줄(상층부)을 걷기 시작하여 사회부장 현진건, 사진과장 신낙균 씨를 붙잡아서 종로경찰서에 유치하였다. 이날 밤 늦게 잡지부장 최승만 씨(본사 간행잡지 신동아 책임자)가 붙들려왔는데 씨는 나의 감방으로 들어오더니 저성으로 사진과원 송덕수 씨도 잡히어 옆 감방 장용서 씨 있는데로 들어갔다고 말하여 준다. 곧 뒤이어 잡지 ‘신가정’ 편집자 변영로 씨도 불려 왔었는데 이 분들이 붙들려온 이유는 첫째로 최, 송 양씨는 ‘신동아’에 낸 손 선수의 사진에 일장기 ‘마아크’가 좀 선명치 않다는 것이고  둘째로 변 씨는 ‘신가정’에 손, 남(승룡) 두 선수의 각부(脚部)사진을 뚜렷하게 노출시켰다는 것이라 한다. 놈들이 변 씨에게 트집을 하기를 ‘손, 남의 사진 중에서 전신형을 내지 않고 하필 각부만 냈느냐?’ 하기에 예의 유머러스한 변 씨는 ‘아니 여보시오, 마라돈 경기에 다리가 제일이지 얼굴이나 전신이 무슨 관계가 있소, 그래서 그 건장한 다리를 일부러 독자에게 보이기 위하여 확대 게재하였소’하고 대답하였더니 놈들도 어이가 없는지 웃으면서 ‘그러나 그것은 풍속괴란죄(風俗壞亂罪)에 해당하오’하며 얼음얼음 하더라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 정도의 문초 끝에 변 씨는 며칠 밤 고생하다가 무사히 석방되었다.”  

 

 이용상 전 언론인, ‘한국언론인물지’, 한국신문연구소, 1981년, 397~411쪽 발췌

  수주(樹州)는 수주다. 그는 영문학자라기보다도, 시인이라기보다도, 언론인이라기보다도 수주는 그냥 수주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천학우매(淺學愚昧)한 필자가 하느니보다 선생과는 각별히 친교가 깊으셨고 주붕(酒朋)이신 박종화(朴鍾和) 선생의 글로써 대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할 것이다.

  “난초 한 그루가 호젓한 골짜기에 홀로 피어 맑은 향기를 아늑히 뿜을 때 난초 그 자체가 누구를 청한 바 아니건마는 그 갸륵한 향기를 찾아 십리유곡(十里幽谷)을 찾는 것이다. 창산의 흰 구슬은 그 자체가 조촐하고 밝으며 그 몸 스스로는 원래가 무심하건마는 모래알과 와력(瓦礫)의 틈에 섞여지지 않고 남의 눈에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에 술이 얼마나 많이 없어졌으며 세상에 술 마시는 이가 얼마나 많으리. 술의 역사를 따져본다면 ‘사기(史記)’에 술을 빚어낸 이가 우왕(禹王)때 의적이라 했으니…(중략)…술의 역사가 이렇게 길고 술 마시는 이가 이렇게 많거니 어찌하여 오늘날 수주의 술 마신 내력인 ‘명정(酩酊) 40년기’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또 읽어보지 못한 이는 책을 얻어 한번 읽어보기를 다투어 원하는 소이연(所以然)이 어디에 있는가. 수주는 그렇지 않다 하되 수주의 인품은 청산의 흰 옥이요, 수주는 스스로 부인하되 수주의 인격은 호젓한 유곡 속에 홀로 핀 난초인 때문이다. 이것은 수주가 죽은 뒤에 내가 쓸 말인데 수주가 살아 있어 이글을 쓰게 되니 수주가 알면 또 한 번 욕하리라. 미안하기 짝이 없다. 수주의 지나간 반평생이 50유여 년 세상 됨됨이 옥 같은 수주로 하여금 술을 마시지 아니치 못하게 한 것이 우리 겨레의 운명이었으며 난초 같은 자질이 그릇된 시대를 만났으니 주정하는 난초가 되지 않고는 못 배겨 내었던 때문이다. 수주를 흠모하는 젊은이가 많다. 수주가 시인이니 시로써 흠모하는가, 수주가 술을 잘 마시니 술로써 경앙하는가. 아니다. 그 본연이 옥인 때문에 노소(老少)가 모두 수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 바탕이 난초인 때문 친구와 제자가 수주를 다시 한 번 아끼는 것이다. 어찌하여 수주가 옥이요, 난초인가. 왜정 40년에 일본유학생이면서도 수주는 백면(白面)의 한 궁생(窮生)이었다. 바야흐로 양풍(洋風)이 파도 높은 을유(乙酉) 이래 7, 8년 미국 유학생이면서도 수주는 의연히 한 궁유(窮儒)다. 옥(玉). 오히려 무색하고 난초의 향기가 도리어 속(俗)되다 하면 수주는 또다시 나를 욕하고 주정하리라.”

이글은 수주 생존 시 발간된 ‘명정 40년기’의 서문이다. 수주의 참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문과 영문을 아울러 통한다는 의미에서 변씨 3형제를 한국의 쌍벽 아닌 ‘삼절(三絶)’이라고 부르는 분도 있고 그중에서도 막내인 수주는 예술적인 천분을 더 많이 타고 났으며 겸하여 ‘명정 40년’의 기록을 자랑할 수 있었으니 학자이신 그의 맏형 영만(榮晩)보다도, 외무부 장관과 총리서리를 지내신 둘째형 영태(榮泰)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삼절’ 중 ‘최절(最絶)’의 존재였다. 여기서 필자는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 흔히 수주 얘기가 나오면 “수주는 천재이기는 했으나 술주정뱅이에 불과했다”고들 한다. 필자는 이럴 때마다 울컥하는 울분과 그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조소를 던지는 것이다. 그 조소는 “당신은 조국의 슬픈 역사를 뼈저리게 느껴보지 못하셨군요!”하는 뜻도 있지만 선생의 진면목을 너무도 모르면서 마음대로 지껄이는데 대한 경멸이기도 했다.

 

전 경향신문 주필 서정억(徐廷檍) 선생이 들려 준 목격담 한 토막

  “모월 모일 모처에서 있은 장안 명문가의 결혼식장에는 정계 재계 등 1급 거물급과 신사숙녀들이 만당해 있었는데 뒤늦게 장택상 씨가 흰 장갑을 끼고 단장을 짚으며 들어서더니 앞자리에 점잖게 앉더라는 것이다. 얼마 떨어진 곳에서 이를 본 수주가
‘얘! 얘! 택상아!’하고 부르더라는 것. 자리가 자리인 만큼 장택상 씨는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수주를 힐끗 쳐다봤는데 수주는 계속
‘택상아!’
‘너 손가락에 옴이 올랐나? 모두 이그러졌나? 문둥병이 오른 거야? 이 날씨에 흰 장갑은 왜?……’
과연 식장은 긴장해졌는데 수주는 계속
‘다리 뼈다귀가 부러졌나? 단장은 또 왜?’
식장은 고요만 했고 장택상도 아무 말이 없더라.”

 

그 후 소년 수주는 계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앙학교에 입학했는데 3학년 졸업을 며칠 앞두고서 체조 선생 이기동(李起東)에게 불량 학생이라는 지목을 받게 되자 그는 대판싸움을 걸어 이 선생을 크게 욕보이고 홀연히 만주 안동현으로 줄행랑을 놨다. 때문에 졸업장을 받지 못했었는데 후일 중앙고보에서 교편을 잡게 되자 명예회원이라는 졸업생 자격을 받게 되었다. 후일 패기만만했던 그의 품격이나 ‘모두가 속물’이며 안하(眼下)에 인간다운 인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던 그의 성격은 벌써 이 무렵부터 있었을 것이다. 술과 개망나니로 형편이 없던 그였기 때문에 자칫하면 자아파멸이 올 것도 같았으나 웬일인지 그는 영문학에 대한 치열한 동경으로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반에 입학하여 남들이 3년에 마치는 학과를 불과 6개월 만에 졸업을 했으며 성적도 우수하여 2등을 차지했었다.(1등은 전 중앙기상대장 이원철<李源喆>박사였다) 수주는 졸업 4년 후인 열아홉 살 때 모교인 기독교 청년회관의 영어교사가 되었는데 그때 월급은 다른 이가 30~40원을 받았는데 수주는 초급이 80원이었다니 크게 우대 받은 셈이다. 수주는 열세 살 때에 시를 지었다. 새 학문을 공부한 그가 한시의 오언, 칠언을 앉은 자리에서 지었고 열여섯 살 때에는 영시를 지은 천재다. 하기야 매월당(김시습)같은 분은 열 살도 못되는 어린 나이에 사람을 놀라게 한 한시를 지었다고 하지만 매월당도 천재요, 수주도 천재다. 그리고 영시를 처음 지은 것은 그가 열여섯 살 때에는 게일 박사가 그 영시를 보자 천재의 시라고 격찬하면서 타이프로 몇 십 장을 찍어 친지인 외국인들에게 보이며 자랑했다는 것이다. 이를 전후해서 수주는 많은 시를 썼는데 시집으로서는 스물다섯 살 때 ‘조선의 마음’이 처음으로 출판됐다. 이 시집은 민족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수주 일대의 명작이었는데 이 시기가 우리 문단이나 우리 사회가 ‘조선의 마음’을 절실히 찾고 또 노래 부르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마음’이 출판된 후 이화여전에서 수주를 초청해 갔는데 이때 가르친 제자로는 모윤숙(毛允淑) 노천명(盧天命) 등의 여류시인이 있다. 그 후 1933년 수주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신가정’지의 주간이 된 것이다. 그해는 공교롭게도 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사를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부사장으로 옮겨가던 해였다. 수주는 동아일보사에서 우리나라 초창기 여기자인 황신덕(黃信德) 여사와도 같이 동아일보사가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폐간 당할 때까지 일했다. 이 무렵 일본이 점점 미쳐 날뛰기 시작하자 수주는 더욱 술과 벗하게 되는데 예리한 신경과 일주(逸走)하는 감정을 가진 수주로서는 알콜의 마취력을 빌어서 세사(世事)를 망각하고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일 이취(泥醉)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수주의 활력은 왕성하였으니 생이지지(生而知之)라는 말이 잘 믿어지지 않는 20세기에서도 수주라는 하나의 페노메논(현상)은 알콜성에 침식되지 않는 특수강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주는 일제 36년, 역사의 잔인한 기반에 얽매이어 살았기 때문에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고 시 ‘논개’에서 그의 어두운 마음을 무겁게 표현하면서 일제생활은 자연히 ‘명정 40년’의 방향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중에도 수주는 일제 압정(壓政)에 신음하는 동포에게 희망과 조국애를 북돋워주기 위해서, 스페인에 빼앗긴 조국 필리핀을 광복시키기 위해서 싸우다가 스페인 관헌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한 대천재요 시인이기도 한 호세 리살 박사(1861~1896)의 순국사세시(殉國辭世詩) 13장을 번역했던 것인데, 위험을 무릅쓴 이 번역은 수주의 민족적 양식(良識)의 발로였다. 이 무렵 일제의 대륙침략은 점점 치열의 도를 증가해 갔고 글을 쓰면 총독부 검열에서 골자(骨子) 있는 글에는 붉은 줄을 그어 경고를 주는 것이었는데 수주는 몇 차례를 삭제 당하고 나서 ‘에익! 뼈 없는 글은 안 쓰겠다.’고 붓을 꺾어 버렸으니 이로부터 수주의 주광(酒狂)은 점점 도수를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수주는 일제 40년에 걸쳐 한결같이 변함없던 그 불기(不羈)정신과 그 강고한 저항정신과 그리고 높은 민족의 긍지를 지켰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 있어서도 과거 미국 유학을 7, 8년이나 하셨건만 미군정 주변에는 가까이 하지 않고 궁하면서도 의연히 살았던 것이다. 해방 후 이 땅의 명사 대가 중진 할 것 없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중행위, 허위의 취작(取作)을 으례 뻔뻔스럽게 해왔지만 수주의 생애에는 아유구용(阿諛苟容) 등은 전연 없었고 도리어 그는 혹폄(酷貶)의 부덕을 자랑삼았었다. 그러했던 수주를 가리켜서 세상 사람들은 흔히 ‘수주는 기인’이라고 했지만 그러한 평은 너무 속된 것이었다. 그 속된 사람들 중에는 수주의 기질에서 우러나오는 역설성이라든지, 타기벽(唾棄癖), 기소(譏笑), 냉매벽(冷罵癖) 등에 질리거나 못마땅하여 ‘기인’이라고 하는가 하면 또 수주의 거침없고 날카로운 그리고 상대를 아연실색케 하는 직언이 무서웠던 유배(類輩)들이 말하는 ‘부덕’일 것이다. 하기야 수주는 ‘중용’을 모시(侮視)하고 ‘원만’을 폄하하는 기질이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홍의병(紅衣兵)’의 대선구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시 우리의 주변에서 중용, 원만이 옳은 어의(語義)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인가? ‘비정상이 정상된 사회’ 속이니 수주야말로 우리 사회의 무의견과 아첨과 교활과 얌체의 뻔뻔과 배신과 야비한 모략중상과 무분별과 사기, 횡령과 불신과 온갖 무질서 등등 해방 뒤 20여 년에 걸쳐 그러한 것들이 창궐할 대로 창궐, 미만(彌滿)했던 속에서도 수주는 고도(高度)한 지성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고독을 가누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언청이 나라에서는 입술 성한 사람이 병신구실한다.’는 속담이 바로 이 경우일 것이다. 천재의 일생은 고독하다지만 암담 불운의 시대에 태어나서 천부의 재무(才貿)를 마음껏 펴지 못하고 스스로 울분을 달랬던 수주! 수주는 참으로 타산과 공리(功利)를 모르신 희소가치의 한 분이었다. 일제 말기 그 단말마적인 공포 속에서도 수주는 일제를 비유하여 ‘오줌싸개’가 연합군의 수레바퀴를 가로막는 것처럼 실로 발칙한 것이라고 했다(시제 ‘당랑(螳螂) 거철(拒轍)의 짓’). 오줌싸개의 짓 뿐 만 아니라 아홉 가지 벌레에 은유한 시조 ‘곤충 구제(九題)’에서 수주는 항일과 민족정신을 외치면서 ‘지원병의 권유’ 강연을 했던 자, 조선과 일본의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주장했던 자, 내선일체를 주창했던 자들을 그야말로 벌레 똥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풍자했다. 그런데 당시 일제에 아첨하면서 날뛰던 유명 무명의 인사들에게 그리고 지금도 잔명(殘命)을 누리고 있는 그러한 인사들에게 수주가 들려주는 시 한 편이 있으니 민족의 앞날과 자신의 후손을 위해서 잘 살펴주기 바란다.

어둠에 쫓긴 나비 불빛찾아 날아들어,
깃만을 태우는가 몸마저 사루우네,
어두면 어둔대로 살아보면 어떠리.
– ‘곤충 9제’ 중 ‘부나비’

비단 일제 때 뿐만 아니라 현재도 미래에도 이런 부나비 같은 꼬락서니들은 언제나 문제 거리였고 민족과 국가를 해치는 인종들인 것이다. 이렇게 부나비 같은 존재를 개탄한 수주는 참으로 민족정신의 사표자(師表者)였다. 아아! 그 표일(瓢逸)한 재분(才分,) 놀라운 기억력, 불기고고(不羈孤高)한 성격, 거침없는 해학 등… 이제는 그 경해(警咳)에 접할 수 없으니 세상이 적적한 것만 같다.

 

  “변영로가 코리안 리퍼블릭 영자 일간신문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불행하게도 인후암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세인트룩(St. Luke)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내외가 신교동에 있는 수주 댁에 병문안을 갔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천재는 목욕하지 않는다.’였다. 수주는 아주 여유 있는 유머러스한 어조로 말했다. ‘바보들이나 목욕을 하는 거지 천재는 목욕을 안 하는거야! 내 큰 형님(榮晩)께서 중국에 계실 때 중국의 유명한 천재 문인(그때 이름까지 말했는데 필자가 지금 기억이 안남)이 목욕 않기로 유명해서 정치범으로 옥에 갇혔을 때도 형무관들이 그 천재 문인 목욕시키느라 고생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부인도 유명한 문인인데 결국 목욕 안 하는 것 때문에 이혼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신명이 나게 이야기했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이용상은 언론인들의 교양지에 게재되는 수주에 대한 글을 쓰면서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시인으로 일제압정에 신음하는 동포에게 희망과 조국애를 북돋워 주기위해 쓴 시 ‘논개’에서 표현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를 수주의 명정 40년 속에 숨겨져 있는 정열과 얼로 상징된 것이라는 데서 수주 변영로의 차원 높은 본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김은우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한국언론인물사화 8.15전 편-하, 한국언론인회, 1992년, 96~101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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