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고형곤(高亨坤, 1906~2004)
1933. 5. 신동아 기자, 1935. 2. 퇴사
제6대 국회의원 시절
고건(高建) 전 총리의 아버지 고형곤 선생도 일제하 ‘동아 식구’ 였습니다.
“신동아사의 발전이 속(速)함은 실로 조선 언론계의 일(一) 기적적 표현이라 하여 도처에서 이야기꺼리가 됩니다. 이번에 또 영업국에도 증원을 하였고 편집국에도 새로이 금년 봄에 성대 출신을 마치신 고형곤 씨가 기자로 입사했습니다.” (신동아 1933년 6월호, 편집후기)
“나의 경우는 송진우 사장에 의해 발탁된 케이스였다. 당시 경성제대 철학과에 적을 두고 있었던 나는 마지막 학기의 졸업논문 제출을 남긴 상태에서 등록금을 못 내고 있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생각다 못한 나는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송진우 사장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았는데, 뜻밖에도 송 사장은 영업국 직원을 불러 ‘고 군 등록금을 대주도록 하게’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송진우 사장의 배려로 무사히 대학을 졸업한 뒤 인사차 찾아간 나에게 송 사장은 잘됐다면서 글을 한편 써오라는 주문을 해왔다. 수필 한편을 써서 인편으로 보냈는데 며칠 후 사장실로 와 달라는 엽서가 날라 왔다. 사장실로 찾아가니 송 사장은 대뜸 ‘자네 오늘부터 여기서 근무하게’하는 게 아닌가.”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 당시 신동아 기자, ‘민족의 잡지, 일제하의 신동아’, 신동아 1991년 11월호)
“신동아가 창간과 동시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일제하에서 마치 정부와도 같은 존재였던 ‘동아일보’에서 발행하는 잡지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동아일보사에서는 신동아를 발행하면서 영리추구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여러 가지 사업들을 벌이는 등 지원을 많이 해주었는데, 영업적으로 수지가 균형을 이루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창간호의 구성을 보면 ‘농가부채 5억 원, 조선농촌은 어데로 가나?’ ‘열강의 신 계획경쟁’ ‘중국국민당의 조직체계’ ‘세계적 인기작가 레마르크’ ‘결이혼으로 본 조선의 자태’ ‘북극탐험사’ ‘태교의 과학적 음미’ 등 다양한 논문이 17편이나 실렸고, 수필 기행문 시 소설 희곡 등을 싣고 있다. 또 ‘세계의 동정’란에는 ‘조선적자문제’ ‘영인(英印) 제2원탁회의’ ‘영국의 거국내각’ ‘중국의 대수해’ ‘일중(日中) 충돌전말’ 등 각국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신동아가 매달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특집 주제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전쟁시비’(32년 2월호) ‘과학문명’(33년 5월호) ‘고도고적’(33년 8월호) ‘극동문제’(34년 2월호) ‘스포츠’(34년 3월호) ‘농촌문제’(35년 2월호) ‘교육문제’(35년 3월호) 등이다. 일제 하의 ‘신동아’를 유심히 살펴보면 해외소식을 많이 실은 점이 눈에 띈다. 이것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는 긴박하고도 미묘한 국제정세를 자세히 다루려는 취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원고부족으로 인한 ‘번역물로 땜질하기’현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오늘날처럼 각 방면의 전문 지식인이 드문 때여서 원고 모으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양한 내용으로 편집한다는 방침 아래 잡지를 만들어야했으나 마땅한 필자들이 적다 보니까 신동아 기자들이나 주요 필자들은 보통 서너 개씩의 필명을 가지고 같은 호 잡지에 겹치기로 등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나의 경우 본명 이외에도 형고은(荊古銀) KHK 등을 필명으로 사용했고, 최승만 씨의 경우는 인왕산인, 필운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썼다. 아마도 번역을 많이 했던 주요섭씨가 가장 많은 필명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수주 변영로씨는 같은 호 잡지 안에 수주라는 이름으로 시를 발표했는가하면 변영로라는 이름으로 수필을 게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하의 신동아를 만든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주요섭이었다. 신동아 창간호가 나오기 직전인 31년 10월 1일자로 입사한 주요섭은 중국 상해의 호강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포드대학에서 공부한 해외유학출신이었다. 사내에서 최초의 잡지전담기자로 입사한 주요섭은 33년 11월에 잡지부장으로 승진했는데, 미국 쪽 사정이 밝고 어학실력이 뛰어났으므로 신동아의 번역원고는 거의가 그의 손을 거쳐 나온 것이었다. 주요섭은 아이디어도 많고 활동력도 대단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외국잡지를 입수해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의 기사를 만들어내곤 했다. 특히 원고부족사태가 발생하면 주요섭의 번역원고로 막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형곤 기자는 기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허헌을 만나 인터뷰하던 때를 꼽았습니다.
“내가 신동아 기자를 하면서 겪었던 일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일로는 허헌 씨 인터뷰를 들 수 있다. 나중에 북한 정권에서 부수상을 지내게 되는 허헌은 그때 영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돌아와 있던 터였다.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갔더니 인왕산 밑 판자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루에 커다란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을 뿐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살람살이였다. 인터뷰를 하면서 사정을 들어보니 해외 여행하느라 돈을 다 써 오막살이 신세라는 것이었다.”(고형곤, 신동아 1991년 11월호)
신동아 1934년 8월호 35쪽
세계일주에서
신문기자로서 얻은 세 가지 인상
미국의 선거전, 모색(毛色)이 각이(各異)한 양대 정치가, 브뤼셀의 국제약소민족대회
내가 구미를 시찰 갈 때의 여행권에 시찰 목적은 구미 각국의 ‘사법제도 견학’이라고 기입되었다. 그러나 구미를 관찰할 때는 나는 세 가지 견서(肩書)의 각이한 명함을 사용하였나니 첫째는 ‘변호사’라는 견서로서 각국의 사법제도를 관찰할 때에만 사용하였었다. 둘째는 전문학교 교수라는 명함으로 교육제도를, 셋째는 신문기자 명함으로서 다방면에 긍한 관찰을 하였다. 위에 말한 전문학교 교수 신문기자의 명함을 사용한 것도 당시 보전과 동아일보사에 내가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동아 1933년 11월호 166쪽 혈누록(血淚錄)-무명생(無名生)
편집자로서 한마디
이 장편소설 ‘혈누록’의 작자 무명생은 금년 21세의 청년으로 불치의 병인 나병환자입니다. 게다가 한 다리를 잘라낸 불구자입니다. 고보(高普)까지 마치고 전도양양하던 수재가 그 몹쓸 병마에게 정복을 당하여 지금 나병환자 수용소에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그의 자서전적 소설로써 그야말로 눈물겨운 작품입니다.
황신덕-김자혜 대담, ‘신가정 때의 여기자’, 여성동아 1967년 11월호, 463쪽
황신덕: 신여성은 자꾸 나오는데 발표할 기관도 없고, 그때부터 동아일보는 동포들에게는 정부 모양 대중이 신임하고 믿고 의지하는 기관이었지요.
김자혜: 기억나는 건 소록도 문둥병환자로부터 원고가 왔어요. 고형곤 씨가 원고를 받았는데 병균이 옮는다고 마스크를 하고 나무 젓갈로 장갑 끼고 편지를 넘기면서 읽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 그 이야기가 두고두고 웃음꺼리로 남았죠.
“신동아에는 28세에서 31세까지의 좋은 나이 때 이년 남짓 참여했었다. 당시의 동아는 인촌 고하라는 두 큰 기둥 아래 제제다사가 모여 언제나 움직이고 있었다. 신동아의 원고 검열은 우리말에 능한 니시무라라는 일인이 맡고 있었다. 부부사이가 좋지 않은 이였다. 그래서 마누라의 바가지가 다음날엔 아무 죄 없는 신동아에 수많은 자국을 남겨도 어쩔 수 없는 억울한 시대였다. 하룻저녁에 새 원고를 만들어 메우는 일은 예사였다. 뜻이 큰 젊은이들이 모여 통쾌한 일도 많았다. 우스운 일도 많고. 신동아에서 2년 일한 뒤 나는 대학이 그리워 경성제대 연구실로 돌아갔다.” (고형곤)
“한국 철학계에서 서양철학을 연구한 1세대 학자로 손꼽히는 청송 고형곤(聽松 高亨坤) 전 전북대 총장이 25일 오전 7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8세.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의 부친으로도 잘 알려진 고인은 후설, 하이데거 등 서양 실존주의철학과 불교 선(禪)철학을 창조적으로 접목시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철학자였다. 원래 전공은 서양철학이었으나 ‘하이데거도 동양사상을 배우는데 정작 우리는 자신을 너무 모르고 있다’며 불교철학에 심취해 존재의 문제를 탐구의 본질로 삼는 선사상에 천착했다. 제자인 서울대 소광희(蘇光熙) 교수는 ‘선생은 천재성이 번뜩이고 로맨티스트적인 기질이 강했다. 그의 강의는 동서양 철학을 넘나들었고 강의 장소는 교실보다 야외, 그리고 술집을 애용했다. 술상이 곧 칠판이었고 술잔이 강의노트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고인이 공직 생활에 나서는 고 전 총리에게 남의 돈을 받지 말고, 술 잘 마신다는 소문을 내지 말며, 누구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말게 하라는 ‘목민관 수칙 3계명’을 내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고 전 총리는 술에 관한 항목을 제외한다면 부친의 엄명을 충실히 지켜 왔다고 밝힌 바 있다.” (2004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김형찬 기자)
고건, ‘참선과 모차르트’(‘나의 삶 나의 아버지’, 동아일보사, 2005년, 10~25쪽)
아버지(高亨坤)가 돌아가셨을 때 모두들 호상好喪이라고 했다. 아흔아홉의 백수白壽를 누리면서 끝까지 맑은 정신을 간직하다 돌아가신 점이 그렇고, 철학으로는 동양과 서양을, 생활에서는 정치와 참선을 두루 경험한 남다른 인생경로를 놓고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맞는 말이다. 참으로 복 받으신 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여읜 자식의 서운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요즘도 늘상 아버지가 떠오른다. 시국이 서수선할 때, 어떤 것이 옳은 길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면 더 그렇다.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판단하셨을까. 그만큼 아버지는 일생을 통해 나를 일깨워주던 분이었다.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조언을 해주시며 항상 버팀목이 되었던 최고의 자문역이자 의논상대였다. 아버지는 전북 임피 지금의 군산시 근교의 농촌에서 태어나 서당을 다니다가 뒤늦게 신교육을 받았다. 만학도였음에도 5년 만에 임피보통학교와 이리농림학교를 끝내고 경성제대 철학과에 입학한 걸 보면 상당히 총명하셨던 모양이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아버지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어렵사리 대학을 마쳤다. 문재文才도 있으셨던지 ‘머슴 문성이’라는 단편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그것을 인연으로 졸업 후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이광수 선생 밑에서 편집부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아버지는 고하 송진우 사장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셨다는데, 어릴 적 와우산 아래 작은 집에서 도포 입은 송진우 사장을 본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고하 선생의 기일이면 어김없이 노구를 이끌고 추모의 정을 표하러 가시곤 했다.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철학 선생님이다. 내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연세대 부근에 머물러 있다. 한때는 서강 와우산 아래에서 살았고, 한때는 신촌 안산 아래에서 살았다. 내가 서울 신촌의 창천초등학교를 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우리 형제는 장난이 심했다. 와우산 집 옆에는 아버지와 연전延專 동료인 이양하 교수가 살았다. 당시 네 살, 두 살배기였던 나와 우리 가형家兄이 아버지와 절친했던 이 친절한 옆집 아저씨를 꽤나 들볶았던 모양이다. 훗날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이양하 교수의 수필에 나오는 ‘옆집의 작은 악당, 경이 건이’가 바로 우리 형제 이야기다. 당시 아버지는 내게 무척 자상한 가정교사였다. “이게 뭐예요, 저게 뭐예요”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짜증 한번 내는 일 없이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다. 때때로 “이게 뭘까, 너 아니?”하고 오히려 질문을 유도하기도 하셨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선생님께 질문한다는 것이, 손을 들고는 “아버지이~!”하고 운을 떼는 바람에 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을까. 이 시절 또 하나 생각나는 게 닭장이다. 당시 대학교수 봉급이라는 게 한창 자라는 아이들을 둔 가장에게는 영 넉넉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부업으로 집에서 닭을 길렀다. 연전 사택 주변에 레그혼Leghorn 100여 마리를 키웠다. 그러다 보니 집 주변이 닭 우는 소리로 꽤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대학총장이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지만, 교수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냥 눈감아준 듯하다. 나는 닭장 청소당번이었는데 횃대 밑에 들어가 닭똥을 치워놓으면 그것을 받아 비료로 파는 사람이 가져가곤 했다. 덕분에 노란 달걀 프라이가 떨어지지 않았던 내 도시락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버지도 이 부산물을 꽤 즐기셨던 것 같다. 주말이면 집이나 인근 산에서 친구 분들과 막걸리 파티를 열곤 하셨으니 말이다. 잔심부름을 맡았던 나는 아버지의 술안주로 닭요리가 빠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분들이 나눈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어린 내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은 그릇이 커야 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이 무렵 아버지는 내 이름을, 당초 지으신 건강할 건健에서 세울 건建으로 바꾸셨다. ‘높이 세운다’는 이름만큼이나 내게 거신 아버지의 기대도 컸던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 노력하도록 동기를 제공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칭찬해서 나를 북돋워주실 뿐이었다. 아버지가 서울대학교로 옮기로 나서 3년 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해에 6.25가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제일 먼저 칸트 전집 10여 권과 나의 중학교 1학년 교과서를 챙기셨다. 한 톨의 양식이 아쉬운 전쟁 통에 그런 행동을 하는 아버지가 어머니 보시기에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짐을 짊어지고 고깃배로 밤섬까지 건넌 뒤 걸어서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 전쟁기간을 보냈다. 환도還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전쟁을 겪고 난 뒤라 어머니는 아들이 의사가 되어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셨지만,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나의 결정을 지지하셨다. 워낙 자식들에게 자신을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성품인데다 아무래도 이과보다는 문과에 호감을 가지셨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아버지와 사제 간이 되었다. 당시 철학개론은 문리대 필수과목이었는데, 주요과목의 개론은 주임교수가 직접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논어에서도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라 하여 자식은 서로 바꾸어 가르치는 법이라고 했는데, 강의사간에 아버지와 맞닥뜨리는 것은 영 거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피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교수 놀리고 흉보는 것이 낙이었을 젊은 시절의 내 동기들은 꽤나 불편했을 테고 아버지 역시 이러한 불편함을 감수했을 것이다. 출석을 직접 부르지 않고 서면으로 하던 시기여서 수업시간에 이름을 불리는 일만은 면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B학점에 그쳤다. 대학 2학년 때던가. 홍릉 숲에서 여학생과 난생 처음 데이트란 것을 하다가 산책 나온 아버지에게 들킨 적이 있다. 사실, 내 딴에는 먼저 아버지를 발견하고 재빨리 피한 걸로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나를 봤다는 말씀을 안 하셔서 오랫동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아버지의 신춘수필을 보니 홍릉 숲에서 나를 발견했던 이야기가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아버지의 수필은 “우리 건이한테 완전히 점령당한 홍릉 숲은 나도 언젠가 여인麗人과 함께 거닐고 싶었던 숲이었다”는 술회로 끝난다. 아버지의 숲을 본의 아니게 ‘점령’ 해버려 뒤늦게나마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다. 나의 문리대 시절, 아버지의 ‘후광’은 계속됐다.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아버지의 제자들이 적극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학생회장이 된 뒤에 선거 공약대로, 필화사건으로 폐간된 문리대 교지를 ‘새세대’로 이름을 바꾸어 복간했다. 이때도 문리대 학장이던 어린 시절 ‘옆집 아저씨’ 이양하 교수가 많이 도와주셨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당시 필화사건을 빚은 이념연구서클 ‘신진회新進會’ 멤버들이 지금은 하나같이 이른바 ‘꼴통’ 보수로 호칭되고 있으니 세상은 참 모를 일이다. 대학을 마칠 무렵 4.19가 터졌다. 전북대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던 아버지는 이때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하셨다. 그 몇 해 전 미국 예일대학교 1년 동안 교환교수로 가신 적이 있는데, 우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사는 나라를 보면서 지식인에게 학문보다 행동이 요구되는 때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고등고시를 통해 공무원의 길을 가겠다는 내 생각을 지지하신 배경도 그러한 뜻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고시에 합격해 내무부 지방국의 수습행정사무관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1962년, 아버지는 군정 반대의 선봉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르셨다. 그 다음 해 총선거에서 통합야당인 민정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셨다. 국회에서는 윤보선 야당 대통령 후보 아래에서 당의 정책위원장과 사무총장 등의 요직을 맡았다. 군사정권을 상대로 가시밭을 걷는 듯한 야당 정치활동의 선봉장이 되셨던 셈이다. 아버지가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 나 역시 그 여파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고시 합격자들은 1년 반 자동으로 수습 딱지를 떼고 보직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고시 동기들은 때가 되지 모두 중앙부처의 계장이나 지방의 군수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였다.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나에게만 보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보직 없는 공무원 생활은 기약 없는 셋방살이와 같았다. 권한도 책임이 없으니 일해도 일하는 것 같지 않고 놀아도 노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버지가 강성 야당 정치인이라는 점 말고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행정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마땅하건만 나라의 현실을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정견을 바꾸시라고 할 수도 없고, 고민 끝에 장관과 면담을 하고 사표를 내기로 했다. 그러나 무보직의 평사무관이 장관과 면담하기가 쉽지 않은 터라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 알려졌는지 드디어 보직을 받았다. 고시 합격 후 3년 반 만의 일이었다. 아직도 이 기록은 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상공부 상영국장이던 형님이 강제퇴직을 했다. 나대신 당하신 것 같아 무척 마음이 아팠다. 신혼 시절인데다 공무원 생활을 갓 시작하면서 겪은 이 사건은 당시로서는 무척 힘든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좋은 약이된 것도 사실이다. 정치와 행정의 야합野合에 대한 저항력이 생겼고, 어려운 시기를 참고 넘기는 저력도 키웠다. 무엇보다 공직자로서 인맥이 아니라 일로 승부를 내겠다는 자세를 익힌 기회가 되었다. 권위주의 시대의 정치상황에서 야당 정치가인 아버지와 행정가인 아들의 입지는 운명적으로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6대 국회의원 4년 임기를 마친 뒤 정치인의 뜻을 접고 다시 철학자의 자리로 돌아오셨다. 반면 나는 본격적으로 전문행정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나의 공직생활이 당신의 뜻을 펼치는 또 다른 방편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내가 공직에 나아갈 때마다 친인척들에게 청탁금지령을 내리고, 항상 기성 정책의 건전한 비판자, 민심의 전달자 역할을 자임하시며 내가 관료적인 타성에 젖지 않도록 엄한 감독의 눈으로 지켜보셨다. 또, 내가 공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다. 나와 아버지 사이에 무언의 파트너십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직생활을 시작할 때 아버지는 내게 ‘공직삼계公職三戒’를 내려주셨다.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찍히지 마라’ ‘남의 돈을 받지 마라’ ‘술 잘 먹는 다고 소문내지 마라’ 세 가지가 그것이다.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찍히지 말라는 것은 줄 서지 말고 실력으로 헤쳐가라는 뜻이었다. 이미 강성 야당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정부에 들어간 이상 이 첫 번째 계명은 공직자로서 생존하기 위해 당연히 지켜야 할 수칙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가 정치를 그만두신 다음에도 맡은 일에 몸과 마음을 전력투구한다는 자세는 내게 ‘제2의 천성’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니, 감천感天까지는 못 가도 감민感民 까지는 가야 국민의 공복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성감민至誠感民’이라는 말을 만들어 좌우명으로 삼았다. 나는 공직생활을 통해 인사人事운동을 하거나 어느 정파에 줄을 대거나 한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킨 셈이다. 두 번째 계명인 ‘돈 받지 마라’, 즉 청렴의 의무는 공직자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덕목이다. 그러나 당연한 일을 지키기가 정말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삼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도지사로 부임하게 되자 아버지는 친지,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청탁금지의 엄명을 내리는 한편, 오히려 이들의 협조를 받아 매달 일정액의 판공비를 내게 보내주셨다. 돈도 물론 큰 도움이 되었지만 나로서는 여기에 담긴 아버지의 당부를 항상 새롭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국보위에 반대해 서슴없이 사표를 내던질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청렴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청렴하면서 눈앞의 이익에 의연해야 한다. 이건 보통사람들에게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다. 그래서 나는 몸담은 조직의 부하들에게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지자이렴知者利廉’을 자주 얘기하곤 했다. ‘지자知者는 청렴淸廉을 이利롭게 여긴다, 청렴淸廉은 천하天下의 큰 장사이다, 큰 것을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수서사건으로 권좌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줄줄이 수감되었지만 나와 함께 특혜를 거부한 서울시 공무원들은 하나도 연루되지 않았다. 바로 ‘지자이렴’의 산 증인들이다. 처음〈� 아버지와 맺은 약속 때문에, 다음에는 더욱 보람 있는 일을 소신 있게 하기 위해 청렴의 계율을 지켰다. 나는 이렇게 형성된 ‘미스터 클린’의 브랜드를 끝까지 지켜갈 것이다. 공직삼계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계율은 잘 지켰지만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마라’는 세 번째 계율만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술을 먹더라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아라’라면 어느 정도 준수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술의 양과 관련된 문제라면 글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DNA 탓인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와 술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들이 소문내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사실 처음 내게 술을 가르쳐준 분도 아버지다. 그래서 술주정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제삿날마다 음복주를 마시게 하셨고, 대학생이 되자 저녁 밥상에서 한 잔의 반주를 권하곤 하셨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호출에 따라 명동의 ‘뽕 쏘아’라는 바bar로 찾아갔더니 동료교수들이며 마담과 둘러앉아 대작하고 계시다가 내게 합석하라 하고는 마티니를 시켜주셨다. 처음 마셔 본 칵테일이었다. 와우산 아래에서 아버지가 친구, 제자들과 술자리 담론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자란 나 역시 직원들과 소줏 자리에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기 좋아한다. 사실 공직생활 중 직원들의 진솔한 얘기는 사무실이 아니라 이런 술자리에서나 듣게 마련이다. 세 번째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대신 나는 새로운 계율을 만들어 실천하기로 했다. 나로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의미의 ‘일일신日日新’이다. 세상은 변하고 이에 따라 행정의 환경도 변한다. 따라서 행정의 사고, 일하는 방식 모두 늘 바뀌어야 한다. 온고溫故는 하되, 지신知新 역시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주신 세 번째 계율을 이렇게 대체한 데 대해서 생전에 아버지는 이렇다 할 말씀이 없었지만, 묵시적으로는 동의하셨다고 생각한다. 당시 스스로가 항상 새로운 공붓거리와 취미를 찾으셨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내게 공직생활의 3계를 내려주시는 데 그치지 않고 충실한 모니터와 정책조언자의 역할을 도맡아 하셨다. 바둑은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수를 더 잘 볼 수 있다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아버지의 이런 도움 덕택에 내가 어느 공직에 있든 그 부처의 공보관실은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공보관실에서도 빠뜨린 기사를 아버지께서 꼬박꼬박 스크랩해서 당신의 의견과 함께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특히 원고지 뒷면을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채운 ‘가신家信 집에서 온 편지나 소식’은 주의 깊게 읽었다. 좋은 정책제안이 많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빈곤의 세습 막으려면 영세서민의 자녀들에게 기능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지적에 시립기능훈련원을 개설해 운영했고, 장애인 대책을 하도 강조하셔서 수화를 배우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게 최고의 자문역이었다. 아버지가 정치를 떠나실 때 나는 앞으로 공직생활을 해나가면서 나의 진로를 포함해 중요한 일은 모두 아버지께서 상의 올리고 자문을 받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1980년 이후 지금까지 24년의 세월 동안 일곱 번, 모두 합쳐 10년 남짓 공직에 있었다. 관官과 민民 사이를 일곱 번이나 왕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러한 약속을 잘 지켜냈다. 다만, 1980년 5.17 비상계엄확대조치에 찬성할 수 없어 사표를 낼 때에는 시간 여유가 없어 사전에 아버지께 상의 드리지 못했지만 직후에 보고하고 추인을 받았다. 민간인 신분으로 있던 10여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정부 주변의 단체장이나 대기업의 임원 자리를 맡은 적이 없다. 지금도 국제투명성위원회의 자문위원과 환경포럼의 대표 이외에는 다른 일을 맡지 않고 있다. 이러한 처신은 부자간에 견해가 일치해 특별히 의논할 일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직에 나아갈 때에는 달랐다. 내 진로를 두고 항상 의견이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뜨거운 격론도 벌였고 두어 번은 내내 견해가 상반되기도 했다. 그중 한 가지가 서울시립대 총장직과 관련한 일이다. 1990년 말, 서울시립대 교수들이 수서 특혜사건에 저항하다 시장 직을 떠난 나를 총장으로 영입하기로 하고 선거를 거쳐 총장 후보자로 뽑은 뒤 교육부에 상신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수서 특혜와 관련한 압력을 거부한데 대한 청와대의 불쾌감을 인지한 교육부는 청와대 상신을 차일피일 미루었고 청와대에서는 수석비서관들을 보내 후보 사퇴를 종용했다. 처음에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아버지 역시 청와대의 압력에 굴하지 말라며 격려해주셨다. 그러나 다시 고민해보고 나는 생각을 바꿨다. 청와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권부와 대립각을 세운 총장으로서는 교수들이 바라는 대로 학교중흥을 이룰 수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아버지는 청와대의 압력에 굴하는 일이라며 그러한 내 판단에 반대하셨다. 그러나 결국 나는 서울시립대 총장직을 맡지 않았다. 평생을 현실 속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을 지키며 공직자의 길을 걸어온 나와 달리, 아버지는 높은 정신세계 속에서 유유자적한 분이었다. 한때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한국철학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맡기도 하셨으나 마음은 내내 철학의 세계에 머물렀던 듯싶다. 실존철학을 한국 철학계에 처음 심어주셨고, 아울러 불교의 선사상禪思想에 심취해 이 둘을 사상적으로 잇고자 하셨다. 학술원상을 받으신 저서, <선의세계>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불교의 선사상으로 용해시킨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내장산 암자에 침거하시면서 완성한 책이다. 한평생 공직에 몸담고 절제하며 사느라 별 재미를 키우지 못한 아들과 달리, 아버지는 멋을 아셨다. 우리 집안의 딸들과 며느리들은 집안 남자 가운데 제일 멋있는 남자로 아버지를 꼽는다. 하이데거를 읽으시던 서재의 벽은 은은한 옥색 한지로 도배를 하였고, 난초를 키우고 가야금과 창을 배우셨다. 불교철학을 연구하실 때에는 모차르트 음악에 심취하기도 하셨다. 외출하실 때면 옥색 두루마기를 입곤 하셨는데, 휘날리는 흰 수염과도 잘 어울렸다. 물론 언제라도 입으실 수 있게 두루마기를 준비하시는 어머니에게는 고역이었겠지만 말이다. 동숭동에서 함께 살 때는 대학생 손자들을 데리고 동네 호프집을 찾는 것이 아버지의 큰 즐거움이었다. 그때 머리에 눌러쓴 베레모가 멋있어서 자세히 보니 내가 오래 전 쓰다 버린 서울대 교모였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멋을 잘 모른다. 베레모 같은 것은 쓸 엄두도 못 내봤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추구하신 멋의 세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이데거와 불교철학, 참선과 모차르트, 아버지는 상반되어 보이는 것 속에서 조화를 얻으려고 하셨던 것 아닐까.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쏠리기 쉬운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흐름 속에서 중용과 평형을 c자아내고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며 원융회통圓融會通을 이루는 것, 이런 마음가짐 속에서 나와 만년의 아버지는 무언으로 통했다. 조화와 중용의 정신이야말로 큰 키, 남다른 건강, 뜻한 일은 이루어내는 의지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아버지는 가셨다. 멋있던 아버지, 어려서는 자상한 가정교사였고 자라서는 따뜻한 후원자였으며 장성해서는 공직생활의 든든한 자문역이었던 아버지는 떠나셨다. 아버지가 키우던 난초는 며느리들이, 남쪽 창 밑의 대나무는 내가 가꾸고 있다. 잘 자란다. 그러나 잘 자랄수록 떠나간 아버지의 흔적이 더 크게 느껴진다. 당시에는 벅찬 일정에 번거롭기도 했던 깨알 같은 글씨의 ‘가신’이 너무도 그립다. 세상이 소란하고 앞이 안 보일수록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허전하게 만든다.
1934년 7월 15일자 3면 수연(水烟)에 잠기인 그날의 명사십리(明沙十里)
1934년 9월 2일자 3면 신추만필(新秋漫筆) 방랑(放浪)이 숙연(宿緣)일런가, 고형곤
1939년 4월 7일자 4면, 현대문화의 분열 제1회(전 6회) 고형곤
1939년 4월 9일자 3면 제2회
1939년 4월 14일자 3면 제6회
동아일보 기사 DB(고형곤)